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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1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제1독서 : 1요한 5,14-21
복 음 : 요한 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작아지기(비움)의 여정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참 행복은 어디 있을까요? 오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작아지기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한 거기
그 자리가 영원한 생명의 참 행복의 자리입니다. 텅 빈 충만의 기쁨에 행복입니다.
어제는 겨울속의 봄처럼 포근한 날씨에 빈 나무 가지들 사이로 환히 드러난
하늘과 산이 참 투명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하여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늘길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찍어 전송했습니다.
아주 예전 겨울에 써놨던 시가 지금도 공감이 갑니다.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
나무마다 푸른 하늘 가득하고
가지마다 빛나는 별들 가득 달린 나무들인데
누가 겨울 나무들 가난하다 하는가”-1998.11.21
나뭇가지들 비움의 자리에 가득한 푸른 하늘입니다.
온갖 나뭇잎들 다 떠나보내고 빈 가지들의 본질로 남으니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의 행복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승들이 좋아하는 겨울산, 겨울나무들입니다.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비우면 비울수록 투명이 드러나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얼마 전 수녀원에서 강론이 없던 평일 미사 때의 참신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때로는 자기로 가득한 군더더기 긴 강론들이 주님을 가려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론이 없으니 미사가, 사제가, 말씀이, 즉 주님만이 투명이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참으로 미사 자체가, 사제의 삶 자체가, 침묵 자체가, 푸른 하늘을 환히 드러내는
텅 빈 겨울나무들처럼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참 좋은 강론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 좋은 삶이나 참 좋은 강론은 그 자체가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삶이요 강론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가 참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반응이 감동적입니다.
일체의 질투심이나 경쟁의식이 없습니다.
빈 겨울나무들을 통해 환히 드러난 푸른 하늘처럼,
텅 빈 무욕의 세례자 요한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님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이런 깨달음 역시 은총의 선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자기 비움의 겸손이 참 아름답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 갈수록 비움의 여정, 작아지기의 여정,
겸손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 복음의 백미입니다.
비단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구도여정중의 수행자들인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작아지기의 여정,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텅 빈 충만의 기쁨과 행복에 참 아름다운 삶입니다.
주님만이 환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작아지기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을까요?
답은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열렬히 항구히 충실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아름다우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자기 비움의, 작아지기의 여정입니다. 요한 사도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우상을 멀리 하십시오.”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들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우리들을 지켜 주시어 악마가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저절로 우상도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사랑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있기에
가능한 작아지기의 여정이자 비움의 겸손한 여정이요,
이런 여정을 통해 투명히, 환히 참으로 아름답게 드러나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영적 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겸손한 작아지기의, 비움의 아름다운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1.4).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00년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인간의 집중력에 대해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평균 인간이 집중력을 지속하는 시간을 12초라고 발표했습니다.
참고로 금붕어가 집중력을 지속하는 시간이 9초라고 합니다.
비록 3초의 차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집중력이 금붕어보다는 낫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의 다시 했던 실험을 통해 집중력 수치가 8초로 떨어진 것입니다.
금붕어보다도 못한 모습입니다.
대화하면서도 계속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서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어하는 모습,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인터넷에 들어가 그냥 시간을 소비하는 모습 등을 떠올리면
인간의 집중력이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인 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얼마나 집중을 하고 있나요? 기도할 때, 미사를 봉헌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 이렇게 다른 생각들이 주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집중에 방해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세상의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관한 생각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힘들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흥분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주었고 그리스도께서도 세례를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생겼고, 요한에게도 사람들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라고 보냅니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요한에게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점이 요한의 제자들이 화났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바로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것입니다.
요한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만,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예수님의 세력이
더 커지고 있다는 불만 등으로 스승인 요한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은 주님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고,
주님은 커지시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께 온전히 집중하고 있기에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집중하고 있습니까?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 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봅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즘 누가 종이 신문을 봅니까? 종이 신문을 본지 오래되어서요?’ 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신문을 만들고, 홍보하는 제게는 어깨가 처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맛있는 집이라면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가곤 합니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이웃에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시간도, 비용도 기꺼이 낼 용의가 있습니다.
종이 신문이 영적으로 맛이 있다면, 지치고 힘든 일상에 위로와 용기를 준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고, 비용을 지급할 것 같습니다.
신문을 정독하면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립니다. 1년에 150불이니 한 달이면 13불이 채 안 됩니다.
고맙게도 제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새 영세자에게 평화신문을 소개하고, 구독료를 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성탄 선물로 평화신문을 보내 주는 문도 있습니다.
대자와 대녀에게 평화신문을 선물로 보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평화신문의 가치를 알고 계십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이 주는 영적인 양식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소개됩니다.
주변에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듯이,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병든 이의 모습으로,
외로운 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오시고 계십니다.
많은 분이 온정의 손길로 그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의 교황님의 일정과 교회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의 친구가 되어야 함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깊이를 봅니다.
현대의 신학 동향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간단한 교리 상식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 수사님의 이야기에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다채로운 활동과 나눔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평화신문은 영적인 종합비타민입니다.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마리아, 엘리사벳, 요셉, 즈카리야, 목동, 동방박사, 시메온, 안나, 베로니카, 키레네 사람 시몬,
십자가상의 한 죄인, 세례자 요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겸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헤로데, 왕궁의 사람들, 율법학자,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빌라도, 군중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사람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서를 보면 죄의 현장들이 잘 나타납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일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바세바를 차지한 것은 욕망 때문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인 것은 분노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은 인색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 잠을 자던 제자들은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빨간 십자가가 도시를 가득 채워도, 화려한 교회의 건물이 우뚝 솟아도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능력과 그분의 지혜를 보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이 보여준 겸손함입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주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겸손함으로 죄의 뿌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참된 진리의 길로 가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만이 계실뿐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져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작아지면
모든 관계는
편안하고 평화롭습니다.
작아져야
우리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환상과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습니다.
작아지는 것이
참된 봉헌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여정은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삶 안에서
점점 커지시는 감사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며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봉헌은
우리 자아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작아지신
아기 예수님의 봉헌을 기억합시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립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에서 세례를 베푸셨다’(요한 3,22 참조)는 보고로 시작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4장 2절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베푼 것으로 소개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성격에 관한 논쟁을 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나중에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초대교회에서 행하게 되는 세례,
곧 성령을 통해 죄의 사함을 받고 새로운 신적 생명으로 탄생하는 삼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와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분”으로,
계시를 통해 오신 분이심을 밝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어서, 자신과 예수님을 동시에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과 ‘신부’는 성경적 표상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신부를 표상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내줍니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부인 교회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의 동반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5,15 참조),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리고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몸소 드러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분명 우리의 친구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신랑의 친구인 우리는 신부인 교회를 차지할 수는 없지만,
교회를 친구의 신부로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의 사랑도 받고 있음을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입니다.”(요한 3,29)
주님!
당신만이 저의 신랑입니다.
당신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듣게 하소서.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당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제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