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시 읽는 계절> 시로 듣는 귀 이야기 / 박남희 (시인)
인간의 감각 기관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대부분 눈과 귀를 꼽을 것이다. 그렇다면 눈과 귀 중에서 어떤 기관이 인간에게 더 유용할까 생각해보면 딱히 하나를 선택하기가 곤란해진다. 가까운 친척 중에 귀가 들리지 않는 이모가 있었다. 귀가 들리지 않아서 목청은 고장 나지도 않았는데 말을 못하고 손짓과 몸짓으로 말을 대신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이모는 다리가 불편한 남편을 만나서 아이를 하나 낳고 살다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 병에 걸린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아이마저 읽고 홀로 외로운 노년의 삶을 마감했다. 당시의 어린 나는 외롭고 쓸쓸한 이모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들을 수 있는 귀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 얼굴에는 중요한 감각 기관이 4개가 있다. 한자어로 이목구비(耳目口鼻)라고 하면 누구나 귀, 눈, 입, 코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순서로 보자면 맨 앞에 나오는 것이 귀다. 왜 그럴까? 어떤 이비인후과 의사는 이목구비 중에서 귀가 가장 앞에 나오는 것은 잘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자신이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시인이 시를 쓸 때도 무조건 쓰는 것보다 자연의 모든 사물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시적 소재나 시상을 얻는 일이 중요하다. 이렇게 많이 듣고 쓴 시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어 생동감이 넘친다. 시에도 이목구비가 있는 것이다. 시에도 시인이나 독자의 생각을 감각하는 귀가 있어서 시인이나 독자의 목소리에 반응한다. 이렇게 탄생한 시들 중에서 귀를 소재로 쓴 시들을 읽어보자.
은빛 서걱이는 강변에 바람 부는 갈밭, 검은 달이 애드벌룬처럼 기나긴 쇠사슬 끝에 매여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갈대는 여기저기서 단칼에 허리가 꺾인다. 허리 아래 드러난 복두장이의 피 묻은 너털웃음이 비비꼬여 달아난다. 쇠사슬을 절컥이며 절뚝절뚝 달아난다.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앙금으로 남은 귀엣말 시퍼렇게 녹이 슬려 인양된 뒤. ― 강인한,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전문
요즘 SNS 상에는 '대나무 숲' 이라는 페이지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익명으로 자신의 비밀이나 하고 싶은 말들을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공간이라고 한다. 이렇듯 대나무 숲이 비밀을 털어놓는 공간이 된 것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전래설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라 48대 임금인 경문왕은 어느 날부터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어지는 병에 걸리게 되자 임금님의 관모를 만드는 복두장이에게 귀를 가릴 수 있는 왕관을 만들게 했는데, 그 일을 누구에도 발설하지 못하게 어명을 내려서 복두장이는 혼자 가슴앓이를 하다가 끝내 병이 들어서 죽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도림사라는 절의 대나무 숲에 가서 대나무를 보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후 바람이 불 때면 그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흘러나와 화가 난 왕은 대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그곳에 산수유를 심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강인한 시인의 시 역시 “바람 부는 갈밭, 검은/달이/애드벌룬처럼/기나긴 쇠사슬 끝에 매어 있”는 이미지를 통해서 언로(言路)를 잃어버린 복두장이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나무 숲에서야 겨우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었던 “복두장이의 피 묻은 너털웃음”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요즘에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지만, 개중에는 아직도 윗사람이나 상급자에게 “앙금으로 남은 귀엣말”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복두장이들이 있다.
나무는 겨울 들판에 서 있었다 나무는 장신구를 떼어버리듯 사소한 귀들을 떨어뜨렸다 모호한 악기들처럼 나무를 흔들던 잎사귀들이 사라졌다 흔들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던 나무는 늘 귀가 아팠다 허공이 흔들리는 잎사귀들로 꽉 채워져서 나무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세상을 떠돌며 바람이 묻혀온 울음소리들이 나무의 귓속에 소용돌이를 일으키곤 했다 제 몸속의 것이 아닌 울음소리들이 제 울음소리처럼 들릴 때까지 나무는 겨울 들판에 서 있었다 시끄러운 귀들이 죽을 때마다 해바라기가 피고 별이 빛났다 나무는 간신히 한 그루의 텅 빈 귀가 된 것이다 ― 이경임, 「반 고흐의 귀」 전문
서양 미술사에서 ‘귀’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반 고흐이다. 그가 말년에 정신병에 걸려 자신의 오른 쪽 귀를 잘라서 사창가에서 일하던 젊은 하녀 가브리엘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고흐가 그녀에게 자신의 귀를 줌으로써 심한 흉터를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 자신의 살을 선물했다는 위안을 얻으려는, 일종의 무의식적 정신착란 행위로 평가되고 있다. 이경임 시인의 시는 「반 고흐의 귀」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나무를 소재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다. 여기서 나무는 반 고흐의 은유적 대상물로, 이 시는 나무가 가을에 나뭇잎을 떨구는 행위를 귀를 자르는 것으로 보고 나무를 의인화하여 고흐의 불행했던 삶을 시로 형상화 한 것이다. “시끄러운 귀들이 죽을 때마다 해바라기가 피고 별이 빛났다”는 구절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내는 고통 속에서도 ‘해바라기’ 시리즈나 ‘별이 빛나는 밤에’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긴 것을 표현한 것이다. 아마도 고흐는 “제 몸속의 것이 아닌 울음소리들이 제 울음소리처럼 들릴 때까지” 그것들을 미술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흐는 자신의 귀 하나를 버리고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들으려고 “한 그루의 텅 빈 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귀퉁이가 아니라 귀다 입술보다 더 많은 말을 간직한 귀 말없이 나를 읽어 주던 귀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려버리지 않는 귀 그러나 비밀을 옮기지 않을 귀 가볍지 않으나 너무 무겁지도 않은 귀 배신할 리 없는 귀 그래서 함께 여행 중이었던 귀 꿈과 상징으로 가득한 귀 아기 코끼리 덤보처럼 비상할 수 있는 귀 손가락을 거는 대신 나는 그의 귀를 가만히 접는다 잠시 후에 다시 만나! ― 강기원, 「책장의 귀를 접다」 전문 인간의 귀는 때때로 간사스러워서 전해들은 말을 다른 귀로 옮기기도 하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책장의 귀는 “비밀을 옮기지 않는 귀”일 뿐 아니라 “말없이 나를 읽어주는 귀”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입술보다 더 많은 말을 간직한” 책과 대화를 나누고 책으로부터 커다란 위안을 받기도 한다. 특히 여행 중에 읽는 책은 같이 여행을 하고 있는 친구 같아서 더욱 정겹다. 이미 친구가 된 책은 자신의 귀를 살짝 접어도 삐지지 않는다. 책은 그것이 자신과 다시 만나자는 즐거운 약속임을 이미 알고 있다. 더구나 귀가 커서 귀를 날개 삼아 날아다니는 아기 코끼리 덤보의 귀를 가진 책이라면 더욱 환상적인 친구가 아닐까?
- *계간 <시마> 2021년 12(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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