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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허영엽 신부
초등학교 때 집 근처 인적이 뜸한 곳에 작은 움막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방물장수 할아버지와 장애를 가진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무표정한 얼굴에 말수도 적은 할아버지를 무서워했고 함께 산다는 딸을 아무도 본적이 없어 여러 가지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움막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근처에 가지도 않았지요.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다가 막 움막에서 나오시는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엄마, 여긴 웬일이야?”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지만 빨랫거리를 손에 든 어머니는 빙그레 웃기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주 그 움막에 들러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의 딸을 목욕시켜주고 빨래도 해주셨던 것입니다. 얼마 후 움막집 딸이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차분하게 임종대세를 주신 후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혀 장례를 치르도록 하셨습 니다. 성당 신자들이 와서 연도도 바쳤습니다. 며칠 뒤 장례가 끝나고 할아버지가 우리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딸이 몹쓸 병에 걸려 수십 년을 방안에서만 지냈는데 아주머니 덕택에 마지막 가는 길에 호강했습니다.”
어머니는 별말 없이 그냥 미소만 지으셨습니다. 나중에 할아버지도 세례를 받고 주변 사람들도 성당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네의 친구들도 더 이상 할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께서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참된 삶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쁨과 자유, 평화와 행복을 한껏 누리면서 사는 삶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성실히 걸어갈 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올바르고 안전한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을 안다면 이미 성공적인 삶을 시작한 셈이지요.
“나는 길이다.” 다행히 예수님께서 스스로 길이라고 하시며 그 길을 자세하게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길은 한 마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길을 열심히 가면 자연히 진리와 생명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주님을 알게 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길을 충실히 가는 신앙인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바로 주님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올바른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
들이 우리를 통해 주님의 진리와 생명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그 ‘길’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지나가는 걸인이라도 끼니를 챙겨주셨던 어머니에게서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지금도 가만히 눈을 감으면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항상 묵주를 손에 쥐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기도하셨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의정부]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조원행 신부
찬미 예수님!
시끄러웠던 봄꽃의 향연이 끝나고 이제는 차분하게 그 깊은 향기를 음미하는 봄의 한복판입니다. 나른해지는 봄의 오후가 급하기만 한 시간의 흐름을 여유로운 머무름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따가운 햇살이 이런 봄의 여유로움을 사치스럽다고 치부할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마음 한편으로 직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상의 직감으로 우리는 많은 미래를 준비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일상 삶을 영위하던 제자들은 놀라운 체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조건부로.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가슴이 메어질 정도로 답답해진 예수님이셨지만 다시 천천히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당신을 통해서 그 원하던 하느님도 뵈올 수 있는 것이고, 당신 안에 이미 머무르시고 계시는 하느님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고, 반드시 당신의 길을 따라 걸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재차 삼차 자상하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큰 위안의 말씀으로는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오로지 그분을 믿기만 하면, 그리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걷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는 철석같은 약속인 것입니다.
그분이 가시는 길은 바로 우리의 일상 삶입니다. 그 어떤 특별한 길도, 놀라운 체험의 길도, 또는 영화 같은 허황된 길도 아닌 그저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는 우리의 일상 삶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상 삶이셨던 갈릴래아로 가서 나를 기다리라 하신 말씀 그대로, 우리도 우리의 갈릴래아인 일상 삶 속에 함께 계셔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아버지의 집에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중심에 두고, 그분의 뜻을 종종 물어보며, 동료들과 사랑을 나누고, 어려울 때는 힘들어하긴 하지만 결국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예민하게 귀기울이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의 일상 삶일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길인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다시 와서 우리를 데려다가 당신이 계신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고 약속해주시는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 곁에 이미 같이 계셔 주시는 우리의 일상은 이미 아버지의 집입니다.
[부산] 요한 14, 1-12./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하신 다음, 그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의미를 명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죽음을 넘어 당신이 가신 저승으로 제자들을 데려가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분이 하신 실천을 하여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 있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떠나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부활하셔서,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회상하면서 제자들이 도달한 결론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는 말씀도 같은 결론을 표현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은 그분을 예언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고, 또 가르친 하느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믿던 하느님과는 달랐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성전의 제사의례에 충실하여 하느님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당신 생명의 기원이라 믿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행세하던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가슴에 품고, 하느님을 부르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믿음이 옳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기에, 죽이는 인간의 힘이 그분을 말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초기 신앙인들은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로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느님에게 도달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도 행복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이나 권력을 좇아 살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과 더불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웃은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진 자녀들이었습니다. 형제자매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주신 하느님의 진리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본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말씀하셨다는 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고도 말합니다. 예수님은 짧은 기간 동안 이스라엘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나갑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더 넓은 여건에서 새롭게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 성령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이 새로운 실천을 하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배워서, 자기들의 시대와 문화에 합당하게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실천을 넘어서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 안에 예수님을 살아계시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더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이 종교적 의무 수행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무수행을 위한 미사, 의무수행을 위한 기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의무수행을 요구하는 율법과 제도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불행도 하느님이 주시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을 깊이 보셨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만든 법과 제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곧 당신 생명의 기원으로 믿으셨습니다. 법과 제도를 강요하며 벌주시는 하느님을 믿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은 탈선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축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사실 인간은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인간을 불쌍히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또한 성숙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이로운 것만 추구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손해도 보고, 희생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만을 위한 울타리 안에 갇혀서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기도하고 수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자비로운 눈으로 보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분의 시선과 그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게’ 해야 합니다. ◆
[인천] 나의 나약함은 하느님 아버지의 또 다른 강한 이름/김부민 신부
오늘 복음에서 “나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나를 알면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 복음의 중심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며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 사랑이 예수님의 삶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버지에 대하여 집착하여 찾고 계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알고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17장에서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산 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은 이처럼 우리의 기준과 생각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어떤 의미의 말씀입니까.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홀로 서거나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하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고 다 맡기는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고 맡기는 믿음이 바로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그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을 따스하고 진실하게 품고 있는지요.
딕 호이트(Dick Hoyt)의 감동 실화를 쓴 ‘나는 아버지입니다.’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아들이 뇌성마비와 전신마비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아이를 포기하라는 주위의 강한 만류(挽留)에도 아버지는 절대로 불쌍한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심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가 아버지에게 ‘달리고 싶어요.’라는 소원을 말합니다. 아버지는 그날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아들의 휠체어를 밀며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달리기 경주에 참가했으며 나중에는 정상인들도 감히 해내기 어려운 수영 3.9km, 자전거 180.2km, 마라톤 42.195km의 철인 3종 경기까지 완주해냈습니다. 그 후에도 강한 아버지와 나약한 아들의 놀라운 도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이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토록 강하고 무한하게 만들었던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아들의 그 나약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고 온통 아버지를 찾으셨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 당신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강하고 무한한 사랑을 찾으며 의지하고 계셨습니다. 강한 아버지와 나약한 아들이 비로소 하나로 일치를 이루었을 때 크고 놀라운 사랑의 힘으로 다시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느새 성당의 느티나무에는 초록의 잎사귀들이 새롭게 돋아났습니다. 햇살에 빛나는 새로운 초록의 잎사귀들이 이렇게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늘이 주는 대로 인정하며 잘 받아들이라고…. 아멘.
[전주] 걱정하지 말라/김준호 신부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가 길이고, 내가 진리고, 내가 생명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말씀하신 대로, 세상에 길이 많아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리는 예수님뿐이며, 세상에 생명이 많아도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분만 믿으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최고의 지혜입니다. 또한 인생의 걱정에서 해방되는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습니다.
자기가 딛고 사는 그것이 가장 튼튼한 반석인 줄을 모르니 두려운 것입니다.
가장 큰 진리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헛된 진리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 늘 불안한 겁니다.
오늘 2독서, 베드로 말씀대로 “주님께 가까이 오십시오.”
우리가 믿는 주님이 바로 내 삶을 바르게 이끌어 줄, 나의 진리요, 나의 길이요,나의 생명입니다.
살아있는 반석입니다. 내 삶을 든든하게 받쳐줄 반석입니다.
그러니 가장 튼튼한 반석 위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하게 맡길 줄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말씀대로 세상 살면서 괜한 걱정 속에 마음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주님께 온전히 신뢰하고, 주님만을 온전하게 믿고,의지하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도록 합시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가 바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부산] 살아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지읍시다./한건 신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한 달이 지났는데, 부활을 체험한 증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제1독서에서는 열두 사도들이 박해 속에서도 부활의 증인으로 곳곳에서 선포했기에, 제자들이 늘어나 공동체가 커지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식탁 봉사를 위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출하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고, 예루살렘의 제자들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평화를 얻고, 성령을 받는 체험을 했기에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당당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오늘 복음 말씀에서 보듯이, 사도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사도들의 선포를 들었던 이는 말씀 속에 담긴 예수님을 믿었고, 그 말씀은 계속 자라났습니다. 제대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평화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우리를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잘 자라고, 그 공동체는 커지고 있습니까? 부활 성야 미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축하합니다.’라고 우리끼리 인사만 했지,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습니까? 사도들처럼 감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내어 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부끄러움과 어색함을 뛰어넘어서 당당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한 적이 있습니까?
신자들이 오랫동안 함께 일하던 동료가 “천주교 신자입니까?”라고 물었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냉담 교우들과 면담을 해보면, 자신이 신자인 것을 드러내기를 꺼리면서 살아왔고, 주위 사람들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고 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부활의 체험,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의 체험입니다. 우리나라의 순교 성인들은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고 그 참된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죽을 위험 속에도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오늘 제2독서의 베드로 사도 말씀처럼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아 죽었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인 성인이 되었습니다. 순교 성인의 후손답게 당당하게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 드러내면서 살아갑시다.
[춘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이유수 신부
한 여인이 마더 데레사를 찾아와 하소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녀님, 저의 삶은 너무 권태롭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마더 데레사 수녀는 “제가 있는 곳에 오시면 진정한 삶을 드릴께요. 꼭 방문해 주세요.” 이렇게 대답하고 인도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그 여인은 인도에 갔고, 마더 데레사 수녀와 함께 고통 받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다 보니 그 여인에게 다시 삶의 의욕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제가 있는 곳에 오시면 삶을 드리겠다’ 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길을 아는 사람만이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또한 길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길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 길을 이미 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도 공자도 세상의 많은 위인들도 이 ‘길’ 을 찾으려 수없이 수련을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자신들이 찾은 ‘길’ 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세상 어떤 누구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길을 찾으려고 했지만 ‘자신=길’ 이라고 말할 수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누구도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이르는 길을 놓으셨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 외에 는 이 길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고대 바벨사람들은 하늘까지 이르는 탑을 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었습니다. 땅에서부터 시작해서는 결코 하늘까지 다다를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하늘로부터 사다리를 내가 있는 곳까지 내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매일 성체를 영하면서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당신 영원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한 몸을 이루심으로써 그 길을 만드셨고 인간은 하느님과 일치하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누구든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고, 당신과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뜻은 그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까지도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시는 주님을 알아뵙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부활체험을 통해서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함께하며 키워온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 제5주간을 지내는 오늘 말씀은 고별담화의 일부를 전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보이시지만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는 주님의 말씀 (13장) 에 제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14, 1) 하며 제자들에게 충실한 믿음을 당부하십니다. 오직 믿음만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굳건한 신뢰와 내적 평화를 줄 수 있으며, 부활하여 오실 예수님을 알아뵐 수 있는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집에 거처할 곳이 많다 …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 같이 있게 하겠다.” 는 약속으로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2 – 3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곳이 곧 아버지의 집이 되는 것일까요 ?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4절) 고 확신하는 예수님께 토마스 사도만이 아니라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 (5ㄴ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6절) 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길을 알 때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길의 끝이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 이라고 하시며 그런 만큼 “이제부터 그분을 아는 것이며 이미 그분을 뵌 것” (7절) 이라고, 길과 목적지가 하나임을 알려주십니다.
‘안다’ 는 것과 ‘본다’ 는 것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안다’ 는 것은 전인적인 만남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 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상호 내재적인 완전한 일치와 친교를 이루십니다. (10절) 또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 (11절)으로써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10, 14 – 15 참조) 이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려주시고(1, 18; 12, 45; 14, 9 참조),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에(1, 17; 4, 23 – 24; 8, 31 – 32; 17, 3 참조),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14, 6)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한 것은 비단 그 시대의 제자들만이 아닐 것입니다. (8절) 필립보의 요청 앞에 예수님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9절) 하시며 너무나 간절하게 믿음을 촉구하십니다.“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10절),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1절; 5, 36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굳건한 믿음으로 확고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믿음만이 예수님 안에서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을 볼 수 있게 하며, 길의 목적지인 ‘아버지’ 와 ‘아버지의 집’ 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14, 2. 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기 위해 “나를 믿는 사람” 은 “내가 하는 일” 과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 이라고 약속합니다. (12절) 예수님의 “일” 은 (11절) 생명을 주는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는 표징이며, 아버지께 가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자들 안에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더 큰 일’ 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 제자들과 그들의 공동체가 맺어갈 믿음의 열매이며 (12, 32; 15, 5; 20, 21 – 23 참조), 그 일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더 큰 일이 됩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활동하신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 3; 마태 28, 20 참조)
묵상 (Meditatio)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14, 9ㄱ) 네, 예수님을 압니다.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이성과 지성으로만 알고 있다면, ‘안다’ 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그리고 그것을 참으로 ‘안다’ 고 할 수 있겠습니까 ? 토마스와 필립보 사도가 그 ‘길’ 을 모르니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라고 청한 것이 어찌 그들만의 나약한 믿음이겠습니까 ? 길을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까닭은 ‘길’ 에 서서 ‘진리’ 로 이끄는 당신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몰입된 탓은 아닌지요 ? ‘생명’ 으로 이끄는 길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참으로 이 아침에 고요로 떠오르는 주님의 얼굴을 뵈오며, ‘나’ 라는 우상을 치우고 싶습니다. 부활하시어 풋풋한 새 아침의 얼굴로 오시어 제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생명의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을 알아뵙도록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기도 (Oratio)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그리하여 세상에 당신의 길이, 만민에게 당신의 구원이 알려지게 하소서. (시편 67, 2 – 3)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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