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아홉 명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갑신정변은 ‘ 삼일천하 ’로 막을 내리고 말았 다. 《고종실록》 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당시 도성 안의 군민 軍民들은 일본인들을 질시하여 만날 때마다 때려서 죽 이거나 상처 입히는 일이 많았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 竹添進一郞는 병사를 거느리고 거류민을 보호하여 도성 밖으로 나갔고, 김옥균, 박영효, 서 광범, 서재필 및 생도 生徒 10여 인은 모두 일본 공사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몰래 인천항으로 가서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쳤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일본으로 떠난 뒤 남은 사람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봉균과 이희정, 신중모, 이창규 등은 모반과 대역부도의 죄로 지금의 서울시청 부근인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이윤상과 이점 돌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으며, 차홍식과 서재창, 남홍철, 고흥종, 최 영식은 불고지죄로 서소문 밖에서 목숨을 잃었다. 천안에 살던 김옥균의 동생 김각균은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오다가 형이 정변을 일으켜 실패하고 도망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날로 경상북 도 칠곡으로 도망쳐 숨어 살다가 어사 조병로에게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옥사했다.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기는 당시 눈병을 얻어 장님이 되었는데, 천안 감옥에서 6~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연좌제에 따라 효수되었고 어 머니 송씨 부인은 누이와 함께 음독자살했다. 김옥균의 처와 젖먹이 딸은 양가파연 養家破緣의 처분으로 죽음은 면했지만 관비가 되어 온갖 고생 을 하다가 죽었다.
김옥균 가족 중 유일하게 형벌을 받지 않은 사람이 누이동생 김균이다. 갑신정변 당시 기계국 주사였던 남편 송병의와 함께 서울에서 살던 김옥 균의 누이동생 김균은 남편과 함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으로 몸을 피 했다.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균은 포승에 묶이는 치욕을 당하 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고 비상을 마셨다. 김균이 독 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소문이 인근에 파다하게 퍼졌다. 하지만 김균은 죽 지 않고 기적처럼 살아났다. 남편은 아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을 다행으로 여겨 사람들에게 상처했다는 것을 알리고 송장 없는 초상을 치 렀다. 정부는 물론이고 일가친척들까지도 김균이 죽었다고 믿었다. 김균 은 곧바로 경상북도 영천의 신녕으로 몸을 숨겼다. 1년이 지난 뒤 송병의는 새장가를 들었다. 혼례 날 신부는 짙은 화장을 하고 유난히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혼례를 마치고 송병의는 천안으로 이사했는데 그 누구도 그가 새장가를 든 여인이 김옥균의 동생인 균이라 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김균은 충청남도 서천군 동면 판교리에서 60여 년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여성들, 특히 혼인한 여성들이 문 밖출입을 삼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18년 박영효가 일본에서 김옥균 의 머리카락 몇 올을 가지고 돌아와 김옥균의 무덤을 쓸 때의 일이다. 박 영효가 제문을 읽다가 목이 메어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는데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무덤 앞으로 다가오더니 무덤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 바로 김옥균의 누이인 김균이었다.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와 아버지인 참판 박원양은 자살을 택했다. 박원 양은 죽기 전에 열 살 난 손자, 즉 영교의 아들을 먼저 죽였다. 박영효의 둘째 형인 진사 박영호는 변성명을 하고 전라북도 진안의 산중에 숨어 있 다가 청일전쟁이 끝난 후 하산하여 죽음을 면했다. 홍영식의 아버지로 임 오군란 무렵 영의정을 지냈던 홍순목은 “ 역적을 지금껏 자식으로 기르면 서 몰랐으니 만 번을 죽더라도 어떻게 속죄하겠는가 ” 하고 탄식한 뒤 홍 영식의 열 살이 채 안 된 아들을 보며 “ 이 종자를 어떻게 남겨 두겠는가 ” 하고는 독살했다. 그러고 나서 대궐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한 다음 독 약을 마셨다. 홍영식의 처 한씨도 형 홍만식의 권고를 받고 자살했다. 서 재필의 아버지인 진사 서광언은 아내와 함께 자결했으며, 서재필의 처와 자식은 독사했다. 형 서재형은 은진 감옥에서 죽었고, 동생인 서창필은 처형되었으며, 서재우는 훗날 사면되었다. 서광범의 아버지인 서상익은 7~8년간 연루된 죄로 유배되었지만 무슨 이유로 벌을 받는지조차 몰랐 다. 서광범의 아내 김씨는 끝까지 절개를 지켜 갑오년 이후 광범과 다시 살게 되었다. 유대치는 제자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을 보고 시 기가 너무 이르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 고 김옥균 등이 도망치자 그들과 함께 두었던 바둑판을 도끼로 쪼개어 아 궁이에 밀어 넣은 다음 수표교에 있는 약국에서 행방을 감추었다. 그 후 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들리는 말로는 오대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 었다고 한다. 갑신정변의 행동대장 격이던 신중모는 참형되었고, 윤영관 은 보부상들에게 잡혀서 참살되었다. 박제경은 수표교에서, 오감은 관철 교 부근에서 민중들에게 붙잡혀 참살되었다. 한 집안에 역적이 나면 삼족 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비극적인 형벌이었다. 개화로 인 하여 파생한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를 목격하고도 당시 사람들은 동정은 고사하고 개화 잡귀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세월은 가고 그 세월 속에 사람들은 가고 없지만 그날의 그 이야기들이 남아서 그날들을 반추시키고 있다. 역사에서 배울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