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드라이져의 ‘생애’
가족이 12명이나 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독일 태생의 편협한 가톨릭교도였던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은 나머지 드라이저는 뒷날 종교를 버렸다. 그러나 오하이오 출신의 어머니는 교육을 못 받았지만 인자하여 그는 항상 애정을 가지고 회상했다. 가난해서 여러 번 이사했기 때문에 인디애나 주의 여러 곳에서 공부했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한 선생의 도움으로 간신히 인디애나대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할 수 있었다. 그뒤 시카고,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 피츠버그에서 기자생활을 하다가 1894년 뉴욕에 갔다. 거기서 〈워배시 강둑에서 On the Banks of the Wabash〉 등을 작곡해 성공한 대중 작곡가인 형 폴 드라이저의 도움을 받아 잡지 기사를 쓰게 되었다. 그는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했으며, 농부 같은 촌스러움이 오히려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고 T. H. 헉슬리, 허버트 스펜서, 다윈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변경할 수 없는 계속적인 진화의 산물이라고 믿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난 새라 화이트와 1898년에 결혼했으나 그의 방랑벽과 침울한 기질 때문에 결혼생활은 곧 어려움에 부딪혔다.
*〈시스터 캐리〉는 1900년에 출판되었으나 456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젊은 소설가 프랭크 노리스와 영국의 아널드 베넷, H. G. 웰스 등은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으나, 인기가 곧 시들자 좌절감에 빠진 나머지 제정신을 잃었다.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굶어죽을 뻔하기도 했으나 다행히 인정 많은 형 폴이 그를 찾아낸 덕분에 살아났다. 이 작품이 가진 문제는 여주인공의 비도덕성보다는 그녀가 평범한 가정 출신이며 타락에 대해 처벌받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신의 누이가 겪은 일을 포함해 가족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스터 캐리〉는 그 당시까지 문학의 소재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던 서민들의 역경과 사생활을 그려냈는데, 투박한 문체에 배어 있는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혁신적이다.
자신의 작품이 인정을 받지 못하자 편집일에서 위안을 얻었으며, 1907년에는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버터릭잡지사의 편집주간으로서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 잡지는 그의 소설을 질식시켰던 바로 그 금기들을 포용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기고자들의 점잔빼는 문체를 꼬집어서 비평했다. 이 잡지의 기고가 중에는 뒤에 친구로 지낸 비평가 H. L. 멩켄도 있었다. 1910년 연애 스캔들 때문에 해고된 뒤 쓴 2번째 소설 〈제니 게르하르트 Jennie Gerhardt〉(1911)는 멩켄의 찬사를 얻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그를 고무했다. 한편 드라이저는 파렴치하면서도 성공한 사람들에게 매료되었으며, 결국 철도왕 찰스 T. 여크스의 모험적 인생을 소재로 〈자본가〉·〈거인〉을 쓰게 되었다.
어려움을 헤치고 성공의 문턱에 도달한 듯했지만 그의 예술적·낭만적 수고의 문학적인 재창조라 할 〈천재 The Genius〉(1915)가 1916년 '뉴욕 악추방 협회'에 의해 발매금지 당함으로써 성공의 문은 그의 면전에서 굳게 닫혀버렸다. 이러한 검열에 반대하는 오랜 투쟁에 멩켄도 충실히 동참했으나, 드라이저는 생계 때문에 다시 잡지에 글을 실어야 했다. 아내와 헤어지자 전위파 문학가·미술가·정치가들의 안식처인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에서 검소하게 살았다. 그곳에서는 솔직한 글을 거부한 사회에 대한 격분뿐 아니라 애정행각, 미신 숭배 등으로도 유명해졌다. 친구들 가운데에는 시인 에드가 리 매스터스와 작가 플로이드 델, 셔우드 앤더슨, 조지 진 네이선, 리웰린 포이스, 존 C. 포이스 등 또다른 반항아들이 있었다. 유럽을 여행한 뒤 자전적인 〈40세의 여행자 A Traveler at Forty〉(1913), 자신이 태어난 주(州)를 자동차로 여행한 뒤 〈인디애나 주민의 휴일 A Hoosier Holiday〉(1916) 등을 발표했으며, 1916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유희 Plays of the Natural and Supernatural〉를 썼으나 모두 돈벌이가 되지는 않았다. 그밖에도 비극 〈도공(陶工)의 손 The Hand of the Potter〉(1918), 단편집 〈자유 Free〉(1918)·〈12인 Twelve Men〉(1919), 철학적인 글 〈헤이 러바덥덥 Hey Rub-a-Dub-Dub〉(1920), 내용의 일부가 1913년 〈뉴스페이퍼 데이스〉에 실린 자전적인 〈나에 대한 책 A Book About Myself〉(1922), 뉴욕을 묘사한 〈대도시의 빛깔 Color of a Great City〉(1923) 등을 썼으나, 어느것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전도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1925년 그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소설을 발표했다. 그것은 뉴욕 주에서 발생한 유명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아메리카의 비극〉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한 젊은이가 어쩔 수 없는 사회 환경으로 살인까지 하게 되는 내용을 다룬 〈아메리카의 비극〉은 즉시 호평을 받았고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은 극화되어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었으며,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어 그가 전에 누려보지 못한 인기와 부를 안겨주었다. 한국에서는 〈젊은이의 양지〉라는 제목으로 그 영화가 소개되었다. 비평가 조지프 우드 크러치는 이 작품을 '우리 시대 최고의 미국소설'이라고 격찬했다. 전에는 그를 혹평한 비평가들도 그의 문제점이었던 구문과 어법이 이 작품에서는 향상되었다고 평했다. 셔우드 앤더슨은 미국인들에게 이 작품을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요컨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며 사나이로서 삶에 대해 진정한 애정으로 가득 찬 사람과 소위 문필가라고 자부하며 요령 피우는 말재간꾼들이 어떻게 다른지 보시오."
그리하여 드라이저는 그리니치빌리지를 떠나 멋진 아파트와 시골집을 갖게 되었고 화려한 옷도 사는 등 상승세를 타는 멋지고 지적인 문학가가 되었다. 소련을 방문했으나 자신의 기계론적 철학으로 인해 사회적 발전의 가능성을 거의 보지 못한 채 회의적인 〈드라이저 러시아를 보다 Dreiser Looks at Russia〉(1928)를 발표했는데, 소로시 톰슨이 러시아에 대해 쓴 책을 명백히 표절한 대목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 싱클레어 루이스와 분쟁에 휩싸였다. 〈사슬 Chains〉(1927)·〈여자들의 회랑 A Gallery of Women〉(1929)은 그동안 써놓았던 단편소설과 스케치를 모은 책이다. 이제 그의 왕성한 창작 시기는 지나버렸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종교가 해결하지 못하는 영원한 신비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어서 과학자들과 교류했다. 한편 첫번째 아내와 이혼하지 않은 채 1920년부터 아름답고 그를 숭배하는 재종(再從) 헬렌 리처드슨과 살았는데, 헬렌은 그의 다른 애정행각들이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한 정신적인 자극이며 천재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참았다고 한다.
1929년의 시장경기 쇠퇴와 잇따른 공황으로 수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치스러운 생활을 절제해야만 했다. 시집 〈박자 맞춰 읊은 기분 Moods, Cadenced and Declaimed〉(1926)은 922부가 팔렸고, 같은 해에 발표한 자전적 작품 〈새벽 Dawn〉도 그 정도밖에 팔리지 않았다. 일관성이나 학문적 논리에 매달리지 않는 그는 최근까지 배척해온 공산주의와 기타 사회개혁을 위한 구상에서 선(善)의 실현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미국인의 실직과 부의 편중에 분개했으며 사람들에게 때로 무분별하기도 했지만 사회의 약자들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가졌다. 그의 결정론적인 철학에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사회저항에 참여하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쳤기 때문에, 오랫동안 계획한 소설 〈성채 The Bulwark〉·〈금욕주의자 The Stoic〉의 집필을 보류했으며 거의 글을 쓰지 못했다. 1920년대의 문학적 영웅이었던 드라이저는 1930년대에는 거침없이 주장하는 급진적인 개혁가로 변화했다. 그러나 그는 당의 노선에서 워낙 자유로웠기 때문에 미국 공산당은 여러 해 동안 그의 명성만을 이용하다가 좀더 순응적인 당원들의 감독하에서 당원의 자격을 주었다. 또한 그뒤 소련은 그곳에서 팔린 그의 작품의 인세로 3만 4,600달러를 주었다.
1939년 드라이저는 헬렌과 함께 할리우드로 옮겨가 자신이 경멸해온 자본주의 체제에서 초기 작품을 영화제작용으로 팔기도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이따금 정부의 부당함을 비난하는 논평을 출판, 직접 돈을 들여 우편으로 배포하기도 했는데 〈미국은 구제할 만한 가치가 있다 America Is Worth Saving〉(1941)도 책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긴 논평이었다. 오랜 친구인 멩켄을 비롯한 옛 친구들과 소원해졌고, 새 친구들을 사귀었으나, 캘리포니아의 생활은 과거와의 결별이었다. 1944년 첫번째 아내가 죽자 자신을 몹시 사랑했으나 사랑받지 못한 헬렌과 비밀리에 결혼했다. 이 결혼은 그녀에게는 사랑의 승리였을 것이나 그의 요란한 애정행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의 마지막 소설이며 죽은 뒤에 출판된 〈성채〉(1946)·〈금욕주의자〉는 지친 상태에서 급히 씌어진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