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마곡사와 백련암
10월 마지막 일요일 갑사 단풍을 보러 갔다가 비방울도 떨어지고 단풍도 채 물들지 않아 바로 돌아 나와 마곡사로 향했더니 가을축제가 있는지 상가입구에서부터 차가 몰려 진입할 수가 없었다. 바람도 불고 날씨도 그렇고 차도 너무 밀려 나들이를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내려온 김에 지나치기도 뭐해서 이리저리 주차할 곳을 찾아보다가 식당가 마지막 계곡 한 모퉁이에 있는 식당의 주자창이 비어 있길 래 식사를 하고 주차시켰다. 식사를 하고나니 하늘은 개였는데 바람은 몹시 불었다. 마곡사는 봄에 이미 둘러 본 터라 오늘은 김구선생이 머물렀다는 마곡사 백련암이나 가볍게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 마곡사 둘러보는 것은 거리 긴 시간이 필요 없는 단조롭다면 단조로운 코스다. 마곡사 경내는 축제로 요란했지만 백련암 가는 길에는 그리 사람이 많지 않아 한가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식당을 니와 일주문 아래 계곡을 따라 마곡사로 향했다. 계곡을 따라 오르니 옛적 보지 못했던 조형물도 보인다. 계곡길이 끝나는 지점에 마곡사 매표소가 나타난다. 마곡사 경내로 바로 들지 않고 백련암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태화산 마곡사는 단풍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단풍이 가을맛을 낸다. 마곡사경내로 가는 길과 백련암 가는 갈림길이다. 입구에서 대략 15분 정도 오르니 김구선생이 수행했다는 백련암 가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김구선생은 일제강점기 나라의 독립과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연상, 호는 연하 또는 백범으로 1919년 상해로 망명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동학농민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고,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을 거쳐 국무위원과 주석을 지낸 분이시다. 해방 이후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했고 완전자주독립노선을 주장했으나,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김구 선생이 수행했다는 마곡사 백련암 전경이다. 마곡사는 김구선생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귀국하여 안악(安岳)으로 오는 도중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 를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 중 체포되어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다행히 형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은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는 못했다. 이듬해(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피신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출가하여 원종이라는 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으며, 그가 피신 중 겨울을 난 곳이 지금의 백범당이라고 하며 수행한 곳이 바로 이 백련암이다. 그후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백련암 대웅전 뒤편에 산신각이다. 백련암의 대웅전인 격인 전각이다. 따로 전각편액이 없이 백련암이란 편액만 걸려 있다. 법당에 모신 주불을 보니 관음보살에 뒤편 탱화로 아미타를 모셨다. 법당 뒤편에 있는 산신각을 올라가 본다. 산신각 뒤편 길에 마애불이 있다길래 올라가는 길에 내려다 본 백련암 전경이다. 마애불에 대한 설명이 없어 조성연대를 알 수없지만 뛰어난 장인 솜씨는 아닌듯하다. 마애불을 보고 다시 백련암으로 내려왔다. 백련암에도 가을은 온 모양이다. 탐스럽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령 메달려 영글고 있다. 마당에는 파란 이끼 낀 고목이 세월의 무상을 말하는 듯하다. @"처음에 내 생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 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것인가를 알았다. 저 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 할 수가 없고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 일지에서} 백련암 아래에 있는정자에 가을 나들이 나온 길손들이 한담을 즐기고 있다. 백련암에서 마곡사로 내려가는 오솔길은 솔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길이 백범 김구선생의 명상길이였던가. 백련암에서 내려와 마곡사 경내로 가는 길의 정자, 네그루의 솔이 운치를 더한다. 마곡사 경내로 내려왔다. 빨간 단풍이 갑사보다는 일찍 든 모양이다. 마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로 현재 충청남도 70여 개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 율사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그뒤 1650년(효종 1) 주지인 각순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옛 모습을 찾았으나 1782년(정조 6) 다시 큰 화재로 영산전과 대웅전을 제외한 1051여 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대광보전은 1788년(정조 12)에 재건되었고, 영산전과 대웅보전은 1842년(헌종 8)에 개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절의 가람배치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대광보전(보물 제802호)· 5층석탑(보물 제799호)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특이한 형식이며 그 주변으로 영산전(보물 제800호)을 비롯하여 응진전·명부전·국사당·대향각·흥성루·해탈문·천왕문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해탈문 마곡사의 해탈문은 일제강점기 때의 목조 건축물로 마곡사 중심 구역인 대광보전으로 진입하는 첫 관문으로서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곡사 해탈문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 6월에 중수했다는 명문이 편액에 적혀 있어 마곡사 천왕문의 중수 시기와 같다. 그 후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지붕 구조는 무고주 5량집이다. 내부 양 협칸의 경우, 홍살로 칸을 막은 다음, 동쪽 칸에 밀적금강역사와 문수동자, 서쪽 칸에 나라연금강역사와 보현동자를 안치하였다. 두분의 금강역사를 쉽게 구별하는 방법은 입 모양을 보면 알수 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밀적금강(훔금강)이고, 일을 벌리고 있으면 나라연금강(아금강)이다. 밀적금강과 문수동자 나라연금강과 보현동자 천왕문(天王門)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절 경내에는 천왕문을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대광보전, 홍성루 등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천왕문은 조선 후기에 세웠으며, 건물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1910년에 고쳐지은 것으로 보인다. 절 입구에서 두번째 있는 문인 천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천장은 지붕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안쪽에는 동서남북 4지역을 지키는 사천왕상과 그림이 있다. 사천왕은 33천 중 욕계 6천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지배자로서 수미의 4주를 수호하는 신이다. 원래는 고대 인도에서 세계의 수호신이었던 것을 불교가 수용한 것이다. 검을 들고 있는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 탑과 창을 든 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비파를 든 북방의 다문천왕(多聞天王) 등이다. 저마다 권속을 거느리고 있는 이 사천왕은 힌두교의 사방 수호신과 내용상 동일한 관념을 채택한 것이나, 신의 명칭에서 그 원어까지 동일하지는 않다.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가 확립한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우뚝 솟은 수미산의 정상에는 도리천(忉利天)이라 불리는 신들의 33천 세계가 있고, 이 수미산의 중턱을 둘러싸고 사방에 사천왕의 세계가 있다. 도리천의 우두머리 신이 제석천(帝釋天:힌두교의 인드라)인데, 불교에서는 사천왕이 모두 제석천의 명을 받아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동작을 살펴 보고한다고 믿었다. 본래 사천왕의 형상을 표현하는 데 정해진 외모는 없었으나, 중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무장한 장군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각 절의 사천왕문에서 보이듯 갑옷을 두르고 무기 등을 들고서 발로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통례이다.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왕만을 따로 신앙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이 경우에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 불린다. 범종각 대광보전과 5층석탑 @마곡사 오층석탑 1782년 대광보전 화재 때 많이 파괴되었으나 현재 화강암으로 보수되어 있으며 1972년 탑을 해체·보수할 때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특이한 상륜이 놓여 있는 구조로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따르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양쪽 모서리에 우주가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안쪽으로 둥근 형태의 기둥이 1개씩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갑석은 높고 폭이 넓은 편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며 상층기단의 갑석 위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높은 2단 굄이 있다. 탑신의 옥개석과 옥신석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석은 각 층마다 양쪽으로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로 1층 탑신의 남면에는 문비와 자물통이 조각되어 있고, 2층의 각 면에는 불좌상 1구씩을 새겨 사방불 형식을 취했다. 2단받침의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곡선을 이루며 처마 끝부분의 반전이 심해 장식화 경향을 보여준다. 상륜부에는 노반 위에 풍마동이라는 청동제로 된 부재가 놓여 있는데, 그 형태는 3층의 전각형 건축물 위에 원형의 복발과 보주가 놓여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상륜부의 형식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중국 원대의 라마식 보탑과 유사하여 원나라와 문화적으로 교섭이 빈번했던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적어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점과 옥개석의 심한 반전 등에서 고려 후기 석탑의 양식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응진전(應眞殿) 마곡사 응진전(麻谷寺 應眞殿)은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응진전은 철종 3년(1852)에 새로 보수한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짜올렸다. 안쪽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백범당은 김구선생이 일제을 피하여 은신할 때 이곳에서 겨울을 난 곳이라고 한다. 조사전 @조사전은 서기 640년에 마곡사를 창건한 자장율사(590~658)를 비롯하여 왼쪽에 도선국사, 오른쪽에 범일국사 그 외 보조국사, 서산, 사명대사, 경허 만공 등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대광보전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마곡사대광보전은 조선 후기 목조건물로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51년에 각순대사가 대웅보전과 함께 중건했으나 1782년 다시 소실된 것을 1788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평면구조를 가진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대광보전주련 淨極光通達(정극광통달) : 청정함이 극에 이르면 광명이 걸림 없으니 寂照含虛空(적조함허공) : 온 허공을 머금고 고요히 비출 뿐이라 雖見諸根動(수견제근동) : 비록 육근(귀,눈,코,혀,몸,뜻)이 유혹을 만날지라도 要以一機抽(요이일기추) : 한 마음을 지킴으로써 단번에 뽑아버릴지어다 却來觀世間(각래관세간) : 물러나와 세상 일 돌아보니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 모두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 마곡사는 김구선생이 황해도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1898년 이곳 마곡사로 피신하여 원종(圓宗)이란 법명으로 출가했던 곳이다. 특히 대광보전의 마지막 2개의 연은 거의 50년 만에 다시 찾은 김구선생이 자신의 일생을 말하는 것과 같아서 감명 받았다고 하는 구절이다. 평생 독립을 위하여 임정을 이끌며 일제에 맞써 싸운 모든 일들이 지나고 보니 모두 꿈속의 일과 다름 바 없는 자신의 심경을 말하는 것과 같아 감회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세상사 살다보면 이 같은 심경을 느끼는 것이 어찌 김구선생 한분뿐이랴. 마곡사 대웅보전 올라가는 계단은 옛전과 똑같이 늘 연등이 메달려 있다. @대웅보전 갑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협시불로 모셨다. 마곡사 대웅보전은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로 보물 제801호로 지정되어 있다. 1651년과 1842년 등 몇 차례의 중수 및 개수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1층과 앞면 3칸, 옆면 3칸의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팔작지붕의 중층건물이다. @대웅보전주련 古佛未生前 (고불미생전) 옛 부처 나기 전 凝然一相圓 (응연일상원) 의젓한 하나의 동그라미 하나 釋迦猶未會 (석가유미회)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으니 迦葉豈能傳 (가섭기능전) 가섭이 어찌 전하리 本來非皁白 (본래비조백) 본래 검지도 희도 않으니 無短亦無長 (무단역무장)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다. 반영을 잡으려했지만 떨어진 낙엽이 쌓여 반영의 제맛이 나지 않는다.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모아미타불()
잠시 머물면서 즐갑하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행복하소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잘 보았습니다
글쓴분은 그다지~…라 하셨는데
가을단풍을 볼 수 없는 이곳 남방권에서 느끼기에 무척 멋지게 펼쳐진 가을색감 들이네요^^
고맙습니다 ( )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마곡사 인연을 만들기 위해 올 여름 시간이 오래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