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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나의 프로토셀 체험사례
I hope you will bear with me as I set our story to print. I want to start with several scripture verses which have been sources of encouragement and strength to us when we have needed it most. However, please do not think this is going to be a sermon. The following scripture verses have been a source of encouragement and strength to us when needed most.
먼저 인내심을 가지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길 여러분들께 요청드립니다. 우리 부부가 절실히 간구했을 때 항상 위로와 힘이 되어준 몇몇 성경구절로 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설교말씀이라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성경구절은 진정으로 우리 부부에게는 위로와 힘의 근원이 되었기에 소개드립니다.
Jeremiah 29:13: "And you will seek Me, and find Me, when you search for Me with all your heart." Jeremiah 33:3: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show you great and mighty things, which you do not know."(NKJV).
“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에레미야서 29장 13절)
“너는 내게 크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에레미야서 33장 3절)
We think as our story unfolds you will understand why these passages are very precious to us.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시면 우리 부부가 왜 이 성경구절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러분들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
After nearly 10 years of marriage, 1 miscarriage, 7 years of infertility studies and hours of prayer, we finally were successful, and I was pregnant at long last. A sonogram, performed at approximately 8 weeks, confirmed that I was actually pregnant with quintuplets. At this sonogram, we could see their strong beating hearts, kidneys, arms, legs, and spinal cords. Their tiny hands still had their webbing and they appeared to be very active and healthy.
1차례의 유산과 7년에 걸친 불임치료, 그리고 수많은 기도끝에 우리 부부는 결혼한지 10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임신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임신 8주차 되는 때에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다섯 쌍둥이였습니다. 초음파검사를 통해 우리 부부는 아기들의 강하게 박동하는 심장, 신장, 팔, 다리, 척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작은 손은 아직 갈귀처럼 보였지만 매우 활기차고 건강하게 느껴졌습니다.
As multiple pregnancies go, mine was a breeze. I never had any morning sickness, no high blood pressure or sugar problems, no toxemia or preeclampsia. But let me tell you, it sure gets tiring spending 24 hours a day on your left side. Around 18½ weeks into my pregnancy, I developed pain in my left hip which would not go away. It was a very deep pain and no amount of rubbing, heat or ice, etc., eased it. The pain progressed into my legs and up into my back.
비록 다섯 쌍둥이를 임신했지만, 저에게는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느끼는 두통이나 고혈압, 혈당, 독혈증, 경련 등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24시간을 지내다보니 제 몸의 왼쪽부분에 점점 무리가 가고 있었습니다. 임신 18주 반이 되었을 때, 왼쪽 엉덩이 부위에 통증이 생기더니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온찜질이나 냉찜질을 아무리 해도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통증은 다리까지 퍼지더니만 등까지 올라갔습니다.
My doctors felt that the pain was due to my inactivity and the pressure of the babies. At this point, I was already as large as a full-term pregnancy and still had a long way to go. About a week after the pain began, I noticed that when I stood up my legs were very shaky, and I would have to stand still for a few seconds before walking. Soon after this, I could no longer do stairs or step up onto anything.
제 담당의사는 저의 통증이 다섯쌍둥이를 임신해서 활동이 둔해지고 아기들 무게의 압력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해산할 날이 많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 벌써 제 배는 만삭의 몸처럼 아주 크게 불러 있었습니다. 통증이 시작된지 일주일 가량 후에 저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 두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을 경험했고, 걷기 위해 잠시동안 가만히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증상이 있은 후 즉시, 저는 계단을 오르내릴 수가 없었고, 발을 올려 딛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The pain continued to worsen as the days went by, so my doctors admitted me to University Hospitals of
날이 가면 갈수록 통증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제 담당의사는 저를 클리블랜드 대학병원에 입원하도록 했습니다. 이때가 임신 23주째 되는 때였습니다. 그 병원에서 이틀째 되는 날에 통증전문의로부터 검사를 받았습니다. 몇가지 검사를 한 후에, 그는 제 통증이 역시 임신으로 인해 골반부위와 엉덩이에 무리를 주어 생겨난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병원에서 특별히 제 통증과 관련하여 해줄 수 있는 치료방법이 별로 없으니, 아기들이 태어날 때까지 참고 견딜 수 밖에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As my pregnancy progressed further, the weakness in my legs increased. One day while walking to the bathroom, I fell and could not get up off the floor. Two orderlies helped me up by lifting me up from under my arms. This put too much stress on my already overtaxed uterus, and by that night, I was in labor. I was only at the end of week 27 -- way too early for a successful outcome. After about 36 hours of labor, with the use of IV drugs, the doctors were able to finally stop the labor. For 8 days I was not allowed out of bed for any reason. By the end of that time, I could no longer walk or even stand. My legs just would not support me.
임신 후반기로 가면서 제 다리는 점점 더 약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화장실을 가던 중에 저는 쓰러졌고 마루바닥에서 일어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두명의 아주머니가 저를 부축해 주어서 가까스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일로 이미 과도하게 무리가 되었던 자궁에 엄청난 충격을 주어 저는 그날 저녁에 분만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겨우 임신 27주째 말이었는데 성공적으로 분만하기에는 너무 빠른 시기였습니다. 분만을 막기위한 혈관주사약의 도움으로 약 36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담당의사는 가까스로 분만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8일간 저는 침대에 누운채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더 이상 걷거나 서 있을 수가 전혀 없었습니다. 제 다리는 저를 제대로 지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Through all this, the pain also continued to increase. It got so bad that the doctors put me on an IV morphine pump the last 6 days of my pregnancy as they were trying to sustain the pregnancy as long as posible for the babies’benefit. However, I was in so much pain, that I needed some kind of relief and they had hoped the morphine would provided us all benefit. I honestly do not remember really being helped from the morphine as I still remember being in horrific pain when I was awake. What I do recall is that the dosage effected me so strongly I just did not care that I was in that pain and that I basically slept 22 out of 24 hours a day.
이런 모든 과정속에서 제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 갔습니다. 통증이 너무나 심해서 의사들은 출산예정일 전 6일동안 제게 몰핀주사약을 투여했습니다. 이는 가급적 조산을 막아 아기들을 건강하게 분만시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때 제가 원하던 것은 오직 통증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들은 몰핀이 저와 아기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희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몰핀이 정말 도움이 됐는지 솔직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제가 다시 깨어났을 때 고통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몰핀의 투여가 너무 강력하게 작용을 해서인지 저는 제 통증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고 하루 24시간 중에 22시간을 잠만 잤었습니다.
At 32 weeks, on September 9, 1989, labor started again around 3:00 a.m. Delivery Day was upon us. For obvious reasons, it was standing room only for the delivery. Jade, Ivana, Zachary, Brenna and Taryn were all born within 4 minutes. Our first miracle was complete: Jade was 3 lbs. 4.5 oz., Ivana was 2 lbs. 6.8 oz., Zak was 3 lbs. 4 oz., Brenna was 3 lbs. 8.5 oz. and Taryn was 3 lbs. 6 oz. Although, our precious Ivana (“God’s Gracious Gift”) was stillborn, the other babies were healthy, and all began to thrive with their medical care.
임신 32주째인 1989년 9월 9일 새벽 3시에 분만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출산일이 다가왔습니다. 제이드, 이바나, 자커리, 브레나 그리고 타린 등 다섯 쌍둥이가 4분만에 모두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부의 첫번째 기적이 완성된 날이었습니다. 제이드는 3파운드 4.5온즈, 이바나는 2파운드 6.8온즈, 자크는 3파운드 4온즈, 브레나는 3파운드 8.5온즈, 그리고 타린은 3파운드 6온즈였습니다. 비록 우리의 소중한 이바나(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는 사산되었지만 다른 4명의 아기들은 건강하게 태어났고, 병원간호에 곧 적응하며 잘 자랐습니다.
However, their mother was very sick.
그러나, 아기들의 어머니가 몹시 아팠습니다.
After the babies were born, my doctors expected that I would be back on my feet within a few weeks with the help of physical therapy. They also expected the pain to disappear with the relief of the physical pressure from pregnancy. Instead, I began to get sicker. My legs were like Jell-O, refusing to work properly no matter what we tried. I also started having trouble keeping food down; even the smell would make me nauseated. And always, there was the pain.
아기들이 태어나자, 담당의사는 물리치료를 받고 나면 제 다리가 수주일내로 다시 원상회복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임신으로 인한 물리적인 압박이 없어졌으므로 제 통증도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점점 더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제 다리는 마치 젤로(디저트용으로 만든 과일향 나는 젤리) 같았고 어떤 치료를 받더라도 정상적으로 움직이지를 않았습니다. 더구나, 식욕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음식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통증은 저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When the babies were about 2 ½ weeks old, the doctors decided they had better find out what was wrong. They did a Nerve Conduction Study (NCS) and EMG, and found that there was a break in the connection between my brain and my spinal cord. So, a CT-Scan was performed next. A tumor was found in the thoracic area of my spinal cord. They did an MRI several days later, and brought in a neurosurgeon. The neurosurgeon advised us that 95% of spinal cord tumors are benign, and that it was just a matter of having surgery with some physical therapy to regain mobility. I was terrified of the surgery itself. The thought never even crossed our minds that we would be facing far worse.
아기들이 태어난지 2주반 가량이 지났을 때, 의사들은 문제의 근원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신경전도검사(NCS)와 EMG검사를 실시했습니다. 검사결과 뇌와 척수사이의 연결부분에 결절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CT스캔을 실시 했습니다. 척수의 흉부부위에서 암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며칠후 MRI검사를 하고 신경외과전문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척수암의 95%가 양성으로 수술을 하고 물리적 치료를 하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문제이므로 수술여부만 결정하면 된다는 소견을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수술 그 자체가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습니다.
On October 12, 1989, I had surgery. When I woke up, I was completely paralyzed from my waist down. I had no feeling, no movement, no balance, no muscle tone. I could not roll over or sit up. I had no control over my bowels and very little control over my bladder. The lower half of my body felt like a dead weight. From this point on, I could no longer keep any food down, and if someone touched me, I felt like I was on fire because my body was not receiving the right nerve impulses/signals
1989년 10월 12일, 저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깨어났을 때, 허리 아래부분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어떤 느낌도 느낄 수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고, 균형을 잡을 수도 없었고, 근력도 없었습니다. 몸을 구르거나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대변은 제어할 수가 없었고, 소변만 약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제 몸의 하반신은 마치 죽은 살덩이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더이상 어떤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몸이 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자극이나 신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만일 누군가가 저를 만지면 마치 제가 뜨거운 불위에 서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On October 16, 1989, they told us the biopsy results. I was diagnosed with a "Glioblastoma Multiforme" (GBM), a nervous system cancer or brain tumor -- Stage IV. GBMs are rare and always fatal. Their characteristics are that the tumor starts out with its main nucleus; then it sends runners (like roots or branches of a tree) out from all directions.
1989년 10월 16일, 의사는 조직검사결과를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다형성교아세포종 (GBM)이라는 중앙신경조직암 또는 뇌암 말기로 진단받았습니다. 다형성교아세포종은 매우 희귀하면서도 아주 치명적인 암이었습니다. 다형성교아세포종의 특징은 신경핵에서 시작 하여 암세포를 나무의 뿌리나 가지처럼 온 몸에 전이시키는 아주 무서운 암입니다.
These runners grow, attach and begin forming more nuclei which continue the process of sending runners out, etc., basically creating spider like webbing throughout the area. My spinal cord was compromised extensively and they were unable to remove all the cancer during the surgery as to do so would have caused me much more physical damage. Further, after surgery, my neurosurgeon advised that I was now also dealing with "free floating cells". These were cells that had been cut away during surgery but not seen or sucked out with their equipment. It was explained to us that these cells would float freely in my spinal fluid and travel throughout my brain and spinal cord, attaching where they may and beginning new tumors.
전이된 암세포는 성장하고 다른 세포에 달라붙어 더 많은 세포핵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생성된 암세포는 또 다시 온 몸으로 퍼져 전이가 되는데 전이부위에 거미줄같이 암세포를 퍼뜨립니다. 제 척수는 광범위하게 전이가 되어 있어서 의사들도 암세포를 모두 제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모두 제거했다 하더라도 제 몸에 더 많은 손상을 미쳤을 것입니다. 따라서, 수술후에도 신경전문의는 제 몸을 자유롭게 떠도는 암세포를 치료해야만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암세포들은 수술 중 수술부위에서 잘려져 나와 몸의 다른 부위에 숨어버렸거나 흡수되어 버린 세포들이었습니다. 이 암세포들은 제 척수액을 타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뇌나 척수에 달라붙어 새로운 암종양을 생성한다고 했습니다.
Now, not only was I paralyzed, but my entire nervous system was compromised with this disease.We were told in 1989 that there were only about 200 reported cases in the entire United States of spinal cord GBMs. Most GBMs are found in the brain. As mine was in the spinal cord, it made it even more rare, more aggressive and faster killing. When diagnosed with a GBM in the brain, most people will live between 18 and 24 months with about 5% living 3+ years from diagnosis. However, when found in the spinal cord, survival time is between 3 and 6 months. I was told I would not survive long enough to see my children's first birthday.
그 때 저는 하반신이 마비됐을 뿐만이 아니라 전체 신경조직이 암세포에 감염된 상태였습니다. 척수 다형성교아세포종은 1989년 당시만 해도 미국 전체에 단지 200명 정도의 발생사례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대부분 다형성교아세포종은 뇌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는 척수에서 발생한 아주 드문 케이스로 더욱 공격적이고 아주 빠르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암이었습니다. 뇌에 발생한 다형성교아세포종은 진단후 생존기간이 평균 18개월에서 24개월이고 3년이상 생존률이 5%에 달했지만, 척수에 발생하면 생존기간이 3개월에서 6개월로 아주 치명적이라 합니다. 저는 그 당시 의사로부터 제 아기들의 첫번째 생일을 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My neurosurgeon wanted me to do bone marrow chemotherapy which totally destroys your immune system, devastates your body and internal organs as well as requires a period of isolation for anywhere from 4 to 8 weeks for recovery from the procedure. This I refused. The next medical option, of course, was radiation. He recommended 30 treatments at a high calibration. I was told that I would be a permanent paraplegic before the treatments were over. We were further advised that there would be continuing deterioration of my spinal cord after the radiation, and that the likelihood of my being a quadriplegic before I died was pretty much 100%.
제 신경전문의는 저의 면역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하고 몸과 신체의 장기들도 모두 망가뜨릴 수 있는 골수항암치료를 제게 권유했습니다. 게다가 항암치료 후 회복을 위해 4주에서 8주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저 혼자만 요양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 다음 선택할 수 있는 치료방법은 당연히 방사선치료였습니다. 그는 30회에 걸친 아주 강력한 방사선치료를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방사선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제 양쪽 하반신이 마비가 될 것이라고 의사는 말해 주었습니다. 더군다나, 방사선치료가 끝나더라도 제 척수는 계속해서 나빠지고 죽기전에 사지마비가 될 가능성은 100%라고 했습니다.
The type of cancer I had would have done this to me without any help; however, the radiation would speed up the process. Then they told me that they still could not guarantee me more than 3 to 6 months to live. At this time, we thought radiation was our only option for the remote possibility of some additional time. The radiation treatments were to be performed at a hospital in my home town, and therefore, were delayed for several weeks due to my further complications and extended hospitalization in
제가 겪고 있는 이런 종류의 암에는 방사선치료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었고, 오히려 암의 진행을 더 촉진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방사선치료를 받더라도 제가 3개월에서 6개월 이상 더 살 수 있으리라고 보장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저희 부부는 방사선치료만이 실낱같은 가능성이지만 제게 그나마 약간의 생명을 연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사선치료를 저의 집근처 병원에서 받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몇몇 합병증을 치료하기 위해 클리블랜드 병원에서의 입원기간이 늘어나면서 방사선치료 계획도 수주일간 지연되었습니다.
It was so hard to pray when you are faced with this situation. This is truly one of those times when the Holy Spirit made intercession on our behalf. Our prayers were always that God's Will be done and that He be glorified in whatever happened. It was never a matter of my being afraid to die. I just was not ready yet. We especially could not understand why we had been given the miracle of our precious babies just to be told that I would not be there to help raise them. It was hard to think that I would not even be a memory to my babies. They would not know who I was. I would only be a photographic image. It just broke my heart.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때가 바로 이런 고난의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이는 결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여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기들을 돌보기 위해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왜 저에게 기적을 베푸시어 이렇게 소중한 아기들을 주시었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들에게 내 존재가 기억조차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참기 힘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제가 누군지도 모를 것입니다. 저는 단지 사진속의 모습으로만 남아있게 되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You see, we believe in the awesome power of prayer and that all things are possible through God. We believe our God is truly wonderous and all powerful! And as Jeremiah said: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show you great and mighty things, which you do not know." So, we did this, and we trusted, and truly were “Prisoners of Hope” (Zechariah 9:12) waiting upon the Lord.
저희 부부는 기도의 절대적인 힘과 하나님께 의지하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경외롭고 절대적인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너는 내게 크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에레미야서의 말씀처럼 저희 부부는 그렇게 했습니다. 저희는 스가야서 9장 12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처럼 하나님께 의탁하며 진정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Immediately, we began to see God working in our lives.
저희 부부의 삶에 곧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남을 보게 되었습니다.
There came such an outpouring of love from the extensive news coverage surrounding our children’s birth, and then later, my cancer diagnosis. It was so unbelievable to us that total strangers could be so generous. Along with this outpouring, we received information on alternative cancer treatments.
제 아이들이 처음 태어났을 때 각 언론사에서 저희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취재해서 보도를 했었는데, 그 뉴스가 나가고 나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나게 많은 분들의 사랑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제가 암으로 진단을 받게 되었었습니다. 전혀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보내주시는 것을 보고 저희 부부는 정말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전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격려와 성원의 메일속에서, 저희는 대체의학적인 암치료법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This was in the day well before the Internet and home computers so alternative cancer treatment information was not available with a few strokes of a keyboard. Some of this information was very questionable, BUT much of it seemed very legitimate. Rob started pouring through everything. One of the items we were sent was a videotape on a product called CanCell?? (now called Protocel??). Rob was really impressed with the tape. He felt that he kept being led back to it, so he finally shared the tape with my father.
그때는 지금처럼 가정에 인터넷이나 컴퓨터가 일상화되기 훨씬 전이라서 컴퓨터 자판기 몇자를 두드리면 대체의학적인 암치료방법을 금방 찾아낼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정보들은 매우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많은 정보들이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해 보였습니다. 곧바로 제 남편 롭은 모든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집으로 보내온 여러가지 대체의학 관련 자료중 하나가 바로 캔셀(지금의 프로토셀)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였습니다. 롭은 테이프의 내용을 보고 무척 고무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그 테이프의 내용에 계속해서 이끌리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테이프를 저희 아버지께 보여주었습니다.
When Rob told me about CanCell??, I was very skeptical. My first words to him were: "If there was a cure for cancer, don't you think they would be using it instead of letting 1,000s of people die." I was so worried that Rob would spend money we did not have on a possible cure, only to have me still die, leaving him in debt with 4 babies to raise and no wife. He, however, refused to discuss the fact I was dying. He did not consider that an option. He had so much faith that God was going to work another miracle in our lives, and that the CanCell?? would help bring about that miracle.
처음 롭이 캔셀(프로토셀)에 대해 제게 말했을 때, 저는 매우 회의적이었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한 첫마디는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만약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제품이 있다면 왜 그 제품을 쓰게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야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어가게 내버려두지요?”. 저는 남편이 저를 위해 제대로 치료하지도 못 할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는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봐야 저는 결국 죽게될 터이고, 남편은 저 때문에 진 빚에다 엄마없이 4쌍동이 아이들을 키우느라 엄청난 빚에 시달린텐데 매우 걱정이 됐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제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대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캔셀을 여러가지 방법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쯤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희 가족의 삶에 또다른 기적을 행사하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으며 캔셀이 바로 그런 기적을 낳는데 반드시 도움을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I finally came home from
1989년 11월 10일, 저는 마침내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와 제 아이들은 병원의 철저한 치료와 24시간 간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병원에 있는 수주일 동안 저의 몸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갔습니다. 저는 몇차례 심각하게 감염이 되었었는데 그중 한번은 패혈증으로 이어졌습니다. 급격한 체중감소, 혈전현상, 심각한 폐색전, 헤모글로빈수치 저하, 극단적으로 오르내리는 체온 등 제 몸의 상태는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급격히 악화되어 갔습니다.
I watched the videotape on CanCell?? on November 12, 1989, and started taking it that afternoon. We canceled my radiation therapy which was scheduled to start the following week. In many respects, it was very hard for me to make the decision to take CanCell??. I had no one to contact who had taken it. All we had was the word of a gentleman named, Edward Sopcak, who was making CanCell??. We knew nothing about him other than what we saw on the videotape and perceived through telephone communications.
1989년 11월 12일 드디어 저는 캔셀에 대한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오후부터 캔셀을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다음주부터 계획되어 있던 방사선치료를 취소했습니다.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해서 볼 때, 캔셀의 복용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저에게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캔셀을 복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에드 솝캑(캔셀의 개발자인 제임스 쉐리단을 도와서 캔셀이 성공적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애쓴 과학자)이라는 분이 말씀하신 내용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비디오테이프에서 본 내용과 전화통화에서 알게 된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I felt like I was the only person who had ever done something like this, and oh so, so alone. However, when we realistically looked at our situation, we came to the conclusion that we had nothing to lose by trying it, and everything to gain. No matter what I did medically, I was going to be dead in less than 6 months. So, if the CanCell?? did not work, I was no worse off.
저는 마치 저 혼자만이 외롭게 캔셀을 시도해 보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캔셀을 복용한다고 해서 우리가 더 이상 잃을 것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얻을게 더 많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떤 병원치료를 받더라도 저는 6개월이내에 죽게 될 것이었습니다. 설령, 캔셀이 제게 효과를 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저는 더 이상 나빠질게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We could see very early that CanCell?? was working. However, it was weeks before we noticed any change for the better in my condition. During this time, Rob was my strength. No matter what type of day he had, he had an unfailing belief that this was our answer. I, on the other hand, was a complete basket case for the first several weeks. I finally had to stop worrying about the "What ifs", and actually start living each day and only that day. I literally told myself each morning, "You made it through yesterday, you will make it through today". Then each night before I went to sleep, I told myself, "You made it through today, you will make it through tomorrow".
우리는 캔셀이 매우 빠르게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몸상태가 좋아지는 변화를 목격한 것은 캔셀을 복용한지 몇주가 지난 때였습니다. 그 기간동안 남편은 제 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제 몸의 상태가 어떠하든간에 남편은 캔셀이 저를 고쳐줄 수 있는 해답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저는 처음 몇주일 동안은 완전히 사지를 못쓰는 폐인이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안되면 어쩌지?’하는 걱정과 우려를 떨쳐버리고 하루하루를 그날에 충실하게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제자신에게 다짐했습니다. “그래 너는 어제 아주 충실하게 잘 살았어. 오늘 하루도 너는 아주 잘 할거야” 그리고,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전에 또 제자신에게 다짐의 말을 했습니다. “너는 오늘 아주 잘 했어. 내일도 역시 잘 할거야.”
I began to eliminate the cancer waste product about 18 hours after my first dose (see Commonly Asked Questions: Lysing). It literally poured out of me: I threw it up; my bowel movements were extremely loose, stringy and frequent throughout the day; I lost it in my urine; my nose ran so much I had to keep a tissue with me at all times; I sweated it out profusely; I had hot/cold flashes and night sweats. When the nurses would give me a sponge bath after a sweating spell, the water would be a golden brown color with what they referred to as "tapioca balls" floating in it.
처음 캔셀을 복용하고 나서 18시간만에 암덩어리가 녹아내린 찌꺼기같은 물질(계란 흰자위같이 약간 흰색의 기름진 물질)이 몸밖으로 빠져나오는 용해현상이 저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 몸밖으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입으로 토해내기도 했습니다. 설사를 심하게 하기도 하고, 변비가 있다가 하루종일 빈번하게 변을 보기도 했습니다. 소변을 통해서도 배출해 냈습니다(소변에 뿌연 거품이 낌). 코가 줄줄 흘러서 하루종일 티슈를 옆에 두고 닦아야만 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땀이 나왔습니다. 몸이 뜨거웠다 차가왔다하는 등 열감과 냉감이 있었습니다. 저녁에 잠을 자면 엄청난 땀이 났습니다. 땀을 많이 흘리고 난 후에, 간호사가 목욕을 시켜주고 나면 목욕물이 마치 타피오카 볼이 떠있는 것처럼 누런 황금갈색이었습니다.
My eyes had extra matting in the corners frequently throughout the day and often, I would wake up in the mornings or from a nap with crusted “junk”on my lashes. I even had some dizzy spells in the early weeks when I would roll over in bed. These were often associated with the vomiting spells. I was so exhausted the first three weeks I was on CanCell?? that it was literaly an effort for me to lift my head off my pillow. My body was working so hard to heal and was eliminating the cancer waste so rapidly. I think one of the reasons my body eliminated so quickly was due to the fact that I had basically not eaten for almost 2 months, and my body was really cleaned out from the prolonged fast.
하루종일 눈가에 자주 눈꼽이 끼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거나 낮잠에서 깨어나면 눈썹에 자주 딱지같은 것이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초기 몇주간은 침대에서 몸을 굴릴 때, 약간 현기증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종종 이런 현상은 구토증세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캔셀을 복용한 처음 3주간은 탈진할 정도로 너무나 지쳐서 베개에서 머리를 들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제 몸의 면역시스템은 치료를 하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작동을 했는데 암찌꺼기를 매우 빠른 속도로 제거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암찌꺼기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약2개월 동안 제가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튼 제 몸은 정말로 오랜동안의 금식으로 인해 굉장히 깨끗하게 청소가 된 상태였습니다.
I ended up back in the hospital in my hometown on the Saturday after Thanksgiving due to some of the other complications I had been experiencing prior to beginning CanCell??. My family doctor was very supportive and allowed my family in around the clock to administer the CanCell?? during this hospitalization. I was taking CanCell?? rectally and needed help to do so due to my lack of mobility.
추수감사절이 끝난 토요일 저는 다시 집근처의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캔셀을 복용하기 전에 있었던 합병증 때문이었습니다. 제 가정의는 저를 많이 도와주었는데 병원입원 기간중에 제 가족이 언제나 병원에 와서 제게 캔셀을 먹여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저는 항문을 통해 캔셀을 주입했는데 제가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Sunday was an extremely bad day for me. Actually, my Mom was afraid that I was slipping into a coma and woke me up about every 2 hours to make sure I was still with her. I do not remember much about that day, other than when I woke up I kept telling her that I was "Just so tired. Just so tired" and that I needed one minute without pain. She was fearful that I was giving up.
그 다음날인 일요일은 제게 정말로 끔찍할 정도로 안좋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혼수상태에 빠질까봐 너무 겁이나서 두시간 마다 저를 흔들어 깨워서는 제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확인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날 어떠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깨어나기만 하면 어머니께 “너무 지쳐, 너무 힘들어”라는 말만 되풀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제가 원했던 것은 정말로 단 일분만이라도 고통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이대로 죽는게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습니다.
However, by the end of the week, I was sitting up in bed. I was starting to eat a little and actually keep it down. The roller-coaster fevers I had been experiencing (103 to 105 degrees about every 2-3 hours) had started to go away as the blood clot problem was once again under control. By the end of the week, I also had started to feel different inside. There really was not any one thing that I could put my finger on to justify these feelings, other than I was just not as tired and I was starting to feel stronger. I came home again on December 3, 1989.
그러나, 그 다음 주말경에 저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고 실제로 진정되고 있었습니다. 혈병문제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자 두세시간 마다 103도에서 105도를 오르락 내리락 하던 열도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말에는 몸안에서 다른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느낌은 한두가지가 아니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는데, 그 전처럼 그렇게 피곤하지도 않았고 보다 힘이 생기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2월 3일 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By the end of December, there was a very noticeable difference in my condition. At this time, we were able to have a physical therapist come to the house to help me learn to stand again. By mid-January of 1990, I started physical therapy 3 times a week for 4 hours a day at a rehabilitation hospital in my hometown. The second day there, I took my first 3 steps since the first week of August of 1989.
12월말경, 제 몸상태에 아주 놀랄만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물리치료사를 집으로 불러서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물리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인 1990년 1월 중순경, 저는 집근처 재활병원에서 하루에 4시간씩 일주일에 3번 물리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이틀째 되는 날에 저는 1989년 8월 첫째주 이래 처음으로 3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By February of 1990, my condition had so radically changed that I went for CT-scans (with and without contrast) of my brain and entire spinal cord. Due to the extensive area which had to be scanned, my CT-scans were performed on two separate occasions and weeks apart. All the scans came back negative for any signs of cancer. My doctor said that the radiologist told him that he read and reread the scans as he could not believe there was nothing there to see. As far as he was concerned, it was amazing that I was still alive and even physically able to come in for the testing as I had done nothing “medically” to prevent the regrowth of my tumor since my original surgery in October of 1989.
1990년 2월말, 제 몸은 아주 급속도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뇌와 전체 척수에 대한 CT스캔검사를 실시했습니다. 검사범위가 매우 넓었기에, 검사는 2주에 걸쳐 두번에 나누어서 실시됐습니다. 스캔검사결과는 음성으로 어떤 암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방사선과 의사는 스캔결과를 판독하고 또 판독해 보았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암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제 주치의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아는 한, 제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검사를 받으러 직접 걸어 들어왔으니 말입니다. 왜냐하면, 1989년 10월 첫번째 수술을 한 이후로 제가 암종양의 성장을 막기 위해 어떤 치료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I have personally chosen not to return for any further testing. We felt that if we truly believed that God answered our prayers, and also trusted what Edward Sopcak told us about CanCell?? and James Sheridan’s (original inventor of Entelev??) theory/research to be true, then we needed to take that next step of faith and believe that I was, indeed, cured. I did not want to live my life in increments always waiting for a test and/or waiting for results.
그 이후로 저는 어떠한 정밀검사도 받지 않기로 결심하고 다시는 병원을 찾지 않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마찬가지로 에드 솝캑이 저희 부부에게 캔셀과 제임스 쉐리단(캔셀과 프로토셀의 제1세대 제품인 엔텔레브의 원 개발자) 의 이론과 연구에 대해 이야기해 준 내용도 진실임을 믿는다면, 바로 그 다음 단계로 제가 해야 할 일은 확신을 가지고 캔셀을 복용하는 것이고 반드시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제 평생을 검사와 결과를 반복하며 기다리는 삶으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I am not advocating here that others not seek medical testing. This is solely an individual's personal choice, and many find consolation in their good reports. This is just the decision that Rob and I felt was right for us and our situation.
제가 여기서 여러분들께 병원검사를 받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검사결과가 좋게 나오면 위안을 받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결정은 남편인 롭과 저의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믿었기에 내린 것이었습니다.
I stayed on the CanCell?? for 2 years and about 3 months as it was helping to repair my extensive nerve damage. During this time, I did a year and 9 months of physical therapy, and I progressed to the use of a quad cane. We had hoped that all my nerve damage would be completely repaired and that I would returned to 100% normal function, but, this was not the case.
저는 심각하게 손상되었던 신경치료에 도움이 되었기에 2년 3개월 동안 캔셀을 복용했습니다. 이 기간중에서 저는 1년 9개월 동안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저는 사각지팡이를 이용해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신경손상이 완벽히 복구되어 100% 정상기능을 회복할 수 있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I do have sensation from the waist down now. It is not what you would consider normal sensation, however, it has become normal for me after all these years. Unfortunately, due to severe damage to my knees, I was forced for a period of time to return to walking with a walker, but am now, thankfully, back to using a quad cane after some more physical therapy. I returned to work 2 days a week as a legal assistant when our children turned 3 years old and worked for 13 years in this capacity leaving this job in January of 2006.
저는 지금 허리 아래부분에 감각을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그런 정상적인 감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저에게는 그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불행하게도 무릎의 심각한 손상때문에 한동안 워커에 의지하여 지낸 적이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지금은 몇차례의 물리치료를 받은 후에 다시 사각지팡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이 세살이 된 해에 다시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을 시작했는데, 13년 동안 일을 계속하다가 2006년 1월부로 그만두었습니다.
I am now at home, doing of all thing, medical transcription for a pain speciality practice. I homeschooled our children from 1st through 8th grade. They then switched over to an online charter high school which they will be graduating from in early June of 2008. We live as normal a life as a family with multiple birth children can live. I have learned to live within my disability -- I am not always happy about it, but I am thrilled to be alive.
저는 지금 집에서 통증전문치료를 위한 보험처리 등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1학년때부터 8학년이 될 때까지 홈스쿨(자택학습)을 시켰습니다. 9학년부터는 온라인 고등학교에 등록시켰는데 2008년 6월이면 졸업을 하게 됩니다. 저희 가족은 여느 쌍동이가족들이 사는 것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장애를 가지고 사는 방법에 대해 배워왔습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살아있을 수 있음에 짜릿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I feel very strongly that having faith/belief in your choice of therapy, as well as having a strong will to survive and remaining as positive as possible during the course of healing, will aid in an individual’s recovery. Your mind is a very powerful healing tool. I, personally, had some very strong incentive to make my doctor's prediction of my death untrue.
저는 자기가 선택한 치료방법에 대해 확신을 하고 믿음을 가짐과 동시에 치료기간 동안 살아남겠다는 강한 의지와 가능한 한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병을 극복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지는 매우 강력한 치료도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죽을 것이라고 예측한 담당의사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기를 강하게 바랬습니다.
We thank God every day for the miracle of my healing and the gift of my life; for James Sheridan’s dream, his absolute drive to find a cure for cancer and his strength of charater to stand up and actively pursue that dream; and further for Edward Sopcak’s willingness to continue Jim’s dream at the time of my need.
저희 부부는 제게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시고 삶에 축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암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불굴의 의지와 강인함으로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루어낸 제임스 쉐리단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간절히 소망할 때에 제임스 쉐리단의 꿈을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전념했던 에드 솝캑에게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We will leave you with these final thoughts – LIFE is so very precious. None of us knows when we will take our last breath. All any of us ever has is each new day that we are given whether we are a brand new baby or an elderly individual or whereever we fall age wise anywhere inbetween on the timeline of life – just each new day that we wake up, and even then, we might not live to the end of that day. None of us is promised tomorrow. All we have is TODAY. We must learn to live TODAY – LIVE each day to the fullest as if it were your last. Just live TODAY!
이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내고자 합니다.
“삶이란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언제 마지막 숨을 거둘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갓 태어난 아기이거나 나이가 든 중년이거나 또는 삶의 시계축에서 어느 시점에 있던지간에 우리 모두가 공히 가지고 있는 것은 매일 매일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입니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새로이 시작되는 하루이지만 우리는 그 날의 끝을 못보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내일을 약속받고 있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오늘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매일 매일을 마치 여러분들의 마지막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사십시요. 여러분의 현재인 오늘을 값지게 사시기 바랍니다.”
Finally, it is our hope and prayer that you too will believe along with us that there is not only hope, but also an alternative for healing from this horrid disease called CANCER using Protocel?? and BELIEVE along with us in one man’s DREAM!
마지막으로, 여러분들도 저희부부처럼 프로토셀이 치명적인 질병인 암을 고칠 수 있는 희망이자 대안임을 분명하게 믿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저희 부부와 함께 한 사람(제임스 쉐리단)이 이루어낸 꿈을 믿어보십시요!
Thank you for allowing us the opportunity to share our miracles with you.
저희 부부의 기적같은 체험사례를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엘로나 & 롭
Elonna & Rob
[본 체험사례는 엘로나씨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려진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을 직접보시려면 사이트 www.elonnamckibben.com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이건 뭔가요? 판매를 목적으로 이렇게 올린게 아닌가요? 운영자님의 확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프로토셀이란 약물이 일종의 항암제인거 같은데... FDA승인을 받은 약물인지...건강식품인지 애매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