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두 기둥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2024.6.29.토요일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사도12,1-11 2티모4,6-8.17-18 마태16,13-19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위 화답송 시편도 좋고,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화답송 후렴도 참 경쾌합니다.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교회의 선물로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니 기쁨이 저절로 샘솟는 느낌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갑니다. 감사의 응답이 바로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러니 감사의 사람으로, 찬미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저절로 겸손한 삶이요 샘솟는 기쁨입니다. 방금 부른 입당성가 291장도 두 사도의 교회를 위한 보완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 바오로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명을 환히 밝혀 비교해 주는 감사송 내용도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하였나이다.”
참 아름다운 보완관계의 사도요, 하느님께서 교회에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어제 읽은 주석 내용 역시 두분의 관계를 명쾌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베드로는 일치와 연속성의 위대한 상징인 교황에 의해 대표됩니다.
그의 역할이 없었다면 우리는 교회가 분열되고 붕괴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중앙 조직에서 분리된 교회의 일부에서 크게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교회는 베드로의 중심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다시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분열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반면 바오로는 또 다른 핵심 역할인 예언적이고 선교적인 역할을 대표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가장자리에서 일하고, 지리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교회의 관심을 소외된 사회적 관심 분야로 밀어넣고, 교회의 경계를 더욱 확장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교회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하는’(semper reformanda) 교회입니다.”
두 사도의 보완으로 비로소 가톨릭 교회는 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w)”, 늘 한결같이 빛나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는 삶입니다. 바로 살아있는 진리의 특징이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임을 깨닫습니다. 이 말마디는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를 포함한 모든 성인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성현들이 말하는 어른도 이런 분입니다.
“어른이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날마다 몸부림치는 존재다.”<다산>
바로 안주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워지려 노력하는 다산의 피나는 내적고투를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어른은 말을 할 때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고, 행할 때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으며, 오직 의만 따를 뿐이다.”
의로움을 추구하며 진리에 활짝 열려 있는 유연한 겸손한 이가 참으로 어른이자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똑같은 성인을 만들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의 역할이 있고 바오로의 역할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닮을 필요도 없고, 바오로를 닮을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나 고유의 성인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참으로 주님을 보완하고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역설적으로 고유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두 사도는 우리가 배울 참 좋은 모범이 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극찬과 더불어 무한한 축복을 받아낸 베드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을 정도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이런 고백이요, 역시 베드로를 꿰뚫어 알아본 주님의 감격에 벅찬 감동적 고백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 또한 이런 신앙고백의 베드로처럼 사는 것입니다. 얼마후 주님을 곡해함으로 “사탄아 물러가라”는 질책을 받았지만, 이 주님의 극찬과 축복의 말씀은 베드로 마음 깊이 각인되어 늘 평생 새롭게 자신을 쇄신하는 기회로 삼게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의 추억이 “늘 옛스러우면서 늘 새로운” 삶을 살게 함을 봅니다.
다음 순교의 죽음을 예감한 바오로의 유언같은 말씀도 그대로 우리의 유언으로 삼고 싶습니다. 역시 사도와 주님과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일치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사도의 삶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얼마나 힘찬 고무적인 고백인지요! 참으로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로 영적승리로 삶을 마감한 바오로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지 그 깊이를 보여줍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방심할 수 없는 영적전쟁입니다. 혼자서의 싸움이, 영적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전투요, 교회의 도움, 주님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베드로가, 바오로가 장엄한 순교로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음도 교회가, 주님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천사의 보호아래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교회 공동체의 열렬하고 한결같은 기도 덕분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사도행전 중심부에,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는 이 구절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배경이신 주님과 그분의 교회공동체가 함께 하기에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로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복음 선포의 내 삶의 현장에서 천하무적 일당백의 주님 사랑의 전사로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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