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분할 :
어떻게 유럽은 이 거대 대륙을 조각냈나?
아프리카 분할
: 어떻게 유럽은 이 거대 대륙을 조각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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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이상 동안 유럽 국가들은 세계를 재편하며,
서로 전쟁을 벌이던 왕국들의 집합에서 지구를
지배하는 강대국들로 변모해 왔다. 그러나
유럽 제국들이 지구에 대한 지배를
가장 극적으로 (그리고 파괴적으로)
강화한 시기는 19세기와 20세기 초였다.
이러한 팽창의 중심에는 아프리카가 있었다.
아프리카는 유럽 열강이 아직 나누어 가지지 않은
마지막 거대한 대륙이었다. 그 결과, 기술 발전,
외교적 책략, 그리고 냉혹한 야망이 결합된
유례없는 경쟁이 벌어졌고, 이는 오늘날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이렇게 급속한 확장을 이루었을까?
왜 이 시기의 식민지 확장은
이전의 정복과는 달랐을까?
그리고 제국들이 붕괴한 지금도
그들의 영향력이 세계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놀라운 확장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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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로 접어들 당시,
유럽 열강은 전 세계 육지의 35%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까지 불과 한 세기 동안 그들은
이 비율을 무려 84%까지 확장된다.
지도를 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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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도 제작은 단순한 과학적 연구가 아니라 정복의 도구였다.
유럽인들은 지도를 정교하게 발전시키면서
지리적 지식을 넓힐 뿐만 아니라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
이 지도들은 유럽 열강의 영토 주장을 정당화하고,
군사 작전을 지도하며, 유럽이 미지의 땅을 지배할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신화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무대의 서막을 연
스페인과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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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제국주의의 첫 번째 물결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험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 두 국가는 서로 세계를 분할하고 강력한
해군력을 앞세워 초기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이
세력을 키우자 독점 체제는 붕괴되었고,
열강 간 치열한 식민지 경쟁이 시작되었다.
기업화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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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획기적인 혁신을 도입했다.
바로 기업화된 식민지 모델이었다.
주식회사를 창설하여 식민지 개척을
하나의 사업으로 만든 것이다.
이 모델 덕분에 유럽의 확장은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민간 기업이 직접 군사 원정을 지원하고 먼 타지에서
자원을 수탈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제국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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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 제국주의는 단순한 정복을
넘어 보다 체계적인 식민지 지배 방식으로 발전했다.
산업화와 첨단 무기의 등장으로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인 정복이 가능해졌다.
새로운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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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유럽 열강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협력을 통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외교 회의를 열어 제국주의 정책을 조율하고,
미개척지의 분할을 협상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개척지,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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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까지 아프리카는 유럽 식민지 확장의
마지막 남은 거대한 대륙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내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가혹한 자연환경은 탐험가들의 발길을 막았다.
치명적 장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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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병은 유럽인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간 탐험가들의 최대 40%가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위험이 컸다. 이 자연적 장벽 덕분에 아프리카는
오랫동안 유럽의 식민 지배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과학적 발전이 이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키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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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 유럽인들은 키니네(퀴닌)라는
화합물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페루의 키나 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것으로,
말라리아 치료에 매우 효과적인 약이었다.
이 발견 덕분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치명적인 질병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본격적인 식민지 확장이 가능해졌다.
무자비한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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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흐름 속에서 벨기에는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합류하고자 했다.
작은 유럽 국가였던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국왕은 식민지를 원했지만,
다른 열강들은 그에게 땅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에 그는 아프리카의 미개척지를 노렸고,
광대한 콩고 분지를 목표로 삼았다.
'비어 있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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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만든 지도들은 아프리카 내륙을
"미개척지"로 묘사하며,
번성하는 원주민 문명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에게
‘개척될 운명’이라는 사고방식을 강화했고,
정복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되었다.
식민지 도미노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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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가 아프리카 영토를 차지하기 시작하자,
다른 유럽 열강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뒤처질 것을 우려한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이
서둘러 식민지 확장을 가속화했고,
불과 몇 년 만에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정복 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베를린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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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분할을 공식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영토 획득에 대한 새로운 규칙이 정해졌으며,
‘질서 있는’ 아프리카 식민지화를 보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는 단 한 명의
아프리카 대표도 초대되지 않았고,
유럽 열강들은 원주민들의 주권을 철저히
무시한 채 대륙을 나누어 가졌다.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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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규정에 따르면, 단순히 지도에
선을 긋는 것만으로는 영토를 주장할 수 없었다.
실제 통치가 이루어져야만 영토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유럽 열강들은 앞다투어 병력을 투입하고
행정관을 배치하며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를 시작했다.
숨 막힐 듯 빠른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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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불과 몇십 년 만에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이
유럽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정복의 속도는 가히 충격적이었으며,
유럽의 발전된 기술과 무기는 역사상 유례없는
효율적인 식민지화를 가능하게 했다.
왕 개인의 식민지, 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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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자신 개인의 식민지로 삼았고,
이는 강제 노동과 폭력, 자원 수탈로 얼룩진 악몽이 되었다.
유럽의 이익을 위해 고무와 상아가 대량으로 채취되었고,
수백만 명의 콩고인이 그의 가혹한 통치 아래 고통을 겪었다.
기반 시설 및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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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제국의 강철 혈관이 되어 광산을 항구와 연결하고,
도시를 전장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겉으로는 ‘진보의 상징’으로 포장되었지만, 이는
아프리카 노동자들과 노예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철도는 지역사회를 발전시키기보다 유럽으로
부를 유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현지의 분열을 활용한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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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열강은 대규모 전쟁을 벌이기보다
현지의 분열을 이용했다.
특정 아프리카 집단과 동맹을 맺고
무기를 제공해 그들의 적과 싸우게 함으로써,
내부 갈등을 조장하고 저항을 약화시켰다.
이를 통해 소규모 유럽 군대가 수십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인구를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유럽의 최신식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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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군은 최신식 총기와 대포를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원주민 저항군은 압도적인 피해를 입었다.
창과 구식 머스킷총을 든 아프리카 군대는
기관총을 갖춘 유럽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다.
결국 소수의 유럽 병력만으로도
거대한 지역을 정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강력한 저항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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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지역이 손쉽게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강력한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896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독립을 지켜냈다.
의학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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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의 식민 지배는
의학 발전에도 기여했다.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에서 활발히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질병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이러한 연구는 유럽의 확장에 기여하는 동시에,
후대에 많은 생명을 구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더 우월한 유럽 문명"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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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자들은 유럽 문명이 우월하다는
논리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었지만,
가짜 과학과 결합하며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식민 통치를 ‘고귀한 사명’으로 포장했다.
왜곡되어 버린 다윈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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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사회진화론(다윈의 생물 진화론을 사회 현상에 적용)이
이러한 사상을 뒷받침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한
이 이론은 유럽인의 지배가 필연적이며,
‘열등한 민족’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과학'을 앞세워
정당화한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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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학자들은 인종적 위계를 조작해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
원주민들의 두개골을 측정하며 유럽인이
‘인류 문명의 정점’이라는 허구의 이론을 만들어냈고, 이는
결국 인종 차별과 노예제 정책을 강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식민지 우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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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는
식민지 우월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영국이 세계를 확장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으며, 영국이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할수록
인류 전체에 더 이롭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무자비한 영토 확장의 기반이 되었다.
역사상 가장 큰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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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영국은 전 세계 4억 1,200만 명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아프리카부터 인도, 동남아시아까지 뻗어나간
영국의 영토는 전 지구 육지의 26%를 차지하며,
역사상 가장 크고 강력한 제국으로 군림했다.
서로를 파괴하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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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럽이 지배력을 확장하는 데 사용한 산업 기술과
군사력은 결국 서로를 파괴하는 도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유럽 문명의 ‘도덕적 우월성’은 환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식민지 해방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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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열강이 전쟁으로 소모되는 동안,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독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유럽이 내세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상에 영향을
받은 아프리카 지식인들은 조직적으로저항을 시작했고,
식민지 해방 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유럽 제국들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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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수십 년 만에 유럽 제국들은 붕괴했다.
아프리카, 아시아, 카리브해의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했으며, 이는 종종
긴 투쟁과 유혈 충돌을 수반했다.
식민 지배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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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립 후에도 식민 지배의 상처는 깊게 남았다.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은 민족 간 갈등을 야기했고,
경제 구조는 여전히 유럽에 종속된 채로 남아 있었다.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은 유럽의 제국주의가 남긴
가장 비극적인 유산이었다.
인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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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분할은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대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의 세계 지배는 역사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었다.
특정한 역사적 결정과 기술적 발전이 맞물린 결과였다.
아프리카와 다른 지역의 민족들이 그 당시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뿐, 세계 권력의 흐름은
인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출처:
(Britannica) (BBC)
(St John’s College, Cambri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