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본기도
주님,
복된 동정녀 스콜라스티카를 기억하며 비오니
그를 본받아
저희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주님 사랑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3,1-8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8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받은 은총을 언제까지 함구해야 할까?
백종원의 골목식당 ‘초심 잃은 거제도 도시락 집’의 내용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백 대표는 거제도에서 작은 식당을 하며 거의 망해가는 세 집을 살려 놓습니다. 특별히 가장 믿은 집은 거제도 도시락집 입니다.
손님이 없는 열악한 상권에서 몇 명 안 되는 낚시꾼들을 위해 새벽부터 일하며 고생하는 도움이 절실한 사장님 부부를 위해 백 대표는 자신의 특별 비법이 들어간 톳김밥과 거미새라면을 만드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가게는 대박을 냅니다.
그런데 10개월 만에 재 방문한 상황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김밥에 톳의 양이 줄었고 맛도 배지 않은 톳을 썼습니다. 거미새 라면에는 통 새우가 아닌 새우를 갈아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홀에서 음식을 먹으려면 1인 1라면을 반드시 먹어야만 합니다. 또 김밥 하나는 카드 결제가 불가 합니다. 카드 수수료 때문에, 몇 개 안 되는 식탁의 회전율 때문에, 등으로 핑계를 대지만 백 대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처음엔 절실했는데, 지금은 욕심이 들어온 거죠.”
주인은 욕심 때문이었다는 말에 반박하지 못합니다.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은 변할까요? 하지만 그 초심을 잃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백 대표는 말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했는데…. 초심을 잃은 가게가 맛이 유지될 리가 없습니다. 초심에 드리워진 욕심을 걷어내야만 멀리 볼 수 있고 오래 오래 많은 손님에게 사랑 받을 수 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세요. 왜 이 좋은 기회를 발로 차요? 갈게요. 10개월 전의 절실함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갈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시던 차라 그도 이방 지역에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을은 세상을 상징하는데 이 세상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이 지배합니다. 고쳐진 그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하지만 이방 민족과 섞여 살던 그는 자기 마을을 지배하던 어둠의 세력의 강력함을 무시하였습니다. 저절로 자신에게 그것이 스며들어 은총을 받고도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마치 백종원 대표가 자신들을 찾아와 비법을 알려주었음을 선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백 대표를 위함이 아닌 그것을 위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처음엔 사마리아 지방이나 이방 민족들에게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지역을 지배하는 악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당신 제자들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께 은총을 받고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데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 지방으로 가서 3년을 수련하고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은총을 받고 3년 정도는 함구 하며 그 은총의 씨앗을 열매 맺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받은 뒤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봅시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5-18)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뵈옵고 바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아랍 땅에 머물렀습니다. 대부분의 성서 학자는 그 시간 동안 수련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어디로 돌아왔을까요? 예루살렘의 교회의 수장을 찾아갔습니다. 수련의 결과는 결국 교회의 수장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만나 다시 교회에서 파견 받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돌아가실 때,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여러 체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교회에 온전한 순명이 가능할 수준이 되었을 때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신앙 체험을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바오로는 신앙 체험 3년 뒤 교회로부터 파견 받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사도 13,1-3)
성령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파견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잘 들어보면 성령께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셔서 교회가 그들을 파견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첫 신앙 체험을 사도 행전에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 체험을 전하면서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에 순종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만해지지 않게 잡아줍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고 교회에 순종 할 줄 안다면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주님께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수도회 사제까지 되었고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에 순종하기까지 그 은총을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 주님의 교회를 둘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종파만 수천, 수만에 이릅니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를 봅시다. 같은 개혁자였지만, 자기가 받은 은총을 전할 수준까지 오른 분은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도회를 어렵게 교회의 인가를 받고 세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순종할 수 있기 전까지는 함구합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 해가 됩니다. 가장 큰 해를 입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초심을 잃지 않도록 은혜를 교회를 통해 주시고 교회에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그 초심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https://youtu.be/Wk-H9V-QbZU
유튜브 묵상 동영상
어렸을 때 살았던 집에서의 기억이 많습니다. 단층 주택이었고 넓은 마당에는 나무와 꽃도 많았습니다. 형제가 많아서 저녁 식사 때면 늘 북적대던 기억, 겨울에는 너무나 추워서 가족 모두가 함께 이불을 덮고 서로의 체온으로 매서운 추위를 이겨냈던 기억, 마당에서 키우던 동물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려집니다.
언젠가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이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어딘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파리를 ‘시간이 멈춘 도시’라고 부릅니다. 100년 전 헤밍웨이가 걷건 거리와 현재의 파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53년 이후 이렇다 할 재개발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찾아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행복을 다시금 간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와 비슷한 감사의 인사를 받곤 합니다. 20년 넘게 써 왔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 때문입니다. 제 글을 보다가 어느 순간 보지 않았는데, 아는 지인이 저의 묵상 글을 보내줘서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묵상 글을 보면서 예전의 순수했던 마음이 생각나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계속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사랑, 평화, 기쁨, 희망, 믿음 등의 소중한 가치가 담긴 마음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늘 그 자리를 지켜주십니다. 특히 당신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변함없이 계속해서 나눠주십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그냥 손만 얹어 주셔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에파타!”라고 말씀하시지요. 손만 얹어도 충분히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셨을까요?
계속된 접촉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말로 위로 하는 것보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 일회적인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변함없는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에 인내하라. 자신의 결함을 자책하며 용기를 잃지 마라. 하지만 지체하지 말고 그 결함을 고치기 시작하라. 그 노력을 매일 새롭게 시작하라(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녀 스콜라스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