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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BC 552~BC 479)
공자(孔子/BC 552~BC 479)
중국 고대의 사상가·유교의 개조(開祖).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邑:지금의 山東省曲阜의 남동) 출생.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생애]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상] 춘추 말기,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공자는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영향]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참고자료
▶ 공자시대의 중국
유왕이 죽은 뒤 태자 의구는 동쪽의 성주로 도망가 B.C.770년 즉위하여 평왕(平王)이 된다. 이후 주왕조는 성주에서 존속하다가 B.C.256년에 秦에게 멸망한다. 이 기간을 동주시대라고 부른다.
주왕실이 동쪽의 낙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왕조는 이전 서주시대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히려 실력을 가진 제후가 패권(覇權)을 다투는 시대가 된다. 따라서 실제로 동주시대의 종말은 주왕조의 멸망시기가 아니라 진이 천하를 통일하는 B.C.221년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 시대는 춘주·전국 시대라고도 한다. 그것은 이 시대 전반기 대부분의 역사가 『춘추(春秋)』라는 연대기에 , 후반기에 활약했던 외교가들의 언론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전국책(戰國策)』이라는 서적에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춘추(春秋)』는 원래 노나라의 연대기였던 것을 공자가 편집하여 개정한 것이라 하는데 그 내용은 B.C.722년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으로부터 B.C.479년 애공(哀公) 16년까지의 사 건을 기록하고 있다.
춘추와 전국의 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위·조의 3家가 晉을 삼분하여 사실상 독립했던 B.C.453년을 그 분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이 있다. 따라서 『춘추(春秋)』이후에 30년 정도를, 또한 그 이전의 50년 정도를 더하여 춘 추시대(B.C.770∼B.C.453)라 하고 B.C.452년 이후를 전국시대로 규명한다.
이렇게 춘추·전국시대의 두 시기를 구분해 보면 춘추시대에는 아직 명목적으로 주왕의 권 위가 온전하여 서주 이래의 예적(禮的)인 제도가 다소나마 시행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전 국시대에는 주왕이 완전히 권위를 잃고 이전의 예적 질서도 시행되지 않아 제후국이 서로 쟁탈을 반복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시대에는 일관된 역사의 흐름도 발견된다. 그것은 분열로부터 통일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춘추시대에는 초기에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70여개국이나 분립하고 있었으나 점차 제후국 상호간의 공방과 동맹을 통하여 패자에 통솔되면서 일종의 제후국연합을 이루 게 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약소국은 점차 대국에 병합되어 주권이 없는 지방도시로 전락하고 이에 따라 대국의 규모는 보다 확대되어 전국시대에는 진·초·제·연·한·위·조의 7대국으로 병합된다. 이리하여 진·한 제국에 선행하는 소제국의 대립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추이의 배후에는 지배집단 내부의 변질과 군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료제의 성립 이라는 요인이 작용했으며 특히 농업생산의 발전에 따른 농촌사회의 변화, 화폐경제의 발달, 상업의 성행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들은 춘추·전국 시대를 통하여 일 관되게 전개·발달되었던 것이다
▶ 생애
공자는 이름이 丘요, 字는 仲尼이니, 그 先代는 宋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叔梁紇이요, 어머니는 顔氏이니, 노나라 양왕 22년(B.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공자를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하였다.
공자는 아이가 되어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를 진설하며 예를 행하는 용모를 베풀었었다. 장성하여 季吏(창 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을 平하게 하시고, 司職吏(축산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
昭公 25년(B.C 517) 갑신은 공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 라로 가시어 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景公에 통하였다. 경공이 尼谿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晏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 공자는 어떤 사람일까?
{論語}를 주된 연구의 근거로 삼지 않을 수 없는데, {論語}를 보면 공자가 호감가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공자의 적대자들이 가한 공격에도 이 인상과 상충되는 내용은 없다. {論語}에 의하면 [공자는 閉居 할 때면 격의없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으며], 또 [온화하지만 당호하였고 , 위엄이 있었지만 사납지 않았으며, 공손하였으나 편안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아첨하지 않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할 경우에는 경의를 표하였 으며, 그 대신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존경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일정한 위치가 있었 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는 물론 미천한 사람들에게조차 고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공자가 항상 수많은 친구들로 떠들썩하게 둘러싸여 있는 型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는 변함없는 친구가 많았지만 크게 인기를 모으는 型은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생각이 깊었고 솔직하였으며 [원망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것을 숨긴 채 친하게 지내는 것을 ......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대개의 경우 그는 면전에세 사람을 비판하고 뒤에서는 칭찬하는 원칙을 따른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존경은 받지만 인기는 끌지 못하는 법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다소 과묵한 편이었다. 이 태도는 자기 아들에게도 적요 된 것 같은데, 그는 자기 아들의 능력에 실망하였음을 솔직이 인정하였다. 그는 예의가 발랐으나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위신을 손상하는 짓으로 생각하였다. 군주나 권세 있 는 세습귀족들과 말할 때도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몹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런 식의 처세가 실제 현명한 것이었느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공자의 교훈인 엄격한 성실성과는 일치한다.
그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을 혐오하였다. {논어}만 보아도 공자가 多辯家가 아니라는 것 을 알 수 있지만 맹자도 [나는 話術에는 재능이 없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공자의 말에는 때때로 감동적이고도 고상한 것은 있지만, 장황하거나 화려한 것은 거의 없다.
다른 면에서도 그는 겉으로만 꾸미는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하였는데, 이것은 세상에 너무 닦인 사람보다는 소박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이다.
공자는 육체적인 안락과 부는 진정한 군자가 추구할 목표가 아니라고 믿었다. [선생께서는 만약 부 가 정당한 추구의 목표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으며, 채찍 을 잡는 마부라도 되겠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겠 다.] 이것으로 공자가 금욕주의자였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진 정한 금욕주의자는 보통 쾌락 자체를 죄악시하고 고통을 선으로 생각하기조차 하는데 공자에게는 이러한 요 소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으로서의 유교는 절제 있는 육체적 쾌락을 반대한 적이 없으며, 공자 자신도 덕과 성실에 배치되지 않는 한 쾌락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쾌락의 원천으로 서 학문을 찬양하였으므로, 순전히 향락을 목적으로 공자가 음악을 즐긴 것은 예외적인 것이다. 쾌락이 바람직한 것일 뿐 아니라 인생의 필요한 일부라는 심원한 심리학적인 진리를 인식한 점에서 유교 는 고대 중국의 주요 철학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문명의 전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극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확신은 너무나 진지하였기 때문에 부당한 비판에도 성내지 않고 미소로써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전지전능한 척하지 않았으며 어는 학자에게도 불가결한 [나는 모른다]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지식을 얻었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무식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제자들이 그와 의견을 달리하였을지라도 그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았으며, 그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치 않았다. 자신이 거창한 사명을 띠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 은 평판보다 공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공자는 항상 주장하였지만, 때로는 친한 제자들에게 자기를 이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한탄할 정도로는 세상의 평판에 관심을 가졌다.
또 그는 인정도 많고 생각도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공자는 맹인을 접대하였을 때, 그 눈먼 손님에게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소개하였으며 그 손님이 호기심은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을 모두 알려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인정이 많아 자기 재산보다는 사람의 안전에 더 관심을 가졌다. [마굿간 이 불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온 공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는가고 물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으 며] 들어세 사냥을 할 때도 [낚시는 하였지만 그물은 사용하지 않았고, 주살을 던졌으나 앉은 새는 쏘지 않 았다.] 이 비범한 인물에 대해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학감각을 가진 열정하였다는 점 일 것이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자주 농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이는 일이 잦았음에는 틀림없다.
그의 이야기 중에는 금방 이해되지 않는 해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 많다. 그 해학 때문에 경건한 주석가들이 난처한 순간에 빠진 일이 많았는데, 주석가 중에는 농담을 하는 것은 성 인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철저하게 확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크게 빈정거리는 어투로 공자를 이렇게 평한 일이 있었다. 즉 [과연 위대하구나, 공자는! 박 학도 하구나! 그러나 어느 분야에서도 명성을 얻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자기가 교사로 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즉시 이 것을 엄숙한 비판으로 인정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무슨 일을 해볼까? 마차를 몰아볼까? 활 을 쏘아볼까? 좋다! 마차를 몰자.]
공자는 자제력은 대단하였지만 초인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감정이란 자제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총애 하는 제자 顔回가 죽었을 때는 슬픔을 억제하지 않았다. 다른 제자가 공자에게 [선생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과연 그랬던가?]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을 지나치게 슬 퍼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그렇게 할 것인가?
▶ 인(仁)사상
禮를 수호화기 위해 공자는 도덕윤리의 측면에서 "仁"의 학설을 제시했다. "仁"이라는 어휘 자체는 공자 이전부터 이미 일상적으로 사용되어왔지만 철학범주로서 제기된 것은 공자에 의해서였다. 공자가 내놓은 "仁"은 이후 중국 철학사에서 중요 범주의 하나가 되었다. 『논어』에서 "仁"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가 안연의 물음 에 답한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禮"와 "仁"의 관계를 개괄하고 공자의 "仁"학설의 기본 내용을 설명해준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 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克己"란 자기 억제이며 "復禮"는 "禮"에 부합되지 않은 언행을 "禮"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克己復禮"를 이룬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어진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안연은 한걸음 더 나아가 "克己復禮"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仁"의 원칙에 부합되는 사람이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禮"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여기에서 말하는 "禮"란 주례이며 동시에 서주 노예제 사회의 등급제도인 것이다. 이로써 공자가 제시한 "仁"이란 일종의 도덕원리를 이용하여 "君子"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 하는 모든 것을 자제케 하고 이들이 주례의 등급규정을 철저히 지키고 예를 범하는 행위를 방지 하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당시 통치계급 내부의 귀족 사이에서 주례가 훼손당하고 위를 범하는 혼란과 자기가 섬기 던 임금이나 부모를 죽이는 등의 "無道"한 행위가 예사로이 발생하는 데 대해 유심주의적 관점에 서 그 원인을 살펴, 이를 귀족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보았다. 이리하여 공자는 "仁"을 또한 귀족 사이의 상호관계를 처리하는 도덕원칙으로 삼아 "仁"이란 곧 "사람을 사람함"이라고 강조하였다. 공자는 귀족들에게 자제와 상호협조를 통해 피차간의 모순을 조화시 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자기 억제와 상호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공자는 "仁"을 실행하는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무릇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려고 하 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해준다." 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 게 하지 말라"고도 하였다. 이 두 구절의 의미는 자기가 이루고자 원한다면 다른 사람도 이룰 수 있게 해야 하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증삼은 "忠恕" 두 글자로써 "仁"의 이 두 원리를 개괄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본래의 생각과 부합된다. 충서의 도는 공자가 주장한 仁學說의 중심사상을 꿰뚫는 것이다.
공자의 '충서의 도'는 역사적으로 착취계급과 그 대표자들에 의해 계급모순을 은폐하고 인민의 투 쟁정신을 마비시키는 부식제로 이용되어왔다. 이들은 온 힘을 다하여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소위 "용서의 도"를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최고의 미덕"으로 선전하였고 나아가 초계급적인 "인류애" 또는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안다"는 식의 "위대한 덕성"을 고취하 는 한편, 이러한 도덕관념을 노동인민에게 적극적으로 부식시켜왔다. 이처럼 저의가 담긴 왜곡된 선전 아래 공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과 남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도덕유형을 만들 려고 한 것 같다. 사실상 공자의 "남"이란 다른 귀족을 말하는 것이지 노동자나 노예까지 포함하 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다음에서와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이는 있 을지라도 소인이면서 어진 사람이란 없다" 또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사람을 부리려 든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공자에게 仁愛의 추구란 통치계급의 일 로서 통치대상인 노동자를 어떻게 지배, 복속시키느냐의 문제일 뿐 무엇이 인애이며 도덕인가를 밝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忠恕란 노예소유주인 귀족들 사이의 忠恕이지 노예소유주와 노예 사이의 忠恕는 결코 아니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착취제도와 착 취자만 옹호하는 것일 뿐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공자로서는 그때까지 다음과 같은 생각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곧 그 자신이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더러 노예가 되도록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 자신이 착취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착취를 받아들이도록 하지도 않 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적대계급 사이에는 "忠恕"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피압박 노동인민으로서 말한다면, 소위 "忠恕"란 철두철미한 기만인 것이다.
공자에게 "復禮"란 "仁"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忠恕의 道"를 실행한다는 것은 반드시 주례에 서 규정한 준칙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자기가 바라는 것"이거나 "바라지 않는 것"이나를 막론하 고 주례라는 원칙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소위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귀족들에게 주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것을 유구한 것으로 자신의 이익 을 고려할 때는 동시에 다른 귀족의 이익도 살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의 목적은 모순을 조화시키고 주례의 구질서를 개선, 유지하는 데 있을 뿐이다. 공자는 당시 두 가지 종류의 소유제에 대한 모순을 반영하는 통치계급 사이의 투쟁을 모두 노예소유주 귀족들 사이의 군신 내 부의 모순으로 보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禮"에 의한 제재, 사상적으로는 "仁"의 고취로써 이와 같은 모순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공자가 제창한 "충서의 도"의 역사적 내용이자 계 급적 정체이다. 공자는 결코 모든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착취계급 전부를 사랑한 것도 아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오직 착취계급 가운데 일부분인 노예소유주 귀족에 지나지 않았 다.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의 입장에 서서 "자기가 서려고 하면 남을 서게 해주고 자기가 이루 려고 하면 남이 이루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허풍을 칠 수는 있어도 내가 참월을 생각한다면 남 의 참월도 지지해주고 내가 반란을 꾀한다면 남의 반란에도 공감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이다. 이러한 충서의 도는 공자에게는 결코 허락될 수 없다. 일정 계급적 도덕이론은 이 계급의 정치제도에 기여하는 것으로, 공자의 "인"도 "예"에 종속되는 것이다.
공자는 "인"을 "復禮"를 추진하는 일종의 도덕적 동력이자 사상적 근거로 보는 한편, "인"의 실행 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인이 어찌 멀리 있으랴? 내가 인을 바란다면 그 인 은 이미 와 있다."라고 공자는 말한다. 자신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행 하려고만 한다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양심이나 자아의식의 산물롤 보 는 것이다. 이러한 유심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공자는 주관적인 도덕동기와 소위 "내성적"인 자아수양의 역할을 크게 내세웠다. 그는 "인의 실천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어찌 남에게 서 비롯되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인"의 실천이 바깥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자각과 주관에 따른 노력에 의거할 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들이 오직 "인"을 실행하고 자각적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주례의 규정을 준수할 수 있으면 "인"의 원칙 이 실현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례 또한 옹호되고 회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노예제 사회가 해체되어 봉건적 소유제 사회로 나아가돈 역사적 변혁기에 위치하는 공자의 인에 대한 학설은 한 역사시대의 복잡한 사회모순, 특히 통치계급 상층에서 발생한 모순으로서 분화와 투쟁을 반영한다. 공자가 중국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통치계급의 내부관계를 조정하는 원칙으로서 하나의 도덕범주인 "인"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통치계급 내부에 새로운 위기가 출현했음을 나타내 는 것으로 불가결한 새로운 조치였다. 그러나 공자는 노예제 사회의 종법제도를 옹호하는 반동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도덕학설도 위선과 기만적 성질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 같은 본질이 일체의 반동계급의 수요를 충족시켰으며 이로써 그는 중국 역대의 반동통치자나 모 든 착취제도의 옹호자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인"의 학설은 역대 봉건지주계급 사상가에 의해 지지, 보완되어 "三綱五常"과 "忠孝節義"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봉건 예교사상으로 발전하여 봉건통치를 옹호하는 냉혹한 사상적 압박도구가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 역사상 공자 때까지 "仁 慈"의 의미밖에 없었던 "인"이 봉건지주계급의 독재를 위한 마취제이자 항상 노동인민의 신체를 얽어매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었던 것이다.
▶ 교육가로서 공자
일개 私人의 자격으로 공자는 자질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로 받았으며, 종래의 정치와는 다르지만 공자의 생각으로는 훨씬 더 좋은 정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목적은 실제적인 것이었으나, 좁은 의미에서의 실제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교육의 목적은 善政을 구현하는 것이었지만, 그 교육의 결과 모두가 유능한 행정가가 되어야 하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것을 훨씬 넘어서서,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든 관점에서 가능한 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며, 특정한 기술만 가진 단순한 전문가가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공자는 지혜가 있고 탐욕스럽지 않으며 용감하고 교양도 있을 뿐 아니라 禮樂에도 정통한 사람을 이상적 인 인간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공자가 제자들에게 제시한 모범이었음에 틀림없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요구하였던 덕성 중, 예컨데 용기나 성실 같은 정치적 성공에 필수적인 요건은 아니었 다. 그러나 공자가 목표로 삼은 것은 입신출세가 아니라 훌륭한 정치였고,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실과 衡平의 덕을 갖춘 사람들이 정치를 운영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공자의 신 념이었다.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물론 제자들을 군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누구를 대상으로 이 작업을 하려고 하였는가?
너무나 가난하여 마른 고기 한죽밖에 예물로 가져오지 못한 사람조차 가르치는 것을 거절한 일이 없다고 공자 자신은 공언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며, 또 미천한 사람에 대한 그러한 친절이 계속 유교에 남아 있었던 사실을 시 사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맹자}에 실려있다. 즉 맹자는 대단히 호사스러운 여행을 하였는데, 그가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궁궐의 관리인이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자 그의 제자가 그것을 훔쳤다고 비난해 와 그는 크게 화를 내었다. 그러나 그 관리인은 맹자가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심사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을 주지의 사실이며 자기가 혐의를 두는 것도 당연하다고 지적함으로써 그 혐의가 옳다고 주장하였다.
가난하다거나 출생이 미천한 것은 공자에게 배우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으며, 방해되는 조건은 따로 있었다. 공 자는 멍청이를 가르치는 것은 거절한다고 스스로 말했고, 또 지적인 개발에 [정열을 불태우는 사람만]을 가 르치겠다고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단지 부와 지위를 얻으려는 목적뿐인 학생들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 한 것 같으며, 보다 고상한 일에 관심을 가진 체하지만 초라한 옷과 거친 음식을 수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더불어 말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내쫓았다.
그러나 그는 [3년 동안 물질적인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공부만 하려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집이 먼 제자들은 공자의 집에서 함께 숙식하였던 것 같다.
그의 교육방법은 완전히 형식을 떠난 것처럼 보이며, 수업시간이나 일정한 시험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대신 공자는 한 명, 또는 동시에 몇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때때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책은 그들이 스스로 학습하도록 했지만 공자가 학습해야 할 것을 지시해 주고 특별한 대목은 함께 토의하였던 것 같다. 이것은 공자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단지 학자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군자를 양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주제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방 법은 극히 개인적이었으며, 제자마다 다른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가르치는 방법도 제자마다 달랐다.
따라서 각 학생의 인물됨을 관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훌륭한 교사가 모두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공자도 주의깊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을 관찰하였다. 그 방법 중에는 현대의 정신요법을 상기시키는 것도 있는 데, 그것은 학생들의 마음을 편안케 한 후 그들의 소망을 기탄없이 자유롭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중간에 말을 끊거나 논평을 하여도 속으로만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동안 그는 자 기가 받은 인상을 종합하여 그들의 장점을 어떻게 살리고 약점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였다.
일단 개개인에 대한 분석을 완료하면 공자는 그에 따라 교육내용을 조정하였다. 때때로 그는 동일한 질문에 대 해서도 제자에 따라 다른 대답을 하였다. 공자가 격식을 차리지 않은 것은 교육방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공자가 죽은 지 오래지 않아 중국 의 교사들은 대단히 권위를 내세웠고 자기들이 말하는 것을 제자들이 무조건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후세의 교사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아무 격식도 없이 편안한 자세로 제자를 대하였고 엄격한 규율 도 내세우지 않았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으며, 後術하는 것처럼 그의 정치 및 지식철학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잘못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선행이 권장이었고, 강제가 아닌 설 득이었으며 시종일관 부정적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자기에게 찾아온 모든 사람들을 [군자]로 만들기 위해 어떤 교육과정을 채택하였는가? 그것은 현 대의 어떤 교육과정도 달랐지만, 동시에 당시 귀족 청년들이 보통 받는 교육과도 달랐는데, 가장 큰 차이점 은 射術과 御術을 제외시킨 것이다. 공자 자신도 활을 쏜 적이 있었고, 공자의 제자 중에도 사술과 어술에 모두 숙달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군자]에게는 그것이 필요없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귀족의 전통적인 기예 중 공자의 목적에 꼭 적합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그것을 계승하 여 그 특유의 강조점을 덧붙여 유가의 표지가 될 정도로 크게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禮]라는 것이다.
[禮]에는 제의를 행하는 형식도 포함되어 있지만, [내부의 정신적 仁心이 밖으로 표현되었을 때]만 비로 소 그 가치가 있으며, 진정으로 仁心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禮]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공자는 [마 음속으로는 전혀 경외심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형식만 갖추는 예를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말했으 며, 죽은 사람을 위한 喪禮에도 모든 격식을 세세하게 지키는 것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 보다 중 요하다고 선언하였다. 단순한 외형적인 과시를 공자는 혐오하였다.
공자는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논어}에는 공자가 {시경}의 편찬과 정리에 관계하였음을 시사 하는 귀절이 있는데 고대에는 시에 음악의 반주가 붙어 있었다. 그는 류트와 비슷한 현악기인 瑟을 탔고 노 래도 즐겨 불렀다. 공자가 직접 음악을 가르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 명의 제자가 瑟을 탔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 은 확실하지만 다른 선생에게 더 깊이 배우기를 기대하였는지도 모른다. 공자는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인격 도야의 마지막 장식으로서 음악과 [禮]에 정통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고, 또 한번은 학생들의 성품은 [시 를 배움으로써 자극되고, 예를 배움으로써 확고해지며, 음악을 배움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확 실히 공자는 단순한 지성뿐 아니라 감정과 정신의 교사로서 [禮]와 음악을 결합시켰다.
▶ 개혁가로서 공자
공자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깊은 번뇌에 빠졌고,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또 주위의 가치관과 맞지 않았던 그의 理想의 근원이나 세상을 개조하려는 수단으로 내세웠던 그 사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공자는 단순히 古道의 부활만을 추구하였고 사람들에게 유덕한 [先王]의 道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을 뿐 이라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공자가 고도를 자신의 사상적 근원으로 시사한 적도 두 번 있었고, 과거와 비교하여 현재를 자주 비난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을 조 롱한 공자의 발언은, 단지 자기에게 개혁을 수행할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비난한 일면이 있다 는 점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인간의 제도가 변화, 발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적절하고 상식에도 맞는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개변시키거나 그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졌다. 이러한 공자의 태도는 漢代에 가서야 비로소 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공자는 [周는 앞선 두 왕조의 경험을 살필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주의 문화는 정말 찬란하구나. 나는 주의 전통을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전통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방향을 추천한 예 는 거의 없었다.
그는 정치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열한 번이나 받았지만, 전통적인 관행의 관 점에서 대답한 것은 단 한 번 뿐인데, 그때 그는 [夏代의 曆과 殷代의 輅, 周代의 冕을 사용하라]고 말하였 다.
여기서도 그는 단순히 옛것만을 따르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각 시대에서 따를 수 있는 관행만을 선택하 라고 말한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공자의 敎說은 기원전 22세기경 중국을 통치하였다고 하는 上古의 제왕 堯.舜.禹로부터 전 수된 것이라고 한다. 그후 이 말은 전통적인 견해가 되어, 공자는 이 上古帝王들의 [황금시대]를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論語}에는 이것을 뒷바침해 주는 자료가 전혀 없다. 공자가 이 상고의 제왕들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맹자나 후세의 학자들과는 달리 완벽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그들을 모방하기만 하면 된다는 따위의 제안을 결코 한 일이 없으며, 사실 {논어}보다 약간 뒤늦게 나온 저술과 비교해 보면 {논어}에는 상고제왕이 언급된 일이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살았던 세상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현저하게 결여된 것을 갖춘 국가, 즉 모 든 백성이 평화와 안전 및 풍요를 향유할 수 있는 국가를 그가 최선의 국가로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평화를 언급했지만, 공자가 평화론자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분명히 그는 평화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불필요한 전쟁은 그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전쟁은 살육전이었을 뿐 아니라 일반 적인 무법상태의 일부였기 때문에 만약 공자가 주장한 정치적 개혁이 성공만 한다면 전쟁은 자동적으로 소 멸될 것이다.
자공이 정치에 관해서 묻자 선생께서는 훌륭한 정부란 충분한 식량과 무기를 갖추어야 하며 백성의 신뢰 를받아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만약 부득이 三者 중 하나를 빼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빼야 합니까?] [식 량을 빼라. 옛부터 사람은 주기 마련이지만, 백성이 신뢰하지 않는 정부는 지탱하지 못한다.] 이것은 정부 자체의 존립을 위해 백성을 굶겨죽여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의미라면 공자답지도 않 은 말이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백성들이 너무나 어리석어 군주의 眞意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군주가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구실로 무자비하게 백성을 몰아내고 착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말이 국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다 같이 그 목적에 대한 이해를 함께 하고 그 이익을 함께 향유하는 협동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고대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민주정치의 가능성을 꿈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 점은 공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성들은 한번도 권력을 장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죄악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공자는 시종일관 백성들의 편을 들었고 모든 불의으 책임을 백성 을 착취하는 세습귀족에게 물었다. 그는 군주가 선량하고 유능하기만 하다면, 준엄한 처벌 없이도 백성들은 할 바를 다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가 정치문제에 다소 큰 영향력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정치이론가도 많 지만, 공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고대 중국에는 상업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주된 축재의 방법은 지배자가 되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었고, 큰 부자를 압제자로 생각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 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군주가 자신의 직분만 다한다면, 사치가 아닌 한 신분에 상응하는 생활을 누릴 자격 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군주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면 아무도 그 정도를 아까와할 사람이 없겠지만, 그 렇지 않다면 군주는 거머리에 불과할 뿐이다. [선생께서는 국가가 道에 의해 통치된다면, 빈천한 것이 부끄 러운 일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부귀를 누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공자시대에는 분명히 그의 주장에 아무도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자가 개혁가로서 상당한 능 력을 갖고 있었음을 잘 말해 준다.
맹자와는 달리 공자는 결코 폭군을 죽여야 한다거나 제왕과 농민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직선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전체적인 운동은 시작도 되 기 전에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1세기 후 맹자가 아무 탈 없 이 직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방침에서 나온 것 같은데, 부패한 정부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기회가 오면 용감하게 행동할 용의를 갖고 있어야 하지만 말을 할 때는 다소 신중해 야 한다는 견해를 공자는 표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항상 조심만 한 것은 아니었으며, 인간이 그 자체로 위대할 뿐 아니라, 모두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숨기려고 한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언젠가 제자 자로를 [떨어진 삼베조각으로 기운 옷을 부 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맹자에 의하면, 공자는 자기가 옳지 않은 경우에는 가장 미천한 사람과 다투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으나, [자신을 돌이켜보아도 옳다고 느끼면 수천, 수만명이 앞을 가 로막고 있어도 밀고 나가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의미에세 그는 군주의 명령보다 일개 대신의 양심 이 더 권위가 있다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간상호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도덕으로 보았다. 도덕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거의 없을지라도, 누구나 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있으며,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가문이나 재산 또는 지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자신의 행동 즉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 공자(孔子, 이름은 丘, B,C 551-479)의 윤리 사상
가. 공자 사상의 출현 배경
(1) 春秋(춘추) 시대
(가) 周(주) 후기, 기존의 제도들이 무너져 혼란해진 시기
(나) 사회 지배층의 전횡 극심, 제후국 간 이익 추구를 위한 전쟁으로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개개인의 도덕성이 상실
(2) 사회 혼란의 근본적 원인 - 도덕적 타락
(3) 타락한 도덕성의 회복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이를 회복 하기 위해 공자는 仁(인)을 강조
나. 공자의 仁의 의미
(1) 인간이 본래 타고난 내면적 도덕성
(2) 인간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사랑의 정신
(3) 사회적 존재로 완성된 인격체의 인간다움
(4) 仁은 맹목적,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선행을 좋아하고 악 을 미워하는 사람이 행하는 참된 사랑임.
(5) 仁을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 도덕 -孝(효)와 悌(제) : 부모를 잘 섬기는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
(6) 仁의 실천
(가) 효제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함(愛人)
(나) 내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베품(推己及人)
(다) 성실과 신뢰를 위주로 생활함(主忠信)
다. 공자의 예(禮)
(1) 仁은 내면적 도덕성, 禮는 외면적 사회 규범 - 인과 예는 表裏(표리)의 관계
(2) 극기복례(克己復禮)
(가) 공자는 당시의 예의 형식화와 개인의 사욕을 극복하고 진정한 예를 회복 하고자 함
(나) 진정한 예는 인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스스로의 자율 적인 의지에서 나오는 것
(3) 君子(군자) - 仁을 바탕으로 예를 실천하는 사람 - 小人(소인)은 군자와 반대로 사욕만을 탐하는 사람
라. 공자의 정치, 사회 사상
(1) 正名(정명) - 사회 성원 모두가 각자의 신분과 지위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하는 것을 이름
(2) 덕치(德治) - 강제된 법률과 형벌보다는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교화하는 정치 사상
(3) 수기이안인(修己以安人)
(가) 德治를 위해서는 통치자가 우선 군자다운 인격을 수양 하고서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
(나) 통치자는 安人을 위해 재화의 적음보다는 재화의 균등한 분배를 염려하여 백성의 경제 생활을 배려하여 야 함.
(4) 大同(대동)사상 - 궁극적 이상 사회인 대동의 사회를 지향 하는 사상
▶ 참고 자료
1. 仁
유학의 도덕 범주 가운데 하나. 유교 윤리에 있어 최고 덕목으로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설문해자(設文解字) 단옥재의 주에서는 "사람이 둘 이상 모여 친하게 지낸다는 뜻에서 인(人)자와 이(二)자를 합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본래 인이란 人자의 겸용(兼用)에 의해 표시된 것으로 '인간적인', '인정이 많은', '친절한' 등의 뜻을 가지고 쓰였다. 이러한 예를 찾아보면 맹자의 "인은 인심이다.(仁 人心也)",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의 발단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라든지, 중용에 "인이란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仁者人也 親親爲大)." 등을 들 수 있다.
춘추 시대에는 인의 어의가 넓어져 '인품이 좋다', '인격이 높다'라고 하는 전인 격적 의미로 되었으며 이것이 공자에게서 중시되어 군자 교육에 있어 최고의 덕목으로 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공자가 말한 인은 '공손함, 관대함, 신실함, 민첩함, 자애로움, 지혜로움, 용기, 충서(忠恕), 효성심, 공경함,' 등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논어에 보이는 인 에 관련된 언급을 찾아 보면
* 공자 말씀 하시기를, "제자는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공경 해야 한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悌[논어]<學而>)
* 유자 말하기를, "부모를 잘 섬기고, 웃어른께 공손한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진저."(.... 有子曰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논어]<학이>)
* 공자 말씀하시기를, "공교한 말이나 좋은 낯을 꾸미는 자는 인이 적으니라,"(...子曰 巧言令色 鮮矣仁[논어]<학이>)
* 번지가 인에 대해 묻자 공자 말씀 하시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에 대해 묻자 공자 말씀 하시기를,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셨다.(...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논어]<顔淵>)
* 중궁이 인을 묻자 공자 말씀 하시기를, "사회에 나아가 사람을 사귈 때에는 큰 손님을 만난 듯 경건히 하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 모시듯 신중히 하며, 내가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안연>)
* 공자 말씀 하시기를, "강직하고, 의연하며, 순박하고, 말이 무거운 자는 인에 가까우니라."(...子曰 剛毅木衲 近矣仁 [논어]<子路>)
* 공자 말씀하시기를, "오직 어진 자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 할 수 있다."(...子曰 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논어]<里仁>)
* 공자 말씀하시기를, "인을 행해야 할 사명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치 말지니라."(...子曰 當仁不讓於師 [논어]<衛靈公>)
* 공자 말씀하시기를, "지사와 인인은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하는 일이 없다."(子曰 志士 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논어]<위령공>)
2. 극기복례(克己復禮)
仁의 체현을 위해 공자가 제시한 구체적 실천 방법, [논어]'안연편'에서 안연이 인을 물었을 때, 공자가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구하는 방법이다.'라고 대답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克'이란 극복한다는 뜻이고, '己'는 생물학적 자아를 뜻하며, '禮'는 천리에 의해 규정된 인간 행동의 고유한 질서를 의미한다. 인간은 형기(形氣)와 감관(感官)을 가지고 있고 감관은 각각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누구나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인간은 생물학적 자아를 극복하여 자기의 생활을 예에 부합 시키려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에 의해 인간은 생물학적 자아의 욕구를 통제하고 도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극기복례의 구체적 방법은 시청언동(視聽言動)을 예에 의해 훈련시키는 것이다. 곧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것이다. 이러한 극기복례의 본질적 의미는 인간의 합리적 행동 질서와 인간의 자연적이고 무절제한 욕망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욕망의 절제를 통해 합리적 행동 질서를 확보하려는 측면에서 공자에 의해 제시된 하나의 수양법이라 하겠다
克己 : 이길(극)자기(기)
자기를 이기다. 사사로운 욕망을 정신력으로 눌러 충격 욕망 감정 따위의 과도한 발동을 억제한다는 뜻 이다.
孔子(공자)가 말한 『과도한 욕망을 누르고 예절을 좇도록 한다(克己復禮극기복례)』에서 나온 말이다.
「논어」의 「顔淵篇(안연편)」을 보면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어느 날 공자의 수제자인 안연이 仁(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를 극복하여 禮(예)를 행함이 仁이다. 단 하루 스스로 이겨서 예를 행하면 천하가 仁으로 돌아올 것이다. 인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남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克己復禮爲人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人由己 而由人乎哉극기복례위인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위인유기 이유인호재)』
안연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극기복례할 수 있는 細目(세목)으로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공자의 대답은 이랬다.
『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
이런 가르침을 받고 안연은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오나 반드시 이 말씀을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자의 중심사상은 仁이고 인과 禮의 관계를 가르친 대목인데 논어 가운데서도 白眉(백미)의 하나로 꼽힌다. 克己는 도덕생활의 기본이다. 私慾(사욕) 私心(사심)에서 벗어나 이를 이기는게 극기다. 禮는 사욕과 사심을 억제하는 규율이며 극기가 있어야 예의 실천이 가능하다는 공자의 가르침은 지금도 백번 옳다.
극기복례( 克己復禮 ).
[ 자기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쫓음. ]
안연(顔淵)이 어느 날 공자(孔子)에게 인(仁)에 관하여 물었는데,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오는 것이 인(仁)이다. 만일 사람이 하루라도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온다면 그 영향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인(仁)으로 돌아 올 것이다. 그런데, 이 인(仁)은 제 힘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 남의 힘을 기다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을 실천하는 조목은 무엇입니까?"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안회가 어리석고 불민합니다만 이 말씀을 실천하도록 평생 힘쓰겠습니다."
-논어(論語, 顔淵篇)
3. 정명(正名)
名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주로 名實 관계에 대한 정치, 윤리적 개념이다. 구체적으로는 名의 의미에 따라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사물의 실상에 대응하는 이름으로 본다. 이 경우의 정명은 사물의 실제와 그 명을 일치시킨다는 뜻으로 동이(同異), 시비(是非), 진위(眞僞)를 분별한다는 논리학의 사실판단에 해당한다.
둘째, 인간의 내면적 덕에 대응하는 명분의 의미로 본다. 이 경우 정명론은 인간의 덕과 그 명분을 일치시킨다는 뜻으로 명분(名分), 귀천(貴賤), 선악(善惡)을 구별한다는 윤리학의 가치판단에 해당한다. 공자는 자로라는 제자가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반드시 명을 바로 잡아야 겠다(必也正名乎)."고 하였고, 또한 "정치란 바로 잡는 것이다(政者正也)."라고도 하여 정치에 있어서 정명의 중요함을 피력하였다.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서 물었을 때,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어버이는 어버이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고 하여 명분과 그에 대응하는 덕이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 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정명 사상은 사회 성원 각자가 자기의 명분에 해당하는 덕을 실현 함으로써 예의 올바른 질서가 이루어지는 정명의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공자가 바라는 정명은 단순한 명분의 고수가 아니다. 예컨데 군자는 명분상 군자이기 위해서는 그 실로서의 인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정명론을 더욱 발전시켜 맹자는 혁명론을 전개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할 때' 혁명을 통해 임금도 내쫓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00학년도 중앙대학교 모의논술고사 심사평
2000학년도 중앙대학교 모의논술고사 심사평 이번 논술고사의 출제형태는 지문 제시형이다. 지문은 『論語』子路편에서 孔子가 그의 제자인 자로와 正名에 관해서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제시문 가)과, 『순자』正名편의 글(제시문 나)이다. 이 지문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논지는 正名이다. 정명이란 명(名)과 실(實)을 일치시켜서 이름(名)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사회관계와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의미이다. 이 글 속에서 사회질서 특히 인륜질서의 정립에 있어서 명칭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리려고 했던 유가 사상가들의 고민과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두 개의 제시문에는 유가 사상의 맥락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도 존재하지만, 차이점도 존재한다. 제시문 (나)의 『순자』의 정명에 관한 글은 공자의 대화보다 대단히 분석적이고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명사를 제정할 때 지켜야하는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는 주목 여하에 따라서 활용할 만한 세부적인 논지가 잠복해 있다. 그래서 답안을 작성하는 학생들은 이 글에 많은 주목을 할 것이라고 예상이 되었다.
출제 및 심사를 맡은 위원들은 공자의 정명의 이념, 즉 명분과 실제를 일치시키는 것이 사회질서의 근본이 된다는 점과, 순자의 정명의 논리, 즉 명칭은 일종의 사회적 약정이지만 그 약정은 명칭과 실제가 부합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명칭이라는 논리, 또 그러한 좋은 명칭을 정립하여야 사회 질서(천한 것과 귀한 것의 구별, 같은 것과 다른 것의 구별)를 바로 잡는다는 논리 등을 논술답안 작성에 활용할 수 있는 제시문의 중요한 논지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관습화되고 있는 언어 용례를 거론하여 그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도록 주문하였던 것이다. 특히 해결책의 모색도 비판의 논지로 활용하였던 정명(正名)의 관념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400여명의 응시자 가운데 이러한 주문과 출제의도를 파악하여 충족된 답안을 제시한 학생들의 숫자는 의외로 적었다. 우선 학생들이 출제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는 학생들의 제시문을 꼼꼼하게 읽고 그 논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부독하거나 성실성이 결여됐다는 판단을 낳는다. 이번 출제가 언어의 잘못된 사용에 관한 비판과 해결책의 제시라는 점에서,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상투적인 글쓰기를 한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관찰되는 부당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언어사용의 사례를 많이 거론하였고, 그것들의 부당함이나 부적절함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해결책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으나, 출제가 요구하는 정명(正名)의 논지를 바탕으로한 논술을 작성한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이 아쉬운 점이다.
학생들의 답안 가운데서 두 편을 우수답안으로 선정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제시문의 논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의 언어 관습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논술이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우수답안은 정미경(수험번호529)과 석혜영(수험번호 337)의 답안이다. 정미경의 답안은 정명의 의미와 그것의 조건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이해한 글로서 논리적 정합성도 갖추었다. 그리고 김춘수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여 정명의 의미를 소화해 낸 점은 논술에 앞서서 글을 정확히 읽고 이해하는 힘과 사유에 의한 유추의 힘이 남들보다 잘 갖추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재 우리의 잘못 관습화된 언어의 용례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다소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렀다고 하는 점이다.
또 석혜영의 답안은 한 차원 높은 언어 용례 제시가 돋보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잘못된 언어 용례를 거론하는 데 있어서 '명사'의 범위를 넘어서서 동사 형용사 같은 용언이나 부사어 등까지도 거론함으로써 무리한 논술을 하였거나, 비속어와 은어를 거론하였지만 그것에 대한 비판이 정명의 본질과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가를 제대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논술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이 답안은 대체로 명사의 범위에 한정하여서 논의를 차분히 전개한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또한 이 답안에서 제시한 언어의 용례는 언어와 인간의 역사와 사회와의 관계를 보는 안목의 깊이를 느끼게 하여서 이 점도 역시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높은 평가를 얻었다.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제시에 있어서도 역시 구체적이면서 식견 높은 제안을 했다고 평가되었다.
> 정명(正名) 사상과 정치 사상
정명(正名)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맡은 바 역할을 다함. : 君君臣臣 父父子子
-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자식은 자식 답게..'
- 정명을 다할 때 사회적 안정 유지 -법률과 형벌보다는 도덕과 예의로 교화
정치 사상
4. 대동(大同)사상
만민의 신분적 평등과 재화의 공평한 분배, 인륜의 구현으로 특징 되는 대동사회를 인류의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상정하는 사상, 예기의 예운편에서 보이는 대동 사회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천하를 사유화하지 않고 공공의 공유물로 한다. 둘째, 사람들은 모두 전체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며 노동의 산물인 재화는 모든 사람의 공동으로 향유한다. 셋째, 노동 능력이 있는 자에게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하며, 노동 능력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는 일종의 사회보장제에 의해 잘 부양한다. 넷째, 통치자는 어질거나 능력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신의와 화목을 구현한다. 다섯째, 자기 부모나 자식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널리 사랑을 베푼다. 여섯째, 악의적인 음모나 모략을 배제한다. 일곱째, 도둑질, 횡령, 착복 등 질서 문란자가 발생하지 않는다. 여덟째,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동사회 (大同社會)
완전히 하나가된 사회, 즉 이상향의 사회를 가리킨다.
대동사회가 어떠한 사회인가에 대한 설명은 <예기>에 잘 나타나 있다. <예운편>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큰 도가 행해지면 전체 사회가 공정해져서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뽑히게 되며, 서로간의 신의가 존중되고 친목도 두터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부모도 자기 부모처럼 여기게 되며,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남의 자식도 자기 자식처럼 여기게 된다.
노인들은 여생을 편안히 마치게 되고, 젊은이들은 각각 자기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자리에서 활동하게 되며 어린이들은 착하고 바르게 자라게 된다.
과부와 홀아비, 또는 의지할 곳 없는 자나 불구인 자는 모두 편안히 보호를 받게 된다. 남자들은 모두 자기 분수에 맞는 일을 하게 되고, 여자들도 모두 적당한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재물과 보화들이 헛되어 버려지는 것을 꺼리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들을 집에다 감춰두는 법은 없다. 또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하지 않는 것을 꺼리며, 자기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 역시 싫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모술수가 필요하지 않게 되며, 도둑이나 불량배 같은 사람이 생길 수 없다.
이리하여 집집마다 문을 걸어두는 법이 없다. 이런 사회를 가리켜 '대동'이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동'이란 크게 같다. 즉 '완전히 같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공자가어>에도 나온다.
공자(孔子/BC 552~BC 479)
중국 고대의 사상가·유교의 개조(開祖).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邑:지금의 山東省曲阜의 남동) 출생.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생애]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상] 춘추 말기,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공자는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영향]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참고자료
▶ 공자시대의 중국
유왕이 죽은 뒤 태자 의구는 동쪽의 성주로 도망가 B.C.770년 즉위하여 평왕(平王)이 된다. 이후 주왕조는 성주에서 존속하다가 B.C.256년에 秦에게 멸망한다. 이 기간을 동주시대라고 부른다.
주왕실이 동쪽의 낙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왕조는 이전 서주시대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히려 실력을 가진 제후가 패권(覇權)을 다투는 시대가 된다. 따라서 실제로 동주시대의 종말은 주왕조의 멸망시기가 아니라 진이 천하를 통일하는 B.C.221년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 시대는 춘주·전국 시대라고도 한다. 그것은 이 시대 전반기 대부분의 역사가 『춘추(春秋)』라는 연대기에 , 후반기에 활약했던 외교가들의 언론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전국책(戰國策)』이라는 서적에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춘추(春秋)』는 원래 노나라의 연대기였던 것을 공자가 편집하여 개정한 것이라 하는데 그 내용은 B.C.722년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으로부터 B.C.479년 애공(哀公) 16년까지의 사 건을 기록하고 있다.
춘추와 전국의 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위·조의 3家가 晉을 삼분하여 사실상 독립했던 B.C.453년을 그 분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이 있다. 따라서 『춘추(春秋)』이후에 30년 정도를, 또한 그 이전의 50년 정도를 더하여 춘 추시대(B.C.770∼B.C.453)라 하고 B.C.452년 이후를 전국시대로 규명한다.
이렇게 춘추·전국시대의 두 시기를 구분해 보면 춘추시대에는 아직 명목적으로 주왕의 권 위가 온전하여 서주 이래의 예적(禮的)인 제도가 다소나마 시행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전 국시대에는 주왕이 완전히 권위를 잃고 이전의 예적 질서도 시행되지 않아 제후국이 서로 쟁탈을 반복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시대에는 일관된 역사의 흐름도 발견된다. 그것은 분열로부터 통일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춘추시대에는 초기에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70여개국이나 분립하고 있었으나 점차 제후국 상호간의 공방과 동맹을 통하여 패자에 통솔되면서 일종의 제후국연합을 이루 게 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약소국은 점차 대국에 병합되어 주권이 없는 지방도시로 전락하고 이에 따라 대국의 규모는 보다 확대되어 전국시대에는 진·초·제·연·한·위·조의 7대국으로 병합된다. 이리하여 진·한 제국에 선행하는 소제국의 대립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추이의 배후에는 지배집단 내부의 변질과 군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료제의 성립 이라는 요인이 작용했으며 특히 농업생산의 발전에 따른 농촌사회의 변화, 화폐경제의 발달, 상업의 성행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들은 춘추·전국 시대를 통하여 일 관되게 전개·발달되었던 것이다
▶ 생애
공자는 이름이 丘요, 字는 仲尼이니, 그 先代는 宋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叔梁紇이요, 어머니는 顔氏이니, 노나라 양왕 22년(B.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공자를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하였다.
공자는 아이가 되어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를 진설하며 예를 행하는 용모를 베풀었었다. 장성하여 季吏(창 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을 平하게 하시고, 司職吏(축산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
昭公 25년(B.C 517) 갑신은 공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 라로 가시어 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景公에 통하였다. 경공이 尼谿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晏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 공자는 어떤 사람일까?
{論語}를 주된 연구의 근거로 삼지 않을 수 없는데, {論語}를 보면 공자가 호감가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공자의 적대자들이 가한 공격에도 이 인상과 상충되는 내용은 없다. {論語}에 의하면 [공자는 閉居 할 때면 격의없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으며], 또 [온화하지만 당호하였고 , 위엄이 있었지만 사납지 않았으며, 공손하였으나 편안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아첨하지 않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할 경우에는 경의를 표하였 으며, 그 대신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존경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일정한 위치가 있었 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는 물론 미천한 사람들에게조차 고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공자가 항상 수많은 친구들로 떠들썩하게 둘러싸여 있는 型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는 변함없는 친구가 많았지만 크게 인기를 모으는 型은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생각이 깊었고 솔직하였으며 [원망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것을 숨긴 채 친하게 지내는 것을 ......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대개의 경우 그는 면전에세 사람을 비판하고 뒤에서는 칭찬하는 원칙을 따른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존경은 받지만 인기는 끌지 못하는 법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다소 과묵한 편이었다. 이 태도는 자기 아들에게도 적요 된 것 같은데, 그는 자기 아들의 능력에 실망하였음을 솔직이 인정하였다. 그는 예의가 발랐으나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위신을 손상하는 짓으로 생각하였다. 군주나 권세 있 는 세습귀족들과 말할 때도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몹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런 식의 처세가 실제 현명한 것이었느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공자의 교훈인 엄격한 성실성과는 일치한다.
그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을 혐오하였다. {논어}만 보아도 공자가 多辯家가 아니라는 것 을 알 수 있지만 맹자도 [나는 話術에는 재능이 없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공자의 말에는 때때로 감동적이고도 고상한 것은 있지만, 장황하거나 화려한 것은 거의 없다.
다른 면에서도 그는 겉으로만 꾸미는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하였는데, 이것은 세상에 너무 닦인 사람보다는 소박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이다.
공자는 육체적인 안락과 부는 진정한 군자가 추구할 목표가 아니라고 믿었다. [선생께서는 만약 부 가 정당한 추구의 목표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으며, 채찍 을 잡는 마부라도 되겠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겠 다.] 이것으로 공자가 금욕주의자였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진 정한 금욕주의자는 보통 쾌락 자체를 죄악시하고 고통을 선으로 생각하기조차 하는데 공자에게는 이러한 요 소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으로서의 유교는 절제 있는 육체적 쾌락을 반대한 적이 없으며, 공자 자신도 덕과 성실에 배치되지 않는 한 쾌락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쾌락의 원천으로 서 학문을 찬양하였으므로, 순전히 향락을 목적으로 공자가 음악을 즐긴 것은 예외적인 것이다. 쾌락이 바람직한 것일 뿐 아니라 인생의 필요한 일부라는 심원한 심리학적인 진리를 인식한 점에서 유교 는 고대 중국의 주요 철학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문명의 전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극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확신은 너무나 진지하였기 때문에 부당한 비판에도 성내지 않고 미소로써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전지전능한 척하지 않았으며 어는 학자에게도 불가결한 [나는 모른다]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지식을 얻었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무식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제자들이 그와 의견을 달리하였을지라도 그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았으며, 그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치 않았다. 자신이 거창한 사명을 띠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 은 평판보다 공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공자는 항상 주장하였지만, 때로는 친한 제자들에게 자기를 이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한탄할 정도로는 세상의 평판에 관심을 가졌다.
또 그는 인정도 많고 생각도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공자는 맹인을 접대하였을 때, 그 눈먼 손님에게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소개하였으며 그 손님이 호기심은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을 모두 알려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인정이 많아 자기 재산보다는 사람의 안전에 더 관심을 가졌다. [마굿간 이 불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온 공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는가고 물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으 며] 들어세 사냥을 할 때도 [낚시는 하였지만 그물은 사용하지 않았고, 주살을 던졌으나 앉은 새는 쏘지 않 았다.] 이 비범한 인물에 대해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학감각을 가진 열정하였다는 점 일 것이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자주 농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이는 일이 잦았음에는 틀림없다.
그의 이야기 중에는 금방 이해되지 않는 해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 많다. 그 해학 때문에 경건한 주석가들이 난처한 순간에 빠진 일이 많았는데, 주석가 중에는 농담을 하는 것은 성 인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철저하게 확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크게 빈정거리는 어투로 공자를 이렇게 평한 일이 있었다. 즉 [과연 위대하구나, 공자는! 박 학도 하구나! 그러나 어느 분야에서도 명성을 얻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자기가 교사로 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즉시 이 것을 엄숙한 비판으로 인정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무슨 일을 해볼까? 마차를 몰아볼까? 활 을 쏘아볼까? 좋다! 마차를 몰자.]
공자는 자제력은 대단하였지만 초인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감정이란 자제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총애 하는 제자 顔回가 죽었을 때는 슬픔을 억제하지 않았다. 다른 제자가 공자에게 [선생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과연 그랬던가?]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을 지나치게 슬 퍼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그렇게 할 것인가?
▶ 인(仁)사상
禮를 수호화기 위해 공자는 도덕윤리의 측면에서 "仁"의 학설을 제시했다. "仁"이라는 어휘 자체는 공자 이전부터 이미 일상적으로 사용되어왔지만 철학범주로서 제기된 것은 공자에 의해서였다. 공자가 내놓은 "仁"은 이후 중국 철학사에서 중요 범주의 하나가 되었다. 『논어』에서 "仁"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가 안연의 물음 에 답한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禮"와 "仁"의 관계를 개괄하고 공자의 "仁"학설의 기본 내용을 설명해준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 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克己"란 자기 억제이며 "復禮"는 "禮"에 부합되지 않은 언행을 "禮"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克己復禮"를 이룬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어진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안연은 한걸음 더 나아가 "克己復禮"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仁"의 원칙에 부합되는 사람이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禮"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여기에서 말하는 "禮"란 주례이며 동시에 서주 노예제 사회의 등급제도인 것이다. 이로써 공자가 제시한 "仁"이란 일종의 도덕원리를 이용하여 "君子"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 하는 모든 것을 자제케 하고 이들이 주례의 등급규정을 철저히 지키고 예를 범하는 행위를 방지 하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당시 통치계급 내부의 귀족 사이에서 주례가 훼손당하고 위를 범하는 혼란과 자기가 섬기 던 임금이나 부모를 죽이는 등의 "無道"한 행위가 예사로이 발생하는 데 대해 유심주의적 관점에 서 그 원인을 살펴, 이를 귀족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보았다. 이리하여 공자는 "仁"을 또한 귀족 사이의 상호관계를 처리하는 도덕원칙으로 삼아 "仁"이란 곧 "사람을 사람함"이라고 강조하였다. 공자는 귀족들에게 자제와 상호협조를 통해 피차간의 모순을 조화시 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자기 억제와 상호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공자는 "仁"을 실행하는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무릇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려고 하 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해준다." 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 게 하지 말라"고도 하였다. 이 두 구절의 의미는 자기가 이루고자 원한다면 다른 사람도 이룰 수 있게 해야 하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증삼은 "忠恕" 두 글자로써 "仁"의 이 두 원리를 개괄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본래의 생각과 부합된다. 충서의 도는 공자가 주장한 仁學說의 중심사상을 꿰뚫는 것이다.
공자의 '충서의 도'는 역사적으로 착취계급과 그 대표자들에 의해 계급모순을 은폐하고 인민의 투 쟁정신을 마비시키는 부식제로 이용되어왔다. 이들은 온 힘을 다하여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소위 "용서의 도"를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최고의 미덕"으로 선전하였고 나아가 초계급적인 "인류애" 또는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안다"는 식의 "위대한 덕성"을 고취하 는 한편, 이러한 도덕관념을 노동인민에게 적극적으로 부식시켜왔다. 이처럼 저의가 담긴 왜곡된 선전 아래 공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과 남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도덕유형을 만들 려고 한 것 같다. 사실상 공자의 "남"이란 다른 귀족을 말하는 것이지 노동자나 노예까지 포함하 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다음에서와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이는 있 을지라도 소인이면서 어진 사람이란 없다" 또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사람을 부리려 든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공자에게 仁愛의 추구란 통치계급의 일 로서 통치대상인 노동자를 어떻게 지배, 복속시키느냐의 문제일 뿐 무엇이 인애이며 도덕인가를 밝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忠恕란 노예소유주인 귀족들 사이의 忠恕이지 노예소유주와 노예 사이의 忠恕는 결코 아니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착취제도와 착 취자만 옹호하는 것일 뿐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공자로서는 그때까지 다음과 같은 생각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곧 그 자신이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더러 노예가 되도록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 자신이 착취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착취를 받아들이도록 하지도 않 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적대계급 사이에는 "忠恕"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피압박 노동인민으로서 말한다면, 소위 "忠恕"란 철두철미한 기만인 것이다.
공자에게 "復禮"란 "仁"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忠恕의 道"를 실행한다는 것은 반드시 주례에 서 규정한 준칙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자기가 바라는 것"이거나 "바라지 않는 것"이나를 막론하 고 주례라는 원칙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소위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귀족들에게 주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것을 유구한 것으로 자신의 이익 을 고려할 때는 동시에 다른 귀족의 이익도 살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의 목적은 모순을 조화시키고 주례의 구질서를 개선, 유지하는 데 있을 뿐이다. 공자는 당시 두 가지 종류의 소유제에 대한 모순을 반영하는 통치계급 사이의 투쟁을 모두 노예소유주 귀족들 사이의 군신 내 부의 모순으로 보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禮"에 의한 제재, 사상적으로는 "仁"의 고취로써 이와 같은 모순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공자가 제창한 "충서의 도"의 역사적 내용이자 계 급적 정체이다. 공자는 결코 모든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착취계급 전부를 사랑한 것도 아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오직 착취계급 가운데 일부분인 노예소유주 귀족에 지나지 않았 다.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의 입장에 서서 "자기가 서려고 하면 남을 서게 해주고 자기가 이루 려고 하면 남이 이루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허풍을 칠 수는 있어도 내가 참월을 생각한다면 남 의 참월도 지지해주고 내가 반란을 꾀한다면 남의 반란에도 공감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이다. 이러한 충서의 도는 공자에게는 결코 허락될 수 없다. 일정 계급적 도덕이론은 이 계급의 정치제도에 기여하는 것으로, 공자의 "인"도 "예"에 종속되는 것이다.
공자는 "인"을 "復禮"를 추진하는 일종의 도덕적 동력이자 사상적 근거로 보는 한편, "인"의 실행 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인이 어찌 멀리 있으랴? 내가 인을 바란다면 그 인 은 이미 와 있다."라고 공자는 말한다. 자신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행 하려고만 한다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양심이나 자아의식의 산물롤 보 는 것이다. 이러한 유심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공자는 주관적인 도덕동기와 소위 "내성적"인 자아수양의 역할을 크게 내세웠다. 그는 "인의 실천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어찌 남에게 서 비롯되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인"의 실천이 바깥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자각과 주관에 따른 노력에 의거할 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들이 오직 "인"을 실행하고 자각적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주례의 규정을 준수할 수 있으면 "인"의 원칙 이 실현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례 또한 옹호되고 회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노예제 사회가 해체되어 봉건적 소유제 사회로 나아가돈 역사적 변혁기에 위치하는 공자의 인에 대한 학설은 한 역사시대의 복잡한 사회모순, 특히 통치계급 상층에서 발생한 모순으로서 분화와 투쟁을 반영한다. 공자가 중국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통치계급의 내부관계를 조정하는 원칙으로서 하나의 도덕범주인 "인"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통치계급 내부에 새로운 위기가 출현했음을 나타내 는 것으로 불가결한 새로운 조치였다. 그러나 공자는 노예제 사회의 종법제도를 옹호하는 반동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도덕학설도 위선과 기만적 성질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 같은 본질이 일체의 반동계급의 수요를 충족시켰으며 이로써 그는 중국 역대의 반동통치자나 모 든 착취제도의 옹호자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인"의 학설은 역대 봉건지주계급 사상가에 의해 지지, 보완되어 "三綱五常"과 "忠孝節義"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봉건 예교사상으로 발전하여 봉건통치를 옹호하는 냉혹한 사상적 압박도구가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 역사상 공자 때까지 "仁 慈"의 의미밖에 없었던 "인"이 봉건지주계급의 독재를 위한 마취제이자 항상 노동인민의 신체를 얽어매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었던 것이다.
▶ 교육가로서 공자
일개 私人의 자격으로 공자는 자질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로 받았으며, 종래의 정치와는 다르지만 공자의 생각으로는 훨씬 더 좋은 정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목적은 실제적인 것이었으나, 좁은 의미에서의 실제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교육의 목적은 善政을 구현하는 것이었지만, 그 교육의 결과 모두가 유능한 행정가가 되어야 하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것을 훨씬 넘어서서,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든 관점에서 가능한 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며, 특정한 기술만 가진 단순한 전문가가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공자는 지혜가 있고 탐욕스럽지 않으며 용감하고 교양도 있을 뿐 아니라 禮樂에도 정통한 사람을 이상적 인 인간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공자가 제자들에게 제시한 모범이었음에 틀림없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요구하였던 덕성 중, 예컨데 용기나 성실 같은 정치적 성공에 필수적인 요건은 아니었 다. 그러나 공자가 목표로 삼은 것은 입신출세가 아니라 훌륭한 정치였고,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실과 衡平의 덕을 갖춘 사람들이 정치를 운영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공자의 신 념이었다.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물론 제자들을 군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누구를 대상으로 이 작업을 하려고 하였는가?
너무나 가난하여 마른 고기 한죽밖에 예물로 가져오지 못한 사람조차 가르치는 것을 거절한 일이 없다고 공자 자신은 공언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며, 또 미천한 사람에 대한 그러한 친절이 계속 유교에 남아 있었던 사실을 시 사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맹자}에 실려있다. 즉 맹자는 대단히 호사스러운 여행을 하였는데, 그가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궁궐의 관리인이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자 그의 제자가 그것을 훔쳤다고 비난해 와 그는 크게 화를 내었다. 그러나 그 관리인은 맹자가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심사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을 주지의 사실이며 자기가 혐의를 두는 것도 당연하다고 지적함으로써 그 혐의가 옳다고 주장하였다.
가난하다거나 출생이 미천한 것은 공자에게 배우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으며, 방해되는 조건은 따로 있었다. 공 자는 멍청이를 가르치는 것은 거절한다고 스스로 말했고, 또 지적인 개발에 [정열을 불태우는 사람만]을 가 르치겠다고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단지 부와 지위를 얻으려는 목적뿐인 학생들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 한 것 같으며, 보다 고상한 일에 관심을 가진 체하지만 초라한 옷과 거친 음식을 수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더불어 말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내쫓았다.
그러나 그는 [3년 동안 물질적인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공부만 하려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집이 먼 제자들은 공자의 집에서 함께 숙식하였던 것 같다.
그의 교육방법은 완전히 형식을 떠난 것처럼 보이며, 수업시간이나 일정한 시험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대신 공자는 한 명, 또는 동시에 몇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때때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책은 그들이 스스로 학습하도록 했지만 공자가 학습해야 할 것을 지시해 주고 특별한 대목은 함께 토의하였던 것 같다. 이것은 공자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단지 학자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군자를 양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주제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방 법은 극히 개인적이었으며, 제자마다 다른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가르치는 방법도 제자마다 달랐다.
따라서 각 학생의 인물됨을 관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훌륭한 교사가 모두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공자도 주의깊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을 관찰하였다. 그 방법 중에는 현대의 정신요법을 상기시키는 것도 있는 데, 그것은 학생들의 마음을 편안케 한 후 그들의 소망을 기탄없이 자유롭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중간에 말을 끊거나 논평을 하여도 속으로만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동안 그는 자 기가 받은 인상을 종합하여 그들의 장점을 어떻게 살리고 약점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였다.
일단 개개인에 대한 분석을 완료하면 공자는 그에 따라 교육내용을 조정하였다. 때때로 그는 동일한 질문에 대 해서도 제자에 따라 다른 대답을 하였다. 공자가 격식을 차리지 않은 것은 교육방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공자가 죽은 지 오래지 않아 중국 의 교사들은 대단히 권위를 내세웠고 자기들이 말하는 것을 제자들이 무조건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후세의 교사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아무 격식도 없이 편안한 자세로 제자를 대하였고 엄격한 규율 도 내세우지 않았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으며, 後術하는 것처럼 그의 정치 및 지식철학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잘못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선행이 권장이었고, 강제가 아닌 설 득이었으며 시종일관 부정적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자기에게 찾아온 모든 사람들을 [군자]로 만들기 위해 어떤 교육과정을 채택하였는가? 그것은 현 대의 어떤 교육과정도 달랐지만, 동시에 당시 귀족 청년들이 보통 받는 교육과도 달랐는데, 가장 큰 차이점 은 射術과 御術을 제외시킨 것이다. 공자 자신도 활을 쏜 적이 있었고, 공자의 제자 중에도 사술과 어술에 모두 숙달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군자]에게는 그것이 필요없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귀족의 전통적인 기예 중 공자의 목적에 꼭 적합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그것을 계승하 여 그 특유의 강조점을 덧붙여 유가의 표지가 될 정도로 크게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禮]라는 것이다.
[禮]에는 제의를 행하는 형식도 포함되어 있지만, [내부의 정신적 仁心이 밖으로 표현되었을 때]만 비로 소 그 가치가 있으며, 진정으로 仁心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禮]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공자는 [마 음속으로는 전혀 경외심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형식만 갖추는 예를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말했으 며, 죽은 사람을 위한 喪禮에도 모든 격식을 세세하게 지키는 것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 보다 중 요하다고 선언하였다. 단순한 외형적인 과시를 공자는 혐오하였다.
공자는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논어}에는 공자가 {시경}의 편찬과 정리에 관계하였음을 시사 하는 귀절이 있는데 고대에는 시에 음악의 반주가 붙어 있었다. 그는 류트와 비슷한 현악기인 瑟을 탔고 노 래도 즐겨 불렀다. 공자가 직접 음악을 가르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 명의 제자가 瑟을 탔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 은 확실하지만 다른 선생에게 더 깊이 배우기를 기대하였는지도 모른다. 공자는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인격 도야의 마지막 장식으로서 음악과 [禮]에 정통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고, 또 한번은 학생들의 성품은 [시 를 배움으로써 자극되고, 예를 배움으로써 확고해지며, 음악을 배움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확 실히 공자는 단순한 지성뿐 아니라 감정과 정신의 교사로서 [禮]와 음악을 결합시켰다.
▶ 개혁가로서 공자
공자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깊은 번뇌에 빠졌고,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또 주위의 가치관과 맞지 않았던 그의 理想의 근원이나 세상을 개조하려는 수단으로 내세웠던 그 사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공자는 단순히 古道의 부활만을 추구하였고 사람들에게 유덕한 [先王]의 道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을 뿐 이라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공자가 고도를 자신의 사상적 근원으로 시사한 적도 두 번 있었고, 과거와 비교하여 현재를 자주 비난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을 조 롱한 공자의 발언은, 단지 자기에게 개혁을 수행할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비난한 일면이 있다 는 점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인간의 제도가 변화, 발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적절하고 상식에도 맞는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개변시키거나 그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졌다. 이러한 공자의 태도는 漢代에 가서야 비로소 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공자는 [周는 앞선 두 왕조의 경험을 살필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주의 문화는 정말 찬란하구나. 나는 주의 전통을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전통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방향을 추천한 예 는 거의 없었다.
그는 정치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열한 번이나 받았지만, 전통적인 관행의 관 점에서 대답한 것은 단 한 번 뿐인데, 그때 그는 [夏代의 曆과 殷代의 輅, 周代의 冕을 사용하라]고 말하였 다.
여기서도 그는 단순히 옛것만을 따르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각 시대에서 따를 수 있는 관행만을 선택하 라고 말한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공자의 敎說은 기원전 22세기경 중국을 통치하였다고 하는 上古의 제왕 堯.舜.禹로부터 전 수된 것이라고 한다. 그후 이 말은 전통적인 견해가 되어, 공자는 이 上古帝王들의 [황금시대]를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論語}에는 이것을 뒷바침해 주는 자료가 전혀 없다. 공자가 이 상고의 제왕들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맹자나 후세의 학자들과는 달리 완벽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그들을 모방하기만 하면 된다는 따위의 제안을 결코 한 일이 없으며, 사실 {논어}보다 약간 뒤늦게 나온 저술과 비교해 보면 {논어}에는 상고제왕이 언급된 일이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살았던 세상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현저하게 결여된 것을 갖춘 국가, 즉 모 든 백성이 평화와 안전 및 풍요를 향유할 수 있는 국가를 그가 최선의 국가로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평화를 언급했지만, 공자가 평화론자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분명히 그는 평화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불필요한 전쟁은 그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전쟁은 살육전이었을 뿐 아니라 일반 적인 무법상태의 일부였기 때문에 만약 공자가 주장한 정치적 개혁이 성공만 한다면 전쟁은 자동적으로 소 멸될 것이다.
자공이 정치에 관해서 묻자 선생께서는 훌륭한 정부란 충분한 식량과 무기를 갖추어야 하며 백성의 신뢰 를받아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만약 부득이 三者 중 하나를 빼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빼야 합니까?] [식 량을 빼라. 옛부터 사람은 주기 마련이지만, 백성이 신뢰하지 않는 정부는 지탱하지 못한다.] 이것은 정부 자체의 존립을 위해 백성을 굶겨죽여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의미라면 공자답지도 않 은 말이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백성들이 너무나 어리석어 군주의 眞意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군주가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구실로 무자비하게 백성을 몰아내고 착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말이 국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다 같이 그 목적에 대한 이해를 함께 하고 그 이익을 함께 향유하는 협동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고대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민주정치의 가능성을 꿈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 점은 공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성들은 한번도 권력을 장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죄악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공자는 시종일관 백성들의 편을 들었고 모든 불의으 책임을 백성 을 착취하는 세습귀족에게 물었다. 그는 군주가 선량하고 유능하기만 하다면, 준엄한 처벌 없이도 백성들은 할 바를 다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가 정치문제에 다소 큰 영향력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정치이론가도 많 지만, 공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고대 중국에는 상업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주된 축재의 방법은 지배자가 되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었고, 큰 부자를 압제자로 생각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 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군주가 자신의 직분만 다한다면, 사치가 아닌 한 신분에 상응하는 생활을 누릴 자격 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군주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면 아무도 그 정도를 아까와할 사람이 없겠지만, 그 렇지 않다면 군주는 거머리에 불과할 뿐이다. [선생께서는 국가가 道에 의해 통치된다면, 빈천한 것이 부끄 러운 일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부귀를 누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공자시대에는 분명히 그의 주장에 아무도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자가 개혁가로서 상당한 능 력을 갖고 있었음을 잘 말해 준다.
맹자와는 달리 공자는 결코 폭군을 죽여야 한다거나 제왕과 농민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직선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전체적인 운동은 시작도 되 기 전에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1세기 후 맹자가 아무 탈 없 이 직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방침에서 나온 것 같은데, 부패한 정부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기회가 오면 용감하게 행동할 용의를 갖고 있어야 하지만 말을 할 때는 다소 신중해 야 한다는 견해를 공자는 표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항상 조심만 한 것은 아니었으며, 인간이 그 자체로 위대할 뿐 아니라, 모두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숨기려고 한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언젠가 제자 자로를 [떨어진 삼베조각으로 기운 옷을 부 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맹자에 의하면, 공자는 자기가 옳지 않은 경우에는 가장 미천한 사람과 다투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으나, [자신을 돌이켜보아도 옳다고 느끼면 수천, 수만명이 앞을 가 로막고 있어도 밀고 나가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의미에세 그는 군주의 명령보다 일개 대신의 양심 이 더 권위가 있다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간상호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도덕으로 보았다. 도덕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거의 없을지라도, 누구나 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있으며,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가문이나 재산 또는 지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자신의 행동 즉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 공자(孔子, 이름은 丘, B,C 551-479)의 윤리 사상
가. 공자 사상의 출현 배경
(1) 春秋(춘추) 시대
(가) 周(주) 후기, 기존의 제도들이 무너져 혼란해진 시기
(나) 사회 지배층의 전횡 극심, 제후국 간 이익 추구를 위한 전쟁으로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개개인의 도덕성이 상실
(2) 사회 혼란의 근본적 원인 - 도덕적 타락
(3) 타락한 도덕성의 회복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이를 회복 하기 위해 공자는 仁(인)을 강조
나. 공자의 仁의 의미
(1) 인간이 본래 타고난 내면적 도덕성
(2) 인간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사랑의 정신
(3) 사회적 존재로 완성된 인격체의 인간다움
(4) 仁은 맹목적,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선행을 좋아하고 악 을 미워하는 사람이 행하는 참된 사랑임.
(5) 仁을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 도덕 -孝(효)와 悌(제) : 부모를 잘 섬기는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
(6) 仁의 실천
(가) 효제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함(愛人)
(나) 내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베품(推己及人)
(다) 성실과 신뢰를 위주로 생활함(主忠信)
다. 공자의 예(禮)
(1) 仁은 내면적 도덕성, 禮는 외면적 사회 규범 - 인과 예는 表裏(표리)의 관계
(2) 극기복례(克己復禮)
(가) 공자는 당시의 예의 형식화와 개인의 사욕을 극복하고 진정한 예를 회복 하고자 함
(나) 진정한 예는 인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스스로의 자율 적인 의지에서 나오는 것
(3) 君子(군자) - 仁을 바탕으로 예를 실천하는 사람 - 小人(소인)은 군자와 반대로 사욕만을 탐하는 사람
라. 공자의 정치, 사회 사상
(1) 正名(정명) - 사회 성원 모두가 각자의 신분과 지위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하는 것을 이름
(2) 덕치(德治) - 강제된 법률과 형벌보다는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교화하는 정치 사상
(3) 수기이안인(修己以安人)
(가) 德治를 위해서는 통치자가 우선 군자다운 인격을 수양 하고서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
(나) 통치자는 安人을 위해 재화의 적음보다는 재화의 균등한 분배를 염려하여 백성의 경제 생활을 배려하여 야 함.
(4) 大同(대동)사상 - 궁극적 이상 사회인 대동의 사회를 지향 하는 사상
▶ 참고 자료
1. 仁
유학의 도덕 범주 가운데 하나. 유교 윤리에 있어 최고 덕목으로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설문해자(設文解字) 단옥재의 주에서는 "사람이 둘 이상 모여 친하게 지낸다는 뜻에서 인(人)자와 이(二)자를 합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본래 인이란 人자의 겸용(兼用)에 의해 표시된 것으로 '인간적인', '인정이 많은', '친절한' 등의 뜻을 가지고 쓰였다. 이러한 예를 찾아보면 맹자의 "인은 인심이다.(仁 人心也)",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의 발단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라든지, 중용에 "인이란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仁者人也 親親爲大)." 등을 들 수 있다.
춘추 시대에는 인의 어의가 넓어져 '인품이 좋다', '인격이 높다'라고 하는 전인 격적 의미로 되었으며 이것이 공자에게서 중시되어 군자 교육에 있어 최고의 덕목으로 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공자가 말한 인은 '공손함, 관대함, 신실함, 민첩함, 자애로움, 지혜로움, 용기, 충서(忠恕), 효성심, 공경함,' 등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논어에 보이는 인 에 관련된 언급을 찾아 보면
* 공자 말씀 하시기를, "제자는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공경 해야 한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悌[논어]<學而>)
* 유자 말하기를, "부모를 잘 섬기고, 웃어른께 공손한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진저."(.... 有子曰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논어]<학이>)
* 공자 말씀하시기를, "공교한 말이나 좋은 낯을 꾸미는 자는 인이 적으니라,"(...子曰 巧言令色 鮮矣仁[논어]<학이>)
* 번지가 인에 대해 묻자 공자 말씀 하시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에 대해 묻자 공자 말씀 하시기를,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셨다.(...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논어]<顔淵>)
* 중궁이 인을 묻자 공자 말씀 하시기를, "사회에 나아가 사람을 사귈 때에는 큰 손님을 만난 듯 경건히 하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 모시듯 신중히 하며, 내가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안연>)
* 공자 말씀 하시기를, "강직하고, 의연하며, 순박하고, 말이 무거운 자는 인에 가까우니라."(...子曰 剛毅木衲 近矣仁 [논어]<子路>)
* 공자 말씀하시기를, "오직 어진 자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 할 수 있다."(...子曰 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논어]<里仁>)
* 공자 말씀하시기를, "인을 행해야 할 사명에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치 말지니라."(...子曰 當仁不讓於師 [논어]<衛靈公>)
* 공자 말씀하시기를, "지사와 인인은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하는 일이 없다."(子曰 志士 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논어]<위령공>)
2. 극기복례(克己復禮)
仁의 체현을 위해 공자가 제시한 구체적 실천 방법, [논어]'안연편'에서 안연이 인을 물었을 때, 공자가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구하는 방법이다.'라고 대답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克'이란 극복한다는 뜻이고, '己'는 생물학적 자아를 뜻하며, '禮'는 천리에 의해 규정된 인간 행동의 고유한 질서를 의미한다. 인간은 형기(形氣)와 감관(感官)을 가지고 있고 감관은 각각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누구나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인간은 생물학적 자아를 극복하여 자기의 생활을 예에 부합 시키려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에 의해 인간은 생물학적 자아의 욕구를 통제하고 도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극기복례의 구체적 방법은 시청언동(視聽言動)을 예에 의해 훈련시키는 것이다. 곧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것이다. 이러한 극기복례의 본질적 의미는 인간의 합리적 행동 질서와 인간의 자연적이고 무절제한 욕망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욕망의 절제를 통해 합리적 행동 질서를 확보하려는 측면에서 공자에 의해 제시된 하나의 수양법이라 하겠다
克己 : 이길(극)자기(기)
자기를 이기다. 사사로운 욕망을 정신력으로 눌러 충격 욕망 감정 따위의 과도한 발동을 억제한다는 뜻 이다.
孔子(공자)가 말한 『과도한 욕망을 누르고 예절을 좇도록 한다(克己復禮극기복례)』에서 나온 말이다.
「논어」의 「顔淵篇(안연편)」을 보면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어느 날 공자의 수제자인 안연이 仁(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를 극복하여 禮(예)를 행함이 仁이다. 단 하루 스스로 이겨서 예를 행하면 천하가 仁으로 돌아올 것이다. 인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남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克己復禮爲人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人由己 而由人乎哉극기복례위인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위인유기 이유인호재)』
안연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극기복례할 수 있는 細目(세목)으로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공자의 대답은 이랬다.
『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
이런 가르침을 받고 안연은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오나 반드시 이 말씀을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자의 중심사상은 仁이고 인과 禮의 관계를 가르친 대목인데 논어 가운데서도 白眉(백미)의 하나로 꼽힌다. 克己는 도덕생활의 기본이다. 私慾(사욕) 私心(사심)에서 벗어나 이를 이기는게 극기다. 禮는 사욕과 사심을 억제하는 규율이며 극기가 있어야 예의 실천이 가능하다는 공자의 가르침은 지금도 백번 옳다.
극기복례( 克己復禮 ).
[ 자기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쫓음. ]
안연(顔淵)이 어느 날 공자(孔子)에게 인(仁)에 관하여 물었는데,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오는 것이 인(仁)이다. 만일 사람이 하루라도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온다면 그 영향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인(仁)으로 돌아 올 것이다. 그런데, 이 인(仁)은 제 힘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 남의 힘을 기다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을 실천하는 조목은 무엇입니까?"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안회가 어리석고 불민합니다만 이 말씀을 실천하도록 평생 힘쓰겠습니다."
-논어(論語, 顔淵篇)
3. 정명(正名)
名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주로 名實 관계에 대한 정치, 윤리적 개념이다. 구체적으로는 名의 의미에 따라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사물의 실상에 대응하는 이름으로 본다. 이 경우의 정명은 사물의 실제와 그 명을 일치시킨다는 뜻으로 동이(同異), 시비(是非), 진위(眞僞)를 분별한다는 논리학의 사실판단에 해당한다.
둘째, 인간의 내면적 덕에 대응하는 명분의 의미로 본다. 이 경우 정명론은 인간의 덕과 그 명분을 일치시킨다는 뜻으로 명분(名分), 귀천(貴賤), 선악(善惡)을 구별한다는 윤리학의 가치판단에 해당한다. 공자는 자로라는 제자가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반드시 명을 바로 잡아야 겠다(必也正名乎)."고 하였고, 또한 "정치란 바로 잡는 것이다(政者正也)."라고도 하여 정치에 있어서 정명의 중요함을 피력하였다.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서 물었을 때,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어버이는 어버이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고 하여 명분과 그에 대응하는 덕이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 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정명 사상은 사회 성원 각자가 자기의 명분에 해당하는 덕을 실현 함으로써 예의 올바른 질서가 이루어지는 정명의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공자가 바라는 정명은 단순한 명분의 고수가 아니다. 예컨데 군자는 명분상 군자이기 위해서는 그 실로서의 인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정명론을 더욱 발전시켜 맹자는 혁명론을 전개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할 때' 혁명을 통해 임금도 내쫓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00학년도 중앙대학교 모의논술고사 심사평
2000학년도 중앙대학교 모의논술고사 심사평 이번 논술고사의 출제형태는 지문 제시형이다. 지문은 『論語』子路편에서 孔子가 그의 제자인 자로와 正名에 관해서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제시문 가)과, 『순자』正名편의 글(제시문 나)이다. 이 지문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논지는 正名이다. 정명이란 명(名)과 실(實)을 일치시켜서 이름(名)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사회관계와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의미이다. 이 글 속에서 사회질서 특히 인륜질서의 정립에 있어서 명칭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리려고 했던 유가 사상가들의 고민과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두 개의 제시문에는 유가 사상의 맥락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도 존재하지만, 차이점도 존재한다. 제시문 (나)의 『순자』의 정명에 관한 글은 공자의 대화보다 대단히 분석적이고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명사를 제정할 때 지켜야하는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는 주목 여하에 따라서 활용할 만한 세부적인 논지가 잠복해 있다. 그래서 답안을 작성하는 학생들은 이 글에 많은 주목을 할 것이라고 예상이 되었다.
출제 및 심사를 맡은 위원들은 공자의 정명의 이념, 즉 명분과 실제를 일치시키는 것이 사회질서의 근본이 된다는 점과, 순자의 정명의 논리, 즉 명칭은 일종의 사회적 약정이지만 그 약정은 명칭과 실제가 부합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명칭이라는 논리, 또 그러한 좋은 명칭을 정립하여야 사회 질서(천한 것과 귀한 것의 구별, 같은 것과 다른 것의 구별)를 바로 잡는다는 논리 등을 논술답안 작성에 활용할 수 있는 제시문의 중요한 논지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관습화되고 있는 언어 용례를 거론하여 그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도록 주문하였던 것이다. 특히 해결책의 모색도 비판의 논지로 활용하였던 정명(正名)의 관념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400여명의 응시자 가운데 이러한 주문과 출제의도를 파악하여 충족된 답안을 제시한 학생들의 숫자는 의외로 적었다. 우선 학생들이 출제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는 학생들의 제시문을 꼼꼼하게 읽고 그 논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부독하거나 성실성이 결여됐다는 판단을 낳는다. 이번 출제가 언어의 잘못된 사용에 관한 비판과 해결책의 제시라는 점에서,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상투적인 글쓰기를 한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관찰되는 부당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언어사용의 사례를 많이 거론하였고, 그것들의 부당함이나 부적절함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해결책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으나, 출제가 요구하는 정명(正名)의 논지를 바탕으로한 논술을 작성한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이 아쉬운 점이다.
학생들의 답안 가운데서 두 편을 우수답안으로 선정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제시문의 논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의 언어 관습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논술이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우수답안은 정미경(수험번호529)과 석혜영(수험번호 337)의 답안이다. 정미경의 답안은 정명의 의미와 그것의 조건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이해한 글로서 논리적 정합성도 갖추었다. 그리고 김춘수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여 정명의 의미를 소화해 낸 점은 논술에 앞서서 글을 정확히 읽고 이해하는 힘과 사유에 의한 유추의 힘이 남들보다 잘 갖추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재 우리의 잘못 관습화된 언어의 용례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다소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렀다고 하는 점이다.
또 석혜영의 답안은 한 차원 높은 언어 용례 제시가 돋보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잘못된 언어 용례를 거론하는 데 있어서 '명사'의 범위를 넘어서서 동사 형용사 같은 용언이나 부사어 등까지도 거론함으로써 무리한 논술을 하였거나, 비속어와 은어를 거론하였지만 그것에 대한 비판이 정명의 본질과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가를 제대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논술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이 답안은 대체로 명사의 범위에 한정하여서 논의를 차분히 전개한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또한 이 답안에서 제시한 언어의 용례는 언어와 인간의 역사와 사회와의 관계를 보는 안목의 깊이를 느끼게 하여서 이 점도 역시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높은 평가를 얻었다.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제시에 있어서도 역시 구체적이면서 식견 높은 제안을 했다고 평가되었다.
> 정명(正名) 사상과 정치 사상
정명(正名)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맡은 바 역할을 다함. : 君君臣臣 父父子子
-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자식은 자식 답게..'
- 정명을 다할 때 사회적 안정 유지 -법률과 형벌보다는 도덕과 예의로 교화
정치 사상
4. 대동(大同)사상
만민의 신분적 평등과 재화의 공평한 분배, 인륜의 구현으로 특징 되는 대동사회를 인류의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상정하는 사상, 예기의 예운편에서 보이는 대동 사회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천하를 사유화하지 않고 공공의 공유물로 한다. 둘째, 사람들은 모두 전체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며 노동의 산물인 재화는 모든 사람의 공동으로 향유한다. 셋째, 노동 능력이 있는 자에게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하며, 노동 능력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는 일종의 사회보장제에 의해 잘 부양한다. 넷째, 통치자는 어질거나 능력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신의와 화목을 구현한다. 다섯째, 자기 부모나 자식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널리 사랑을 베푼다. 여섯째, 악의적인 음모나 모략을 배제한다. 일곱째, 도둑질, 횡령, 착복 등 질서 문란자가 발생하지 않는다. 여덟째,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동사회 (大同社會)
완전히 하나가된 사회, 즉 이상향의 사회를 가리킨다.
대동사회가 어떠한 사회인가에 대한 설명은 <예기>에 잘 나타나 있다. <예운편>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큰 도가 행해지면 전체 사회가 공정해져서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뽑히게 되며, 서로간의 신의가 존중되고 친목도 두터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부모도 자기 부모처럼 여기게 되며,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남의 자식도 자기 자식처럼 여기게 된다.
노인들은 여생을 편안히 마치게 되고, 젊은이들은 각각 자기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자리에서 활동하게 되며 어린이들은 착하고 바르게 자라게 된다.
과부와 홀아비, 또는 의지할 곳 없는 자나 불구인 자는 모두 편안히 보호를 받게 된다. 남자들은 모두 자기 분수에 맞는 일을 하게 되고, 여자들도 모두 적당한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재물과 보화들이 헛되어 버려지는 것을 꺼리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들을 집에다 감춰두는 법은 없다. 또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하지 않는 것을 꺼리며, 자기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 역시 싫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모술수가 필요하지 않게 되며, 도둑이나 불량배 같은 사람이 생길 수 없다.
이리하여 집집마다 문을 걸어두는 법이 없다. 이런 사회를 가리켜 '대동'이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동'이란 크게 같다. 즉 '완전히 같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공자가어>에도 나온다.
대동세계 ( 大同世界 )
철학용어. 중국 전국시대에서 한(漢)나라 초 사이에 유가학파(儒家學派)들이 주장한 일종의 이상사회. 사람이 천지와 만물과 서로 융합하여 한 덩어리가 된다는 말이었는데, 유가학파들은 논리적 근거를 경서인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 둔다.
큰 도[大道]가 행해지고 어진 사람과 능력있는 자가 버려지지 않으며, 가족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노인은 자기의 생을 편히 마치고, 젊은이는 모두 일할 수 있으며, 노약자·병자·불쌍한 자들이 부양되며, 길에 재물이 떨어져도 줍지 않는 세상이 바로 대동세계라는 것이다.
이 대동사상은 청말에서 민국초에 이르는 정치가·사상가들, 홍수전(洪秀全)·캉유웨이[康有爲]·담사동(譚嗣同)·쑨원[孫文]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캉유웨이는 《대동서(大同書)》에서 대동사회를 방해하는 요인은 바로 이기심(利己心)이라고 보고 이기심을 타파하려면 먼저 가족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한국에서도 이익(李瀷)이 대동풍속을 이루려면 각자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하였고, 심정진(沈定鎭)은 《성본연대동설(性本然大同說)》에서 인간의 본성은 누구든지 다 갖고 있는 보편성이라고 주장했으며, 최한기(崔漢綺)는 구성원 개개인의 사회적인 자각이야말로 대동사회 구현의 필수요건이라 하였다. 명칭만 다를 뿐 이상사회를 나타내는 말로 ‘요순(堯舜)시대’ 요순지치라는 말이 유학자들에게 널리 쓰였다. 요순시대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임금을 통해서 실현하는 이른바 왕도정치관이었으므로 임금을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드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이이(李珥)의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은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단이며, 조정의 경연석에서의 강의나 저서·상소를 통하여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중조 때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운동은 좋은 예가 된다.
[출처] 공자(孔子/BC 552~BC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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