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행 | 나를 찾아 떠난 인도와 네팔
생과 사의 경계가 없는 그곳에서 걸은 25일 …
‘마음 가는 대로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될 것’
대학을 졸업하고 16년간 한 직장에서 일하던 맞벌이 여성이 사표를 던졌다. 그의 나이는 올해 마흔. 남편도 아이도 돈벌이 걱정도 잠시 잊고 불쑥 인도로 떠났다. 25일간의 인도 체험을 통해 그는 ‘질퍽하게 살아 숨쉬는’ 공기를 폐 한가득 마시고 돌아왔다고 한다. 누구든 한 번쯤은 일상의 고리를 끊고 짐을 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움의 결정체, 타지마할.
나는 다섯 살 아이를 둔 마흔 살의 일하는 엄마이며, 젊어 고생을 오래 하셨던 곽진학·차현숙 씨의 큰딸, 평범한 어느 회사원의 아내 그리고 4형제 집안의 막내 며느리다. 대학 졸업 후 실질적인 첫 직장이던 곳에서 16년쯤 일했고, 그곳이 집인지 회사인지 헷갈릴 쯤 퇴직을 결심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라도 그저 진공상태로 있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인도로 떠났다. 나답게 매우 소심하고 저렴한 선택이었던 ‘패키지 배낭여행’으로.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아를 찾거나 삶이 무엇인가 하는 인생의 거창하고 심오한 질문의 해답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회사원 남편의 앞날이 언제나 확실해질까 늘 걱정하고, 모아둔 돈 없이 이 나이에 아이 교육비는 어떻게 감당하나 둘째는 낳아야 하나 같은 답 없는 질문에 머리가 복잡하고, 은행 빚은 이자 갚기에도 늘 벅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박한 심정에 충동적으로 회사를 그만둔 평범한 마흔 살의 아줌마가 ‘질퍽하게 살아
숨쉬는’ 공기를 폐 한가득 마시고 돌아왔다는 행복했던 여행 이야기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은 나이가 몇이든, 남자든 여자든, 엄마든 아빠든, 일을 열심히 했든 안 했든 지금 당신이 있는 그 자리가 조금이라도 숨이 가빠진다면 당신은 아주 잠시라도 그 ‘진공상태’를 즐길 권리가 충분히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혹은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당신의 아내, 남편, 여자친구, 남자친구, 부모님, 자식 … 그 누구에게라도 그 소박한 ‘진공의 선물’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그게 우아하게
홀로 떠나는 여행이든, 나름의 요란법석 스펙터클한 인간관계가 들썩이는 패키지 여행이든, 그게 어디라도 잠시 떠나는 것은 다 좋다.
▶해질 무렵 카주라호 서부사원.
사실 무작정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앞서 준비 없이 꿈만 키웠다. 주워 들은 건 있어서 좀 그럴듯한 곳에 가고 싶었으나 겁이 많아 혼자 떠나기는
영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절충한 곳이 ‘인도/네팔 25일 패키지 배낭여행’. 저렴한 형태의 항공편과 숙소를 여행사가 제공해주고, 인솔자가 현지 공항 도착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 큰 틀에서 길잡이를 해주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여행은 여행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으로, 말 그대로 배낭여행과 패키지여행을 결합한 형태다.
출발을 1주일도 남겨 놓지 않고 급하게 예약을 했던 터라 나는 준비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개념을 상실한 상태였다. 여행사에서 이런저런 준비물에 대한 책자를 나눠 주었으나 그 정보는 본체만체하고 내 마음대로 오리지널 한국 스타일로 멋을 낸 여름옷만 차곡차곡 개어 무겁게 넣었다. 지금에 와선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백만분의 일의 경우에 대비해 사 두었던 등산복 바지 한 벌, 긴 팔 상의 두 벌, 랜턴에 우의까지 챙겨 넣었다. 지퍼가 터질 듯 빵빵해진 배낭을 공항 카운터에 내려놓고 재어 보니 13.5㎏.
두 어깨를 짓누르는, 누군가의 말처럼 딱 내 전생 업의 무게.
# 출발, 그리고 델리에서 첫 밤
▶해질 무렵 카주라호 서부사원.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통해 안내된 대로, 8시10분까지 인천공항 C 발권 카운터 앞에 도착했다. 벤치 근처에 배낭을 지닌 사람이 몇 보였으나 우리 팀인지 알 수 없어 ‘이미지 관리 차원’의 웃음은 아끼기로 했다. 8시15분을 넘겨 여행사에서 나온 듯한 직원 한 명이 다가와 안내를 시작했다.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이기 시작했다. 그 근처에서 눈치를 보며 앉아 있던 모두가 내가 함께 떠날 팀이었던 것이다. 모두 합해 열여섯 명.
다른 경유지를 이용하는 두 명을 제외하고, 열네 명은 홍콩을 경유해서 델리로 가는 일정이다.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조차 익숙하지 못했던 우리 일행은, 경유지인 홍콩에서 입국심사하고 공항을 나올 뻔했던 아찔한 순간을 뒤로하고 어찌어찌 하루 꼬박 걸린 일정으로 한밤에 델리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입국장을 나서는데 인도 복장을 한 검고 긴 생머리의 자그마한 여성이 팻말을 들고 서 있다. 바로 우리 일행을 안내할 길잡이 안 샘. 저 여성에게 겁 많고 소심한 나의 25일을 맡겨야 한다. 앞으로 그녀에게 무조건 충성하기로
마음 먹었다.
숙소로 가기 위해 택시에 서너 명씩 나눠 타고 바하르간즈에 도착했다. 거리는 말 그대로 폐허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 그 자체. 드문드문 희미한 가로등 아래 맨살의 전깃줄이 수십 개씩 서로 겹쳐 드러나 있는 것은 고사하고, 길 한가운데에서 자는 소에, 어둠 속에 늑대로도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앙상하고 왠지 사나워 보이는 개, 그들의 똥 그리고 우리 쪽으로 허옇게 엉덩이를 내놓고 일을 보는 젊거나 늙은 남자들. 그 골목을 헤쳐 들어간 숙소는, 아무리 개중에 나은 곳이라 하더라도 숙소까지 걸어오면서
충격을 일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 시트 위에 침낭을 펴 놓고 몸을 뉘었다. 13.5㎏ 짐의 무게 중 기껏 350g 침낭이 앞으로 가장 밥값을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분홍색의 도시, 자이푸르
새벽에 뉴델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자이푸르로 이동했다. 오늘 탈 기차가 앞으로 우리가 탈 이동편 중 가장 쾌적한 것이라는 비보가 있었던, 에어컨이 있는 좌석칸이었다. 에어컨이 있는 칸에서는 차와 비스킷을 포함한 간단한 아침식사가 나온다. 차를 마시니 저 아래에서부터 뜨뜻한 감동이 밀려올라 어젯밤 델리의 충격이 살짝 비켜갔다.
▶갠지스 강변.
자이푸르 숙소에 도착했다. 나무와 꽃이 심어진 작은 정원이 있는 사람 냄새 나는 호텔이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인 홀로 여행.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오후 일정에 앞서 인솔자의 주도로 잠시 모여 팀원 간 통성명을 했다. 18세 소년부터 53세 아저씨, 교사, 게임 디자이너, 그룹여행 인솔자, 전직 도의원 등 직업도 다양했다. 이 안의 생활도 결코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콜카타 여행자 골목.
자이푸르는 ‘핑크시티’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곳으로, 라자스탄 주의 수도다. 성 안 건물 벽이 온통 분홍색이라 핑크시티라 불리는데, 빛바랜 분홍색이 지친 사람들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시내를 둘러보고 시장에서 사람들과 흥정도 해보고 구걸하는 아이들의 거친 공격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얇은 긴팔 상의와 바지를 샀다. 이 한 벌을 사기 위해 벌인 흥정은 마치 ‘첩보전’ 같았다. 고도의 심리전으로 상대가 제안할 가격을 넘겨짚으며 ‘너의 라스트 프라이스’를 핑퐁처럼 줄기차게
되묻다 일행의 도움을 받아 결국 3분의 1 가격에 구입하고 “유 아 마이 프렌드”를 외치며 가게를 나섰다.
▶안나푸르나의 끝없는 계단들.
익숙하지 않았던 이곳의 ‘흥정’ 과정은 얼마의 가격을 꼭 깎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지 않고 출발한다면 꽤 흥미롭고 즐길 만하다. 상대가 물정을 모르는 외국인이니 터무니없는 가격을 우선 ‘불러나’ 보고, 이에 질세라 들은 풍월이 있는 관광객 또한 어처구니없는 싼 가격으로 맞서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은 간혹 서울에서처럼 ‘깎는 사람 낯 뜨거워지는’ 가게 주인의 퉁명함이 아니라 웃으면서 ‘협상하는’ 자리가 된다. 금세 500루피를 불렀다가 내가 부른 ‘50루피’에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마이 프렌드, 마이
라스트 프라이스 200루피 오케?” 하는 인도 상인을 보면 그 터무니없는 가격정책에 화가 난다기보다 ‘쿨하게’ 인정하는 그들의 방식에 피식 웃음이 날 뿐이다.
#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 평온한 안식처 카주라호
아그라에서 타지마할을 보고, 카주라호로 이동했다. 그저 교과서에 나올 법한 훌륭한 건축물 정도의 사전 지식밖에 없었던 내게 ‘타지마할’은 문자 그대로 백문이불여일견이었다. 내가 감히 할 수도 없는 예술적 시각으로서의 평가가 아니다. 문에 들어서면 꿈처럼 아득하게 보이는, 마치 하늘나라라도 본 듯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하얗게 빛나고 있는 타지마할을 맞닥뜨렸을 때의 첫 느낌 때문이다. 샤 자한의 절절한 그리움이 없었다면 타지마할은 그저 아름다운 건축물에 그쳤을 것이다. 그날 눈으로 경험했던 그리움이라는
그 영원하고도 신비한 힘,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 것.
카주라호로 이동하는 밤, 인도의 밤기차 침대칸을 처음 경험했다. 아무래도 남은 평생의 여행 경험 중 몇 안 되는 충격이 될 것 같다. 출발시각이 밤 12시가 다 될 무렵이어서 11시가 조금 넘어 역에 도착했다. 외국인이라 쉽게 표적이 되는지 플랫폼에 배낭을 내려놓은 우리 주변으로 아이들이 모여들어 끈질기게 구걸을 했다. 돈을 주면 후에 더 큰 불편이 온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실감한 우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무대응 전략을 썼다. 우리가 탈 차는 에어컨
없는 이등 침대칸. 예정된 시각을 20여 분 넘겨서 기차가 도착했다. 확실하게 기차가 도착한다는 안내도 없고, 도착한 기차에 (분명히 표에는 적혀 있는) 우리가 탈 칸이 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모로 흔드는 인도 사람들의 ‘yes’라는 대답을 몇 번 듣고서야 드디어 우리가 탈 칸을 찾았다.
아·비·규·환. 닭장은, 아니 기차 안은 깜깜했다. 내 눈앞도 깜깜해졌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누워 있는 몸이 희미하게 보였고 배낭을 짊어지고 통로를 지나는 우리 몸에 그들의 손발이 스쳤다.
기차에 제대로 잘 탔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이제 정말 큰일났다는, 잠은커녕 제대로 엉덩이도 붙이고 있을 수 없겠다는 극도의 불안감이 밀려왔다. 잠시 후 길잡이 안 샘이 승무원을 데려와 좌석 안내를 부탁했고, 우리 자리에 누워 있던 인도인들은 승무원의 손길에 더러 잠이 깨어 부스스 일어나 비어 있는 다른 자리로 향했다. 3층 중 맨 위칸을 내가 쓰기로 했다.
우선 배낭을 던져 올려 놓고 철제 사다리를 밟고 올라 침대 위에 앉았다. 허리를 펴고 앉기엔 천장이 낮다. 엎드렸다. 운동화를 벗어 안쪽에 나란히 놓고
주섬주섬 침낭을 침대 위에 깔았다. 아래 쪽에 있는 창문에서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지만 다행히 머리 위쪽으로 선풍기가 있어 죽을 만큼 덥지는 않다. 그렇게 누워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나니 이제는 제법 잘 수 있는 분위기다. 우리 일행이 사용하는 아래쪽 칸에서 벌써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참으로, 참으로 놀랍다.
그렇게 도착한 카주라호는 힌두교 사원과 성적 조각인 미투나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틀을 머무는 일정이라 숙소에 짐을 풀고 느긋하게 빨래를 했다. 인도식 백반인 ‘탈리’로
요기를 하고 식당 앞인 서부사원군으로 향했다. 이곳은 크고 작은 사원이 군집해 있는 큰 사원군으로, 사원 사이의 공간은 정원으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천천히 크게 돌아보다 입구 근처의 신전까지 왔다. 슬리퍼를 벗고 계단을 올라 신전 안에 들어섰다. 바깥의 뜨거움과 달리 안은 사방으로 뚫려 있어서인지 제법 서늘했다. 한 인도 여인이 청소를 하다 눈을 마주치곤 웃으며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어디에서 왔냐고 묻고, 이곳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서늘함 때문인지 그곳에 들어섰을 때의 왠지 모를 쾌적함 때문인지 “이곳이 참 좋다”고 했더니
그녀는 대뜸 ‘힐링’이라고 대답했다. ‘아, 그럴 수 있겠구나. 여긴 사원이었지.’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전 안에서 책을 읽고 사람들을 구경하다 졸기도 했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왜 여기 인도에까지 와서?’ 정신 없이 일정을 좇아 오다 이제야 스스로에게 든 의문.
# 갠지스 강에서의 푸자(바라나시)
▶히말라야 고산족들의 ‘희망’이라는 이름의 깃발.
갠지스 강을 볼 수 있다는 부푼 마음에 일정에 별 표시를 해가며 기다렸던 곳. 저녁에 열린다는 푸자를 구경하기 위해 숙소에 짐을 풀고 갠지스 강가의 가트로 향했다. 푸자는 힌두교인이 강가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의식으로 브라만 사제에 의해 매일 저녁 갠지즈 강에서 행해진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여섯 명의 브라만 사제가 푸자 의식을 시작했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가트 계단 귀퉁이에 자리 잡았다. 내 옆에는 깨끗하게 다림질한 하얀 셔츠와 바지를 입은 인도인 할아버지가 앉았다.
행복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할아버지는 의식 중간중간 안경을 살짝 들고 눈가를 닦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젊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평생에 한 번 이 의식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강물을 떠 얼굴이나 몸에 뿌리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이 사람들이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잘사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을까? 잘사는 것과 잘 죽는 것,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
새벽에
배를 타기 위해 로비에 모였다. 화장터 가트에서 출발한 배가 1시간 가량 강을 돌며 강 이쪽 저쪽의 풍경을 구경시켜 주기로 했다. 강 이쪽에는 이른 새벽부터 수영하는 아이들, 빨래하는 사람들, 우리 같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반면 강 저쪽은 마치 버림받은 폐허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일행 하나가 멀리에서 떠내려오는 무엇을 발견했다. 기역자로 꺾인 허옇고 커다란 나무토막 같은 것이 둥둥 떠내려오다 우리 배를 스쳐갔다. 한때 사람이었던 무언가였다. 부드러운 느낌은 하나도 없는, 바늘 하나 들어갈 수 없는 딱딱하기만 한 질감의 그것이
우리 옆을 스쳐갔다. 지독하리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아주 천천히 그것이 우리 옆을 지나 저 멀리로 갈 때까지, 이상하게도 무섭다거나 역하다거나 하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 배에서 내려 호텔로 걸어왔다. 방에 들어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유 없이 여러 번 구역질을 해댔다.
바라나시 강변의 골목길은 내 경우에는 푸자 외에 최고의 경험거리였다. 그 길에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골목을 걷는 경험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다는 이야기다. 두 사람이 마주치면 어깨가 부딪힐 정도의 좁은 골목에서,
혹여 소라도 만날라치면 벽에 찰싹 달라붙어 걸어야 한다. 소에게 다칠 위험도 있지만 그보다 만의 하나 재수 없으면 똥 묻은 꼬리에 옷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마치 춤을 추듯, 소가 꼬리를 흔드는 리듬에 몸을 맞춰 지나가야 한다. 길바닥에 개나 소가 싸 놓은 똥도 꼭 피해가야 하는 지뢰다.
이 길에서는 해질 무렵 정전이 됐을 때의 난감한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인도는 어느 지역이든 정전이 일상 다반사지만 이 헷갈리는 미로 같은 골목에서 당하는 정전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다행히 자가발전시설을
갖춰 임시로 불을 켜놓은 집이 나침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걸로 우리 같은 초행자가 길을 찾아 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일상사가 그 안에 모두 녹아 있는, 결코 쾌적하다고 할 수 없으나 땀냄새 진한 그 좁은 골목길들이 어느새 그리워진다.
# 콜카타
밤기차를 타고 콜카타로 이동했다. 그간엔 덥지만 비교적 건조해서 참을 만했는데 덥고 습한 지역의 에어컨 없는 밤기차는 악몽 같았다. 아니 악몽조차 꿀 수 없을 정도로 끈적거렸다.
콜카타는 내게는 마더테레사하우스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가 여기에 죽음을 기다리는 집을 열었던 것처럼 이곳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죽는 일보다 힘들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역에 도착하니 한 남자가 짐을 머리에 이고 양 손에도 바리바리 들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짐을 운반해주고 그가 받는 요금은 10루피, 우리 돈으로 300원이 채 안 되는 돈. 어디나 그렇지만 여긴 더더욱, 남자고 여자고 아이고 어른이고
먹고살기 위해 길에 나선 사람이 가득하다. 그 중 우성인 젊은 남자들은 그래도 힘이 남아 우리 같은 관광객에게 비릿한 호객행위라도 하지만 나이 들거나 어린 사람들의 눈동자는 참으로 고단하다. 먹고산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 ‘입에 풀칠’하는 행위임이 절실하게 실감된다. 인도인에게 함부로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은 죄악이다.
콜카타에서 마지막 날 마더테레사하우스에 들렀다. 다행히 개장시간 안에 도착해 마더테레사가 머물던 작은 공간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작은 방에서, 더구나 부엌 위라 찜통 같았을 그
방에서 단 한 번도 팬(천장에 붙은 선풍기)을 사용하신 적이 없다고 했다.
뜬금없이 한 사람의 에너지에 생각이 미쳤다. 의지가 강한 한 사람의 에너지가 남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작든 크든 자신의 에너지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행동할 때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가져볼 일이다. 내 생각만 옳다는 고집은 위험하다. 그분께서 단 한 번도 팬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안내문의 한 문장에, 한 사람의 집중된 에너지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까지 생각이 번져갔다.
후대에 와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그분이 바꾸어 놓은 것들을 생각하면 쉽게 어설픈 평가는 하지 말 일이다.
# 신을 닮은 산, 안나푸르나(포카라)
국경을 넘어 카트만두에서 이틀을 머물고 다시 버스를 타고 포카라로 이동했다. 포카라는 페와 호수와 안나푸르나가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트레킹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짧지만 1박2일 경험을 하기로 하고 이곳의 일정을 늘렸다. 둘째 날 아침,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룸비니로 향하고 다시 델리에서 만날 것임에도 우리는 마치 영영 헤어지는 것처럼 아쉬운 인사를 나눴다. 벌써 정이 많이 들었던가 보다.
예약했던 숙소 근처 여행사에서 트레킹에 대한 사전 안내를 받았다. 여행사 직원이 아무리 ‘절대로 어렵지 않은 편한 길’이라고 강조해도 저질체력인 우리 일행의 두려움은 줄지 않았다. 아침에 든든히 식사를 하고 산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간드룩이란 곳으로, 5시간쯤 예정된 산행 후 하루를 묵고 다음 날 같은 코스로 내려오는 일정이다.
처음 2시간은 가벼운 하이킹 코스를 걸었다. 날씨도 좋고 길도 좋아서 소풍 나온 기분으로 수다까지 떨면서 걸었다. 이후 만난 예기치 않은 난관.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3시간 넘게 올라가야 한다는 것. 숨이 가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려 자주 쉴 수밖에 없는 우리 곁으로, 앙증맞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연신 지나갔다. 그 중에는 일명 ‘조리’라 불리는 간편형 슬리퍼를 신고 가는 아이도 있었다. 세상에, 그 아이들에게는 저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이 그저 평지 정도일 뿐인 것이다.
게다가 당나귀 떼는 왜 이리 자꾸 내려오는지. 외길에서, 그것도 경사에서 만나는 당나귀 떼는 대략 난감이다. 물자를 싣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순하디순한 당나귀들이 귀엽고 안쓰럽기도
할 법한데, 현실에서 나는 어쨌거나 ‘그들과 그들의 똥’ 사이의 최대한의 거리를 확보해야 했으므로 매 순간이 긴장이었다. 다음 날 내려오면서 보니, 나보다 당나귀들이 먼저 나를 느끼고 옆으로 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잠시 멈춰 킁킁 냄새를 맡은 후 당나귀가 먼저 한쪽으로 피해서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오랜 세월 사람들과 부딪히며 외길을 지났던 경험으로 익혀진 그들의 ‘배려’의 습관이었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Welcome to Ghandruk’이라는 푯말이 저 앞에 보였다.
마치 안나푸르나 어느 높은 봉이라도 오른 듯 울컥했다. 산악인을 위한 전문 코스는 물론 다르겠지만 이곳 트레킹은 한국의 등산과 달랐다. 산을 ‘오른다’는 것보다 ‘걷는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수 있겠다. 높은 곳의 마을 사람들이 아래 지역을 오가며 생활하는 길이기 때문에 스포츠로서의 ‘등산’이라기보다 ‘일상으로서의 오르내림’ 정도가 적당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산을 돌고 돌아 쉬엄쉬엄 걷는다면 나 같은 운동부족형 인간도 어지간한 일정은 소화할 수 있다. 도착해 롯지에 앉아 맥주 한잔 마시며 경치를 보는 맛, 새벽에 아스라히 보이는
안나푸르나까지 땀을 흘린 대가가 실로 값지다. 다음에는 꼭 좀 더 긴 일정으로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산을 내려왔다. 이제 남은 일정은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카트만두에서 델리로 이동해 먼저 도착한 일행과 합류하는 것. 그리고 델리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 다시 델리로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는 18인승 경비행기를 이용했다. 이 비행기는 미리 좌석을 배정하지 않아서 원하는 자리가 있는 탑승객은 문 앞에 미리 줄을 서야 한다. 이 비행기의 왼쪽 자리에서 안나푸르나가 보인다는 정보 때문인지 미리 일어나 있거나 하지 않는 서양인들조차 만반의 준비를 하고 언제든 뛸 태세다. 나는 천만다행으로 일행의 도움을 받아 왼쪽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비행기가 뜨고 드디어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개 비행기를 타면 산은 늘 아래에 있기 마련인데,
안나푸르나는 비행기의 고도보다 더 높이 있어 더욱 신비해 보였다. 마치 거대한 하늘 제국을 보는 느낌. 만약 내가 네팔 사람이라면 아마 안나푸르나에 오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신처럼 엄마처럼 늘 나를 지켜봐 주고 보살펴줄 것 같은 영험하고도 따뜻한 산, 거기에 대고 기도하고 바라면 뭐든 들어줄 것만 같은 관대함의 얼굴을 한 그 산에 굳이 올라가 깃발 꽂고 내려오는 행위 자체가 네팔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 아닐까.
카트만두에서 비행기를 타고 델리에 도착했다. 22일째 여행 중인 우리는
이제 길잡이 샘 없이도 느긋하게 택시를 잡고 일행이 있는 숙소로 향할 수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배낭을 메고 걷는데 첫날 밤 기억에 감개가 무량했다. 가로등조차 드물던 그 길에서 시꺼먼 개들을 보고 기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그 복잡한 길에서 약도도 없이 물어 물어 여유 있게 숙소를 찾아가고 있다니. 숙소에 도착하니 일행이 먼저 와 있었다. 기껏해야 이틀 만인데 얼굴만 봐도 너무 반가웠다. 서로 고생한 이야기들을 하며 까르르 까르르 웃음꽃을 피웠다. 이제는 20년 가까운 나이 차조차 실감나지 않았다.
#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서 나는 25일간의 일정이 마치 꿈속이었던 것처럼 잠시 마음 둘 곳을 모르고 헤매다가 어느덧 일상에 적응하고 있다. 엄마로, 아내로, 딸로, 직장인으로서 늘 그랬던 것처럼 부족하고 허둥지둥하는 모습 그대로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법정 스님께서 <인도기행>에 쓰셨던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경구를 안고 갔다. 인도는 내가 가진 여러 부분의 고정관념에 대해서 내 스스로가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깨끗함과 더러움을 구분하는 고정관념에 대해서, 보이는
것만을 전부로 알았던 나쁜 습관에 대해서. 두렵고 힘들기만 했던 첫 밤기차 여행 이후, 나는 나름대로 밤기차 이등칸을 편하게 이용하는 법을 터득했으며 실제로 그 이후로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즐기기 시작했다.
여행 초기 식당 테이블 위에 벌레만 기어가도 기겁을 하던 내가, 어느덧 찻잔에 둥둥 떠 있는 바퀴벌레를 쓰윽 건져 내고 태연하게 마시게도 되었다. 내 마음속에 있던 과거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이 어느 순간 일시에 혼란스러워졌을 때도 그저 ‘그럴 수 있음’으로 스스로에게
기다릴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절대로’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경험이었다. 물론 일상에 익숙해지면 금세 원상복귀될 일시적 여행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는 여행 후의 작은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기가 조금 수월해진 점이다. 전 같으면 조그만 일도 금세 초조해 하고 안달할 것을, 이젠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어, 정성을 다하고 기다리면 되지’ 하는 여유가 생겼다. 조금 덜 고단하고 더 고단하고의 차이일 뿐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고 결국 지옥인 건 내 마음속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난하다고 지옥이 아니고, 몸이 좀 편하다고 천국인 것은 아니다.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분명 욕심이고 집착이었다. 서툴지만 아주 조금은, 이제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자기만의 긴장감을 늘 안고 산다. 적당한 긴장감은 삶의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필요 이상의 긴장은 사람을 쉽게 지치고 병들게 한다. 밖에 나와 일을 하든, 아이를 키우든, 혹 특별히 내세울 만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럴 때 자기만의 긴장을 푸는 비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고단한 삶의
링에서 쉽게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긴장을 푸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여행’을 택했다. 그 중 이번에 택한 인도 배낭여행은 다행히 당시의 나에게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던 듯하다. 당시 나는 ‘관계들’에 대한 긴장감이 내성을 넘어선 상태였고, 이 ‘관계’를 잠시라도 놓기 위해 극단적으로 한 달 가까이 서울을 접고 떠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관계들’을 머릿속에서라도 온전히 놓고 있을 만큼 몸을 적당히 지치게 할 장소가 인도였던 것일 수 있겠다. 아니, 우리 여행의 길잡이 샘이 강조했던 대로 그래서 ‘인도가 우리를 불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선택은 들어맞았고, 적어도 그 기간 속에서 나는 ‘관계 속의’ 나를 벗고, 마음의 소리대로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었다. 함께 여행을 했던 열여섯 명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나처럼 직장을 그만두거나 새 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여행이란 탈출구, 그리고 인도라는 특수한 지역은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꽤 매력 있는 처방전일지 모르겠다.
내게 여행은, 새로운 환경을 접하는 경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새로운 환경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또 다른 도전이기도 하다. 어쩌면 내게 여행은 궁극적으로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조금 먼 길을 돌아가는’ 과정일 수 있겠다. 여행을 떠날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고, 여행에서 충분히 나를 만나고 돌아와서 가족과의 일상이 더 행복하다. 새 일을 시작하면서의 두려움, 긴장감을 이젠 조금 즐길 수 있게 되었고 뭐든 잘해 보고 싶은 의지가 마음의 일발로 장전되었다. 이제 남은 2010년을 전보다 더 잘살아낼 자신감이
생겼다.
나이 마흔에 세상살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기가 쑥스럽기는 하지만 막연한 불안함, 긴장감, 책임감, 가끔씩 견딜 수 없는 탈출 욕구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때로는 익숙한 환경에서 빠져나와 보라’고 진심으로 추천한다. 힘들 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머리가 복잡해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 ‘익숙한 사람들을 떠나 나를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유익하고도 값지다. 어쩌면 자신이 속한 크고 작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기 몸 하나만 쏙 빠져나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하고 이기적이다. 그러나 너무나 지쳤을 때 한 번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꼭 내가 아니어도’를 생각해주면 좋겠다. 내가 경험한 것과 같다면, 걱정했던 것보다 내가 비운 자리가 결코 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다지 낯설어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절실히 필요하다면 용기 내어 저질러 볼 일이다. 우리는 충분히 떠날 자격이 있으므로.
■ Travel tip
가는 길 = 인도는 비교적 넓은 지역이라 단기간에 많은 도시를
둘러보기 어렵다. 대신 델리를 포함한 북부지역, 뭄바이를 포함한 남부지역, 북부 고산지역 등 여행의 목적에 맞춰 지역과 일정을 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항공편을 이용할 경우 주로 북부지역은 델리, 남부지역은 뭄바이를 통해 인도로 들어간다. 오사카·홍콩 등을 경유하는 저렴한 항공편도 있다.
숙소 = 빈부의 격차만큼 숙소 역시 편차가 크다. 큰 도시에는 저예산(budget) 여행자가 이용할 만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급 숙소도 꽤 있다. 이런 숙소를 이용할 경우 ‘인도법에 따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다면 바퀴벌레·모기와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매우 더운 시기라면 에어컨 시설이 있는지도 확인해볼 일이다.
기타 정보 = 여행자로서의 기본 수칙만 지킨다면 인도는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여행지다. 다만 첫 여행인 경우 교통·숙소정보 등을 얻기 어려우므로 부분적으로 여행사의 도움을 받는다면 수고를 덜 수 있다. 주식은 카레와 밥·난 종류의 말가루 빵으로 저가 식당에서는 닭고기 외의 육류는 찾기 어렵다. 다이어트를 생각한다면 최적의 여행지인 셈이다. 여행 중 배앓이를 하는 경우가 많으니 물은 꼭 생수를 사 마시고, 음식도 조심해야 한다. 인도에서 생기는 설사는 한국 지사제가 듣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으므로 현지 약을 구입할 경우에 대비해 필수 용어들을 꼭 외워 가자. 겨울철이 방문하기에 제일 적당하고, 우기는 피하는 것이 좋다.
(월간중앙 2010.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