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대면하는 명사
설날을 사흘 앞둔 주말로 명절 연휴로 이어지는 토요일이다. 새벽에 잠을 깨 전날 고향을 다녀온 걸음을 글로 남기면서 시조도 한 수 더 보탰다. “팽이를 치고 놀던 조붓한 바깥마당 / 논두렁 연 날리고 썰매 탄 얼음 도랑 / 유년기 아스란 기억 세월 저편 남았다 // 하굣길 진달래꽃 오디를 따 먹기도 / 쇠꼴을 베다 말고 호드기 틀어 불던 / 앞동산 그대로건만 머리숱은 성글다”
좀 진부하다만 제목을 ‘산천은 의구한데’로 붙였는데 성묫길에 선산을 오르면서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고 남긴 사진에서 어린 시절이 떠올려졌다. 겨울이면 놀던 동구 밖이나 하굣길 둘러 온 앞동산이 눈앞에 선하게 어리었다. 앞으로 내 남은 생에서 몇 번 더 걸음을 다녀올지 그 햇수를 가늠할 수 없다. 차례는 줄여 지내지 않지만 숙제를 미뤄두지 않는 모범생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며칠 뒤 설날 연휴에는 눈비가 예상되고 추울 거라는 예보이지만 이번 주말까지는 날씨가 포근하고 맑다. 설 직전 임시공휴일로 정한 월요일을 포함해 설날 전후 공공 도서관은 일제히 휴관이지만 주말까지는 열람실이 개방되어 그곳을 행선지로 정했다. 원이대로로 나가 동정동에서 북면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기 전 마트로 들어 점심 끼니로 삼을 컵라면을 준비해 배낭에 챙겼다.
동정동에서 대방동을 출발해 북면으로 가는 17번 버스를 타고 굴현고개를 넘었다. 외감마을 동구에서 화천리를 앞두고 감계 신도시로 향하니 설날 고향 방문을 환영한다는 펼침막이 내걸려 있었다. 동전 산업단지에서 무동으로 들어 신축 아파트단지 산기슭 최윤덕도서관으로 향했다. 업무가 시작되는 시각과 맞춰 출근하는 직원들과 같이 열람실로 올라 자주 앉은 열람석을 차지했다.
서가에서 철학서로 분류된 책과 함께 환경생태와 관련된 책을 뽑아 자리로 되돌아왔다. 김형석 교수의 책은 거의 읽었는데 근간 가운데 여태 읽지 않은 제목이 보여 먼저 펼쳤다. “100세 철학자의 인생, 희망 이야기”로 ‘젊은 세대와 나누고 싶은’ 이라는 관용구는 책을 펴낸 출판사에서 붙인 듯했다. 노교수의 강연 원고나 지면에 기고한 글에서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였다.
나라 안에서는 작금의 혼란한 시국 상황에서 좌우 진영이 극단으로 치달아 서로는 이성을 되찾는 냉각기가 필요하다. 나는 방송 매체는 일절 접하지 않고 인터넷판으로 뉴스는 몇 줄 읽으면서 정국 흐름의 대강은 알고 있다. 진보의 좌측에서는 노철학자가 해방 후 혼란기 북한 체제에 염증을 느껴 월남해 자유 진영으로 합류했음에도 자기네들 편을 들지 않는다고 외면받기도 한다.
도서관에서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명사들의 서책을 접할 수 있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감각을 가질 수 있어 좋다. 일전 대산 작은 도서관에서는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미술평론가 유홍준이 쓴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를 읽었다. 유 교수는 누구도 부인 못할 진보주의자임에도 그가 남긴 제주 답사편에 노산 이은상이 영실의 진달래꽃을 예찬한 시조를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노철학자가 젊은 세대에게 전하는 목소리이지만 현직을 떠나 다시 학생으로 되돌아온 나에게도 어울리는 얘기들이었다.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예방접종 효과처럼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인생을 영위할 것인가에 대한 나침반이 되었다.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무엇인가 남겨줄 때 진정한 품위를 느낀다 했다. 선한 인간관계는 서로 존경하고 위해 주는 마음 자세로부터 비롯된다고 봤다.
김 교수 책을 단숨에 완독하느라 점심때가 늦어졌다. 아래층 휴게실로 내려가 컵라면과 따뜻한 커피로 간단히 한 끼 때웠다. 식후 열람실로 돌아와 역사학자 김동진이 쓴 ‘조선의 생태환경사’를 펼쳤다. 교원대학 역사교육과를 나와 현직 교사를 거쳐 역사학에서 새로운 한 분야로 ‘생태환경사’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이였다. 자연과학의 생명 현상을 이해 심화시켜 역사학에 접목했다. 25.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