[문학속의공간] ① 우체국-설레는 사랑 전하던 낭만 어디로
시와 소설에서 특정의 공간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적지 않은 경우, 공간 자체가 작품의 기조를 결정하기조차 한다. 쓰여진 시기와 형식, 그리고 주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공통점은 작품들 사이의 흥미로운 비교 검토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 문학에 나타난 주요한 공간들을, 작품 속에 묘사된 것과 현실의 모습을 견주어 가면서, 찾아가 보기로 한다. <편집자>
유치환 '행복'에, 이수익 '우울한 샹송'에 배어나던 행복과 슬픔
휴대전화와 전자우편의 시대에 편지의 자리는 어디일까? 이제 소식과 용건을 전하거나 안부를 묻기 위해 굳이 편지에 의존해야 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편지는 지배적인 통신수단의 자리에서 물러나 특수하고 예외적인 기능으로 자신의 영역을 한정시켜야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편지에게도 황금시절이 있었다. 가까이 살면서 매일 만나 얼굴을 마주 대는 사이가 아닌 사람들에게 편지는 매우 유용하고도 편리한 도구였다. 오죽하면 대상과 경우에 따라, 그리고 계절별로 세분해 놓은 <모범서한집>이니 <편지 쓰기 대백과>니 하는 `가이드북'까지 있었겠는가.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은근하면서도 뜨거운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 편지만한 매개는 달리 없었다. 그 시절, 연애편지 한번 안 써 본 이는 희귀 동식물 목록에서나 찾아야 할 정도였다. 편지와, 그 편지를 취급하는 우체국이 뭇 시인들에게서 사랑의 절창을 이끌어낸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서/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청마 유치환(1908~67)의 연시 <행복>은 우체국을 소재로 삼은 시 가운데 앞자리에 놓이는 작품이다. <바위>나 <깃발>과 같은 남성적이고 호방한 기풍의 시로 잘 알려진 청마가 이처럼 섬세한 감성의 시를 썼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더구나 이 시가, 유부남인 청마가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수많은 연애편지를 써보낸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가외의 흥미와 즐거움을 안겨준다. 청마는 이 시의 마지막을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는 인사로 끝내고 있거니와,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연서들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이기도 했다.
<행복>이 우체국을 매개로 한 사랑의 행복을 따뜻하게 노래했다면, 이수익(58)씨의 시 <우울한 샹송>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우체국에 가면/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풀잎 되어 젖어 있는/비애를/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돌아올까//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그 꽃들은 바람에/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행복>의 주인공은 여기서는 객체로서 관찰의 대상이 되어 있다.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 그들을 관찰하는 주체는 행복한 그들과는 반대로 슬픔과 상실감에 시달린다. <행복>의 주인공이 사랑의 기쁨에 들려 있는 반면, <우울한 샹송>의 화자는 실연의 늪에 빠져 있다.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웃는 웃음이 역설적으로, 눈물과 통곡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화자의 고통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을 보라.
사랑의 성취이든 상실이든, 편지와 우체국이 사랑과 필연적인 함수관계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편지(또는 우체국)의 어떤 점이 그런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일까. 이문재(41) 시인의 <푸른 곰팡이>를 읽어 보자.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산책시편>이라는 시집에 실린 이 시에서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편지가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가 닿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데에 사나흘씩이나 필요하다니! 왜냐하면 그것이 “발효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잘 발효된 술이 깊은 맛을 내듯이 사랑 역시 그러하다. 시인이 보기에 사나흘이라는 발효(醱酵)의 시간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선언이 정식으로 발효(發效)되는 데에 요구되는 경과기간이다.
이 즈음의 젊은이들 눈에 `우체국파' 시인들이란 못 말릴 게으름뱅이이거나 심각한 시대착오자로 비칠 터이다. 과연 우체국에 와서 사랑의 편지를 쓰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기까지의 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젊은이들이 남아 있겠는가. 물론 지금도 웬만한 우체국에는 `필연대'라고 불리는, 편지 쓰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서울 충정로우체국 정연석(45) 국장의 말로는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은 주로 중년층이다.
“우체국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옛날 친구가 생각나 즉석에서 편지를 써서 부치는 머리 희끗한 분들을 이따금 보게 됩니다. 젊은이들은 아무래도 휴대폰이나 이메일 같은 첨단매체를 선호하기 마련이죠.”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우체국은 요즘 본업인 우편업무에 못지 않게 금융업무에도 열중하고 있다. 충정로우체국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은 우편물을 접수하는 창구이고 왼쪽은 입출금과 공과금 납부, 보험 등의 업무를 보는 창구로 구분되어 있다. 오른쪽이 장소는 비좁은데 사람은 붐비는 반면, 왼쪽은 대체로 한산하여 쾌적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시인들이 노래한 낭만과 여유를 찾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것은 혹 안도현(39) 시인이 노래한 가상의 `바닷가 우체국'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바닷가 우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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