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기완은 왜 ‘이야기’와 ‘우리말’에 목숨을 걸었나 ▷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본, 'Netizen Photo News' 는 가입 필요없이 손님께서도 연결에 넣어두고 날마다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 있음 '한국 네티즌본부'
◇ 백기완 선생은 시 ‘묏비나리’의 첫구절에서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라고 호소하고 있다.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시는 1980년 12월 차가운 감옥에서 만들어졌다.1979년 YWCA위장결혼식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구속된 백 선생은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듯 했던 그 순간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 사진:> 16일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향년 89세.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대부터 농민·빈 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 허리를 다쳐 감옥에 쓰러지고, 종이와 펜조차 없던 그때 머릿속으로 한 자, 한 자 되뇌이며 지은 그 시는 이후 병원에 입원한 뒤 글로써 다시 옮겨질 수 있었다.“한발띠기”에 목숨을 걸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되뇌이며 “산자여 따르라”는 / 백 선생의 외침/‘묏 비나리’에 등장하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라는 구절은 소설가 황석영과 작곡가 김종률의 손을 거쳐 1982년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탄생하게 됐다.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되뇌이며 “산자여 따르라”는 백 선생의 외침은 어떤 시련과 절망 앞에서도 당당하게 싸워나가던 그의 삶과 정신을 느끼게 한다. 1932년에 태어나 찬란해야할 청춘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보낸 그는 많은 이들이 미국, 일본 등 강대국에 희망을 걸던 그때 민족의 주체성과 우리 민중의 힘을 믿었다. 민중의 힘, 민족의 힘을 믿으며 모두가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꿨다. 그의 이런 정신은 지난 2019년 백 선생이 마지막으로 출간했던 책 ‘버선발 이야기’에 잘 담겨 있다. “이것은 자그마치 여든 해가 넘도록 내 속에서 홀로 눈물 젖어온 것임을 털어놓고 싶다.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니나(민중)를 알았다. 이어서 니나의 새름(정서)과 갈마(역사), 그리고 그것을 이끈 싸움과 든메(사상)와 하제(희망)를 깨우치면서 내 잔뼈가 굵어왔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너 나 없이 함께 일하고, /너 나 없이 함께 잘사는 ‘노나메기’/2019년 2월 13일 열린 ‘버선발 이야기’ 기자 간담회에서 백 선생은 “내가 죽으면, 이런 거 쓸 사람도, 핏대 세울 이도 없다”며 자신이 던진 말뜸을 새겨달라고 당부했다. ‘버선발’은 영웅은 아니지만, 너 나 없이 함께 일하고, 너 나 없이 함께 잘사는 ‘노나메기’를 이루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간다.
◆ “통일, 통일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통일하지 말자는 국가보안법을 두고 무슨 통일이냐” ▷ “나는 이 썩어문드러진 구조를 뒤집어엎자는 거야. 자본주의를 향한 큰 소리, 자본주의를 향한 한바탕이 버선발 이야기다. 돈 좀 땅 좀 있다고 물려서 먹고 사는 놈 안 좋다. 이자놀이 해먹는 놈 안 좋다. 그럼 뭘 해야 하나. 돈이 있든 없든 머슴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너나 없이 다 일하고, 모두 올바르게 잘 살자는 것이다. 본, 'Netizen Photo News' 는 가입 필요없이 손님께서도 연결에 넣어두고 날마다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 있음 '한국 네티즌본부'
◇ 내가 속한 나라만 잘 살면 안 된다. 사람사는 세상 고루 잘 돼야 한다는 걸 깨우쳐야 한다. 짐승을 죽이고 사람만 잘 살자는 것도 아니다.”어떤 경계나 서로 다르다며 편가르기 없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꾼 그에게 분단을 절대 진리로 여기며 우리의 형제를 적이라 부르게 하는 국가보안법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악법이었다. <△ 사진:> 2019년 2월 13일 열린 ‘버선발 이야기’ 기자 간담회
○··· 우리가 늘 버릇처럼 말하는 통일도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헛소리일 수밖에 없다고 백 선생은 늘 강조했다. 백 선생은 지난 2007년 10월 18일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선언’ 기자회견에서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않고는 전쟁종식과 평화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없다”면서 “통일, 통일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통일하지 말자는 국가보안법을 두고 무슨 통일이냐”고 호통을 쳤다.국가보안법을 없애고 통일을 이루는 건 그에게 평생의 과제였다.
◇ 지난 1989년 백 선생은 시집 ‘백두산 천지’를 펴내며, 머리말에서 “분단을 틀어쥐고 있는 제국주의와 그 세력의 앞잡이”에 맞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해방통일의 어기찬 물결에 끝까지 따라 붙어 이 민중에 의한 해방통일 민족통일이 완결되는 것을 내 생애의 과업으로 다할 것임을 다시 한 번 맹세”한다는 다짐을 싣기도 했다. <△ 사진:> 여야 정당들, 백기완 선생 타계 일제히 애도 “고인의 정신 이어받겠다”
○··· 이런 그의 다짐은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민중에 의한 해방통일을 걱정하게 했다. 지난 2018년 4월 23일 서울 혜화동 서울대학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은 백 선생은 목숨이 오가던 그 순간 수술대에 오르기 전 문재인 정부에 당부의 메시지를 남겼다.“요즈음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다가서는 그 태도, 방법 다 환영하고 싶습니다. 생각대로 잘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 보태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에 주체적인 줄기였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운동의 그 맥락위에 서있다는 깨우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 촛불혁명이 뭐요? 우리 한반도의 참된 평화요, 민주요, 자주통일,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통일이었습니다. 그 맥락위에 서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재인 정부, 민중적인 자부심과 민중적인 배짱을 갖고 소신대로 한번 해보시오!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진 않겠지만 그저 병실에서 한마디 남깁니다.”
◆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달동네 ‘빨갱이’ 소리까지 들으며 살려낸 우리말 ▷ 통일운동가이자 민중운동가였던 백 선생은 평생 우리옷을 입으며 우리 민중의 문화를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다. 특히 우리말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달랐다. 지난 2016년 열린 ‘두 어른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의 일화는 백 선생의 우리말 사랑을 잘 보여준다. 본, 'Netizen Photo News' 는 가입 필요없이 손님께서도 연결에 넣어두고 날마다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 있음 '한국 네티즌본부'
◇ 그 자리에서 백기완 선생은 기자들에게 ‘서각(書刻)’이라고 하지 말고 ‘새김판’이라고 부르라고 호통을 쳤다. 문정현 신부가 칼로 새겨 만든 작품을 두고 했던 말이다. ‘판’이라는 말이 한자가 아니냐는 질문엔 ‘들판’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판’도 우리말이라고 덧붙였다. <△ 사진:> 백기완(왼쪽)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 문정현 신부가 2016년 6월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린 '시대의 2인전 두어른'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뉴시스
○··· ‘서각(書刻)’은 글씨를 무언가에 새긴다는 말인데, 막상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다. 하지만 백 선생의 ‘새김판’이란 낱말을 들으니 그 말을 알지 못했지만 듣는 순간 무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백 선생은 영어나 한자를 쓰지 않고도 글을 쓰고, 말을 한다. 2019년 열렸던 ‘버선발 이야기’ 기자간담회에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국어사전에조차 안 나오는 단어가 있어서 ‘임꺽정 용어사전’이라는 책까지 나왔다. ‘버선발 이야기’에도 용어 해설이 나온다. 영어와 한자를 쓰지 않고 이렇게 순우리말로 책을 엮으신 게 놀라웠다.
이런 언어를 어떻게 체득하신 건지 궁금할 정도”라며 “선생의 삶, 사상의 밑바탕에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에게서 전해진 민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평가했다.요즘 흔히 쓰는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등도 그가 만들거나 찾아낸 순우리말이다. ‘달동네’라는 말도 처음 만든 이가 백 선생이었는 데 이 일로 인해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백 선생은 지난 2008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50년대 초 부모 잃은 아이들을 모아 야학을 열었을 때의 일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 명창 임진택 선생:“백기완 선생의 ‘이야기의 미학’은 앞서의 미적 범주들을 다 포괄하면서도 핵심적으로는 부당한 압제로 인해 깨져나간 민중의 삶과 고통에 분노하고 그 삶과 꿈을 다시 불러 일으켜 세우는 ‘분노의 미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마침 눈이 오고 달이 뜨니까 깨진 잿더미가 그렇게 예쁘더라고. ‘달동네’란 말이 떠올랐고, ‘달동네소식’이란 유인물을 만들어 돌렸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끌고가 거꾸로 매단 채 발로 차며 ‘빨갱이’로 몰았다. ‘너 빨갱이지!’ ‘내가 왜 빨갱입니까?’ ‘달동네라고 그러면 되냐 하꼬방이라고 그래야지’ ‘그건 왜말인데요?’ ‘왜말 싫어하는 거 보니까 빨갱이야’ 일주일 동안 실컷 매 맞고 나왔다.”
◇ 빨갱이로 몰려가면서도 실컷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여러 책을 지명 또는 이름과 숫자 등을 빼면 순우리말로 가득한 책을 연이어 펴낸바 있다. 이렇게 우리말을 사랑하고, 아끼는 백 선생이지만, 그는 한때 ‘영어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 사진:>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연설하는 백기완 선생. 1987.11.01ⓒ민주운동화기념사업회
○··· 백 선생의 친구인 박동규 선생은 자서전 ‘배추가 돌아왔다’에서 “내 나이 열아홉, 백기완은 스물. 그 시절 백기완은 청년운동가이자 영어 천재로 유명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인데도 영어학원 강사로 활약했고, 길 가며 영어 단어 외우느라고 전봇대에 부딪혀 코피를 줄줄 흘린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백 선생은 우리 시대의 뛰어난 이야기꾼이기도 했다.백 선생이 풀어내는 이야기엔 마치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듣는 듯 살아 꿈틀거리는 민중의 날것 그대로의 언어와 민중이 오랜 시간 살아가며 깨우쳐온 깨달음이 담겨 있다.
날것 그대로의 민중의 언어, 그 진수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황해도에서 구전된 ‘장산곶매’다. 소설가 황석영이 대하역사소설 ‘장길산’ 첫머리에 짧게 인용해서 소개했지만, 이야기의 진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건 1979년 나온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책에 실린 장산곶매 이야기다. 장산곶매가 대륙으로 사냥을 떠나기 전 밤새 부리질을 해 자기 둥지를 부순다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비장한 결단의 이야기로 가슴에 전해졌다.
판소리 명창 임진택 선생은 지난 2012년 쓴 ‘분노의 시대 분노의 미학, 민중 이야기꾼 백기완’이란 글을 통해 “백기완 선생의 미학은 대체 어떤 미학인가? 흔히 미적 범주를 얘기할 때 장엄이니 비장이니, 숭고미니 우아미니, 골계니 해학이니 풍자니 하는 등의 범주를 말하곤 하는데, 선생의 이야기는 대체 어떤 범주의 미를 관통하고 있는가? 나는 그것이 ‘분노’라고 생각한다. 백기완 선생의 ‘이야기의 미학’은 앞서의 미적 범주들을 다 포괄하면서도 핵심적으로는 ‘부당한 압제로 인해 깨져나간 민중의 삶과 고통에 분노하고 그 삶과 꿈을 다시 불러 일으켜 세우는’ ‘분노의 미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 산새, 들새들이여. 낱알은 물고 가되 울음은 떨구고 가시라.” ▷ 본, 'Netizen Photo News' 는 가입 필요없이 손님께서도 연결에 넣어두고 날마다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 있음 '한국 네티즌본부'
◇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른 세상은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바꾸고, 그렇게 함께 싸우며 희망을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한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린다. <△ 사진:>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2019년 2월 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씨의 영결식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김슬찬 기자
○··· 돈(자본)이 사상(주의)이 되어 지배하는 사회는 피도 눈물도 없다. 백 선생은 다른 세상, 노나메기 세상을 현란한 이론의 언어가 아니라 민중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장산곶매’ 이야기는 죽을 각오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전사들의 삶이 담겨 있고, 다른 물고기에게 먹히던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 맞서 싸우며 용이 되는 ‘이심이’ 이야기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강자의 폭력과 지배를 민중의 힘으로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준다.
‘골굿떼 이야기’는 고깃국에 쌀밥을 맘껏 먹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중의 바람을 담고 있다.민중이 꾸는 꿈은 막막하기만 하다. 작디 작은 ‘이심이’는 언제 용이 되고, 장산곶매는 언제 독수리와 구렁이를 물리치고,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를 것인가? 역사는 어둡고, 갈 길은 막막해 보이지만, 백 선생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의 삶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각오가 된다. 백 선생은 시 비문(碑文)에서 이렇게 말했다.“익은 낱알은 죽지 않는다. 땅으로 떨어질 뿐이다. 산새, 들새들이여. 낱알은 물고 가되 울음은 떨구고 가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