솥바위를 바라보고
설날을 닷새 앞둔 일월 하순 금요일이다. 우리 집안은 연전 기제사를 통합해 봄날에 조상을 기리는 날의 시제로 모아 명절 차례를 줄였다. 그러함에도 띠동갑보다 한 살 더한 큰형님이 고향을 지키고 계셔서 가끔 문안을 간다. 설을 앞두고 조상 산소 성묘와 형님 내외분을 뵈려고 교통이 덜 혼잡할 때 길을 나섰다. 일전 자갈치 시장에서 사둔 생선 돔 네 마리를 챙겨 배낭에 넣었다.
이른 아침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로 나가 의령행 버스를 탔다. 그 차는 고속도로로만 가질 않고 함안 가야에서 국도를 따라 군북을 거쳐 의령 관문 정암교를 건넜다. 차창 밖으로 옛 정암교와 솥바위라 바라보였다. 읍내에 닿아 고향마을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니 곧장 덕실 중리 고향 집에 이르렀다. 형수는 집안을 머물렀으나 형님은 문화원으로 나가 서실 회원들과 교유 중이라 했다.
고향 집 고샅에 한 그루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열매와 잎을 모두 떨군 채 나목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가지가 무성한 은행나무 꼭대기에는 봄이면 까치가 집을 지어 새끼를 쳐 떠나는데 해마다 층수를 올려 가면서 세 개가 되었다. 새해에는 암수 한 쌍 까치가 그 가운데 맨 꼭대기 묵은 집을 수리해 둥지로 삼으려고 했다. 까치는 집수리를 거의 마쳤는지 둥지에 든 꽁지가 보였다.
형수는 커피와 토속 분위기가 나는 메밀묵을 차려내 먹은 뒤 뒷동산으로 선산 성묫길을 나섰다. 남은 생에서 다리가 성할 날을 가늠해 본다면 앞으로 이십 년은 더 다닐 수 있어야 할 텐데 단언해서 말할 수 없다. 가파른 비탈을 오른 선산 언저리 밤나무와 모과나무가 자라는데 노랗게 익은 모과는 낙과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과가 차로도 쓰이나 양이 너무 많아 방치했다.
무덤가로 다가가니 멧돼지가 무덤 봉분을 파헤치는 피해를 막으려고 설치한 경보음이 울렸다. 조부님과 부모님 산소에서 자손이 다녀감을 아뢰는 절을 올리고 선산을 내려왔다. 숙부님이 잠든 곁에 고조부와 증조부 산소를 옮겨 놓아 거기도 자손이 다녀감을 아뢰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읍내 문화원에서 서실 회원들과 교유한 형님이 아우가 왔음을 알고 용무를 일찍 끝내고 왔다.
형님 내외분과 점심상을 비우면서 농사와 안부 얘기가 오갔다. 가을에 심어둔 마늘은 겨울 추위에도 싹이 파릇했다. 수확을 끝낸 대봉감은 가지를 낮추는 전정과 거름주기까지 마쳐 놓았다. 큰형님은 고추 농사를 꽤 짓는 편인데 비닐하우스를 세워 모종을 키운다. 설을 쇠고 난 입춘 무렵 씨앗을 뿌려 싹이 터 자라면 옮겨심기 해 튼실한 모종을 길러 이랑 지은 밭으로 내다 심는다.
큰형님은 요새 집안치고는 자녀를 많이 두어 조카들이 넷이다. 모두 성혼 출가에 진주나 서울 등지에서 사는데 설이면 손자를 데리고 고향 집으로 모여들 테다. 차례는 지내지 않아도 형수는 불려 놓은 콩으로 손수 두부를 빚고 명절을 쇨 음식 마련으로 분주할 테다. 그동안 맏며느리로 시집와 평생을 봉제사 접빈객으로 고생한 형수님인데 앞으로는 좀 편한 여생을 보낼 수 있으려나.
점심상을 물리고 나서 잠시 환담을 더 잇다가 오래도록 머물지 않고 창원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형수는 설을 쇠려고 먼저 준비한 메밀묵과 떡국떡을 한 봉지 싸 놓아 고맙게 받아 양손에 들었다. 읍내까지 걸어가도 되겠으나 손에 든 짐으로 택시를 불러 기사는 연방 고향 집 어귀 닿았다. 형님 내외분과 작별하면서 후일 전화 넣고 찾아와 뵙겠노라고 인사 나눈 뒤 읍으로 갔다.
마산으로 가는 버스표를 구해 합천에서 내려온 차에 올라 차창 밖을 봤다. 정암교를 건너면서 ‘솥바위’를 소재 삼아 음보로 맞춘 시조를 한 수 남겼다. “지리산 덕천강이 남강댐 거쳐 나와 / 잔모래 부려 놓아 기름진 들판 이룬 / 솥바위 여울져 흘러 거름강에 이른다 / 정암루 올라서면 펼쳐진 강변 풍광 / 임진년 왜적 막은 백마 탄 홍의장군 / 충절은 청사에 새겨져 길이길이 전한다” 25.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