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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mkorea.com/7258153366
대한민국 5대 국경일 중 하나지만
한글날과 달리 공휴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거 먹는 거임? 헌법 만든 게 뭐 대수라고 ㅉㅉ' 라는 반응이긴 하다
'이 나라의 장점이라면 오래 살지 않아도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어 볼 수 있다'
라고 비아냥 거리듯 말한 한홍구의 말처럼,
사실 이 나라에서 제헌절을 이야기하기에는
워낙 다이나믹한 사건들이 많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펨붕이 입장에서
그래도 제헌절인 만큼 한 번 제헌 헌법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당연히 대통령제 국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헌법을 만들기 위해 뽑혔던 제헌 의원 생각은 많이 달랐다
당시 제헌 의원들 대부분은
총리가 이끄는 의원 내각제를 선호했다
위의 사진은 대한민국 제헌 헌법의 기반이 된 유진오 교수의 초안인데,
해당 초안에는 양원제 실시와 의원 내각제 구조가 명확하게 담겨 있었다
비록 일제를 패망시킨 건 미국이었긴 했지만
제헌 의원들 입장에선 아무래도 미국의 정치 체계가 많이 낯선 상황이었고
미국 문화를 그대로 들여오기에는 이질감이 꽤 있던 상황이었기에
자신들이 경험해보아서 익숙했던 일본식 정치 체제를 참고하려고 하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반일 감정과 별개로
사회 체제나 제도 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남아 있던 상황이어서
형법 같은 중요한 분야조차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 형법을 그대로 사용했을 지경이었고
상대적으로 '사소한' 국민을 규정하는 호적 제도 같은 건 1960년대까지 일제가 제정한 걸 그대로 썼던 상황이었다
학교 행정 같은 분야에서는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말로는 미국식 교육제도를 본받겠다고 하면서, 정작 현장에서는 일본식으로 돌아가는 판이었으니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도 불구하고
사회 시스템 측면에서 일제의 잔재를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제헌 의원들이
'그나마 일본의 상황이 정상이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을 참고하여
참의원과 민의원 양원제 의회를 구성하고
총리가 정국을 주도하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려고 한 게 의외가 아니다
그리고 제헌 의원들이 의원 내각제를 선호한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권력 짬짜미' 였다
비록 대통령제처럼 누군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행정부를 장악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파벌들이 서로 각료 자리를 나누어 갖는 체제였기에
해방 직후 각지의 지방 토호들이 위주였던 제헌 의원들 입장에선
자신들도 내각에 들어가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의원 내각제를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한민국 제헌 헌법은 제헌 의원 다수의 의견에 따라
의원 내각제로 결정이 될 판이었으나
막판에 '이의 있소' 를 외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는 '내가 미국에서 겪어봐서 아는데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
미국이 괜히 세계 최강대국인줄 아느냐
그러므로 이 나라에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라고 대통령직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김구조차도 이승만을 인정하던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의 명망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이었기에
함부로 이승만의 주장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헌법 제정 논의는 막판 10분을 남기고
대통령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수정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미 구상해 놓은 총리 중심의 체계를 뒤엎진 못하기에
제헌 헌법에 대통령직이 들어갔긴 했지만 총리 위에 대통령이 존재하는
마치 오늘날 국회의사당의 돔처럼 '옥상옥' 같은 구조였다
아무튼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대통령직이 신설이 되었고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이 총리보다 위에 서긴 했지만
기존 제헌 헌법의 내용을 뜯어고치지 못했다보니
실권은 총리가 갖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승만은 한민당 대표인 김성수와 회동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한민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지지하고,
이승만은 그 반대 급부로 김성수를 총리로 임명한다'
이렇게 합의를 마치고 한민당의 김성수는 기뻐서
자기가 총리에 취임했을 때
한민당 내에서 누구를 내각에 앉혀야 할지
미리 내각 구성을 짜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결과 제헌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결과
제헌 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나서 이승만은 총리를 지명해야 했는데
당연히 김성수는 자신이 지명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승만은 자신만이 대한민국을 구원할 지도자라고 '자뻑' 기질이 강했기에
누구를 위한 꼭두각시 바지대통령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승만은 초대 총리로 이윤영을 지명했다
참고로 이윤영은 김성수의 지역구를 뺏어간 인물이라는 점에서
김성수와 한민당을 대놓고 조롱하는 선전포고였다
이에 격분한 김성수와 한민당은
이윤영에 대한 총리 임명안에 반대표를 던져 무산시켰다
이런식으로 이승만이 자신들을 배신한 일에 분노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이들을 달래보고자
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했다
그리고 이범석은 자신이 총리가 되면 내각 요직 대부분을 한민당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되자 김성수 입장에서는 비록 자신이 총리가 되어
새로이 탄생한 대한민국을 주도하지 못하는 점이 화가 났지만
'고집불통 또라이' 그 자체였던 이승만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사람 냄새 나고 말이 통하는' 이범석이 총리로 있는 게 낫다는 판단 하에
초대 총리로 이범석을 임명하는 안건에 대해 동의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지명한 사람 답게
이범석은 한민당이 아니라 이승만을 지지했고
총리로 취임한 이범석은 이승만의 의향대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다만 그나마 약속했던 게 미안했던지 재무부 장관만은
한민당 소속인 김도연을 임명했는데
사실 김도연도 한민당 주류와는 노선이 좀 달랐다는 점에서
초대 내각에 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주류 세력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렇게 이승만에게 두 번이나 농락당한 김성수와 한민당은 격분했다
이 일로 한민당은 이승만과 완전히 갈라서서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지만
이승만은 자신에게 대적하는 이들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소련 유학 경력이나 사상적인 측면에서
사회주의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앉히고
내가 밀어줄 테니까 한 번 소신껏 토지개혁을 시행하라고 맡겼다
사실 이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상황이었다
이승만과 조봉암은 정치 성향이 물과 기름마냥 상극이었기에
제헌 헌법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직 신설 주장에 대해서
유일하게 끝까지 이건 안 된다고 반대했던 사람이 조봉암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역시 6.25 당시 조봉암이 부산으로 오자
'자네는 왜 북으로 가지 않고 여기로 왔는가?' 라고 비아냥 거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사사건건 자신과 대적하지 못해 안달난 한민당을 박살내고 싶어했고
한민당 의원들이 대게 해당 지역을 장악한 대지주라는 점에 착안하여
자영농 육성을 하는 김에 대지주들을 몰락시키기 위해 조봉암과 손을 잡은 것이었다
이승만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하고 싶은 데로 할 수 있었던 조봉암은
마침내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지주들은 극렬하게 반발하였는데
김성수만 하더라도 이대로 땅을 빼앗길 순 없다고
제방을 터뜨려서 논을 염전으로 바꾸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직접 토지개혁을 밀어붙였던 만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는 말처럼,
다른 나라에서 토지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세부적인 규정을 이용한 농간은 대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자신들을 몰락시키려는 시도에 분노한 한민당에서는
이승만을 날려버리기 위해 각을 재고 있었는데,
6.25가 발발하면서 그러한 시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으로 대구와 부산권을 제외한 전 국토가 함락되면서
인민군들이 지주 계층을 철저하게 처형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지주들의 운명은 셋 중 하나 뿐이었다.
1. 그나마 인민군 입장에서 명망 있고 이용 가치가 있는 자들은 납북
2. 인민군 입장에서 이용 가치가 없는 자들은 학살
3. 운 좋게 인민군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은 빈털털이가 되어 몰락
간신히 피난을 가서 화를 면한 이들도 몰락은 피할 수 없었다
토지개혁 당시 보상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은 전쟁으로 인해 휴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화폐가치가 심각하게 추락하여
1953년 화폐개혁 당시 100원을 1환으로 교환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토지개혁과 전쟁으로 지주 계층들은 완전히 몰락하였으며
이들이 아무리 이승만을 싫어했다고 한들
지주 계층을 멸절시키려고 했던 김일성의 북한 정권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김일성이 싫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이승만을 지지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이승만에 대적하던 지주 계층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승만의 '내가 대통령 해야겠다' 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대통령 중심제와
한민당을 몰락시키기 위해 시작한 토지개혁이라는 스노우볼은
의외의 방향에서 대한민국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바로 소작농들이 자영농으로 변신하면서
소작료로 낼 돈을 자식들의 교육비로 지출할 수 있게 되면서
이렇게 확보된 양질의 인력들이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실제로 룰라 대통령이 '한국의 토지개혁 사례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 이라고 극찬했는데
이승만과 정치 성향이 상극인 룰라 입장에선 립서비스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토지개혁이 시행된 결과,
'전쟁이 시작되면 100만명은 기본으로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라는 박헌영의 예상과는 무색하게
북한이 아무리 봉기하라고 선동을 했어도
인민군이 공출해 가는 양이 소작료와 토지배분 상환금보다 많았기에
농민들이 북한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고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다는 점은
어쩌면 토지개혁이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가
적화통일 되는 것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만일 당시 제헌 헌법이 초안대로
총리와 내각 각료들이 짬짜미하던 의원 내각제였다면,
과연 의원들의 기반인 토지 개혁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토지 개혁이 불가능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은 산업화를 이루고
국민들이 단결하여 북한의 야욕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제헌 헌법 제정 과정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새어 버렸지만
아무튼 제헌절도 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로서
비록 공휴일은 아니더라도 그 의의를 되새겨 보았으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이 글을 써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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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조선건국일이랑 날짜 똑같은거 알아간다~!~! 여샤 고마워
오... 이렇게 자세히 알게된거 처음이야 흥미롭다
오오...처음 알았어 글 가져와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