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
가시 철망 꽃울타리
함영연
과수원에 딸린 창고의 문이 열리자,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왔어요.
“이제 부지런히 일을 해야지. 함께 잘해 보자.”
아저씨가 농기구를 보며 말했어요. 전에 주인 할아버지와 같이 창고를 둘러보던 아저씨였어요.
“주인이 바뀌었나 봐.”
“그럼 새 주인인 거야?”
농기구들의 말처럼 강릉 시내에 살던 아저씨가 어단리에 있는 사과 과수원을 사서 온 거였어요. 전 주인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아서 일하기 힘들어했거든요.
어단리는 칠성산이 있는 마을이지요. 어단리 과수원의 사과들은 물 맑고 공기 좋고 볕이 알맞아서 아삭하고 달다는 평을 들어왔어요. 아저씨는 사과 농사에 한껏 기대를 품은 표정이었어요.
하지만 주인이 바뀌어도 창고 구석에 돌돌 말려 있는 가시 철망은 별 감흥이 없었어요. 전에도 없는 것처럼 지냈는데, 새 주인아저씨도 농기구를 들고 나가면서 철망 쪽은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거예요.
밖에 나갔다 온 곡괭이, 삽, 호미들은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새들이 노래 부르는 걸 들으면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아. 재잘재잘 말을 걸며 친구가 되어 주니까.”
“맞아, 나비들이 날갯짓하는 모습은 얼마나 예쁜데. 밖에 나가면 다들 친구가 되지.”
농기구들의 이야기에 철망은 부러움이 한껏 솟았어요.
“아, 나도 밖에 나가서 친구를 만나고 싶어. 여기는 너무 심심해.’
철망은 소망을 지닌 채 나날을 보냈어요.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이었어요. 창고에 온 아저씨가 두리번거리더니 철망 쪽으로 왔어요.
“여기 있군. 울타리로 안성맞춤이야.”
아저씨는 철망을 들고 나가서, 구멍 난 울타리 바닥 흙을 고르고 철망을 쳤어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질거렸어요. 철망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과일이 열려 있는 사과나무와 울타리로 서 있는 탱자나무들이 보였어요. 그제야 실감이 났어요.
‘드디어 나왔어. 밖에 나왔어!’
철망은 가까이 있는 탱자나무를 보았어요. 농기구들 말처럼 금방 친구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어요. 하지만 탱자나무는 좀처럼 눈을 맞추지 않았어요. 아무리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냉랭한 탱자나무에게 말 거는 게 멋쩍었어요.
‘나도 곧 친구가 생길 거야.’
철망은 탱자나무 때문에 잠시 주춤했던 마음을 떨쳤어요.
한 무리의 새들이 날아왔어요. 철망은 인사를 건넸어요.
“안녕? 반가워.”
“앗, 따가워! 짹짹.”
새들은 몇 번 철망 근처를 기웃대다가 날아갔어요. 밖에 나오면 금방 친구가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내 마음도 모르고….”
철망은 기분이 언짢았어요.
“쯧쯧,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지.”
옆에 있는 탱자나무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내게 말한 거니? 고마워. 가만히 있길래 말 걸기 어려웠어. 그런데 뭘 알아야 한다는 거야?”
“네 모습을 봐. 날카로운 가시가 있잖아.”
“가시가 어때서?”
탱자나무 말에 철망은 가시를 뾰족뾰족 세워 보였어요.
“그래, 가시를 세우는 게 네가 할 일이야. 그렇게 하라고 거기에 있는 거지.”
탱자나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어요.
“전에는 울타리가 성근 곳으로 사랑의집 아이들이 드나들며 사과를 가져가도 주인이 뭐라고 안 했어. 농약 친 날에는 큰 글씨로 약 쳤으니, 당분간 먹을 수 없다고 써 붙이기도 했거든. 바뀐 주인은 칠성산이 가까이 있어서 고라니가 드나들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지만, 내 생각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아. 그러니 네가 할 일은 누구라도 다가오면 가시를 세워 쫓아내야 해. 우리처럼 말이야.”
탱자나무도 철망 못지않게 촘촘한 가시를 지니고 있었어요.
“후유,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철망은 가시손을 보며 한숨을 쉬었어요.
“저기 봐!”
그때 탱자나무가 소리쳤어요. 아이 둘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어서 할 일 해야지. 가시손에 힘을 줘. 그래야 과수원에 들어가지 못하지. 안 그러면 쓸모없다고 아저씨가 걷어 버릴걸. 그 자리에 있던 탱자나무도 말라가니까 쓸모없다고 뽑아버렸거든.”
탱자나무 말에 철망은 내키지 않았지만, 가시손에 힘을 불끈 주었어요.
“누나, 저기….”
철망을 본 아이가 걸음을 멈췄어요.
“들어갈 수 없게 막아놓았어. 여기 사과 맛있는데….”
“맞아. 사과병에 걸린 애도 여기 사과를 먹으면 낫잖아.”
아이들은 과수원을 물끄러미 보다가 발길을 돌렸어요. 가다가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어요.
철망은 할 일을 다 한 듯해서 뿌듯했어요. 그것도 잠시, 안타까워하던 아이들 눈빛이 자꾸만 생각났어요.
“탱자나무야, 사과병이 뭐야? 사과를 먹어야 낫는 병도 있어?”
“몰라!”
탱자나무 목소리에 찬 바람이 불었어요. 더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어요.
“그것참, 쓸만하구먼. 진즉 쳐놓을걸.”
과수원에 나온 아저씨가 철망을 보며 흡족해했어요. 아저씨 칭찬에 철망은 그런대로 마음을 달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고요한 밤이 되면 여전히 마음이 허전했어요.
“아이, 따가옹!”
어슬렁 다가오던 길고양이가 물러나며 앞발을 비볐어요.
“안녕? 난 가시손으로 과수원을 지키는 울타리야.”
“누가 모르냥?”
길고양이는 쌩하니 가버렸어요. 기분이 울적했어요.
“탱자나무야, 속상해. 네 말대로 난 가시가 있어. 가시 때문에 친구 사귀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철망은 힘이 쭉 빠졌어요.
“아이쿠, 내 말이 가시가 되었네. 미안해. 널 보면 그 자리에 있던 탱자나무가 생각나서 편하지 않았어.”
며칠 지나서인지 쌀쌀맞던 탱자나무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그런 줄 몰랐어. 그런데 저번에 본 애들이 자꾸 생각나.”
“옆 동네 있는 보육원 아이들이야.”
“보육원?”
“응, 엄마 아빠가 없거나 사정이 있어서 떨어져 사는 사랑의집 아이들이지.”
“전에 말한 사랑의집 아이들이구나. 그 애들이 여기 사과를 좋아한다고 했어.”
“예전처럼 못난이 사과를 나눠주면 되는데.”
“못난이 사과는 뭐야?”
“먹는 데는 문제 없지만, 팔기 어려운 사과를 말해. 저번 주인 할아버지는 못난이 사과를 가져가게 했거든.”
“좋은 분이시네. 그런 사과는 어떻게 만들어?”
“만드는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지거나 매달려 있더라도 흠이 있는 사과를 말해.”
탱자나무는 사과에 대해서 제법 알고 있었어요.
철망은 이후에도 가시손을 세워 할 일을 했어요. 노루나 오소리 같은 산짐승이 과수원에 들어가려다가 철망을 보고 뒷걸음을 쳤어요. 그럴 때마다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추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사과들이 달큰하게 익어갔어요.
“날이 꾸무럭거리는 게 예사롭지 않아. 무사히 지나가야 하는데.”
아저씨가 하늘을 보며 말했어요. 하늘엔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급기야 사방이 어둑해지고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어요. 바람은 사과나무가 뿌리째 뽑힐 정도로 거세졌어요. 철망 구멍으로도 바람이 쌩쌩 지나갔어요.
“태, 태풍인가 봐.”
옆에 있는 탱자나무가 겁먹은 소리로 말했어요.
“태풍이라고?”
처음 겪는 일이었어요. 바람이 사정없이 흔들어댔어요. 철망은 중심을 못 잡고 튕겨 나갈 것만 같았어요.
‘이러려고 밖에 나온 게 아닌데.’
철망은 안간힘을 써서 버텼어요.
다행히 밤새 몰아치던 바람이 새벽녘에 잠잠해졌어요.
날이 밝자, 아저씨와 아줌마가 헐레벌떡 과수원으로 왔어요.
“생각보다 사과가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네요. 상하기 전에 사랑의집에 가져다줘야겠어요.”
아줌마가 떨어진 사과를 바구니에 담았어요.
“못난이 사과가 생긴 거잖아. 어서 그렇게 해주세요.”
철망은 달뜬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 순간만큼은 세찬 바람이 고마울 정도였지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어요. 삽을 들고 아줌마 옆에 서 있는 아저씨 때문이었지요.
“당신은 지금 상황을 보고도 사랑의집 타령이오?”
아저씨 말에 짜증이 묻어났어요.
“알아요. 나무들 흙 북돋워 줘야 하고, 꺾인 가지 정리도 해야죠.”
“알면서 그래요? 그리고 성한 사과도 아닌데 준다고 좋아하겠소?”
“바람에 떨어진 거지, 먹을 만해요.”
아줌마가 사과 하나를 베어 물며 아저씨에게도 건넸어요.
“사랑의집 원장님이 그러시는데, 거기 있는 한 아이가 엄마 생각나면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한대요. 그래서 못난이 사과가 나오면 좀 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얼른 주고 와서 일할게요.”
“어린애가 못난이 사과를 찾다니 이상하군.”
“그 애 엄마가 병원에서 투병 중인데, 아프기 전에 간식으로 여기 사과를 자주 줬나 봐요. 엄마 생각날 때마다 사과를 찾아서 아이들이 사과병에 들었다고 하기도 한대요.”
“흠, 주려면 많이 가져다줘요. 맛이 달구먼.”
아저씨도 못난이 사과를 베어 물며 말했어요.
“후유!”
철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어요.
아저씨는 인부들을 불러 사과를 수확했어요. 먹을 사과가 없으니 기웃대던 산짐승도 오지 않았어요. 철망은 한가롭게 나날을 보내고 있었어요.
“난 창고에서 오래도록 쓸쓸했어. 그래서 밖에 나가게 되면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찾아와도 다 쫓아내야 하는 신세잖아. 속상해.”
철망이 툴툴댔어요.
“기다려 봐. 때가 되면 친구가 생길 거야. 그 전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겠지.”
탱자나무가 힘을 북돋워 주었어요. 하지만 철망은 탱자나무의 말이 지나가는 말로 들렸어요.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데 기다려 뭐하나 싶었지요.
그래도 추운 겨울을 보내는 동안, 쓸쓸함이 몰려오면 가끔 탱자나무의 말이 생각났어요. 자신보다 먼저 울타리로 지낸 탱자나무의 말이니 허튼 말은 아닐 거라는 믿음도 생겼어요. 그렇지만 변한 건 아무도 없었어요. 참다못한 철망이 불평을 터뜨렸어요.
“탱자나무야, 기다리라는 말은 하기 좋은 말에 불과해. 뭘 기다리라는 거야? 차라리 창고에서 밖에 나갈 꿈을 꿀 때가 더 나았어.”
“조바심을 내려놔. 지레 지치겠다. 창고에서 나오고 싶다는 소망은 이뤘잖아. 그것만도 고맙지 않니?”
탱자나무가 말침을 놓았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창고 구석에서 밖에 나갈 날을 고대하던 때를 잊은 채 불평이라니! 마음에 안개가 걷히고 고마움이 스몄어요. 이후 철망은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봄햇살의 포근함을 기다리며 지냈어요.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하는 힘도 키웠지요.
드디어 겨우내 추위가 물러나고 눈 부신 햇살이 너울거리는 봄이 왔어요.
“저 밑을 봐.”
탱자나무가 말했어요. 철망은 무심히 아래를 보았어요. 풀꽃들이 철망을 타고 오르고 있었어요. 숨이 훅 멎는 것 같았어요. 철망은 심호흡한 뒤, 말을 건넸어요.
“안녕? 난…, 가시가 있단다.”
“괜찮아요. 저도 가시가 있는걸요.”
“정말 가시가 있구나. 이름은 뭐니?”
“가시모밀이에요. 기대도 되죠?”
가시모밀이 수줍게 말했어요.
“그럼 그럼, 얼마든지 그래도 돼.”
철망은 기꺼이 반겼어요. 가시모밀은 마음 놓고 철망에 줄기를 뻗었어요.
“저도 타고 올라가도 되죠? 저는 메꽃이에요.”
“그러고말고. 어서 올라오렴.”
가시모밀과 메꽃은 철망을 타고 올라가며 마음껏 키재기를 했어요. 철망은 푸릇한 기운으로 나날을 보냈어요. 그래서인지 뜨거운 여름에도 지치지 않았어요. 가시모밀과 메꽃이 꽃을 피우자, 덩달아 주위 풀꽃들도 함께 어울렸어요.
아저씨와 아줌마가 과수원에 일하러 왔어요. 철망 근처를 지나던 아줌마가 말했어요.
“어머나, 며느리밑씻개가 꽃을 피웠네요. 메꽃도요.”
“요즘은 며느리밑씻개라고 하지 않고 가시모밀이라고 하던데.”
아저씨가 말했어요.
“가시모밀, 부르기 훨씬 좋네요.”
그날 철망은 아저씨와 아줌마가 하는 말을 통해 개불알풀은 봄까치꽃, 소경불알은 알더덕, 중대가리나무는 구슬꽃나무로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우와! 풀꽃들이 오밀조밀 피어서 꽃울타리가 되었네.”
지나가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철망 앞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사과를 세 번째 보냈을 때, 사랑의집 원장님이 아이들과 인사하러 왔어요. 꽃울타리를 본 아이들이 함박웃음을 지었어요. 그날 사과병에 걸렸다는 아이도 같이 왔어요. 밖에 나가지 않으려던 아이가 어단리 과수원에 간다니 따라나섰다며 원장님이 대견해했어요. 철망은 풀꽃들이 편안하게 기댈 수 있게 더욱 마음을 쏟았어요.
“탱자나무야, 고마워.”
“뭐가?”
“난 밖에 나오면 당장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았어. 그런데 뾰족한 가시로 쫓는 일만 하니 얼마나 실망스럽던지.”
철망은 작년 일이 아주 오랜 일처럼 느껴졌어요.
“그게 네 일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날 찾는 친구를 위해서도 할 일이 생겨서 좋아. 네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그 말에 뭘할까 하다가, 거센 바람에도 지탱하는 힘을 키우려고 했지. 다 네 덕분이야.”
꽃울타리가 된 철망이 환하게 웃었어요. 탱자나무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어요. 덩달아 풀꽃들이 화르르 향기 내어 꽃울타리를 보드레하게 감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