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만주사변 즉, 9•18사변 (九一八事變) 발생
만주를 노리던 일제는 1931년 9월 18일경 만주 일대를 전면 공격하고, 중국계•러시아계•한국계•몽골계 친일파 등으로 구성된 괴뢰국가 수립을 획책하였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
일본군의 공격
강교항전(江橋抗戰) 과 한국 신문 보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친일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었던 장학량(張學良)은 부저항 등의 되지도 않는 정책을 남발하다가,
만주 지방의 대도회 봉천(고려시대의 심양) 등이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고 함락된다.
그러나 1931년 11월 4일경 흑룡강성 태래현(泰來縣) 인근 흑룡강의 지류인 눈강(嫩江)에 설치된 철교인 강교 일대에서 흑룡강성 대리 주석 마점산(馬占山) 지휘하는 반일군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다.
마점산(馬占山) 장군
치치하얼 인근 강교
강교항전(江橋抗戰) 의 무대인 흑룡강의 지류인 눈강
강교항전(江橋抗戰) 기념비
강교항전(江橋抗戰) 기념지
흑룡강 TV 에서 대작 드라마로 만들어진 마점산 장군과 강교항전(江橋抗戰)
https://youtu.be/YPDLubmVi-Q
강교사건 기념지의 물망 "국치"
결국 마점산(馬占山), 이작형(伊作衡), 소병문(蘇炳文) 등의 반일•반만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11월 21일경 동청철도를 따라 북서쪽 러시아 방향인 해륜(海拉尔)방면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장전구(張殿九) 장군, 이두(李杜), 공헌영(孔憲榮), 왕덕림(王德林) 등도 반일에 가담한다.
강교항전(江橋抗戰)의 소병문(蘇炳文), 장전구(張殿九) 장군 등
반일열사 공헌영(孔憲榮) 선생
강교항전(江橋抗戰) 의 소병문(蘇炳文) 장군
강교항전(江橋抗戰) 이작형(伊作衡) 선생
반일열사 중에는 수십년간 중화인민공화국과 한국 등에서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나, 1930~1940년대의 한국 신문은 분명 만주 일대에서 반일에 나섰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강교사건(江橋事件)은 만주사변 발생 이래 처음으로 일제와 앞잡이 등 6,000여명을 살상하고 타격을 입혔으며,
만주사변이후 일제가 처음 경험한 졸전이었다.
일제가 흑룡강 지류인 눈강(嫩江)의 강교 일대에서 패배하자,
당시 한국과 중국의 신문들은 강교사건을 1920년 흑룡강(아무르강) 하구 니항에서 일본군이 전멸한 니항사건(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옙스크 사건)처럼 연이어 대서특필하였다.
1920년 대대적으로 보도된 일제 침략군이 전멸한 니항 사건
출처 : https://www.easyatm.com.tw/wiki/%E6%B1%9F%E6%A9%8B%E6%8A%97%E6%88%B0
만주일대를 점령한 일제는 결국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동북 군벌 장학량 아래에 있던 동북군 해군 장령 심홍열(沈鴻烈) 등은 중화민국 남경정부 쪽으로 귀순한다.
그리고, 일제는 요서지방과 화북, 내몽골 일대를 차례로 점령하고 1936년경 중국침략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다.
1936년 5월경부터 화북에서 일본 침략군과 중국군 제29군(군장 송철원) 등과의 대립이 계속된다.
중일전쟁 직전의 중화민국 해군 상황
중국 현대사 자료에 따르면 중일전쟁 직전 중국 해군은 57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소형선을 포함한 총톤수는 약 6만톤으로 일본 해군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당시 해전에 적합하지 않은 오래된 배들이었다.
비교적 큰 군함은 영해(寧海), 평해(平海), 일선(逸仙), 응서(應瑞) 4척이었으며, 4척을 합한 톤수도 10,000톤의 일본 순양함 한척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영해(寧海)
선박의 수, 톤수, 장갑 품질, 화력, 사정거리, 속력, 선박의 연식 등의 모든 점에서 당시 중국 해군은 일본 해군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청나라 말엽부터 해상 지배력이 없었던 중국 해군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전혀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7일 7•7사변 발생 (일명 중일전쟁, 지나사변)
북평(오늘날의 북경) 남서쪽에 위치한 노구교(盧溝橋)에서 일본군의 공격으로 중일전쟁이 발생하였다.
7•7사변은 끊임없이 침략주의 야욕을 드러내왔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전면적인 중국 본토 침략의 시발점이었고, 중화민족의 반일활동과 저항을 불러왔다.
출처: https://www.easyatm.com.tw/wiki/%E8%98%86%E6%BA%9D%E6%A9%8B%E4%BA%8B%E8%AE%8A
1937년 7월 29일경 중국의 대도시 북경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송호회전과 강음해전의 무대인 양자강 하류
중화민국 제1함대 사령 진계량 장군
중화민국 해군 총사령관 진소관(陳紹寬) 장군
송호회전 (일명 제2차 상해사변, 八一三事变, 第二次上海事變)
1937년 지나사변을 일으켜 연전연승하던 일본군은 8월 9일 홍교공항사건(虹桥机场事件) 등을 핑계로 8월 13일경부터 육군, 함대와 공군력을 동원하여 상해 일대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일본 해군 육전대는 상해 인근 송호(淞滬)해안에 상륙하였다.
중국군은 상해방면에서 9집단군 사령 장치중(張治中) 등을 중심으로 저항하였다.
지나사변 주요전투중 하나인 송호회전(淞滬會戰)의 시작된 것이다.
그 때 당시 상해, 남경 일대는 중국의 대도시가 밀집되어 산업과 경제의 중심지였으며,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다.
8월 13일 송호항일전쟁이 발발할 무렵 일제는 석 달 만에 중국을 멸망시키겠다고 외쳤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송호방어선을 신속히 돌파하기 위해, 해군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음방어선을 돌파하고 양측 즉 앞과 뒤에서 중국국 주력부대를 포위하고 송호전장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8월 16일 일본군은 비행기를 동원해 중국해군이 방어하던 강음 방어선을 공격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8월 22일에는 중국해군 사령관 진소관(陳紹寬)의 기함 평해(平海)를 표적으로 일본 폭격기 12대가 폭격을 가했고, 중국 해군은 일본 전투기 1대를 격추하였다.
중국군과 일본군 약 100만여명이 동원되어 수개월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 역시 상당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1937년 11월 12일경 상해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일본군의 양자강 방어선 돌파 계획
일본 침략자들은 만약 강음 방어선을 뚫지 못하면 숭명도(崇明島)와 황포강(黃浦江) 주변 지역에서만 활동할 수 있고 양자강(장강) 내륙 지역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제3함대 기함 이즈모(出雲號)에서 논의된 침략 계획은
"반드시 중국해군을 징벌하고 보복해야 한다.
양자강을 통해 중국 내륙을 공격하고 보급을 할 수 있도록 양자강 강음 봉쇄선을 돌파해야만 하고, 먼저 강음의 중국 방어군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군함, 300대 이상의 항공기, 100,000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 강음 방어선을 단숨에 돌파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중국 고대시대로부터의 충신 길
중국 고대의 역사에 따르면 충신에게 주요 길목을 지킨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사나 임진왜란에서도 자신의 독립 염원을 죽어서 증명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진계량은 중국 항일전쟁 초기부터 국가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진계량은 전쟁 전 동원 회의에서 모든 사람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군인은 항상 충성스럽게 직분을 수행하여야 합니다.
용맹스럽게 전투에 임하고, 육지의 전장이면 마땅히 몸을 바쳐 국가에 헌신하고, 죽어서도 포대에 담겨 묻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다의 전장이면 모두 죽어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장 환경이 아무리 위험해도 일본군의 죽이고 결과를 내야 합니다.
마지막 포탄과 마지막 한발의 어뢰를 사용해서 적을 죽여 침략의 댓가를 치르게 해야 합니다.”
https://youtu.be/wnvyR8HvpbU
첫댓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군요 중국해군은 일본 해군 총톤수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군요 일본군이 강음방어선 돌파계획이 어떻게 될지 다음화가 기대되는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