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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신 삥 이 수술 이과장님 수술 아니었어?”
“아..네..그.게 이과장님께서 갑자기 복통이 있으시다고 ...긴급으로...서 교수님께서 대신 수술을….” 의국 내 인턴들 사이에서 가장 악명 높은 선배로 불리는 박영민이 질문하자,
당황한 인턴은 코밑으로 흘러내리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쓸어 올리며, 뚝뚝 끊어지는 말을 힘겹게 이어갔다.
동건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엇이 불안했는지 방문까지 걸어 잠근 채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팔을 꺾어 V자를 만든 뒤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쥔 모습은 후회와 환멸에 번뇌하는 모습이었다.
시선은 방금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몽환적이며 정확한 원근감이 없이 한곳에 딱 고정되어 있었다.
얼마 후 갑자기 고개를 번뜩 치켜세운 동건.
또 다시 상기되는 자신의 비겁한 결정에 대한 자책과 함께 비관적 결론에 대한 부정을 앞세운 듯한 혼잣말을 내뱉는다.
“아냐 아닐 거야 그 아이는... 그 아이는 분명 죽지 않을 거야, 분명 살아날 거야.” 동건이 이렇게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수차례 반복하는 동안 두 시간 이란 시간이 흘러 오전 10시 반이 되었다.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두 차례 신호음이 있은 뒤, 전화기 너머에서 극도로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네, 과장님. 뭐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임원들에게만 주어지는 비서실과의 직통 업무지시는 과장급들에게는 유례없는 특혜였다. 이런 특혜 또한 동건은 누리고 있었다.
“저........ 서 교수님 수술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좀 확인하고 싶은데요.” 동건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말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과장님 확인하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비서는 깔끔하고 정갈한 어투로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자 갑자기 편두통이 밀려왔다.
왼편 머릿속을 바늘로 사정없이 찌르고 있는 듯한 불쾌한 통증이었다. 동건은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다른 한손을 이용해 책상서랍을 뒤져 약통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어 타이레놀 500미리 몇 알을 입안에 털어 넣고는 동쪽 창가 쪽에 놓인 T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 옆에는 독일에서 수입된 최신식 정수기가 용맹한 전사처럼 검은색 갑옷에 금장을 두른 채 자리하고 있었다.
물 한잔을 따라 마신 뒤 막 잔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동건은 빠르게 자리로 가 앉았다. 긴장감에 손에 땀이 차올랐기에 전화기를 들어 올릴 오른손을 왼팔 소매 위에다 쓱 한번 문지른 뒤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를 귀에다 대는 순간부터 1초 간격으로 동건의 얼굴색이 바뀌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주사기를 동건의 얼굴에다 꼽아 얼굴 안에 있는 피를 쭉쭉 빨아내고 있는 것처럼. 홍조 띈 얼굴이 서서히 색을 버리더니 결국엔 하얗게 변했다.
머릿속에선 한동안 휴가를 떠나보냈던 단어들이 하나 둘 돌아와 짐을 풀기 시작한다. 죄책감, 자멸감, 상실감, 절망감 그런 것들이 한 대 뒤엉켜 자기 스스로를 멸시 하며 투쟁 하고 있었다.
동건은 순간 세차게 머리를 뒤흔들어 이들을 밖으로 내동댕이치려 했다. 그제 서야 나지막이 들려오는 자기합리화의 목소리를 자신의 귀로 듣게 된다.
“그래, 아닐 거야,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나 때문에 그 애가 죽은 건 아니잖아. 내가…….내가 수술대 앞에…….섰더라도 그 아이는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 였을거야, 그래 그럴 거야, 분명히….”
사람들은 때론 내 내면 속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면서까지 자기 자신을 옹호해야 하는 때가 있다. 동건에게는 그때가 바로 지금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 난 난 비겁한 것이 아니야 절대로….” 하지만 동건은 그 어떤 위안의 말로도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자기 스스로가 기준을 둔 양심의 벽은 쉽게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난 자책감은 스스로에게 자책감과 모멸감을 주고 있었다.
잠시 후 동건은 기억 저쪽에서 2시간 전 자신을 이곳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오게 만들었던 기억의 단편들을 어렵게 끄집어내어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여인의 얼굴…….섬광…….그리고 숫자…….숫자[1]’ 그 숫자가 주는 의미를 어느 순간부터 동건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숫자1은 분명, 하루 또는 오늘 당장에 그 아이의 생명이 끝난다는 것을. 수술실로 향하던 승강기 안에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수술실이 있는 2라는 버튼을 미처 못 누른 것이 아니라, 순간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두려움은 매순간 수술 방에 들어서면서 간간히 느껴오던 그런 두려움이 아니었다.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의사들 마저, 고개를 내저은 환자들 마저도 동건의 수술 방에만 들어가면 새 생명을 얻어 나오고 있었기에 매스컴에선 동건을 신의라 칭하고 있었다. 이미 많은 이들의 의식 속에 괄목할만한 존재감을 가지게 만든 메디컬 사이언스(Medical Science)계의 영웅으로 존립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명성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단 생각이 만들어낸 불안감은 불안은 넘어 공포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전화기에선 자신이 회피해 도망쳐 온 그 소년이 수술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동건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대고 일찍 퇴근하는 중이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게 되어 항상 퇴근시간이면 어김없이 이어지던 긴 차량의 행렬을 피할 수 있어 그나마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동건이 운전 중인 제네시스 G9은 현재 국내산 차량 중에 동급 최고의 사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차는 며칠 전 병원에서 동건에게 제공한 또 하나의 특혜였다.
동건이 탄 차는 순간 스피치를 적절히 활용해가며 분당, 수거간 자동차 전동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대한이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멀리보이는 산등성에는 아직까지 낙엽 화 되지 않은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단풍을 이루고 있어 붉은빛이 연연[娟娟]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무의식중에 바깥공기가 따뜻할 거란 자각에 조수석과 운전석 창문을 내리는 버튼을 동시에 눌렀다.
귀까지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강한바람이 세차게 차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려, 운전하는 시야마저 가리게 만들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이 주는 타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 듯 했다. 마치 엄마가 아끼는 화병을 깨뜨린 뒤 당연히 혼날 것을 각오하고 있던 중 이상하게도 아무런 꾸지람이 없는 것에 더욱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하루 종일 가지고 있던 때에 아버지에게 대신 혼날 때처럼 차갑고 매서운 바람에 혼 줄이 나면서도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조금은 씻기어 나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동건이 탄 차가 수서 고가도로 밑을 막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동건의 뇌리에 그 어떤 기억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였다, 검은 옷의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얼굴.’ 오늘 처음으로 여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기에 기억 속 조각난 퍼즐 하나가 중요한 자리에 끼워 맞추어 졌다. 그럼에도, 미래에 닥쳐올지 모를 불행의 근원이 될 아이의 수술을 피하고자하는 생각이 급급했기에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확실하다 생각하곤 있지만 틀림이 없다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는 아직 완성 짓지 못한 기억 속 퍼즐. 그래도 오늘로서 확실시 된 건 언제인지 만났던 기억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듬성듬성 자리를 비운 기억들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동건은 결국 까마득한 기억속의 장소들까지 되짚기 시작하였다.
학교, 어릴 적 다니던 교회. 공원, 식당, 여행길속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되었던 인연들까지 차례로 여자의 얼굴위에다 놓고 오버랩 해보았다. 그러나 전혀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는 그때, ‘병원’이라는 장소를 떠올리게 되자 ‘꿈틀’ 기억의 한 언저리에서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마치 얇은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막혀있는 것 같이 기억이 날 듯 날 듯 하면서 끝내 떠오르는 무엇이 없자 답답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온 해답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뒤엉켜 아찔한 현기증을 만들어 낸다. 결국 생각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만다.
동건이 자신의 오피스텔로 들어와 샤워를 막 마치고 나올 때쯤이었다.
‘띵 동’ 거실 소파 팔걸이 위에다 올려놓은 휴대폰이 동건에게 잠깐 와보라고 불렀다. 전파를 타고 날아온 문자메시지 한통이 하루 종일 달고 있던 동건의 무감정한 얼굴에 변화를 가져오게 만든다.
「오늘 늦게 끝나세요? 저 오늘 맛있는 거 사주실 시간 혹시 되시나 해서요^^」
수연이 이렇게 동건에게 무언가를 먼저 청한 적이 없었던 터라 동건은 다시 한 번 발신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았던 얼굴 의 근육들이 움직였다. ‘씩’하고 웃자 온 종일 함께 있었던 불편한 마음들이 수연의 문자한통으로 일출 전 푸른 미명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남한산성을 오르는 산중턱에 위치한 경양식 식당이었다.
처마 위에 고인 물은 땅을 향해 떨어진다는 당연한 이치가 이곳에선 달리 적용되고 있었기에 동건의 두 눈은 뜨악하게 변했다. 영하의 날씨 거기에 산속이 주는 인센티브, 단순히 춥다가 아닌 추워‘죽겠다’라는 수식어가 동반돼야 옮은 맹추위였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이용 하하는 자리는 따뜻한 벽난로가 있는 실내가 아니었다.
능선을 타고 길게 늘어선 테라스 위로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와 반대로 실내에는 벽난로 옆으로 옹기종기 모여 불을 쬐는 어린 아이들만이 보일 뿐 언뜻 봐도 10여개가 넘어 보이는 테이블 전부가 비어있던 것이었다.
“아니 이렇게 추운데 왜 사람들이 다 밖에 나와서…….”
“다 이유가 있어요, 우리도 저기에서 먹어요.” 수연이 사람들이 붐비는 테라스 쪽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동건은 또 한 번 놀라하며 반문한다. “네~에?”
저 멀리 공터 주차장에다 차를 세워 놓고 30여개가 넘는 나무계단을 올라 식당입구까지 오는 동안 만해도 코끝이 시려왔고, 귓불은 떨어져 나갈 듯 얼얼하기까지 했는데 이 추위에 실내가 아닌 밖에서 식사를 하자는 수연의 제안에 쉽게 ‘Yes’라 말할 수 없는 동건의 표정은 난감을 넘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때. 수연이 동건의 팔을 자신의 두 팔로 감아 안고는 걸음을 이끈다…….
수연이 행한 또 다른 ‘처음’ 그만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던 모든 부정의 수식어가, 추위에 얼어붙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계에 남아있던 두려움이 설빙 되었는지 동건이 수연이 팔짱낀 손에 이끌려 식당 출입문 쪽으로 이끌리는 동안에도 동건의 시선은 식당 앞 정원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얼어붙은 물레방아를 붙잡고 놔주지를 않는다,
나무 조각들은 얼기설기 붙여 만든 묵직한 출입문을 밀고 실내로 들어서자 산장 레스토랑 분위기와 어울리는 Kevin Kern - Return To Love가 들려왔다.
캐리비안 해적선을 산중에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실내 인테리어가 한 층 더 체감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실내 분위기를 제대로 확인할 틈을 주지 않고 웨이츄레스가 다가와 허리를 숙여 인사 한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제가 자리를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동건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나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를 이런 산중에서 받게 되는 것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는지 우쭐함과 생경한 느낌이 교차한 듯한 표정을 하고는, 자신과 한발 앞질러 웨이추레스를 따르는 수연과 걸음을 나란히 하기위해 발놀림을 서두른다.
동건과 수연 누구도,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느껴지는 테라스 자리를 원한단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웨이추레스는 당연하다는 듯 동건과 수연을 그리로 안내하고 있었다. 또한 가장 추운 맨 끝자리에 앉게 됨을, 행운인줄 알란식의 부연설명까지 하면서 말이다.
“마침 조금 전 손님 한 팀이 빠지면서 겨우 자리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최고의 자리로 말입니다.” 문득 동건은 자신과 수연이 탄 차가 주차장에 들어설 때 빠져나가고 있던 흰색BMW를 떠올리게 된다.
“여기 있습니다.” 동건과 수연이 자리에 앉자 웨이추레스가 손에 들고 있던 메뉴판 외에 또 다른 무언가를 하나씩 나누어 주고는 자리를 피했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장거리 비행 시 기내에서 나누어 주던 촉감 좋은 양모 담요 두 장이었다.
그제야 자리까지 오는 동안 지나쳤던 사람들의 모습이 잔영으로 되살아났다.
‘모두가 한 장씩 들고 있던 체크무늬 양모담요’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주변을 둘러보는 동건.
그때서야 주변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제멋대로 담요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30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은 동건과 수연처럼 마루에 앉지 않고 나란히 앉은 상태로 한 장은 두 사람의 무릎을 덮는 것으로, 남은 한 장은 등 뒤로 돌려 윗몸을 덮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선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마주보고 앉아서 식사가 끝나며 나오는 후식커피를 후 후 불며 홀짝이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등 쪽에 담요가 덮여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테이블에 사람들도 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동건의 눈이 멈춘 곳은 바로 등 뒤쪽에 자리한 남, 여 커플이었다. 한 장은 몸통에 다른 한 장은 머리위로 보자기처럼 뒤집어쓰고 있는 커플이었다. 여자는 20대 초중반으로 보였고, 그 옆에는 카키색 캐시미어 원단으로 만들어진 고급 코트를 입은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들은 얼핏 보기에도 아버지와 딸의 나이차이로 보였다. 그러나 분명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아닌 것을 누구나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두 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벤치형 의자를 두 사람은 마치 카누를 타듯 남자가 뒤에서 백 허기를 하고 앉아 있었다.
동건의 시선이 그곳에 생각보다 오래 머물러있자 수연이 자리에서 엉덩이 떼고는 몸을 쭉 빼 동건의 등을 살짝 찌르는 것으로 주위를 환기 시킨다. 그제 서야 동건이 얼른 몸을 돌려 수연을 보았다. 허공에서 만난 눈빛으로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고는 얘기가 서로 통했는지 마주보고 웃는다.
수연이 눈짓으로 동건의 시선을 우측으로 돌려세웠다. 동건의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가는 동안 5°씩의 각도 변화가 생길 때마다 얼굴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는 모습이 마치 프레임이 나뉘어진 아날로그 필름처럼 수연의 눈에 와 박혔다.
동건의 머릿속에선 일순간 우주에 있는 모든 질량이 가진 물체에 작용하는 만류인력의 법칙이 깨지고 있었고, 천문학, 지구과학 이론 등이 모두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하늘에 별들이 , 아니. 은하수 전체가 땅으로 떨어져 버렸어요…….” 동건이 잠꼬대 하듯 입술을 움직이자, 수연의 음성이 꿈속에서 들렸다.
“저는 지구가 우리 발아래만 남겨놓고 모두 함몰 됐냐고 물었었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깍아 자른 듯 한 절벽 아래로 어둠이 가득 차 있었고, 저 멀리 보이는 도심의 불빛들이 휘황하게 빛나면서 광활한 우주를 만들고 있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그 순간 동건의 머릿속에선 어릴 적 기억하나가 떠올랐다. 시골 할머니 댁 앞마당이 생각이 났다.
불이 지펴져 있던 왕겨더미가 어둠속에서 보였다, 검은 재 사이사이에서 빛을 내뿜고 있는 불꽃들이 보였다.
‘때론 짧게, 때론 길게 명멸하면서 빛을 발하고 있는 왕겨더미가, 현실로 돌아와 저만치 멀리에 있는 마천루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놀람과 환희가 뒤섞인 목소리로 동건이 물었다. “와. 수연 씨는 이런 멋진 곳을 어떻게 알았어요?” 그리고 수연의 답이 있기 전 동건의 또 다른 질문이 뒤를 이었다. 이번엔 좀 전과 사뭇 다른 칼칼한 영화 속 악당의 목소리 이었다.
“여기 누구랑 와 봤어요?” “푸.푸하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기위해 앙다운 입술이, 한여름 상온에 오래 상한 우유에서 번식하는 대장균의 번식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늘어난 웃음의 질량을 못 이겨 입술을 벌리고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동건씨 그런 사람이었어요?” 수연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뭐요~?” 엊그제 엄마와 손잡고 가게로 들어온 심술 난 6살 꼬마의 얼굴과 말투가 동건에게 있었다.
“지난달 유미생일날 유미가 알려줘서 같이 딱 한번 와봤어요.” 순간 수연은 보았다. 식물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볼 수 있는 꽃의 개화장면을. 조금 전 동건의 얼굴에서,
“아, 그랬군요! 하하하” 동건이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수연의 시선에 동건이 집어든 메뉴판 글씨가 거꾸로 보였다. 몇 초가 지났는데도 수연의 시선이 자신의 정수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동건이 슬며시 고개를 들자 수연의 눈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일초, 이초, 삼초, 사초.
“하하하” “호호호” 두 사람의 웃음소리에 주변의 시선들이 소리 나는 곳으로 모였다가 원래대로 돌아가서는 자기들끼리 달리 해석한 얘기를 나누며 웃는다.
동건은 참나무 숯불에서 살짝 구운 육질 좋은 안심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올리브 기름에 마늘과 양파 그리고 노랑, 빨강색의 파프리카를 송송 썰어 프라이팬 위에서 빠르게 겉만 살짝 익힌 야채가 스테이크 주변에 보기 좋게 깔려있어 더욱 먹음직 서럽게 보였다, 거기에 바다향이 물씬 풍겨나는 굴 소스에다 마늘, 배, 고추와 몇 개의 향신료를 첨부해 만든 독특한 소스가 고기와 야채 주변으로 선을 그리며 뿌려져 있었다. 수연은 한려수도가 있는 청정해역인 남해가 원산지인 소라를 가지고 껍질을 벗겨낸 연갈색 속살을 주원료로 하여 여기에 각종 야채와 양념, 그리고 계란을 섞어 반죽한 뒤 그 위에 스위스 최고급 치즈를 뿌려 오븐에다 구운 소라 그라탱 [Gratin] 을 주문했다.
너무나 맛있게 차려진 음식이었으나, 사실 황홀한 야경과 살을 에는 듯 한 추위는 맛의 진가를 고스란히 음미 하는 것을 방해 하고 있었다.
“요즘 많이 바쁘실 텐데, 제가 이렇게…….” 수연은 이미 온기를 모두 잃어 고무처럼 굳어버린 치즈 덩어리를 포크로 쿡쿡 찔러대며 말하고 있었고, 동건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허리를 자르더니 자신의 말을 이어 붙인다.
“그럼요. 얼마나 바쁜데요, 그래도 수연씨 만나는 일에 매니저의 동의를 얻어야 할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마세요.”
목젖이 보일정도로 크게 웃던 동건의 시선이, 그 어떤 감흥도 찾아 볼 수 없는 억지 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수연의 얼굴과 대면한 순간, 귓불까지 쭉 올라갔던 입고리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재미있다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수연. 그런 수연의 웃음이 이젠 자신의 삶을 통째로 뒤고 흔들고 있음을 심장이 먼저 알아보고 있었다. 동건은 한참을 그렇게 헝클어진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게 되었다.
수연과 늦은 밤까지 데이트를 하고 난 다음날이었다. 점심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응급실에서 호출이 들어왔다. 건설 현장에서 부상한 50대 남자, 극심한 다중성 장기손상과 그만큼의 골절상, 갈비뼈 서너 개가 부러졌고, 골반 한쪽이 탈구 되었으며, 어깨 관절이 으스러지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의 환자였다. 6시간이란 장시간의 수술 끝에 환자에게 수혈된 양구 백두산부대에 갓 들어온 김 이병이 기부한 혈액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혈액이 가치 있게 되었다.
기진맥진 상태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동건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밀어 넣은 상태로 앉아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지 않아 ‘똑 똑’ 두 번의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벌컥’ 방문이 열어젖혀지는 소리에 동건이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선배” ‘역시나’ 동건은 자신의 방에 허락도, 동의도 없이 불쑥- 들어올 수 있는 의국 내에서 유일한 한사람을 순간 떠올렸고 고개를 문 쪽으로 돌린 상태에서 익숙한 윤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늘어 뜨려던 눈꺼풀은 더 힘을 주어 안구를 닫아버린다.
“선배, 정말 대단했어. 지금 병원 안이 난리가 아니에요. 어떤 녀석들은 우리 신의님, 신의님 하는 것이 마치 교주를 숭배 하는 줄 알았 다니깐, 아무도 중요 장기 6군데나 손상을 입고 뇌사 상태로 5분 가까이 된 환자를 살려 낼 거라는 쪽에다 돈을 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거든, 그런데 그런 환자를 살려내다니 선배는 정말,,,,” 동건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도끼눈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자 윤희는 할 말을 잃고 시선은 배회 한다.
“너 녀석들, 환자의 생명을 놓고 내기를 한 거야?” 쩌렁쩌렁한 동건의 목소리가 방안을 빠져 나와 비서실 밖에서 들리자, 친구에서 메신저를 하고 있던 비서가 화들짝 놀라 문 쪽을 바라본다.
“아 무슨…….선배…….말이 그렇다는 거지. 무슨 내기를……. 암튼 고지식하기는,”
이렇게 말하며 동건 곁으로 다가온 윤희.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책상위에 엉덩이를 올리고는 영화 원초적 본능에서 다시보기를 하도 해서 테이프가 늘어난 부분의 그 명장면처럼 샤론스톤이 다리를 꼬고 앉듯이 윤희가 앉는다.
“왜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본론만 말하고 어서 나가. 나 피곤해.”
“아 왜 그래요 선배, 정말 진심으로 선배 칭찬해주로 온 사람 한태.” 표정까지 진지하게 바꾸고는 다소 신중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런데 선배에…….” 어려운 것을 쉽게 취하고자 할 때 나오는 여자들만의 필살기, ‘애교’ ‘코맹맹이 소리’ 여자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상대성 이론에 결부 된다는 것을.’
“그동안 많이 궁금했는데……. 참고 참았었는데, 더 이상 참으면 내 몸뚱이가 아마도 선배 수술이력에 포함될 것 같아서, 묻는 건데……. 선배 그날 병실에 있던 여자 누구야……. 나도 얼핏 낯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선배가 아는 여자를 내가 모른 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안 그래 선배 그치의~?”
“야 조윤희 너 뭐야! 왜 내가 아는 여자를 네가 다 알아야 하는데? 네가 뭔데, 네가 내 마누라라도 돼?” 동건이 또 한 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아 놀래라…….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잉 너 뭐야 임신했어? 누구 애야?” 동건이 몸을 바로 세워 앉더니 윤희의 의사가운을 잡아당기며 배에다 시선을 두며 말했다.
“아 뭐야, 왜이래…….” 순간 돌발적인 동건의 행동에 당황한 윤희는 동건의 손에 끌려가던 가운자락을 ‘홱’ 낚아채 와서는 황급히 자신의 배를 가린다.
“뭐, 뭐야 그 배, 정말 임신, 야 바른대로 말해 누가 너 배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놈 누구냐니깐?” 동건이 다시 배를 확인하려는 듯 달려들자, 후다닥 책상에서 내려와 책상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는다.
“임신 아니라니깐, 이건 엄연히 매일 야근에 시달리느라, 생긴 스트레스 덩어리라니깐!”
“포화 지방덩어리겠지, 넌 몸매는 그래도 괜찮은 녀석이 배는 그게 뭐냐? 502호 최미숙 환자도 너 임신한 줄 알고 나에게 뭐 선물할지 묻던데”
“선·배” 윤희가 ‘꽥’ 소리치자 동건의 얼굴에 있던 의미심장한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회진만 아니었어도…….그냥”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 본 윤희가 말했다. 문 쪽으로 걸어가던 윤희가 한마디 더하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선배 오늘 저녁은 선배를 위한 축하파티니까 늦지 마. 흉부외과 김 과장님도 팀원들 하고 오신다고 하셨으니까, 각오는 하고 오셔야 할 거야. 알지 정형외과 강 선생 전문의 되던 날, 걱정되면 박 기사님한테 얘기해서 술집 앞에다 앰뷸런스 파킹해 놓고 퇴근하라 할게. 호호호, 그리고 방금 전 못들은 대답은 이따가 들을 거니깐 준비해 두라고.” 윤희가 말하는 동안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던 동건이 윤희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걱정도 안 된다는 듯 시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1차는 식사 겸 반주로 갈비집을 선택했다. 1차를 끝내고 2차로 정해진 곳은 모던 바와 가라오케가 믹스 된 듯한 퓨전 술집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바가 맞긴 한데, 홀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무대에선 대한민국을 팝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키는 것에 일조를 한 노래방 시설이 구비외어 있었다.
1차에서 2차로 옮겨지는 동안 당직 스케줄이 있는 몇 명의 의사 거기에 가정이 있는 유부녀 의사와, 간호사들이 빠지자 절반이상이 줄어 10여명의 인원만 2차에 합류해 있었다.
동건은 이미 1차에서 상당량의 술을 마신 터라 꽤 취기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의국 내 최고의 주량을 자랑하는 흉부외과 김 과장의 건배 제의를 한 번도 거절 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이런 동건을 옆에서 안쓰럽게 지켜보던 윤희가 몇 번이나 흑장미를 자청했지만 동건은 빈번히 이를 거절하고 있었다. 윤희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꾀를 내어 김 과장의 노래가 듣고 싶다며 군중을 동요시켰고, 결국 김 과장은 후배 의사들에 팔에 이끌려 무대 위로 올랐다. 김 과장을 무대 위로 끌고 가던 레지던트 3년차 상용이, 순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볼 때 윤희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인다, 상용은 알겠다는 듯이 한쪽 눈을 한차례 감았다 뜨는 것으로 모종의 거래는 성사되는 듯싶었다.
이때다 하고 윤희는 동건의 곁으로 바투 다가와 앉았다.
“선배, 내가 선배 살리려고 저 녀석에게 쿠폰 한 장 발행했다. 노래 3곡 부르기 전까진 김과장님 자리로 못 돌아오게 해놨으니까, 그때까진 술 안 마셔도 돼, 어때 고맙지? 선배 생각하는 사람 나밖에 없 다는 거 인정해 줘야 한다고, 응, -응?”
동건은 이미 많이 취했는지 알알이 굵게 맺힌 벼이삭처럼 몸이 깊숙이 굽어 있었다.
“선배, 선배 왜 대답이 없어, 많이 취했어?” 윤희는 대답 없는 동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 서야 고장 난 자판기에서 물건이 쏟아지듯 동건의 말이 빠져나왔다.
“야, 나 아직 끄떡없어 아직, 안취했다고, 야 너 잘 왔다. 나랑 한잔하자. 야, 술잔 어디 있어?” 흐느적거리며 테이블 위에서 술잔을 찾는 동건의 모습은 마치 평형인형처럼 상체가 앞뒤로 크게 흔들거렸다. 물방울을 가로로 뉘어 놓은 듯 크고 잘생긴 눈은 어느새 소금물에 담근 지 몇 해가 지난 새우 마냥 가늘고 길게 늘어져 있었다.
“취했는데 뭘?” 테이블 위로 쓰러질 듯 위태위태한 동건의 팔을 끌어 앉으며 윤희가 비아냥거리자, 동건이 신경질 적으로 반격한다.
“아직 안취.했다니깐, 자.한잔 더 따라봐…….” 기어코 술잔을 거머쥔 동건은 술잔을 윤희의 얼굴 앞에다 밀었다. 윤희는 동건의 손에 들려진 잔을 빠르게 뺏더니 비어있는 술잔에다 미리 따라놓은 물이든 잔을, 손에다 쥐어주었다.
“어, 이건 무슨 술이야. 이야 술 색깔 보니까 이거 보드카지, 그치? 그래 쎈 술로 하자 이거지.그래 하자고, 해.” 윤희가 또 다른 잔을 들어 동건이든 잔에다 부딪치자, 동건은 물이든 잔을 자신의 입에다 쏟아 보고는 빈 잔을 들어 머리위에다 올린다. 탁탁 털어 내용물을 다 비웠다는 세레모니까지 마친 동건은 우월감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자, 봐, 어때, 나 안취했지, 하하, 크윽…….”
“어, 하하 그래 안 취했네, 안취했어,” 윤희는 동건의 몸에 더욱 바짝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더니 귀에다 대고 유혹하는 듯한 어투를 사용해 말한다.
“선배, 선배 사고 난 날…….그날, 병실에 같이 있던 여자 누구야?” 갑자기 고개를 ‘퍽’ 치켜든 동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살짝 겁을 먹고 목을 뒤로 쭉 뺀 윤희,
“난…….그냥…….” 윤희가 말을 멈춘 건 갑자기 바보처럼 해 멀건 미소를 얼굴에 드리운 동건을 보아서 옅다.
“수연씨……. 헤헤, 내가 사랑하는 여자…….헤헤,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동건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던 윤희가 정색하며 따지고 든다.
“아, 뭐야 선배, 선배 나 서른다섯 넘을 때 까지 시집 안가면 나 데리고 산다며?”
“야, 너 취했냐?” “...............?”
“다른 사람들 다 아는 것을 왜 너만 모르고 있냐?” “뭘 모르는데?”
“뭐긴 뭐야 너 집에 거울 없냐?” “.......거울 없는 집이 어디 있어?”
“아, 얘…….정말 웃기네. 동건은 조금 전까지 취한 연기를 해왔던 것 마냥 바로바로 윤희의 말에 응수하고 있었다.
윤희가 동건의 눈을 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던 찰라, 화장실에 갔던 승준이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이 화장실을 간 사이 자신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있는 윤희를 발견하고는 기필코 다시 자신의 우상인 동건의 옆 자리를 고수하겠다며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려 하는 승준의 등짝을 윤희는 있는 힘을 다해 내려친다.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맞은편 자리에서 옆으로 쓰러져 자고 있던 흉부외과 2년차 레지던트 한명이 놀랐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바로 다시 쓰러진다.
충분히 아팠을 거라 예상했기에 미안한 얼굴을 보이고 있는 윤희는 승준의 다음 말에 오히려 뜨악한 얼굴이 되고 만다.
“과장니이임, 과장님, 수제자는 접니다. 그~쵸~오? 여기 윤희 선배가 아니죠?”
승준의 혓바닥에 모기라 물려 부은 소리를 내자, 윤희의 얼굴이 점점 벌레 씹은 얼굴로 변하더니 급기야, “야 차승준~!” 윤희의 고함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건에게 바싹 달라붙어 종소리를 내고 있는 승준이 많이도 얄미 엇던지 윤희는 다시 한 번 승준의 등짝에다 ‘쩍’ 소리를 남기고는 자신이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자, 아까부터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몇몇의 일행들이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소리 내 웃었다.
술자리가 파한 시간은 새벽3시가 다돼서 엇다. 동건은 아이러니 하게도 술자리가 끝나게 되자 오히려 취기가 사라진 듯 정신이 또릿또릿 해졌다.
술에 취한 일행들을 위해 대리기사를 불러 주는가 하면, 차가 없는 이들에겐 택시를 잡아 귀가를 도왔다. 마지막으로 인턴 동기였던 김성래에게 택시를 잡아 태우는 것으로 피날레(Finale)를 장식했다.
김성래를 실은 택시가 눈앞에서 저만치 멀어지자 동건은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밤이슬이 내려 노면에서 바로 얼어버린 탓에 약간 부자연스런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 또한 매서 엇기에 고개를 들고 걷기조차 어려웠다.
매서운 바람에 한기를 느낀 동건은 옷매무새를 고쳐 쥐었다. 병원에서 나올 때 자신의 차를 두고 다른 일행의 차를 타고 나온 것을 뒤늦게야 후회가 되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할 거리는 되지 않는 터라 걷기를 택했던 것이었다.
자신의 차가 세워져 있는 병원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선 8차선 대로 위에 횡으로 세워진 육교를 건너야 했다. 동건은 계단보다 앞서 마중 나온 램프를 이용해 육교위로 올라갔다. 도로위에 떠있는 육교 한가운데 다다르자, 알 수 없는 생각하나가 발길을 잡아 세우더니 육교 아래 도로를 내려다보게 했다.
늘, 차들로 가득 매워져 있던 도로가 을씨년스럽게 휑하였다. 그 모습이 왠지 낯선 곳에 와 있다는 생경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때 멀리서 두 대의 차량에서 뿜어내고 있는 불빛이 동건을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불빛들이 동건과 근접한 거리에 다다를 쯤, 차들은 고가 밑으로 내려가 사라졌다. 그때 앞선 승용차가 갑자기 차선을 변경하려는 순간 트럭운전수는 느닷없이 앞쪽으로 끼어드는 승용차가 크게 거슬렸던지 전조등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이어진 크락숀 소리. 돌연 밝아진 불빛으로 인해 눈이 부신 동건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세웠다.
그러는 그때 별안간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얼마 전 수연이 했던 사고의 전말.
그리고 또 다른 기억하나가 그 위에 오버랩(Overlap)되기 시작하였다.
다리위에서 난간에 서있던 여인의 모습, 동건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글오글 돋아나기 시작하면서 귀밑터럭이 쭈뼛쭈뼛 일어섬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서 수연의 부모님과 첫 만남의 장면이 화살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어 들것에 누워있던 모습이 기억을 제압했다.
동건은 ‘악’ 외마디 비명을 지름 과 동시에 머리를 감싸 안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깊은 상념 속에서 빠져나온 동건이 천천히 감았다 뜬 시선에 들어온 것은 육교 아래로 급류처럼 흐르는 차들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설물이 동건의 시선을 빨아들이듯 끌었다. 육교아래. 정확히 지하고가 위에 새롭게 세워진 철책난간, 그리고 붉은색 표지판에 큼지막이 적혀있는 ‘위험, 사망사고 지점’ 이란 글자가 보였던 것이다. ‘혹시…….설마…….아니지…….아닐 거야…….’ 머릿속에선 수많은 의문들이 새롭게 피어났고, 서로 부딪혀 명멸하고 또다시 생성하기를 반복하더니 종결에 이르러 그럴지도 모르겠다. 에서 그러하다로 몰고 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떠오른 기억하나가 논쟁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젠 그 여자를 용서하기로 했어요.
결국 이러한 기억의 조각하나를 구멍 난 퍼즐 판에다 채워 넣자 전체 그림 중 한쪽 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림을 완성 짖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빈 공간들이 남아 있었기에 동건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더 상념 속에 빠져 있어야만 했다.
싸늘한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와 동건의 뺨을 세차게 후려친 뒤에야 정신을 차리게 된 동건은 꺾인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잠시 뒤 노면에 신발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동건이 육교 끝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차장에 막 도착할 쯤 동건은 대리기사를 호출하기 위해 전화기를 찾았다. 그러나 주머니란 주머니를 다 뒤져봐도 전화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제길.” 동건은 순간 피로와 권태가 한꺼번에 밀려옴에 짜증이 났다. 하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집중 시켰다. ‘갈빗집’ 동건은 머리를 내저어 분실장소 목록에서 지운다. ‘그럼 2차로 갔던 퓨전술집’ 또다시 머리를 내젓는다. 마지막으로 갔었던 모든 바에서 분명 자신의 전화기로 승준에게 대리기사를 불러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모던 바가 아니면 거기서 나와 이곳 주차장까지 오는 동안 일 것이다.’ 생각이 이렇게 정리가 되자, 차문을 얼어 콘솔박스 안에든 동전 몇 개를 챙겨들고 영안실 쪽에 세워진 공중전화 박스로 향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째가 돼서야 통화 연결 음이 끊어지고 대신 시끄런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네, 전 그전화기 주인인데요…….” “네, 여기 리논데요, 손님께서 소파에 떨구고 가셨더라고요.” “아, 네 그랬군요. 제가 지금 바로 찾으러 가겠습니다.” “네, 그럼 그러세요.”
통화를 끝내고 나자 절로 ‘휴’하고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제 서야 통화한 여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스키니 진 청바지에 밝은 색 스웨터, 차림에 단발머리 20대여성, 친절한 웃음을 한 채 서빙 하던 모습이 기억이 났다. 결국 동건은 택시를 잡아타고 휴대폰을 찾기 위해 떠나왔던 술집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휴대폰을 찾아 다시 병원 주차장으로 돌아와 보니 시간이 벌써 5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택시 안에서 가끔 이용하는 대리운전 회사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동건이 이번엔 스팸 목록을 뒤져 대리운전 회사 연락처를 찾아 연결을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 연결되지 않았다.
동건은 하는 수 없이 오랜만에 당직실에서 자야겠단 생각을 하고는 차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이 돼서야 수연을 생각하게 된다, “뭐야, 문자 한통도 안 한 거야 너무하네.” 동건은 실망 스럽 다는 듯 입가에 주름을 내 걸으며 휴대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카톡을 실행시켰다. 그리곤 수연을 터치‘와우’ 난데없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어젯밤부터 마지막 술자리가 파하기 직전까지 이미 많은 양의 메시지가 도착해있던 거였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답변까지 보내져 있었다. ‘누가 답장을…….’ 의문은 발신 내용을 보자 바로 풀렸다, 「이 휴대폰 주인께서 저희 가게에다 전화기를 놓고 가셨네요. 혹시나 연락되시면 (니노)에 있다고 전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거기 연락처를 좀 알려주세요, 혹시나 해서 그리고 Open시간과 Close시간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02-525-1234 Open/PM7시 Close/AM5시」 동건은 화면을 움직여 이전 메시지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AM05:10 「동건씨 저 이제 장 다보고 , 분당으로 갈거 에요, 일어나시면 메시지 주세요, 무슨 일 있는걸 아니죠?」 동건은 어느새 건물로 통하는 또 하나의 출입문 앞까지 와있었다.
AM04:50 「괜찮은 거죠?」
AM03:10 「술자리가 길어지시나 보네요. 전 이제 막 꽃시장에 도착했어요.」
AM02:30 「아직도 술자리가 이어 지시나 봐요, 저 이제 출발해요.」
PM10:05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이따가 봐요」
PM10:04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꽃시장으로 마중 갈거니까 연락 주셔야 해요. 꼭요. 올라가실 때 제 차로 가면 되니까 차는 두고 오시고요.」
PM10:04 「술 드시고 피곤 하실 텐데 그냥 들어가서 쉬시는 게…….」
PM10:03 「수연씨 꽃시장에서 우리 만나요」
PM09:50 「저 이제 들어가요, 갑자기 주문하나가 들어와서 이제야 끝났네요.」
PM06:03 「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새벽시장 가는 날이라 일찍 자려고요^^」
PM06:00 「수연씨 저 오늘 회식 있어서 꽃집에 못 들릴 거 같아요, 문단속 잘하시고 일찍 들어가 쉬셔야 해요, 알았죠.♥」
동건은 일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크나큰 분노가 일었다, ‘어떻게 이러한 약속을 잊을 수가 있는 거야’ 오늘도 레지던트 한명의 작은 실수하나를 지적해 호되게 야단친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동건 자신 아녔던가, ‘정신 나간 놈, 위선자, 천치, 바보, 멍청이, 자신은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한 유전인자를 가진 상등 동물이라 믿어왔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 것이 착각임을 깨달으면서 수반되는 자기 비하가 썰물처럼 밀려왔다. 스스로를 한란하고 힐책하는 것도 모자라 증오 스럽기 까지 했다. 그런데 이때 비관적 단어들의 출몰을 저지시키는 음률 하나가 귓속을 비집고 들어왔다.’카-톡‘ 동건은 허둥지둥 전화기 액정화면을 확인한다.
AM05:32 「저 지금 분당으로 가고 있어요, 휴대폰 찾으시거든 연락주세요.」
동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연씨 지금 어디세요?” 통화 연결 음이 끊김과 동시에 다급하게 물었다.
「저 전화기를 찾으셨네요, 다행이에요」
“지금 어디냐니까요?”
적반하장으로 거칠게 따지고 묻는 동건의 물음이 서운해선지, 새벽 내내 걱정했던 사람이 의외로 멀쩡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야속해선지, 수연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이미 많이 왔어요.」
“그만가고 차 세워요. 얼른요. 네. …”
당당하게 내 뱉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애원조로 변해 들렸다.
「…지금 여기 올림픽대로 한가운데 에요.… 여기서 어떻게… .」
“무조건 세워요. 아. 아니 빠져나오세요.”
「택시 기사님께 말씀 드려볼게요‥ 그런데 …」
“제가 그리로 금방 갈거니까 올림픽대로에서 빠져나가세요. 알았죠?”
「저 … 기사님 죄송한데요. … 」
동건은 수연이 택시기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듣는 순간 전화를 끊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차로 뛰기 시작했다.
동건이 차에 올라 빠르게 시동을 걸었다. 차가 막 출발 하려는 순간 수연의 목소리가 다시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조금만 가면 도산대로 쪽으로 빠진…」
“아, 네 알았어요. 거기서 나와서 우회전 하자마자 유턴을 하세요. 그리고 유턴하자마자 바로 차를 세우시면 되요. 날씨가 많이 추우니까, 차안에 그대로 계세요. 아셨죠. 20분 쯤 걸릴 거예요. 그럼.”
동건은 혼자만 할 말을 다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동건은 전화를 끊자마자 시간을 확인 했다. (5시35분)
수연은 미터기(Meter)에 나온 금액에 조금 더 추가적인 요금을 지불 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동건이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수연은 그렇게 낯 두꺼운 행동을 아래보다는 조금 추위를 견디는 편이 났다고 판단이 섯 던 것이다.
도로가에 커다란 꽃 상자들이 허리높이 보다 조금 높게 두 줄로 쌓여져 있었다.
그리고 수연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막고 섰다. 혹여나 찬바람에 꽃들이 상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렇게 서있었다.
한 겨울, 그것도 새벽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매서웠다.
간간히 지나는 행인들의 얼굴에는 달빛을 막고선 먹구름 마냥 어두운 색을 띄고 있었다.
그런데 수연의 얼굴에선 그런 기색을 찾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핏 설핏 실없이 웃고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동건이 도착하기로 예상했던 시간이 10분이나 더 지났다. 팔을 걷어 시계를 내려다 본 수연이 초조해 저선지 추위에 구르던 발놀림이 조금 더 빨라지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선 전화기를 쥔 손에 축축하게 땀이 차 왔다.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지나친 시간이 무려 30분이나 되고 서야 수연은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통화음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갑자기 온 몸으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리고 끝내 음성녹음 의사가 있는 지를 묻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때 멀리서 ‘삐뽀,삐뽀’ 앰뷸런스에서 나는 사이렌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곧이어 앰뷸런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황색의 경광등 불빛에다 시선을 빼앗긴 채,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마는 수연, 초조함, 불안감, 두려움, 비애 이런 것들이 한 대 뒤엉켜 사색의 얼굴을 하고선 말이다. 문뜩 떠오른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한 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습관처럼 삶은 다가올 미래의 불행을 감춘 채 잠깐의 행복을 제공한다. 절대 영원히 이어지는 행복은 정말 이 세상에 없는 걸까?’
추위도 잊은 채 계속해서 전화기만 붙들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수연의 온 몸에다 흩뿌리고 있는 새하얀 눈발이 오늘따라 더욱 야속하게 보여 지고 있었다.
수연과 만나기로 한지 10분전, 동건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연을 생각하자 자연히 액셀러레이터 위에 올려놓은 발목에 힘이 들어갔다.
수연에게 술 냄새를 들키지 않으려고 콘솔박스 안에 있던 가글을 꺼내 입안을 행군 것도 모자라, 출발하면서부터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살을 에이는 듯한 강바람이 들이치고 있었다. 동트기 직전이라 그런지 어둠은 최고조에 달아 올라있었다.
그나마 달빛에 조금이나마 짙은 회색을 띄고 있던 하늘마저 방금 전 먹구름으로 뒤덮여 암흑의 하늘이 되어 있었다. 병원에서 출발한지 정확히 18분 만에 동건을 실은 차량은 ‘도산대로방향’이라 쓰인 이정표를 따라 우측 차선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동건은 수연이 탈것을 예상해 조금 전 창문도 닫고, 조수석 자리에 시트 열선도 올려놓은 상태였다. 창문을 열어두었을 때 느끼지 못했는데 창문을 닫자 왠지 자신의 몸에서 스멀스멀 술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동건은 또 다시 팔을 뻗어 조수석 앞에 있는 큰솔박스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 안엔 분사용 방향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크기도 작았지만 원통형으로 박스 가장안쪽에 들려 있었기에 쉽게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동건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한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아슬아슬하게 시트에서 엉덩이를 땐 상태가 돼서야 겨우 손가락 끝이 방향제가 걸렸다.
조금 더 엉덩이를 들어 올려야만 방향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또 한 이때 만난 커브길 은 더 없이 불안전한 자세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1,2분 후면 수연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망설일 수가 없었던 터라, 발가락에 힘을 주고 몸을 최대한 길게 늘어뜨렸다. 그리고 막 방향제가 손가락 마디에 걸려 끌려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차체에 둔탁한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에 급하게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동건.
미끄러운 노면은 순식간에 차의 방향을 인도 쪽으로 향하게 했고 차는 차로와 인도를 구분하기 위해 시설된 방지턱 위로 앞바퀴가 모두 넘어서고 나서야 멈출 수가 있었다.
짧은 순간 극도의 불안과 혼동이 엄습해 오면서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아무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신경세포들 보다 일찍 기능을 회복한 자각신경계의 명령으로 머리를 뒤흔든 뒤에야 신경세포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시신경계 세포들이 활동을 시작하자 눈앞에 벌어진 사실에 동건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만다. 혹시나 하고 보이는 것을 의심한 나머지 주먹으로 눈을 비빈 뒤 다시 떴다. 연이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판단이 서자 어의 상실한 눈이 되고 마는 동건, 시선이 향한 길옆으로 길게 뻗어 있는 초목 사이로 쓰러져 있는 사람의 형상이 차량에서 뿜어져 나온 불빛에 비쳐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초석을 다투는 그 짧은 순간 동건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최근에서야 거머쥔 사랑과 성공된 삶을 일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자 머릿속에선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애써 외면 하고자 궁색한 변명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이곳을 피해 도망 칠 것인가, 아니면 차에서 내려 경찰과 119에 연락을 취할 것인가, 선자와 후자 모두 동건의 삶은 깡그리 무(無)화 시켜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만일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이 죽기라도 한다면 최근에 쌓아올린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구속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극심한 두려움이 내면을 뒤흔들었다. 죽지 않는다 하여도 음주 운전 중 인사사고는 형사적 처벌을 면키 어려운 일. 그러는 그때 떠오른 생각 하나가 심연 속에서 빠져나와 생각을 지배하려 들던 양심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동건은 우선 백미러와, 룸미러를 이용해 후방을 살폈다. 그리고 재빨리 유리창 너머로 주변을 살폈다. 겨울의 새벽이라, 또한 대로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인 터라 지나는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뒤이어 따라온 차량 또한 보이지가 않았다. 만일 뒤에서 차가 온다 하여도 자신의 차가 사고자의 모습을 가리고 서있는 꼴이었고 거기에 비록 생명이 다한 덤불과 작은 묘목들이긴 했지만 자신의 차의 전조등을 꺼버리자 가까이 다가와 유심히 살피지 않고서는 사람임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아 보였다. 동건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막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뒤쪽에서 불빛이 보였다. 동건은 재빨리 몸을 웅크려 트려 깊숙이 숨겼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고 이마에서 시작된 식은땀이 주르르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 막히는 몇 초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이 뒤에서 온 차량은 동건의 차를 살짝 피해 저만치 가버렸다. 그제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동건은 재빨리 사고자가 쓰러져 있는 덤불 속으로 몸을 날렸다. 사고자를 뒤 자석에 눕힌 뒤 동건은 무릎을 꿇어 몸을 최대한 속인 상태에서 사고자의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우선 환자의 목덜미에 엄지와 중지를 가져다 대고는 맥을 확인 했다. 그러나 자신의 격단치는 심장소리에 희석되어 쉽게 판단이 어려 엇기에 결과를 얻기 까지는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이 맥이 뛰고 있었다.
그러나 맥이 가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 직감적으로 위험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눈을 벌린 뒤 실내등을 켜 동공의 반응을 확인했다. 다행히 불빛에 반응을 보여 동공이 수축됨을 보였다. 이번엔 호흡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사고자의 코끝에 자신의 귀를 가져다 대었다. 예상대로 호흡 상태가 좋지 않았다.
종합해 보건데 사고자의 상태는 최대 몇 분 내에 코마상태에 빠져들고 말 것이란 것이 경험에서 얻은 미림(*미림: 경험에서 얻은 이치 )에 의해 판단이 내려졌다. 서둘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단 생각밖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건은 우선 환자를 소정시키기 위해 안전벨트를 뽑아 걸었다. 그런 뒤에 기도 유지를 위해 입고 있던 슈트를 벗어 둘둘 말았다.
그리고 옷을 환자의 목 아래 두기 위해 머리 아래로 손을 밀어 넣는 순간 손끝에서 끈끈한 점액이 느껴졌다. 익숙하지만 언제나 불쾌감을 안겨주던 혈액의 느낌이었다. 출혈정도는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뇌에 손상이 갔을 확률이 있다는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동건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크리넥스 티슈를 주워 박스를 가르고 그 안에 들어있는 티슈를 모조리 꺼내 환자의 뒤통수에 다 대고, 환자의 양말을 벗겨 그 위에다 씌웠다. 그리고 서둘러 시트와 시트사이로 난 공간을 가로질러 운전석에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차에 시동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었다. 앞바퀴가 올려 져 있는 차를 후진으로 인도에서 내려 차도로 옮기는 순간 ‘덜컥’하고 차체 하부가 방지 턱에 걸려 둔탁한 소리를 냈다. 도로에 온전히 내려진 차는 빠르게 앞으로 질주 했고 얼마 안 있어 좌회전 신호대기 차선과 우측 영동대로 방향으로 갈라서는 위치에 다다랐다. 수연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려면 우회전을 한 뒤 1차선으로 붙어 유턴을 해야 했다. 동건이 탄 차는 우회전을 시작했다.
그리곤 전화기를 집어 들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기에서 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동건을 ‘울컥’ 감정이 솟구침을 느끼며 짧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동건의 시선이 머문 곳에 수연이 아무것도 모른 채 밝은 얼굴을 하고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찬바람에 손이 시려 엇음에 손을 호호불어 가면서도 미소지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죄책감과 미안함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쿵’하고 가슴한켠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꾸역꾸역 참아내던 격한 감정이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밀고 올라와 통증을 만들고 있었다. 전화기 넘어 에선 자꾸만 여보세요를 반복해 부르짖더니 잠시 텀을 주었다가 다시 말이 있었다. 아마도 상대가 무심결에 전화를 받았다가 아무 말이 없자 발신자를 확인 한 듯 보였다.
「저 … … ?」
상대는 갑자기 입이 얼어붙은 듯 말이 이어지지가 않는다.
“지금 당직 누구야?”
동건의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더욱 긴장한 응급실 전담 레지던트 1년차 황진수는 당황한 나머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동건이 고함치듯 다시 말한다.
“나 외과 과장이야. 오늘 당직의 누구냐고”
「아‥네‥그게‥그러니까…….외과…최민호‥선생‥입니다.」
“그 친구 지금 어디서. 당장 전화 바꿔. 지금 당장!”
「그‥그게‥」
“아냐, 수술실 긴급으로 얼렌지 하고. 당직 닥터 바로 수술준비 하라고 해. 어서!”
동건의 말투는 신입 장교를 훈육하는 장성급 지휘관의 명령하달 때와 다르지 않았다. 또한 진수는 감히 눈을 마주치기조차 버거운 상관에게 주눅 들어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이등병처럼 말을 재대로 잇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의국 내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상대인 동건에게 난생처음으로 직접적인 명령을 하달 받는 순간이라 그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상태였다.
「그게 ‥ 그런데 ‥ 15분 후에 ‥ 화상환자 ‥ 수술이 …」
진수는 긴장한 나머지 말이 뚝뚝 끊겼다.
“ 그 환자 지금 당장 수술 안하면 죽기라도 하는 거야?” 동건이 버럭 화를 냈다.
“아 ‥ 아닙니다. ‥ 당장 수술시간 변경하고,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과장님.”
동건은 전화를 끊고 나서야 수연에게 문자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수연씨 미안합니다. 갑자기 응급환자가 발생해서요.」
문자를 확인한 수연의 두 눈에선 참고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야속해서가 아닌 안도의 눈물이 말이다. 동건은 전화기를 내려 놓은 지 10분 만에 수술실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지하 1층 비상엘리베이터 앞으로 차를 가져다 세웠다. 차가 멈추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지성을 비롯하여 두 명의 의사 가운을 입은 이들이 차로 달려들었다.
동건이 빠르게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 젖히자, 순간적으로 모두의 낯빛이 굳어 지는 게 보였다. 이들이 놀란 것은 환자의 처참한 몰골이나 부상의 경중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유는 통일되게 한 가지였다.
이 시간에 왜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 환자가 동건의 차 뒤 자석에 실려져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였다. 더욱이 자신들이 알기론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동건은 자신의 축하파티에 참석했던 걸로 알고 있던 터 라 당황 서러움이 더 했다. 모두가 일순간 넋이 나가있는 것을 동건의 고함소리에 의해 정신을 차리고는 차안에 있는 환자를 조심스럽게 들것에 옮겨 실었다.
동건은 차 옆에 서서 승강기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그들을 정신 나간 사람 마냥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이었다. 모두가 승강기 안으로 들어선 뒤 문이 닫히고 있는 그 짧은 순간 동건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경악 서러운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승강기 한가운데 정확하게 환자의 머리 밑쪽에 서서 동건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검은 옷의 여자가 또 다시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웃듯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가있는 모습이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섬뜩한 모습 이였다. 그러나 동건을 경악케 하는 것은 여자의 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섬광과 함께 나타난 숫자 때문이었다.
숫자를 보는 순간 동건은 두 다리가 일순간 잘려나간 사람마냥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승강기 상단의 표시등이 2라는 숫자에서 화살표 모양이 사라질 쯤 동건의 입에서 처절한 절규의 소리가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으~악”
이번에 보인 숫자는 동건에겐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모든 행복을 일순간 앗아가 버리는 상실의 표시였으며 미래에 다가 올 절망의 암시 이었던 것이다.
비탄에 잠긴 듯 초점을 잃은 시선 안엔 방금 전 보였던 1이라는 숫자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동건이 정신을 수습하고 막 수술실에 도착 했을 때는 간호사들에 의해 환자의 얼굴에 인공호흡기가 부착된 상태였고 여러 개의 링거 줄이 하나로 연결되어 환자의 팔에 꼽혀진 후였다. 작년에 레지던트 딱지를 떼고 전문의 계열에 들어선 최민호는 동건보다 나이로는 2살이나 위였다. 하지만 병원 또한 군대처럼 엄격한 서열체계가 있는 법, 수술실로 들어서고 있는 동건을 보자 민호는 자연 동건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수술실 밖에서 거쳐야 하는 수순을 무시 한 채 막무가내로 수술실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아선 사람은 의사가 아닌 어시스트를 담당하고 있는 간호사 엇다.
눌러쓴 수술 모 사이에 희끗희끗한 머리가 보이는 것이 어느 정도의 나이와 경륜을 가늠케 했다.
“과장님” 패닉상태에 빠져든 눈 , 마치 영혼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표정을 지운 얼굴을 한 동건 앞에 딱하니 버티고 선 정간호사가 음험한 목소리로 동건을 불렀다. 동건과는 이미 수십 번이나 수술 호흡을 맞추었던 경험 많은 간호사였다. 그런 정간호사 눈엔 동건은 지금 수술실에 들어올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또한 동건의 과장 승진 환영회가 몇 시쯤 돼서야 끝나는지 또한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건의 넋 빠진 모습과 환자의 상태를 보아 동건으로부터 내막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한들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장님” 정간호사는 또 한 번 동건을 불렀다. 이번엔 냉철한 이성을 앞세운 간결한 어투를 사용했다.
“이동건 선생님 지금 저 환자의 상태를 두고 메스를 잡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수술실 안에 있던 누구도 들을 수 없게 나지막이 속삭이듯 내 뱉은 그 말이 동건의 귀에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들렸는지 게슴츠레 떠져 있던 두 눈이 일순간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더군다나 과장님께서는 지금 음주 상태 아니십니까. 이건 엄연히 ….”
정간호사의 말이 비수처럼 동건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차츰 평정심을 잃어가는 눈빛을 보이는가 싶더니 비장한 어투로 동건이 말했다.
“정간호사님. 이미 눈치 채셨다 시피 저에겐 더 이상 퇴로가 없습니다.”
아연실색한 눈빛을 보이던 정간호사는 잠시 동안 심각한 고민에 빠진 얼굴을 하더니 결심이 썼는지 손가락을 뻗어 수술 전 손을 소독하는 싱크대를 가리켰다.
동건이 가운을 착의 하는 동안 정간호사는 살균세탁물을 실은 카드 안에서 수술용 마스크와 모자 그리고 수술용 장갑을 꺼내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X-선 실로부터 도착한 필름을 지성이 조명판 위에 걸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잠시 후 동건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고 이서서 민호와 지성이 크게 의욕을 상실한 눈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두개골 한쪽이 함몰 되었고 쇠골과 갈비뼈 여럿이 골절되면서 많은 부위의 장기 손상이 예상되는 회생 불가능의 상태임을 의사가 아닌 정간호사 또한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거기에 다른 필름하나가 그 옆에 따라 붙었고, 거기엔 환자의 하복부 사진이 걸려있었다. 사진 속에는 골반 뼈가 여러 개로 조각나 있었다. 이는 콩팥이나 자궁의 손상 또한 배재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임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민호는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휘휘 저으며 혼잣말을 했다.
“ 수술은 무의미 해‥.”
동건이 여지 것 수도 없이 많은 다중성 외상 환자를 수술한 경험이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처럼 현재 숨을 쉬고 있는 것 자체를 기적으로 보아야 할 환자를 상대한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아니 몇 번은 조우한 적이 있었다. 모두다 시신으로서 말이다. 이러한 상태의 환자를 수술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으며 수술한다고 치더라도 테이블 데스(Table death)가 자명 하였기에 누구도 수술을 시도하려고 조차 하지 않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동건이 어깨를 축 늘어 드린 체 환자가 누워 있는 수술대 앞으로 가서 섰다. 여전히 두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분명 동건이 수술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 했기에 그랬다. 그런데 다음 순간 동건의 입이 열리자 두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한 표정이 되고 만다.
“환자나이 48세. 교통사고로 … 인한 다중외상 상태. 현재 … ‥ .” 동건의 입에선 수술 전 환자의 상태가 브리핑 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건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매스를 쥘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환자가 아니 자신이 사고를 낸 피해자가 죽게 된다면 동건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 자명했다. 의사 생활 또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 물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방송과 언론 매체에선 동건을 영웅으로 만든 시간보다 더 단시간 내에 밑도 끝도 없는 나락(那落)으로 추락시키고 말 것 또한 정해진 귀결인 것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뒤엉키자 메스를 거머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동건은 떨리는 손을 막아보려는 듯 재빨리 다른 손을 메스 쥔 손위에 얹어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민호의 얼굴엔 비웃기라도 한 듯이 설핏 미소가 보였다 사라진다.
그때 동건의 귀에 환청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조언 한마디가 들려왔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이유가 절박해야 갰지요.’
오래전인가! 아닌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가 정확한 시기도 또한 누가 해준 말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분전 지하주차장에서 보았던 예지일자 [1] 이란 숫자가 떠오름과 동시에 ‘운명’ 이란 두 글자가 그 위에 포개졌다. 그러자 마치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던 큐브조각 하나가 우연히 맞아 떨어져 한쪽 면의 색의 배열이 맞추어 지듯 알 수 없던 의문의 실마리 하나가 풀리기 시작했다. 이 말을 자신에게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기묘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바로 그 검은 옷의 여자였던 것이 기억났다. 1년 전쯤 이었다. 검은 옷의 여자는 119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실려 왔었다. 복부 쪽 두 곳에 흉기에 찔린 열상을 입은 환자로 서 말이다. 공원에서 만난 강도에 의해 입은 상처라 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수술을 집도한 것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완벽하게 치유 되었다는 사실 또 한 말이다. ‘그런데 왜? 그 때 자신의 목숨을 준 것이 고마워서?’ 그것 또한 또 다른 의문에 빌미를 만들 뿐이었다. 그 이유는 그 여자가 보이고 있는 기괴한 상황들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면의 큐브색이 맞추어 졌으나 또 다른 면을 맞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맞춘 면을 다시 엉클 어 야 하는 것처럼. 풀어진 실마리를 잡아당기자 다른 쪽에서 또 다른 매듭이 만들어 지듯 오히려 더 담담한 상황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과장님 마취 끝났습니다.”
마취과 의사의 목소리가 내면의 늪으로 깊이 침침해 있던 그의 자각을 끄집어내었다.
짧은 순간 투명한 눈빛을 보이고 있던 동건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날선 칼날처럼 명진 하게 빛났다. ‘그래, 어차피 정해진 운명이라면 피하지 말자.’ 이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나자 복잡하게 뒤엉켰던 머릿속이 일순간에 깨끗이 정돈된 느낌이 들었고 자연스레 손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건의 손끝에 매달린 예리한 칼날에 의해 환자의 피부는 빠르고 정갈하게 잘려나가고 있었다. 쇠골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흉부를 지나 배꼽 바로 아래까지 개복한 환자의 속을 들여다보자. 환자의 장기 손상 정도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늑골 여럿이 부러졌고, 그 중하나가 신체 하부로 흐르는 혈관을 눌러 혈류를 막았고 그로 인해 주먹만 한 혈전이 생겨 터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비장이 위치한 곳에서 심각한 출혈이 보이는 것이 대동맥 또는 대정맥 일부가 파열되어 장내 출혈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부러진 늑골 뼈 조각이 혈관을 천공하고 그곳에 들어앉아서 출혈 양을 조절하고 있는 듯 복부 안에 괴인 피의 양은 예상보다 적은 양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손상부위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직 개복조차 하지 않은 하복부와 골반 부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머리 쪽은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현재 열려진 흉부와 상복부의 손상정도만으로도 사실 수술을 포기하고 절개된 부분을 다시 개복(盖覆)한다 하여도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건은 수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 할 수 없었다. 동건의 지시로 지성이 막 늑골 부위에 견인장치 부착을 시도 하려는 순간이었다. 환자의 심장기능을 체크하던 심전도에서는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경고음은 밀폐 된 공간 안에서라 공명이 더해져 더욱더 크게 들려지고 있었다.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모니터를 확인한 민호가 소리쳤다. 이어서 모니터에 표시된 숫자를 읊었다.
“70, 65 ‥55 계속 해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모르핀 준비하고 혈액 수혈 양 두 배로 늘려 어서”
동건의 격양된 목소리가 일자, 사람들이 일순간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동건이 지시한 명령이 채 이행되기도 전에 짧게 끊어져 들리던 단조 음이 하나로 길게 이어져 들려왔다. 그와 함께 모두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었다. 망연자실한 동건의 얼굴색이 어둡게 변했고, 지성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만다.
심장 쪽이 이미 개복된 상태라 전기 충격이 마저 사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모두의 생각은 테이블 데스를 예견하고 있는 듯 하나 같이 넋을 놓고 모니터와 환자의 심장으로 나뉘어 시선이 고정된 채 움직임이 없었다.
정지된 시간을 무너뜨린 것은 마취의 박 선생 이었다. 수혈중이 엇던 마취제를 잠그려는 듯 링거 줄에 달린 밸브로 손이 막 가려는 순간, 동건의 움직임을 보고는 손이 허공에서 멈추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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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인공인 동건이 음주운전하다 사고를 내고
중상자를 살려보겟다고 발버둥치는데 혹시 살려낸다면 훈장이 더늘겟네
요 아니면 평생을두고 후회와
양심때문에 괴로워하면서 폐인이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