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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영 선생의 《신간회 연구》
1993년경 이균영 선생에 의해 《신간회 연구》라는 책이 출판되었을 때, 자료를 제공한 분에게 “왜 그런 인터뷰를 했느냐?”고 물어보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미 수십년전에 작고하셨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십여년전부터 다른 학자들이 러시아, 북한, 중국 등의 과거 찾아보기 힘든 자료를 살펴보고 “그 책에 오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이 분야도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진술자가 교도소에 몇 번씩 갔다 오고, 중국을 몇 번씩 다녀오고 했는데, 그 무렵의 이균영 교수는 쉽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던 점도 있었던 모양이다.
송나라 사진 서긍의 ≪고려도경≫
서력 1123년경 고려시대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을 남겨 한국사에서 가끔 인용된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한국의 기록문화가 부실할 적에 《중국의 반일열사》들 중 한국과 관련된 기록을 남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들에 대한 귀중하고도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중국의 반일열사 000장군은 니항사건, 1920년 청산리 전투와 일제의 만주 침략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청산리 전투라는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주변에서 지켜봤던 제3자의 입장에서 본 내용을 제공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반당•반혁명 분자 탄압
중국 측의 이러한 제3자의 자료가 쉽게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중국 역시 국공내전과 분열이라는 대립이 있었고, 1950년대의 반당•반혁명 사건, 1958년경 대약진운동, 1966년경 문화대혁명 등으로 쉽게 말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이여송 묘비의 한글
요령성 철령에 만들어진 이여송(李如松)의 가짜 묘만 하여도 묘비의 한문 옆에 작게 한글로 “이여송지묘”를 썼다가 파괴하는 경우가 있었다.
앞으로 한글로 “이여송지묘”를 써넣기 까지는 수차례 파괴와 복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한국의 평가가 어떻던....
그런 이여송은 300~400년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과거는 그런 시대였다.
하물며 반당•반혁명이 당연하던 중국 대륙의 사정상 한국에서 공산주의 계열과 관련이 적은 《반일열사》를 먼저 언급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최근 반일열사로 인정
한국에 알려지기로는 동북공정 사업 등이 진행되는 1990년대에서 ~ 2000년대에 들어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만주사변, 지나사변 등에서 활약했던 국민당계 등의 반일열사들을 공식 도서 등에 기재하기 시작하였고
그제서야 중국의 『백도백과』를 비롯한 인터넷 사이트에도 확인이 되었다.
이불 뒤집어 쓰고도 듣지 못했던 중국측 반일열사들을 자유롭게 열람할 기회가 온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세상인가 !!!
독립운동사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1920년 니항사건, 1920년 러시아령 연해주 4월 참변, 독립군의 간도•만주•연해주 이동시기, 국경선을 이루던 흑룡강(아무르강)과 우수리강, 송화강, 눈강 등 지류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제3자 입장에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는
중화민국 해군상장 진계량(중국어 발음 : 첸지량(陈季良). 다른이름 : 진세영) 장군의 일대기를 2편에 걸쳐 간단히 살펴본다.
진계량(陈季良, 혹은 개명전 이름: 진세영(陳世英), 중국식 발음 : “첸지량”, 1883 ~ 1945)
진계량 (진세영) 중국명 : 첸지량 장군
생애 요약
진계량(중국발음: 첸지량)은 1883년경 복건성 복주(푸저우) 출신이다.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해군 명장이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불과 20~30년전에서야 반일열사로 인정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전에도 한국 『독립운동사』와 『신문보도』 등에서는 이미 그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1920년 니항사건에서 생떼를 쓰던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전멸한 것을 톱뉴스로 보도한 1920년경 국내외의 신문들
진세영(진계량)은 청나라 시대 거의 처음으로 설립된 청나라 정규 해군사관학교 격인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남경, 복건, 아무르강, 하르빈, 양자강 일대에서 활약하여 중국 현대 전쟁사의 중요 전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진세영(훗날의 진계량)은 남경의 강남수사학당(1890년설립, 1912년 해군군관학교로 개칭)을 졸업하고 해용함(海容艦)의 1등 항해사를 역임했다.
1911년 10월 10일경 발생한 무창봉기에서 그는 혁명군을 지지하였다.
강형함(江亨艦) 함장과 강방함대 분함대 영대장(領隊長)을 역임했다.
니항사건(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기간 동안 아무르강 하류 및 중국 만주지방에서 일제 침략자에 대한 러시아 볼셰비키의 작전을 지원했다.
니항사건 이후에도 계속 해군에 복무하였다.
해용함 함장, 해군 제 1함대 사령, 해군부 상무차장을 역임했다.
1937년 항일전쟁 당시 일본의 "3개월내 중국 패망"의 망상을 깨기 위해 강음해전(江陰海戰)에 참여했다.
1945년 사망했으며, 사후 해군 상장(海軍上將)에 추증되었다.
기본 정보
중국어 이름 : 진계량(진세영에서 진계량으로 개명, 陈季良, 중국어로는 “첸지량”으로 발음됨)
생년월일: 1883년
고향: 복건성 복주(福建福州)
국적: 중국인
사망 연도: 1945년
직업: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해군 상장(國民革命軍海軍上將)
학력: 남경 강남수사학당(南京江南水師學堂)
생애 (人物生平)
개요 (人物概述)
진가(陳家)는 대대로 학자 집안이었고, 과거에는 7명이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진계량의 증조부 진홍창과 할아버지 진익모(陳翼謀)는 모두 지방의 향시에 합격한 거인(舉人)이었다.
진사과에는 급제를 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아버지 진경하는 강소성 임지현의 지현(한국의 군수와 유사한 벼슬)이었다.
진계량의 어머니 채씨였다.
4명의 아들과 딸이 있었고 진계량은 막내였습니다.
진세영(진계량) 형제는 모두 공부하고 과거 시험을 쳤지만, 진계량만 홀로 남경의 강남수사학당에 입학하였다.
1905년 강남수사학당 4기 운행반(屆駕駛班)을 우등으로 졸업했습니다.
강남수사학당의 졸업생으로는 소설가 노신(魯迅, 1881~1936)이 있다.
노신은 청나라 말기 육군소학, 육군중학, 군관학교를 거치는 장교와 군인의 길을 가지는 않았다.
1911년 무창봉기 가담
졸업 후 진세영은 "건안(建安)" 및 "해용(海容)"과 같은 선박을 경험했다.
1911년 무창 봉기 동안 "해용(海容)" 함포의 장교였던 진세영(陳世英)은 유가묘(劉家廟)에 대한 포격을 지휘하였고, 공화국을 지지하는 해군의 첫 번째 포격을 가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용호
중화민국 군함 해용호
강형함 함장
1914년, 진세영은 "강형함"의 함장이 되었다.
강형함
강방함대 함선
1919년 ~ 1920년경 아무르강 하류에서 발생한 니항사건(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옙스크 사건) 기간 동안 그는 "강형함(江亨)" 함선의 곁포 1문, "이천(利川)" 함의 함포 1문을 함포탄 21발과 함께 볼셰비키 트리피츤이 지휘하던 유격대에게 빌려주었다.
트리피츤이 지휘하던 볼셰비키 유격대는 이 함포를 이용해 니항의 일본 영사관을 포격하여 수십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130명 이상을 생포했다.
나중에 일본 정부는 "니항사건(廟街事件)"에 대해 중국 정부에 교섭에 응하라고 요구하였다.
1922년 해용(海容) 함장으로 진급하였다.
1923년 1월 해군 대령(당시 중국군 상교(上校)는 보통 대령에 해당된다)로 진급하였고, 1924년 5월 해군소장(海軍少將)으로 진급한다.
1925년 2월 진계량은 해군 1함대 사령관과 푸젠•샤먼 해군 경비 사령관으로 진급했다.
중화민국 장개석 정권의 북벌 기간중 용담전역(龍潭戰役)에서 손전방의 군대를 3시간 동안 포격하여 손전방군을 물리쳤다.
1928년에는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32년에는 중화민국 해군 정무 차장 겸 제 1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참전
1937년 "7•7 사변(七七事變, 중일전쟁)"이 발생했을 때, 진계량은 외국 참관자들이 "1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비극적인 해전"이라고 부르는 강음해공전(江陰海空戰)을 지휘하였다.
중국 해군 1함대 4척의 군함을 이끌고 2개월여 동안 일본군 300여대의 전투기와 70여척의 군함과 유혈전을 벌이고 20여 대의 적기를 격추하였다.
강음해전 이후 진계량은 해군 중장으로 진급되었다.
강방요새(江防要塞) 조직
1940년에 그는 해군의 제1 교열조 조장(校閱組組長)이 되어 중일전쟁의 요충지인 강방요새(江防要塞), 해군 학교 및 기타 기구를 조직했다.
1944년에는 총사령부참모장 겸 해군 제1함대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5년, 62세의 나이에 오래된 부상의 재발로 사망하였다.
진계량의 부인은 남편의 유언에 따랐고 진계량을 위해 시멘트 관을 만들어 중경의 도전리(稻田裡) 언덕에 안치하였다.
1945년 5월 25일에 사후 해군 최고 계급에 해당되는 해군상장(海軍上將)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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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항사건(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옙스크 사건)
1920년 니항사건 추모비
1917년 10월 러시아 무산혁명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레닌 정부는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세계사를 뒤흔든 러시아 혁명으로 중화민국 역시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해방된 러시아 공산 정부는 짜르 러시아, 백파 콜차크 등 친일파가 장악했던 흑룡강(아무르강)의 항행권을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중국측의 주장으로 보인다. 레닌 정부가 이 무렵 여러 가지 양보를 닥치는 대로 한 것은 사실이다.)
중화민국 북경정부의 길림•흑룡강 일대 강방함대 창설
1917년 7월경, 중화민국 북양정부는 잃어버린 아무르강 일대의 운행권을 다시 확보하고,
국경과 만주일대의 변방 항운을 보호하기 위해 길•흑강방주비처(吉黑江防籌備處)를 해군 총사령 직속으로 신설하고, 하르빈에 사령부를 두고, 제2함대에서 포함4척과 상선에서 개조한 함선 3척을 이전하여 함대를 구성하기로 하고, 사령관에 왕숭문(王崇文, 1871~1935), 참모장에 심홍열(沈鴻烈, 1882~1969)을 임명하였다.
아무르강 하류 니항 일대의 일본군과 백파의 만행이라고 떠도는 사진???
지나사변 참가 중국해군 심홍열(沈鴻烈, 1882~1969) 장군
(당시 러시아혁명으로 인한 국경선 불안, 마적과 온갖 비적떼, 밀수꾼, 밀렵꾼, 일제 간첩 등이 들긇던)
흑룡강(아무르강)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길•흑강방함대(吉黑江防艦隊)는 1922년 북양정부 소속에서 친일 마적 출신의 봉천 장작림(張作霖) 군벌에게 이전되었다.
(아마 온갖 마적과 비적떼를 견디다 못한 친일마적 출신 만주군벌 장작림의 요청도 있었을 것이다.)
선박 부족으로 해군부는 2함대의 포함 3척 "강형함(江亨)", "이첩(利捷)","이수(利綏)"와 무장 예인선 "이천(利川)" 을 합한 4척으로 북상함대(北上艦隊)를 구성하여 동해를 거쳐 사할린섬 타타르 해협을 통과하여 아무르강 하류 쪽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아무르강 일대 중화민국 강방함대
만주지방 친일파 장작림군벌의 동북해군
1920년대 무렵의 동북해군과 아무르강, 송화강, 우수리강 일대 강방함대
그러나 러시아측 기록에는 니항의 중국 함대는 수송선(보급선)까지 있어 5척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수송선 정안(靖安)함은 아무르강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니항에 머무르다 동해를 통해 중국으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중국 해군의 실상
이 무렵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해군은 이름만 거창하고, 돈이 없는 조직이었다.
일본, 미국, 러시아 등의 해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청도에서 노획한 독일 군함을 활용해야 하는 시기였다.
해군 병사들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군함건조와 군비확충은 커녕 함대의 일일 지출도 유지가 어려웠다.
그러니 국경을 이루는 아무르강, 송화강, 우수리강 일대의 경비가 어떠했는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중화민국과 일본의 동맹관계
니항사건 당시 중화민국과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군이었으며, 중화민국 북경정부 역시 수천명의 육군을 연해주에 시베리아 간섭군으로 파견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과 중화민국 북경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시베리아 간섭에서 같은 편이었다.
중화민국은 독일과 싸우는 유럽쪽으로도 비무장 노동력을 파견하였다.
제국주의 침탈의 시기, 중국 노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 등 여러 곳에 많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가 식량난과 인력 부족에 시달리자 전쟁물자와 식량, 노동력 지원 등을 위해 약 50만여명의 중국인이 러시아로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중 일부는 러시아 내전 당시 볼셰비키 편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러고 니항 인근은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어장으로, 한국의 어선과 천연가스•석탄•유전사업까지 진출하고 있으며, 당시에도 다수의 중국인 소유 배들이 머무르고 있었고,
이 무렵 중국인 역시 니항에서 어업•상업에 진출하고 있었으나,
일제 침략군이 니항을 점령하자 중국인 거주민 역시 조선인들처럼 차별대우를 받기 시작하였다.
물론 니항의 일본인 상점에 일하고 일본영사관 협력단체를 결성해 끝까지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충성한 자도 있었을 것이다.
(※참고 도서 : 구트만 저, 『니항에서의 죽음』, 영문번역 도서명 『니항의 파괴(THE DESTRCTION OF NIKOLAEVSK-ON-AMUR)』에 따르면 일본군은 진정한 구세주였다.)
4척의 군함 중 가장 큰 함선은 배수량이 550톤인 "강형함(江亨)"이며 선장은 진세영(나중의 진계량)이었다.
그는 푸젠(복건) 출신이며 청나라의 해군사관학교 격인 강남수사학당을 졸업하였다.
제2함대가 주둔하고 있던 상해에서 길림•흑룡강방함대(吉黑江防艦隊)가 주둔할 하르빈까지는 험난한 항해였다.
수송선 정안(靖安)의 니항까지 동행
동해를 거쳐 북상하는 선박의 바람과 파도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기 위해 2함대는 선박을 개조하였다.
그리고 특별 수송선 '정안(靖安)'을 파견해 함대를 견인 및 호위했다.
1919년 7월 21일, "정안"의 함장 감련겸(甘聯趝)이 함께 영솔하고, 5척의 북상 함대는 상해 인근 오송 항구(吳淞港)를 출발하여 북쪽으로 항해하였다.
중화민국 북상함대 5척의 니항 도착
북상 함대는 황해, 동해를 건너 타타르 해협을 건너,
거의 두 달에 걸친 험난한 항해 끝에 1919년 8월 25일경 혹은 9월 초 마침내 니항(니콜라예프스크)에 도착해 흑룡강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아직 흑룡강은 얼기 한참 전이었다.
중국 군함 4척이 도착하였음을 보도한 사할린 주의 독립운동가 신문 '국민성'
(수정 및 작성중입니다.)
첫댓글 최근에 들어 만주사변,지나사변 등에서 활약했던 국민당계 반일열사들을 공식 도서에 기재하기 시작했군요 대표적 인물이 진계량이군요 강형함의 배수량이 550톤 밖에 안됐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920년도 중국의 550톤 군함이면 매우 큰 군함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룡기2 ㅇㅇ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