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조정 시집 『그라시재라,서남전라도 서사시』
그라시재라
그라시재라는 ‘그러시지요’라는 긍정의 전라도 방언이다. 이 책은 조정이 쓴 시집으로 조정의 글이라기보다 우리네 할머니의 한이 서린 이야기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할머니들의 대화를 들리는 그대로 구수한 전라도 방언으로 써 내려간 이 시를 읽노라면 손녀딸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 같은 풍경이 연상된다. 그리고 대화 속에는 전라도의 핍박받은 한이 그대로 서려 있기도 하니 그 서러움과 절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시의 대화체
이 책의 대화체 시는 할머니들의 인내와 애환의 한 뿐만 아니라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전설의 고향 같은 내용도 있다. 동학 때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뛰어넘는 할머니들의 입담. 성님, 아우 하며 부르는 우정.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동지애. 그들에게는 친척보다 나은 이웃사촌의 도타운 우정과 동지애가 있다. 그래서 서로 위로해주고, 공감 해주며, 충고와 타박도 서슴지 않는다.
엄니, 탕 소리 나면 뒤 좀 돌아보소
이 '엄니, 탕 소리 나면~'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읽었던 대목의 시다. 아마도 6.25가 막 지나서 전라도 서남지방에서 좌익토벌을 핑계로 경찰들이 무고한 사람들까지 끌고 가던 시절의 얘기일 것이다. 그때 산사람들의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가족까지 덤터기를 씌워 끌고 가서는 사살을 한 사건들이 비일 비재 했었다 한다. 그 일의 일환이리라 짐작이 된다. 딸과 어머니가 총구를 들이미는 토벌대 경찰에 끌려가는 상황. 뒤에서 끌려가며 유언이 되버린 딸의 마지막 말. "엄니, 탕 소리 나면 뒤 좀 돌아보소" 그 목소리가 귓전에 남아, 혼자 살아남은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으로 박혀 한이 돼버린 그 말이 내 가슴까지 절절하게 만들고 말았다. 열 걸음도 못 가서 난 탕!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은 어머니의 얼어버린 몸. 끝내 뒤를 돌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심정을 그 누가 알까!
이 사건은 내 고향 제주의 4.3 과도 일맥 상통한다. 나의 친할아버지도 비슷한 상황으로 4.3의 희생자가 되셨다. 다른 점이 있다면 4.3은 6.25 전쟁 전(1948년)에 일어난 일이란 것이다.
사투리로 낭독하다
나는 읽는 내내 소리내어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실 사투리는 말로 내뱉는 맛이지 읽는 맛은 아니지 않은가? 맛깔스럽게 툭툭 내뱉는 지방 언어는 특히 전라도 방언은 그 특유의 투박함과 익살스러움, 능청이 있어 톤을 실감나게 소리내지 않는다면 그 맛을 살리기 어렵다. 발제자인 전라도 팀원에게 막상 이 시를 읽어보라 하니 영 그 능청스러움을 시원하게 살리지는 못했다. 독서토론을 하는 우리들에게 아쉬움을 남긴 전라도 발제자의 낭독을 시작으로 나도 소리 내어 읽어봤지만 영 시원찮았다. 마음 같아서는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맛깔나게 하고 싶었는데 마음같지 않다. 서남 지방의 할머니들의 멍울진 한까지 가슴에 담아 읽어내야 하는데 그걸 우리가 어찌 즉흥적으로 흉내낼 수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 더듬거리거나, 무슨 뜻인지 몰라 헤매기 일쑤였으니 조용히 읽으며 마음속으로 할머니들에게 공감과 응원을 하는 것으로 만족할 밖에.
그라시재라 모티브
조정 시인이 처음 글을 쓸 때는 꽤 박식한 언어로 식자들이 좋아하는 어려운 글을 썼더란다. 저자의 아버지가 어느 날 왜 그리 글을 어렵게 쓰느냐 라는 말에 누구나 읽기 쉬운 글을 쓰고자 마음을 먹고 쓴 글이 이 시집이라 하니, 작가의 터닝 포인트가 아버지의 타박 한마디라는 게 부녀지간의 신뢰와 애정이 한 아름 느껴지는 대목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 조모에 대한 추억이 소재가 되었으니 아버지가 쏘아 올린 한마디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여 재탄생시킨 삼대의 합작이라 할 것이다. 작가의 고향사랑, 가족사랑이 보여진다..
지방은 살아있다
수도권과 지방이 균형있게 발전을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교통의 인프라가 갖춰진 대도시로 가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을 막을 재간은 없다. 지방의 언어로, 정감있는 사투리로 책을 쓰는 것만으로도 지방이 ‘살아있다’ 라는 존재감을 알리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독특함과 스토리 텔링을 좋아하는 요즘 세대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세대와 구세대의 소통의 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경헙서
그러고보니 내 고향 제주도 사투리로 된 시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라시재라'는 제주말로 ‘경헙서’ 라는 말이 될 것이고, 일반사람들이 읽기에는 더 외국어 같아 많이 읽힐 거란 생각이 들진 않는다. 그러나 요즘 TV에서도 제주도 드라마가 많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제주도 방언도 사람들이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막상 제주도 말을 하고 보니 손이 오글거리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책이 있다면 그때는 자신있게 실감나게 낭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익는 마을 백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