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4/28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진리의 영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방인 교회를 돌보며 살았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닌 것이 아니라 아시아 쪽에 살다 보니 로마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동료들의 순교 소식을 듣는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역시 순교 못지않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교우들의 순교 소식도 들었을 겁니다. 어떻게 잡히고, 어떻게 재산을 빼앗겼으며, 어떻게 회당에서 쫓겨나 죽었는지 속속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밀고자들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교우들끼리 서로 고발하고 재산 때문에 배교하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스승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던 것임을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노년의 그는 결코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아름다운 행위지만 현실에서는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끝없는 투쟁이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신념이 강하다고 순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총의 힘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끝까지 견뎌 낼 수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목숨을 바치지는 못했지만 순교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의사로서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 삶을 사는 분이 요즘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을 잔다고 한다. 독실한 신앙인인 그가 한숨을 푹푹 쉬며 토로한 이야기다.
어떤 종교 재단 병원에서 경영과 기획 전문가를 초빙한다는 광고를 냈다. 이제는 병원도 전문 경영을 해야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다나. 전문 경영이라 함은 특성화 또는 차별화를 하겠다는 것인데, 과연 종교 재단 병원이 내세우는 특성화는 무엇일까? 설마 여타 병원처럼 돈 잘 벌어 나중에 베풀겠다는 명분 아래 돈 잘 버는 쪽으로 기획하겠다는 것은 아닐 테고. 혹시 다른 병원에서는 하지 않는 말기 암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병실을 확충하거나 임종을 앞둔 어느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더욱더 내실을 기하려는 것인가? 의료 자체가 선교인 때가 있었다. 개화기 때 인천에는 서구식 의료와 선교와 교육이 함께 들어왔다. 구급약조차 없던 그때, 선교사들이 베풀었던 의료 봉사는 곧 선교였다. 그들이 했던 선교의 또 다른 방법은 교육이었다. 우리는 이 셋을 같은 맥락에서 보았고, 그것이 이 땅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그리고 민주화 시대, 이 땅에서 교회는 나름대로 시대적 소명을 받았고 실천했다. 요즘 교회 병원에는 자판기 커피 대신 고급 커피숍이 생기고, 최신식 주차장만큼이나 새로운 시술이 서민적 의료를 대체하고 있다 한다. 이윤 경영 압박이 본질적 치료를 밀고 들어오는 가운데, 교회 병원마저 다른 병원처럼 떠밀려가서 그 본래의 특성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시대와 장소가 달라지면 그에 발맞추어 교회 병원도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변화 발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느님을 섬기는 일,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자비의 의술을 펴는 그 근본 목적은 변함없이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내 자리에서 올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어떠한 것인지 자문해 본다. 이흥우(인천교구 부평3동 천주교회)
4월 28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 요한 15,26─16,4ㄱ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살아볼만한 세상, 견뎌볼만한 세상>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여러 가지 병고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암, 고혈압, 당뇨병, 중풍... 그리고 죽음, 그런데 우리가 이런 병고를 겪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병은 벌의 결과가 아닙니다. 악령의 활동으로 인한 것도 아닙니다.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로에 이어지는 과음, 지나친 흡연, 그릇된 식생활 습관, 영양결핍...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친구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든 병 앞에서 열렬한 기도와 더불어 정확한 발병의 원인 규명, 적극적인 치료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노력은 뒷전인 채 오로지 치유기도, 안수기도, 치유를 위한 봉헌...이런 것에만 혈안이 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성령 기도회가 제대로 자리 잡고 있는 본당이나 교구가 많아져 흐뭇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 직접적인 성령체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새 생활과 겸손한 이웃봉사로 이어지니 참으로 보기가 좋습니다. 반대로 지나친 감성적인 접근, 신앙의 개인주의화, 자기도취, 선민의식은 언제나 경계해야할 적입니다. 계속 다가오는 큰 십자가로 얼굴이 늘 고뇌와 불안으로 가득 찼던 한 형제의 얼굴이 어느 순간 편안한 얼굴로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신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배경이 무엇인가 살펴봤더니, 간절한 기도에 이은, 강렬한 성령 체험, 철저한 하느님 자비에 의탁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영혼의 도우미이자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이 온통 육적인 것에 몰두해있기에, 우리의 안테나가 온통 세속을 향해 있기에, 우리의 시선이 전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기에, 그분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여정 안에서 평소보다 훨씬 강렬하게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탄생한 순간, 세례 받던 순간, 견진 때, 서원 때, 서품식 때, 성령쇄신 세미나 때, 고백성사 때, 성체성사 때, 병자성사 때, 혼인성사 때... 그런 순간 우리가 성령의 활동을 보다 가깝게 손에 잡힐 듯 체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순간은 평소보다 훨씬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느낀 바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순간 체험하게 될 은총은 놀라운 것입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느님의 자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던 현실이 ‘살아볼만한’, ‘견뎌볼만한’ 현실로 변화될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었던 ‘인간’들이 그저 안쓰러운 인간, 측은한 인간, 감싸주어야 할 인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기적의 원동력, 우리 신앙을 한 단계 성장시켜줄 활력소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호자,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19번 / 주여 몸과 맘 다 바치오니
When the Advocate comes whom I will send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to me. And you also testify, because you have been with me from the beginning. (Jn.15.26-27)
만약 새벽 4시에 장례식에 가야 한다면?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중에서)
정말인지 거짓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다니던 신학교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새학기가 되어 신입생들이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지요. 신입생인 신학생들은 설레이는 마음을 가지고 매 수업을 충실히 들었지요. 그런데 프랑스어 담당 신부님께서 들어오셨는데, 그 신부님은 연세가 많으신 프랑스 분이셨어요. 학생들은 프랑스 분이니까 긴장을 했지요. 하지만 학생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분은 한국말을 너무나도 잘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학생들이 신부님께 이렇게 물었지요
"신부님, 신부님께서는 프랑스 분이시면서도 한국말을 참 잘 하시네요."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내가 너보다 한국말을 더 오래 했다."
그 신부님은 몇 십년을 한국에서 선교를 하셨으니 이제 갓 신학교에 들어온 신학생보다 더 오랜시간 한국말을 쓰며 살아 왔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은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고정 관념의 틀을 깬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어떤 변화보다 더 힘들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남과 자기를 비교하게 됩니다. 또한 단순히 비교만 하면 괜찮겠지만, 이런 비교 뒤에는 자기를 비관하게 되지요.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안돼.' 그리고 어떤 이는 다른 사람 탓을 하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쟤 때문에 그래 ,쟤는 왜 그래."
이런 마음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결코 평화를 얻을 수가 없겠지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자꾸 남과 자기를 비교하게 되므로 평화에서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고 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답니다
한 거부가 살았어요. 그는 일가 친척도 없었으며 처자식도 없었지요.그래서 그의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왜냐하면 친구가 많았으며 그의 도움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집에서는 매일매일 파티와 모임이 있었고 그 때문에 거부는 외로울 겨를이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신의 그 많은 재산을 물려줄 상속자 하나 없이 죽음을 맞이 하게 되었지요. 그는 죽으면서 유서 한 통을 남겼는데, 장의사에게 꼭 새벽 4시에 자신의 장례를 치루어 주고 그때 유서를 개봉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답니다.
하는 수 없이 장의사는 새벽 4시에 장례를 치루었지요. 그런데 평소에는 그렇게 자주 보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달랑 4명의 하객만 참석을 했지요. 어찌되었든 장례는 거행되었고 마지막으로 그 거부의 유서가 개봉됐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다고 합니다.
"내 전 재산을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보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이든 우정이든 한번 가진 마음을 끝까지 변하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지령
한번 시작한 마음이면 끝까지 갑시다. 뒤돌아보거나 머뭇머뭇거리거나 변심하지 말고 용기 있고 자신있게 끝까지...
삼겹살
(희망 가게중에서)
시골에서 사목 하시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어느날 신부님께서는 그 동네에서 오랫동안 냉담하셨던 할아버니께서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 갔습니다. 하지만 그 할아버니께서는 신부님을 보자마자 고개를 돌린채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을 나가지 않는 그에게 있어서 신부님은 달갑지 않는 방문객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애쓰던 신부님께서는 쓸쓸하기 짝이 없는 방과 가엾을 정도로 냉랭한 난로 ,그리고 바닥나기 시작한 식량을 알아 챌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정육점으로 들어가 삼겹살 두근을 그 집에 배달해 달라고 주문을 했답니다.
며칠후, 신부님께서는 다시 그 할아버지의 집을 방문했고 할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입을 잘 열지 않았지만, 전보다는 약간 다정하게 신부님을 대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신부님은 그 할아버지를 위해 또다시 삼겹살을 주문했습니다. 세번째 방문을 하게 되었을때. 할아버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마음을 열고 아주 친절하게 신부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오랫만에 고백성사를 보았고 , 함께 기도를 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긴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수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노력과 말로써 할아버지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며칠뒤 그 할아버지는 자신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자성사를 받으시면서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저는 지금 아주 평화롭습니다. 이제 나는 곧 하느님께로 갈수 있겠지요? 그런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킨 것은 신부님의 말씀이 아니라 저를 위해 사 주셨던 삼겹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할아버지에게 가장 근본적인 변화의 도구는 삼겹살이었습니다. 즉 삼겹살을 통해서 그 할아버지는 하느님을 느낄수 있었고 비로소 회심을 할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필요한 것을 나의 이웃에게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다른 것을 통해서 이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변화되지 않았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이런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저 사람이 문제야."
하지만 이렇게 단정하기에 앞서 내가 모든 방법을 동원 했는지, 특히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에서 그 입장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았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탓하기 이전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천천히 되집어 보면서 기다려 보는 미덕이 필요합니다. 노력에는 항상 댓가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
첫댓글 병은 벌의 결과가 아닙니다. 악령의 활동으로 인한 것도 아닙니다.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로에 이어지는 과음, 지나친 흡연, 그릇된 식생활 습관, 영양결핍...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친구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든 병 앞에서 열렬한 기도와 더불어 정확한 발병의 원인 규명, 적극적인 치료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노력은 뒷전인 채 오로지 치유기도, 안수기도, 치유를 위한 봉헌...이런 것에만 혈안이 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