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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여호수아기의 말씀 5,9ㄱㄴ.10-12>
그 무렵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11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5,17-21>
형제 여러분,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새 사람’, ‘새로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출애굽 과정이 끝나고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된 땅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그 땅의 소출을 먹게 되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을 말합니다.
곧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심으로써 ‘새로운 피조물’과 ‘새 것’으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2코린 5,17), 우리를 ‘화해의 직분’(2코린 5,18)과 ‘화해의 말씀’(2코린 5,19)을 맡기시고, ‘그리스도의 사절’(2코린 5,20)로 파견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음(2코린 5,21)을 말합니다.
곧 ‘새 사람’으로의 변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새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지고한 사랑과 자비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나누어 받아 집을 떠나 방종한 생활 끝에 모든 것을 탕진한 작은 아들은 마침내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 내고서 말합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루카 15, 8 참조)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마침내는 돼지 치는 품팔이꾼이 되어서야 ‘내 아버지 집의 품팔이꾼들에게까지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큰 아들도 있습니다.
화를 내는 그에게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깨우쳐줍니다.
한편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멀리서 보고서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종들에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버지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혀주셨듯이(창세 3,21), 그는 ‘가장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의 '자비로우신 아버지'라는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아들의 새로운 탄생을 모태에 묻고 있는 갓 태어난 어린애의 머리 형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야말로 고통 속에서 탄생하는 깊고 깊은 사랑과 선입니다.
그리하여 회개는 단순한 죄책이나 자책이 아닌, 그분의 사랑에로의 귀환이요, 그분께 대한 기쁨과 찬미, 탄성의 노래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도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받는 죄인>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늘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중성’을 지닐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지내다가도 이해득실이 주어지면 속을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집 나간 아들과 아버지 곁에 있던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집 나간 아들을 ‘못된 놈’으로 볼 수 있고, 아버지 곁에 있는 아들을 ‘효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속이 드러납니다.
작은아들은 자기의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미리 챙겨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길 수 있다는 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산으로 받은 재산 모두를 잃기까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큰아들은 늘 아버지 곁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효자 중의 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효자의 속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왔습니다.
집을 나갔던 동생이 빈털터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집을 나간 놈인데 신경 쓸 것이 뭐 있겠습니까?
자기가 선택한 운명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마땅하지요!
그렇지만 아버지 품은 한없이 넓고 깊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한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를 거부하였습니다.
“저는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하며 속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아니, 언제 아버지가 아들을 종으로 여겼습니까?
자기 스스로 종이 되었지요.
부자관계를 종과 주인의 관계로 만든 것은 큰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설득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31-32)
큰 아들은 몸둥이만 아바지와 함께 있고 마음은 콩밭에 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큰아들이 잔치에 참여하였을까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큰아들 입장이라면 그 잔치에 기꺼이 참여하였을까요?
결국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여려 있으나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크고 넓고 깊으신 우리의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그분의 자비가 그리웠을까요?
불만이 많은 큰아들을 보고 “동생 하나 못 받아 주느냐? 속이 좁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의 속은 얼마나 넓은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챙기는 속을 보아야겠습니다.
작은아들이 밑바닥으로 한없이 떨어졌을 때 그 안에서 사랑의 아버지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결국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반드시 실패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큰아들이 아버지 곁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살았다고 해서 꼭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있든 저기에 있든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고 그분과 하나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작은 아들이 거지꼴로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먼저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른 질책이 없습니다.
아들의 회개는 바로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사랑 앞에서!
우리 중에는 고해성사를 통해 작은아들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처럼 늘 아버지 곁에 있으니 나는 효자라고 생각하며 교만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인정할 때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허물과 현주소를 알고 아버지의 품으로 간다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더없이 큰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늘 행복의 원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인간은 자기감정의 원인을 움직이는 수레바퀴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돌아온 탕자의 형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시는 대상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들고 계시는 것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과 함께 기뻐해야 옳은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아버지만을 위해 일했는데 방탕하게 살고 돌아온 동생에게만 잘해주는 것이 얄미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써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하지 않았음이 증명됩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느님께 속하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기쁨의 원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내가 어디, 혹은 누구에게 속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감정은 내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은 내가 속하려고 하는 대상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는 그 감정의 원인을 나르는 수레바퀴입니다.
‘요나’(Jonah)라는 단편 영화 내용입니다.
움부나와와 그의 친구 주마는 한 휴양지 바닷가에 사는 절친한 친구입니다.
둘은 관광객의 사진기와 같은 물품들을 훔치는 좀도둑입니다.
그들은 사진기를 훔쳐 아름다운 자신들의 마을을 홍보하여 더 큰 휴양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은 물고기가 잘 잡히는 것 빼고는 이렇다 할 뷰 포인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진기로 여기저기 찍는 순간 그들의 인생을 바꿀 대형 사고가 터집니다.
주마가 음부나와를 촬영하는 그 순간 거대한 물고기가 물 위로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함께 찍힌 것입니다.
음부나와는 흥분하여 이 사진으로 마을을 홍보하자고 합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물고기를 보러 몰려들었고 관광객이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쓰레기와 향락 시설도 함께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움부나와는 ‘피시 맨’이라 불리며 이 지역의 가장 유명한 홍보대사가 됩니다.
움부나와는 행복을 마음껏 즐깁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사진을 찍어준 친구에게는 점점 관심을 잃어갑니다.
움부나와는 돈과 향락에 물들어갔고 물고기는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 주마는 너무 변해버린 움부나와를 떠납니다.
세월은 흘러 움부나와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더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멋진 바닷가를 이렇게 쓰레기장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외롭게 바닷가를 바라보던 움부나와에게 그 큰 물고기가 보였습니다.
그 물고기를 잡는다면 마을을 다시 한번 일으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는 배 한 척을 끌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혼자 힘으로는 그 물고기를 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움부나와는 물고기와 사투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거대해지고 더 더러워진 그 물고기는 음부나와를 삼켜버립니다.
이 영화는 구약의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만들었다고 봅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결국 들어가게 된 것이 큰 물고기의 배 속입니다.
그는 다시 자기 행복의 원천을 하느님의 뜻에 둡니다.
그리고 니네베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들어갑니다.
감정은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이라 여기는 것에 내 마음을 둘 때 그 행복이라 여기는 것으로부터 감정이 비롯됩니다.
우리는 마치 마차의 바퀴와 같습니다.
마차의 바퀴는 중심에 축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있고 그 중간에 여러 개의 살이 바퀴를 지탱합니다.
가장 중간의 구멍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무언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종속됩니다.
바큇살들이 바로 여러 감정입니다.
내가 마음을 두고 있는 것에 의해 감정들이 나옵니다.
바퀴는 그 감정들에 의해 움직이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만약 내 마음을 하느님 사랑의 축에 끼우면 나의 감정은 그것에 의해 좋게 바뀌고 그러면 사랑의 행위가 나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을 하느님께 두면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고 하느님과 함께 슬퍼합니다.
세상 감정들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이 됩니다.
내 마음을 하느님께 두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할 줄 몰랐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마음이 다른 곳에 꽂혀있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그 마음이 부모에게 꽂혀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기뻐하시는데 우리가 슬프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감정을 뽑아내는 다른 것에 먹힌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할 것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움부나와는 물고기에 자기 마음을 빼앗겨 절친 주마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 잃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기면 좋은 감정이 솟아납니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는 사실 두 아들의 모든 감정을 다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감정은 열려 있었고 첫째 아들의 감정은 닫혀 있었습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나머지 모든 감정의 원인은 어둠입니다.
빛은 태양이고 어둠은 블랙홀입니다.
‘만개’(In full bloom)라고 번역되어도 괜찮을 이런 단편 영화도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별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행복의 원천은 남편이었습니다.
아내는 밖에 절대 나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택배로 주문하고 집안에서 남편이 하던 식물을 가꾸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화분에서 지렁이 몇 마리가 나와 거실을 파고듭니다.
이내 그 구멍은 블랙홀이 되어 점점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입니다.
집안에서 달아나려 해 보지만 지금까지 밖을 나가보지 않아서 밖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편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남편이 좋아하던 화분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내는 갈등합니다.
화분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화분과 함께 남편의 기억이 있는 블랙홀로 들어갈 것인가.
영화는 후자를 택합니다.
이는 어떻게 세상 것으로부터 감정을 얻어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최후를 보여줍니다.
빛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나머지 우리에게 감정을 일으키는 모든 피조물은 실제로 바퀴와 같은 우리를 굴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감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입니다.
요나처럼 자신을 만든 분의 목적대로 그분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퀴는 구르게 되고 자신이 딛는 땅의 느낌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블랙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맏이의 모습은 아버지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끼워 넣지 못한 가짜 하느님 자녀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 것에 감정이 휘둘리면서 하느님 자녀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끼워져야 하는 마차 바퀴와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피조물에서 비롯되는 감정에 종속될 것인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에 종속될 것인가는 우리 선택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의 슬픔을 안고 끼고 애써 보듬으면서 살아가는 형제자매님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감내하고 있는 그 큰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그저 눈빛만 봐도 즉시 알수 있습니다.
어린 두 자녀를 두고 먼저 떠난 아내, 참으로 혹독한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두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한 젊은 아빠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눈빛이 놓아버리고 싶은 삶의 의지를 계속 붙들게 한답니다.
이제는 순전히 자신의 몫이 되어버린 산더미 같은 빨래며, 싱크대 설겆이 거리에서 아내의 얼굴을 본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말끔히 치유해주시고 위로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따라 복음 구절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따뜻한 얼굴이요, 한없이 포근한 그분의 품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탕자의 귀향에 대한 헨리 나웬식 묵상의 결론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 아들, 그리고 첫째 아들, 최종적으로 아버지, 세 인물이 공존합니다.
탕자의 귀향 스토리는 둘째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첫째 아들로 넘어가고,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끝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분위기는 참으로 따뜻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존재합니다.
죽을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둘째 아들을 다독여주며 안심시켜주는 모습에서 너그럽고 지혜로운 한 노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주목할 부분이 두 손입니다.
두 손의 크기가 우선 다릅니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왼손은 강하고 억셉니다.
마디마디에 꽤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만지는 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고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반면 오른손은 어떻습니까?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
귀부인의 손가락처럼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다정한 분위기입니다.
손을 사뿐히 올려놓은 듯합니다.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고 있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 안에는 모성과 부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면서도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한편으로는 붙잡아주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루만져주십니다.
아버지가 걸치고 계시는 큼지막한 외투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색상이 따뜻하고 고운데다 큼지막합니다.
모양도 아치를 닮아서 깃들이기 좋은 환영의 공간입니다.
세상에 지친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는 장막처럼 보입니다.
헨리 나웬은 특별한 표현을 합니다.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머 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결국 아버지의 커다란 망토는 보살핌과 보호 속에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한 존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극진히 환대하고 있습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며 다정히 등을 두드려주고 있습니까?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를 꽉 움켜쥐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고 묵상하며, 나는 과연 돌아온 탕자인가, 아니면 첫째 아들인가 파악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와 헨리 나웬은 그게 아니라고 외칩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모두 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부단히 둘째 아들에서 첫째 아들로, 첫째 아들에서 아버지로 옮겨가고 변환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이를 꽤 먹은 헨리 나웬의 고백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
(헨리 나웬, 탕자의 귀향, 포이에마 참조)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되찾은 아들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읽을 때, ‘작은아들의 입장’에서 읽을 수도 있고, ‘큰아들의 입장’에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살아 계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작은아들)’이 바로 ‘나’일 수도 있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큰아들)’이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아들도 아니고 큰아들도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들’이라고 말하는 ‘오만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들’이 아니라 ‘나’입니다.
1) 작은아들이라면,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않고 아직도 ‘밖에서’ 방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애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이미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보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2) 큰아들이라면, 자기 자신은 ‘기쁨 없이’ 살면서 남의 회개를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의 슬픔과 기쁨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슬픔과 기쁨에, 또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에 동참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이야기에서는 작은아들이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죄를 뉘우친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항상 그렇게 비참해져야만 회개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상태까지 가기 전이라도, 세속이 주는 즐거움과 재미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고 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비참한 상태입니다.
건강을 잃은 다음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는 경우가 많지만, 잃기 전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비참해지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은총을 잃기 전에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최상의 지혜’입니다.
어쩌다가 잃었지만 정신을 차려서 회개하고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잃었는데도 모르고 살거나 알더라도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큰 슬픔’과 ‘큰 기쁨’을 동시에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하는 것은 그가 떠나 있을 때 크게 슬퍼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슬픔만 드리고 있는가?”
‘회개’는 모든 것을 원상 복구하려는 노력입니다.
여기서 ‘옷, 반지, 신발’은 아들의 지위가 회복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떠나 있는 동안에는 아들의 지위를 잃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4-36)
‘작은아들’은 ‘죄의 종’으로 살다가 그 상태에서 벗어나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고 ‘참된 자유’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회개와 아버지의 자비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회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줄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권한이고, 우리는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우리를 받아주시기를 겸손하게 간청할 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아버지께서는 언제든지 너그럽게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큰 기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작은아들이 떠나 있는 동안 아버지가 크게 슬퍼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큰아들의 ‘화’는 우리가 흔히 ‘정의감’으로 착각하는 감정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면서, 자기가 화를 내는 것은 ‘정의의 실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큰아들이 감히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아버지를 비난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의’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끔찍한 종교전쟁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무자비한 정의는 폭력이 될 뿐입니다.
작은아들은 돌아와서 집의 ‘안’에 있는데, 큰아들은 ‘밖’에 있습니다.
집과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도 ‘잃은 아들, 죽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타일러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이고, 바로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기뻐하겠는가? 밖에서 화만 내겠느냐?”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기쁨 - “부끄러워 합시다. 그리고 회개합시다”>
참으로 좋은 분이나 글은, 또 어떤 불행한 일들은 우리를 거울처럼 비추어 주며 한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큰 깨우침과 가르침을 줍니다.
길이 남아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왜관수도원 2022년 봄호 계간지 ‘분도’지에 나오는 이덕근 마르티노 아빠스의 인터뷰 기사가 그러했습니다.
마르티노 아빠스는 1985년에 아빠스직에 선임되어 1995년까지 소임에 충실하다 만10년만에 내심 약속한대로 과감히 아빠스직을 사임한 분입니다.
참으로 집착없이 아름다운 떠남의 모범을 보여 준 분입니다.
길다 싶지만 공감하면서 부끄러움과 더불어 큰 가르침이 된 참 진솔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날 우리는 팔공산 기슭 한 암자에서 84세 참 은수자를 만났다.’로 시작되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우리 수도원 형제 한 분이 나를 ‘팔공산 곰’이라고 놀립니다.
나는 햇수로 28년째 이곳 군위 성 바오로 안나의 집 사제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단 한번도 미사를 궐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도 세끼 모두 스스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수녀원에서 ‘점심 한 끼라도 저희가 해 드리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점심만 해 주는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알밥(햇반)을 데펴 먹고 저녁에는 라면(감자면)을 끓여 먹습니다.
처음엔 청소가 가장 힘들었어요.
그것도 운동 삼아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눈이 침침해진 뒤로는 갖고 있던 책을 모두 수녀원에 기증하였습니다.
영적 독서 책만 몇권 남겨 두었습니다.
책장은 수녀원 병실의 약장으로 사용합니다.
텔레비전도 수녀원에 기증하고 라디오만 듣습니다.
텔레비전은 바보로 만들지만 라디오는 상상하게 하거든요.
역류성 식도염도 있지만 많이 좋아져 잠을 잘 자지만 관절염으로 손을 많이 떱니다.
피부염도 있지만 약은 가능한 조금만 먹고 하루 30분 이상 걷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부유하지요.
이러한 단순한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김 보스코 신부님과 김 라자로 수사님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요.
특히 라자로 수사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이발을 해주러 옵니다.
보스코 신부님은 매일 문안 인사 전화를 합니다.
젊은 형제들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들도 늙으면 아름다운 수도원의 전통이 됩니다.
노인이 되면 더 외롭기 마련입니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이 복음 말씀이 나의 사목 표어입니다.
수도자의 삶은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와 형제애와 단순성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내밀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길어진 이곳 삶이 가능했던 것은 젊을 때부터 익힌 ‘예수기도’ 덕분입니다.
형제애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이웃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힘 닿는대로 실천적으로 단순하게 사는 것입니다.
가진 것도 단순하게 사고도 단순하게 하면 좋습니다.
내가 수십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형제애와 단순성이 수도생활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아빠스직을 사임할 즈음에 정리한 생각입니다.
사실 나는 옷 해 입은 지가 10년이 넘었어요.
혼자서 산속에 사니까 옷이 많이 필요없답니다.”
“나는 아빠스 재임 동안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에 힘을 쏟았습니다.
‘후배들을 위하여 돈을 모아야 하지 않는가’ 형제들은 말했지만, 나는 금요강론 때마다 ‘수도원의 돈과 우물물은 안 쓰면 썩는다.’ 하며 가난한 삶을, 나누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제 자신의 수도생활을 성찰하면서 참으로 부끄러움과 더불어 큰 가르침과 깨우침이 된 내용이라 길다 싶지만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 모두를, 우리 온 인류를 참으로 부끄럽게 한다.” 머릿기사에 영감을 받아 윗 내용을 인용하게 됐습니다.
마찬가지 오늘 그 유명한 복음 중의 복음이요 소복음서란 루카복음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면서 회개에로 이끌며 읽을 때 마다 감동하게 되며 늘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늘 새롭게 샘솟는 우물같은 복음입니다.
혹자는 ‘탕자의 비유’ 또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라 칭하기도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대표적 인물 셋이 나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와 바리사이 같은 완벽한 삶의 추구자인 큰 아들, 그리고 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귀가한 작은 아들 셋 중 과연 나는 어디에 해당됩니까?
셋 다 반면교사가 됩니다.
어느 한 편 사람이기보다는 아마도 셋의 모습이 정도 차이일 뿐 우리 안에 혼재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때로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일 때도 있겠고, 몰인정한 외적 모범생인 큰 아들의 면모도 있겠고, 때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작은 아들의 겸허한 면모도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에는 안 나오지만 생략된 셋째 아들 한 분을 상상하니 즐겁습니다.
바로 이 내용을 소개한 하느님의 외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자비하신 아버지를 꼭 닮은 셋째 아들로 자부하지 않았겠나 하는 유쾌한 생각도 듭니다.
정말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부족을 완전 보완하는 자비하신 아버지를 빼다 닮은 예수님입니다.
이 복음을 읽는 우리 역시 자비하신 아버지가 우리 궁극의 목표임을 깨달으면서 아버지를 꼭 닮은 예수님을 우리 평생 삶의 모범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이 됩니다.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을 회개에로 이끈 것은 불우했던 극한 상황에서 자비로운 아버지가 계신 고향집의 사랑 가득했던 추억이었습니다.
사랑의 추억이 작은 아들의 회개를 촉발해 고향집의 아버지를 찾게 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을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벌떡 일어나 아버지께 가니 전적인 회개의 순간이자 부활의 순간입니다.
내적으로 파스카 신비가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순간입니다.
바야흐로 회개를 통해 내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 작은 아들의 내면 상태의 묘사처럼 들립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새삼 설명이 없을 정도로 자명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멋지고 탁월한 ‘이야기꾼(storyteller)’인지 깨닫습니다.
노심초사, 오매불망 집떠난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며 귀가한 아들의 환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귀가하는 아들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서 가서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거지’같은 삶에서 본래의 존엄한 품위를 회복한 ‘왕자’같은 모습의 작은 아들입니다.
왕자처럼 살아가야 우리들이 자기를 잃고 거지처럼 살아간다면 아버지는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 것이며 우리 또한 얼마나 억울하고 부끄럽겠는지요!
이렇게 돈은 쓸 때 쓰는 것이 사랑이자 지혜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파스카 축제 잔치를 연상케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 여정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꿈에 그리던 고향집 같은 가나안 땅 예리코 벌판에서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환대에 감격한 아들이나, 이 신바람 나는 장면을 대하는 독자들은 저절로 오늘 다음 화답송 시편을 노래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는 작은 아들과 이 화답송을 노래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그 찬미가 있으리라.
내 영혼아 주님 안에서 자랑해보라.
없는 이들 듣고서 기뻐들하라.”
마지막 장면, 큰 아들의 반응과 항의, 또 큰 아들을 달래는 한없는 인내의 사랑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인정머리 없는 편협한 큰 아들의 부정적 모습도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 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
질투로 분노가 극에 달한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아들’로 산 것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던, 아버지의 자비로운 속마음을 너무나 몰랐던 무지(無知)의 큰 아들이었습니다.
아우가 아니라 저 아들이라 말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처럼 역시 사랑하는 큰 아들에게 진심을 토로하는 아버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큰 아들은 물론 큰 아들같은 우리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해달라는 호소입니다.
평생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곁에서 살면서도 아버지를 몰랐던 큰 아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일 수 있고, 또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자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제 큰 아들이, 큰 아들같은 우리들이 강요가 아닌 자발적 회개로 응답할 차례입니다.
아마도 큰 아들은 내심 몹시 부끄러워 회개했을 것이며,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신 아우의 환영 잔치에 기쁘게 참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은 날마다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 온 우리들에게 기쁨의 미사 잔치를 마련해 주시며 우리 모두 아버지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사순절 미사 독서에서 '되찾은 아들' 비유를 종종 만나는 이유를 우리 각자는 잘 압니다.
저마다에게 뿐만 아니라 또 공동체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부르심이 되기에 그렇지요.
오늘은 이 비유 말씀에 담긴 방향성과 운동성이 각별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고 있었다."
(루카 15,1)
먼저 이처럼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동안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들어온 질책이나 비난, 무시의 말과는 달리, 자기들을 사람 대접하고 진정 염려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갈증과 허기를 채우고 싶어서 모여듭니다.
이를 못마땅해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 안에서도 매우 다양하고 역동적인 방향성과 운동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작은 아들이 유산을 요구해 "먼 고장으로 떠났다."(루카 15,13)고 합니다.
그는 제 욕망과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와 집과 가족의 품에서 멀리 떨어져 나갑니다.
물리적 거리는 물론 심적 · 정서적으로도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음껏 방종하게 지내면서 아버지 품 안에서 익힌 삶과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결과는 재산 허비 · 탕진, 굶주림, 구걸, 거부 체험입니다.
굶주림에 지친 그에게 품팔이꾼들도 배불리 먹던 아버지 집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통해 돌아갈 의향이 싹트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루카 15,20)
복음사가는 집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에게로"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굳이 분리하지 않듯이 아버지와 아버지 집 역시 같은 의미, 곧 '제자리'를 의미합니다.
작은 아들은 욕망의 탐닉과 자기파괴적 삶을 멈추고 '제자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한편 멀리서 그를 발견한 아버지가 그를 향해 달립니다.
이미 한 번 시작된 사랑은 멈출 수 없습니다.
끊어낼 수도, 없었던 일처럼 무효화시킬 수도 없기에, 아들의 부재 동안 내면으로 더 절절히 동동거리면서도 외적으로 잠시 멈추어 있던 아버지의 사랑에 발동이 걸립니다.
그동안에도 마음은 늘 그를 향해 달렸기에 발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건 문제도 안 됩니다.
아들의 돌아오는 발걸음은 굶주림과 불안에 지쳐 무겁지만 그를 향해 달리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노구임에도 재빠릅니다.
행여 괜한 자존심으로 작은아들 맘이 변할까 조급하기까지 하지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마침내 서로를 향한 방향성과 운동성이 접점을 찾습니다.
목을 껴안는 것은 반가움과 친밀감의 표현인 동시에 다시는 서로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결속의 욕구입니다.
입맞춤은... 아, 이 아름다운 입맞춤은 우리를 창세기의 한 대목으로 이끌어 갑니다.
"주 하느님께서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 2,7)
하느님께서 입맞추심으로 사람이 생명을 얻었듯이, 죄로 죽었던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입맞춤으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이 입맞춤으로 방종과 굶주림, 구걸과 거부당함로 무너졌던 그의 자존감이 되살아나고, 떠나기 전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입맞춤은 흡사 마술과 같습니다.
사랑의 마술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다음의 말씀으로 군더더기 없이 정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코린 5,17)
서로를 향해 나아간 두 존재의 만남에서 사랑의 절정이 '화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다른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면 '화해'라는 과정보다 '회개와 용서'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화해'라면 자기 허물에 대해 쌍방이 인정을 하고, 각자의 과실에 대해 상대방에게 동시에 사과하고 또 서로를 용서해 주면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 짧게 인용된 본문에서 '화해'(2코린 5,18.19.20)라는 말씀을 다섯 차례나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라고 직설을 날립니다.
감히 하느님과 화해라뇨?
하느님께서 뭘 잘못하셨다고?
"그분이야 그저 잘못한 사람이 엎드려 빌면 용서해 주시는 입장이지 화해는 무슨..." 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허물은 아버지 품을 떠나고 곁길에서 방종하고 죄지은 사람 편의 문제이고 하느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시니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회개와 용서'의 관계일 때는 한쪽이 다가가 빌면 다른 쪽이 받아들이고 풀어주는, 일방적인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녔고, '화해'일 경우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나아가는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녔다고요.
복음의 아버지처럼 하느님도 달리십니다.
돌아오는, 아니 돌아갈까 마음 먹기도 전에 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먼저 화해하고 싶어하십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아니 굳이 잘못이라면 잘못하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허용한 잘못 밖에 없으면서, 우리와 화해하고 싶어하십니다.
용서를 빌기도 전에 목을 껴안고 입맞추며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해 주시려 늘 만반의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영화 촬영 때 Go 사인이나 Q 사인 직전에 외치는 "레디~"나 "스텐바이~" 상태로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큰아들과 아버지의 방향성, 운동성도 봅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루카 15,28)
사랑을 향하다 말고 '멈춤'입니다.
정체되고 고착됩니다.
사랑은 특성상 흘러야 하는데 이처럼 멈추어 고이기 시작하면 탁해지고 썩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또 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지요".
상대방이 어떻건 간에 아버지는 여전히 사랑의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니고 급박하게 움직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잠재적 죄인 또는 활성화된 죄인인 우리에 대해 하느님께서도 그러고 계십니다.
제1독서는 모세 사후에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야기를 전합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할례를 받게 하시어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여호 5,9) 버리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리고 벌판에서 하느님의 업적과 그 완성을 기리며 파스카 축제를 지내지요.
이집트 탈출 후 여기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끊임없이 움직여 왔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장막이 하느님 현존의 표징입니다.
오로지 한 방향성, 한 운동성을 지니고 배신과 징벌 간청과 용서 등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척박한 광야살이 중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징표였던 "만나가 멎습니다."(여호 5,12)
함께 한 방향으로 움직이건, 서로를 향해 움직여서 만남을 이루건, 하느님과 우리는 끊임없이 함께 움직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움직이기 마련인데다, 특히 사랑이 본성상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선 이들은 축제를 벌입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의 감동적인 만남 이후에도 잔치가 벌어지지요.
큰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은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정착 후 어떻게 살아갔는지, 작은아들이 귀향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의 문제처럼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역사는 일회적 회개와 용서, 화해를 이룬 뒤 동화 속 이야기처럼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범죄도 실수도 용서도 화해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어디서 누구와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아버지, 아버지 집, 아버지 품, 즉 제자리를 향한 방향성과 운동성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이미, 여전히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또 움직이실 것시니 우리만 그 자리의 기억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의욕은 넘치는데 함께 하는 신자들이 적었습니다.
평일미사에는 5명 나온 적이 있습니다.
많이 나오면 10명 남짓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에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유는 있었습니다.
집중 호우로 피해가 컸습니다.
성당에서 피해자들을 위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실수로 보상에서 제외된 분들이 있었습니다.
실수와 오해는 큰 상처가 되었고, 그런 분들은 성당과 멀어졌습니다.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이야기를 들었고, 새로 온 신부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삼계탕과 칼국수를 하는 유 가브리엘 형제를 만났었습니다.
지난 일들은 잊어버리고 함께 하자고 부탁하였습니다.
다음 주에 성당에 나왔고, 남아 있는 분들이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오해를 풀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포사목 본당에서도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본당 이전이나, 증축과 같은 결정에서 의견이 나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신자들 간의 반목과 불신 때문에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의 사목방침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포사목 본당에서 새로 부임한 사제는 가정방문을 통해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중요한 사목입니다.
마음이 열린 신자들이 성당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나가는 것이 사목자의 보람이기도 합니다.
사순시기에 성당에서 멀어진 분들, 하느님을 떠나 있는 분들을 성당으로 모시고 오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똑같이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였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건강도 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 중에 ‘희망’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빈털터리 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 대한 희망을 품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둘째 아들을 보았고, 마당으로 나가서 둘째 아들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기로 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았지만 세상으로 나가지 않았던 큰 아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큰 아들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벌인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처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불평하였습니다.
불평의 이유는 ‘잔치’였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잔치를 벌여 주었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한 큰 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벌여주지 않았다고 불평하였습니다.
큰 아들에게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은 몸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집에 있지만 교만과 허영에 빠져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들을 차별하고 무시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머니를 생각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방황하면서 집을 나갔던 둘째 형을 걱정하였습니다.
형이 돌아오면 먹을 수 있도록 늘 따뜻한 밥을 한 공기 준비하였습니다.
어느 날 둘째 형이 바람처럼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머니는 둘째 형을 위해서 따뜻한 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앞가림을 잘 하는 형제들의 자리도 있었지만, 방황하던 둘째 형을 위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둘째 형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늘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둘째 형이 돌아오면 어머니의 그늘이 모처럼 활짝 갠 하늘같았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지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어머니의 마음보다는 무시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던 큰 아들과 같았습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희망’을 간직하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한다면, 방향을 돌려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다면,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받아 주십니다.
큰 아들처럼 ‘비난과 불평’을 간직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집에 있을지라도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희망의 배를 타고 아버지께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자비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날 때부터 유전자에 새겨지기 때문에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바뀌지 않을까요?
성격이 타고난다고 하지만, 성격의 상당 부분은 태아기와 유아기에 각인된 경험으로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서 튼튼한 몸을 만들 수가 있듯이,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분명히 성격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바뀌어 갑니다.
성격, 자아, 행동양식, 습관 모두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자신이 변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분명히 바꿀 수 있습니다.
단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쉽게 포기해서 문제입니다.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죄의 유혹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다면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열정을 가지고 변화의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선함으로 변하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율법의 유산법은 장자가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를 가지고 동생은 그 나머지 3분의 1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생전에 유산분배가 있어도, 분배받은 아들들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있어도 처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유산을 분배받았고 처분까지 한 것입니다.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죄를 마음껏 범하라는 이유가 아닙니다.
또 자기 혼자만 잘 살면 그만도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상의 삶을 지키지 않고 자기 멋대로의 비정상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정상적이지 않은 작은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하느님께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우리를 매번 용서하시고 받아주십니다.
물론 복음에 등장하는 큰아들처럼 세상은 이런 용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면서, 끊임없이 단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향하면 당신의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십니다.
이를 위해 작은아들이 보여 주었던 모습처럼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변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한 노력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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