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문화재탐방
하양 부호리 금호서원(琴湖書院)
manmaninfo ・ 2024. 2. 14. 20:06
하양 부호리 금호서원(琴湖書院)
하양 부호리 금호서원은 조선 세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 경암 허조(許稠,1369~1439)를 모시는 사원이다.
허조는 조선시대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황희와 함께 세종 30년간을 태평성대로 이끈 뛰어난 재상이었다.
조선 왕조 통치의 기본 법전인 '경제원'과 '속육전'을 편집하여 펴냈으며, 유교 국가의 통치 이념이 드러난 '국조오례의'와 '사례의'를 찬정하고,
석전(공자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의식) 의식을 개정하였다. 또한 성균관 학사와 사부 학당을 세웠다.
효종 4년(1653) 영남 유림이 지금의 하양읍 금락리에 사당을 지었으며, 숙종 10년(1684)에 위패가 모셔졌다.
경종 4년(1724)에 지금의 하양읍 서사리로 옮겼으며, 정조 14년(1790)에 사액 되었다.
*사액(賜額):조선시대에 왕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扁額)을 내리던 일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고,고종 38년(1901) 헐린 곳에 유허비각이 세워졌다.
1923년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경덕사를 비롯하여 수고당,성경재,구인헌,내삼문,외삼문,하당 등이 있으며,
정문에는 '준도문(遵道門)'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인 수교당은 정면 4칸,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다.
수교당(修敎堂)
경덕사(景德祠)
성경재(誠敬齋)
.............................
정조실록29권, 정조 14년 2월 19일 庚午 6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고 수찬 허조의 벼슬을 회복시키고 홍문관 부제학을 추증하다
○復故修撰許慥官, 贈弘文館副提學。 吏曹因幼學許默上言, 覆奏言: "謹考尹舜擧所輯《莊陵誌》云: ‘修撰許慥以李愷妹夫, 參謀自刎而死, 依律論斷。’ 南孝溫所撰《六臣傳》曰: ‘許詡之子修撰慥, 死於丙子之禍, 其父貞簡公與成三問等同死。 其父復官贈諡之後, 其子獨未蒙恩, 實是朝家未遑之典, 許慥復官之請, 允合許施。" 敎曰: "許文敬院宇賜額, 永豐家宣諡, 適在此時, 而故修撰許慥之事, 際又入徹, 事若不偶。 況與其父貞簡公 詡辦死之年條, 雖有先後, 節義之無異, 古人文字如是斑斑乎, 父蒙賜諡之恩, 子尙在未復官秩, 其所號籲, 尙云晩矣。 故修撰許慥奚特復官? 宜擧貤贈之典。 且況光廟聖敎, 若曰: ‘若使許詡在者, 六臣當爲七臣。’ 亦可仰聖意之所在。 今豈可循例贈職而止? 其家主祀人, 自本曹訪問錄用。"
신역 정조실록 > 정조 14년 경술 > 2월 19일 > 최종정보
정조 14년 경술(1790) 2월 19일(경오) 양력 1790-04-03
14-02-19[06] 고 수찬 허조의 벼슬을 회복시키고 부제학에 추증하다
고(故) 수찬 허조(許慥)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하였다. 이조가 유학(幼學) 허묵(許默)의 상언으로 인하여 의견을 갖추어 주상에게 아뢰기를,
“삼가 윤순거(尹舜擧)가 편집한 《장릉지(莊陵誌)》를 상고하여 보니 그 내용에 ‘수찬 허조는 이개(李塏)의 매부(妹夫)인데,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으므로 법에 따라 논단(論斷)하였다.’라고 하였고,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에는 ‘허후(許詡)의 아들 수찬 허조가 병자년(1456, 세조2)의 화란(禍亂) 때 죽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비 정간공(貞簡公)은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 아비에 대해서는 관작을 회복하고 추증하여 주었는데 유독 그 아들은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실로 이는 조정이 미처 겨를이 없어 시행하지 못한 은전입니다. 허조의 관작을 회복시켜 달라는 청은 시행해 주는 것이 진실로 합당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의 서원에 사액하고 영풍군(永豐君)의 집에 시호를 내려 준 것이 마침 이때에 있었는데, 고 수찬 허조의 일이 또 이즈음에 보고되었으니 우연치 않은 일이다. 하물며 그 아비 정간공 허후와 죽은 해로 따지자면 선후의 차이가 있지만 절의로 보자면 다름이 없는 것이 옛사람의 기록에 이와 같이 뚜렷이 남아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비는 시호를 하사받는 은전을 입었는데 자식은 아직도 관질(官秩)이 회복되지 못하였으니 허묵이 상언하여 호소한 것이 오히려 늦었다고 하겠다.
고 수찬 허조에 대해 어찌 관직만 회복시켜 주겠는가. 추증해 주는 은전도 베풀어야 할 것이다. 또 더구나 광묘(光廟 세조(世祖))의 하교에 ‘만약 허후가 있었다면 육신(六臣)이 칠신(七臣)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제 어찌 규례에 따라 증직하는 정도로만 그칠 수 있겠는가. 이조에서는 그 집안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원전】 46 집 95 면
[주-D001] 이개(李塏) : 세조 즉위 이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주-D002] 그 아비 …… 죽었습니다 : 이 기사에서는 허후와 허조를 부자 관계로 기술하고 있으나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과 조현명(趙顯命)의 문집 《귀록집(歸鹿集)》 권17에 수록된 허후에 대한 시장(諡狀) 〈고참찬허공시장(故參贊許公諡狀)〉에서는 허후와 허조가 숙질 관계로 정리되어 있다. 즉 허조는 허후의 아우인 허눌(許訥)의 아들이다. 허후는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단종(端宗)을 보좌하다가 계유년(1453, 단종1)의 정란(靖亂)을 당하였으나 세조가 그를 아꼈으므로 그 당시에는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정란 성공 축하연에서 황보인을 두둔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등의 행동을 보여 결국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고 거기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성삼문 등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병자년(1456, 세조2)에 죽음을 당하였으니 허후가 성삼문 등과 함께 죽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사건이 아니다.[주-D003] 그 아비에 …… 주었는데 : 허후는 영조 23년(1747) 11월 30일에 복관(復官)되었고, 영조 32년 5월 29일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承政院日記 英祖 23年 11月 30日, 32年 5月 29日》[주-D004]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 허후의 아버지이다.[주-D005] 영풍군(永豐君) : 단종의 복위와 관련하여 세조(世祖)에게 죽음을 당한 여섯 명의 종실(宗室) 중 한 명인 이전(李瑔)이다. 이전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와 함께 오종영(五宗英)으로 불린다.[주-D006] 육신(六臣)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한 자들로, 남효온의 《육신전》에 따르면 박팽년(朴彭年), 성삼문, 이개,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를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자헌 (역) | 2020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경상도(慶尙道)
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허조(許稠) 세종조의 정승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 경상도(慶尙道) 하양현(河陽縣)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금호서원(琴湖書院) 숙종 갑자년에 건립되고, 정종 경술년에 사액되었다. 허조(許稠) 태묘(太廟)에 보라.
.........................
일성록 > 정조 > 정조 14년 경술 > 2월 13일 > 최종정보
정조 14년 경술(1790) 2월 13일(갑자)
14-02-13[19] 경상도의 유생 채사현(蔡思玄) 등 285인이 상소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세종조의 명상(名相)인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바로 나라의 원로이며 사림의 거두로서, 그 나라를 다스린 공로와 선비들의 표준이 된 덕망은 진실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 주기에 합당하고, 숭장(崇獎)하는 은전을 입기에 마땅합니다. 도내의 하양현(河陽縣)에 있는 금호서원(琴湖書院)은 바로 그에게 제사 지내는 곳인데, 100년이 된 유사(遺祠)에서 비록 사림이 존모(尊慕)하는 정성을 펴기는 하지만, 두 글자의 사액(賜額)에 대해서는 아직도 조정의 숭보(崇報)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밝은 시대에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으며, 선비들의 실망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근자에 삼가 듣건대,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를 모시는 상주(尙州)의 원우(院宇)는 도내의 유생이 상소하여 청한 것으로 인하여 즉시 사액하라는 명을 내리셨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황희와 허조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 신하들에 대하여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하양은 바로 허조의 관향이면서 평소 머물던 곳이므로, 사림이 반드시 이곳에다 모시려고 하고 있으니, 조정에서 사액하는 은전을 또한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특별히 은혜로운 편액을 내려 주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황 익성공과 허 문경공이 한 몸이 되어 재상의 업적을 세운 것은 사람들마다 익숙히 아는 바인데, 사원에 아직도 편호가 없으니 흠이 되는 일이라고 할 만하다. 더구나 연전에 이미 익성공의 사원에 사액을 허락하였는데, 지금 문경공에 대해서는 어찌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광태 (역) | 2007
강 : 慶尙道儒生蔡思玄等二百八十五人上疏賜批
목 : 疏略曰世宗朝名相文敬公 許稠卽王家之蓍龜士林之山斗而其經濟之功表準之德亶合俎豆之報宜蒙崇奬之典而道內河陽縣 琴湖書院卽其尸祝之所也百年遺祠雖伸士林尊慕之誠二字華額尙遲朝家崇報之典斯豈非昭代之闕章多士之觖望乎近者竊伏聞翼成公黃喜 尙州院宇因道儒疏請卽降賜額之命夫黃許一體也今於一體之臣宜不當有二而矧玆河陽乃是稠貫鄕而爲平生杖屨之所則士林處奉之所以必於此而朝家宣額之典似亦不可已也伏乞亟命有司特頒恩額批以黃翼成 許文敬一體相業塗人耳目祠院之尙無扁號可謂欠事況年前旣許於翼成之院今於文敬何可一許一斳乎所請依施
.........................
홍재전서 제21권 / 제문(祭文) 3 / 금호서원(琴湖書院)에 편액을 하사하는 날에 치제한 글
태조에서 세종까지 네 조정의 치세를 도와 / 四朝贊治
머리가 희게 센 원로였네 / 皤皤黃髮
주석이란 두 글자 / 柱石二字
영광스러운 임금의 말씀이셨네 / 衮華垂綍
오래 왕도의 교화가 이루어져 / 久道化成
널리 시행되어 그침이 없었네 / 普施無止
요숭(姚崇) 송경(宋璟)과 같은 공이 있었고 / 若姚若宋
공을 닮은 훌륭한 아들과 손자가 있었네 / 有孫有子
이에 금호에 나아가 / 爰就琴湖
사우(祠宇)에 편액을 다네 / 扁于祠楣
진실로 광세의 감회로 말미암으니 / 亶由曠感
이 잔을 흠향하길 바라네 / 尙歆玆巵
[주-D001] 주석이란 …… 말씀이셨네 : 주석(柱石)은 기둥과 주춧돌로 국가의 중임을 맡은 대신을 비유한다. 태종이 풍양(豐壤) 이궁(離宮)의 연회에서 세종에게 한 말로, 허조(許稠)에게 기대며 “이 사람은 나의 주석이다.[此予柱石也]”라고 하였다. 《國朝人物考》
ⓒ 한국고전번역원 | 김홍영 (역) | 1998
弘齋全書卷二十一 / 祭文三 / 琴湖書院宣額日致祭文
四朝贊治。皤皤黃髮。柱石二字。衮華垂綍。久道化成。普施無止。
若姚若宋。有孫有子。爰就琴湖。扁于祠楣。亶由曠感。尙歆玆巵。
.........................
강 : 命河陽 琴湖書院宣額時遣官致祭
일성록 > 정조 > 정조 14년 경술 > 2월 17일 > 최종정보
정조 14년 경술(1790) 2월 17일(무진)
14-02-17[03] 하양서원(河陽書院)과 금호서원(琴湖書院)에 선액(宣額)할 때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목(目)이 없는 기사임
ⓒ 한국고전번역원 | 공정권 (역) | 2007
...........................
하양서원(河陽書院)과 금호서원(琴湖書院)에 선액(宣額)할 때에-> 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에 선액(宣額)할 때에
* 命河陽 琴湖書院宣額時遣官致祭
慶尙道儒生蔡思玄等二百八十五人上疏賜批 道內河陽縣 琴湖書院卽其尸祝之所也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경상도(慶尙道)
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허조(許稠) 세종조의 정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 경상도(慶尙道) 하양현(河陽縣)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금호서원(琴湖書院) 숙종 갑자년에 건립되고, 정종 경술년에 사액되었다. 허조(許稠) 태묘(太廟)에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