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1년 남은 것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카그닐 님은 이미 충분히 성인입니다. 아직 어린 에드가 님을 왕위에 바로 올려봐야 좋을 일은 없다고 봅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인만큼 여기서는 안전하게 성년까지의 섭정기간을 지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에 에드가는 잠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 침착하게 호소하는 듯한 이 목소리는 서쪽의 젊은 대영주, 크리스토퍼 마리엔 드 엘게스트Christopher Marien de Elghest. 삼괴의 전쟁에서의 전공으로 급격히 세력을 넓힌 대가문으로, 당주인 크리스토퍼 공은 카네 왕의 맏딸인 카트리나Katrina에게 결혼함으로 그 지위를 더더욱 정당화시킨 경우로, 점점 더 연륜이 쌓이기 시작한 강한 영주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에드가 님도 겨우 4년 남은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주어진 남쪽의 하임델 영지에서 올린 실적은 이미 무시하지 못할 정도. 왕궁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과는 확연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에 반박하는 이 힘찬 목소리의 주인은 북쪽의 롤란드 이시스 드 가랜드Roland Isis de Garland. 엘프의 피가 흐르는 것으로 유명한 가랜드 가의 당주로, 에드가의 둘째 누이인 오르가나의 남편이었다.
"그 실적이라 하는 것도 결국엔 측근들이 도와준 성과. 본인의 업적으로 치부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카그닐 님의 섭정이 있다면 훨씬 더 안정적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이 능글맞은 목소리. 에드가의 서쪽에 위치한 영지의 주인이자 남부의 대영주인 브랜든 시엔 드 볼센Brandon Thien de Vorsen. 해로를 통해 에드가보다 몇 일 정도 먼저 도착한 듯 했다.
엘게스트나 가랜드는 당연히 자신과 혈연 관계로 가까운 쪽이 왕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볼센은 자신을 총애하는 카그닐이 왕이 되어야 자신에게 에드가가 맡고 있는 영지가 돌아갈 확률이 높아는 것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브랜든 볼센은 다른 대가문들과는 다르게 무공을 세워서 영지를 늘린 경우가 아니었다. 아니, 침실에서 세운 무공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칭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향간에는 그를 일컬어서 '부인장이Wifemaker'라고 부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자식은 딸만이 일곱. 주변의 크고 작은 영주들에게 이 딸들을 시집 보낸 뒤, 그 딸에게서 적자를 낳게 하는 형식으로 남부의 대부분을 세력권 안으로 흡수한 그였다. 물론 아직 정식으로 흡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그를 남부의 대영주로 정식으로 임명한 것 또한 카그닐의 행정 중에 하나였다.
물론 그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볼센은 결코 미숙한 영주가 아니었고, 엘게스트 다음으로 가장 미드아일Midisle지역의 국가들과의 해상 무역에 힘썼기에 재력으로는 누구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대부호였고, 정치적 수완으로 따지면 남쪽의 어느 영주보다도 뛰어났다. 그저 국가를 위해 공헌한 양과는 관계 없이 영지를 늘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드는 에드가였다.
"지금 왔습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6개의 눈이 순식간에 그를 향했다. 하지만 에드가는 모두 무시하며 대신 곧장 침대 옆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혈색이 좋아 보이시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숙부."
그 말에 카네는 어느새 회색으로 변한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본지 오래된 건 알겠지만, 벌써 이 숙부의 원래 혈색조차 잊은 게냐?"
그렇게 말하면서 뻗는 왼손의 등에 에드가는 이마를 갖다 댄 뒤 입을 맞췄다.
"분명 나이를 드신 건 확실합니다만, 아직은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래 그래. 남쪽에서는 거짓말만 가르치나, 브랜든?"
그 말에 브랜든 볼센은 뭔가 말하려고 시작했지만, 그 사이에 서빈도 빠른 발걸음으로 나타나서 형이 일어선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오랜만입니다, 숙부."
그러면서 손에 이마를 갖다 대는 동안 카네 왕은 힘든 표정으로 탄식했다.
"그렇구나. 이렇게 가족들이 다 모이는 걸 보니까 내가 죽긴 죽을 건가 보구나."
그 말에는 전원이 정색하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카네 왕은 손을 저어서 모두를 일소했다. 그리고는 에드가와 서빈을 번갈아 보면서 그들의 생각을 물었다.
"안 그래도 지금 나의 사후 계승에 대해서 얘기하던 중이었다. 너희들도 뜻하는 바가 있을 터. 한마디씩 해보도록 해라."
그 말에 서빈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그에 대한 글렌 레이필드 공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이름에 대영주들의 눈이 전부 서빈을 향했다. 그 시선을 짐짓 즐기는 듯, 서빈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이윽고 당찬 목소리로 기억한 내용을 전하기 시작한다.
"동쪽의 오지에서 글렌 매슈 드 레이필드 고합니다. 갑작스런 발병으로 위독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저 또한 병마로 인해서 왕성에 직접 뵈러 가지 못하는 것이 원통할 따름입니다. 에드윈 님을 비슷한 병마로 잃은 저희인 만큼, 카네 님마저 같은 병마로 돌아가신다면 이 어찌 슬픈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건강을 되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허나, 위험하신 만큼 분명 왕위 계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이 늙은 기사는 서빈을 통해서 뜻을 전하려 합니다.
이번 계승에서는 곧 성년에 이르는 카그닐 왕자님의 섭정을 바라는 자들과 나이로는 3년 어리지만 혈통의 순서로 따지면 일단 우선권을 갖는 에드가 왕자님이 바로 즉위하길 바라는 이들이 서로의 뜻을 꺾고 자신의 뜻을 세우고 싶어할 터입니다.
물론 다들 각자 그럴 듯한 이유는 있을 터이고, 전부 사실일 확률도 높습니다. 결론적으로 따지만, 어느 쪽으로 보든 아페리온에게 있어서는 득실이 엇갈리는 어려운 선택임이 틀림없습니다.
이 늙은이는 평생을 전쟁터에서만 보냈다 보니 그런 계산은 하려고만 해도 머리가 쑤시고 자제심을 잃기 때문에 논리 정확하게 파악하고 판단하는 일은 못하겠습니다. 다만 제 생각의 한계로는 성년까지 1년이 남았든, 하루가 남았든, 성년이 아닌 이상 카그닐 님에게는 카네 님을 이어서 왕좌에 대신 앉을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
그 말을 듣기도 전에 엘게스트는 이미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볼센은 마지막 구절에 입술을 깨물었다. 가랜드마저 고개를 숙인 지 오래였다. 그에 비해 카네 왕은 그런 그들을 보고 웃으면서 고개를 젓고 있자, 서빈은 잠시 쉰 뒤 자신감이 배가된 목소리로 계속해간다.
"허나, 카그닐 님의 뛰어난 그릇과 풍부한 재정의 경험은 분명 아페리온 왕가의 보배. 이 것을 낭비할 정도로 인재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옛날 로에그리아에도 있었던 재상과 같은 직책을 주어 아직 젊으신 에드가 님의 통치를 보좌하는 것이 어떨지 권해봅니다."
그 말에는 결국 카네도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혼자서 이견들을 일소하고 내린 결론에 추신까지 보내다니! 글렌 공도 여전히 강건하군."
그 말에 서빈도 웃어 보이면서 대답했다.
"분명 이해해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가 뜻하는 바는 전부 이해했네. 1이 모자라든 10이 모자라든 모자란 건 모자란다는 말. 감복했다. 이 것이야 말로 우리 아페리온에 필요한 철저한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