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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사랑으로>
어제 서른여덟 해를 앓은 사람을 고쳐주신 것이 시빗거리가 되자 오늘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안식일에 일을 하신 것만으로도 시빗거리가 되고 박해를 하려고 하는데,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을 동일시하시니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이 되어 이제는 신성모독죄로 죽이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느님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불경죄를 짓는 것이지만, 오늘 요한 복음의 주님은 수다스러우시고 더 심하게 얘기하면 너절하게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 설명인지 변명인지를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간단하게 종합을 하면 그것은 '창조와 구원'입니다.
저는 가톨릭 전례를 매우 사랑하고, 특히 오랜 전통의 축적인 미사 경본을 사랑하며, 미사 경본 안에서도 감사송을 더 사랑하는데, 연중 시기 공통 감사송 2는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창조하시고, 정의로 책벌하셨으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비로 구원하셨나이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얼마나 잘 요약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창조하신 좋은 것들을 책벌도 하시지만 책벌도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결국은 구원을 하시는 것인데, 그 구원 사업을 하시는 분이 우리 주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선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모든 것을 당신 마음에 들게 만드실 수 있으시고, 그래서 당신이 만드신 것을 싫어하실 리 없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는 지혜서 11장 23-4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창조된 피조물 중에 우리 인간은 사랑으로 주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기에 책벌을 하시지만, 이 또한 구원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으시고, 그래서 책벌도 하시고 구원도 하십니다.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이런 하느님 사랑을 어미의 사랑에 빗대어 얘기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우리도 하느님처럼 그리고 어머니들처럼 창조와 구원의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사랑으로.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 둘 자리>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마더 데레사)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나시길 기도드립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평안(平安)에 이르는 법: 평화와 안식의 차이>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38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였습니다.
40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는 하느님의 일이란 이렇게 동물을 새로 태어나게 하여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이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고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요한은 안식일의 의미가 사실 주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오늘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아담의 일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예수님은 이렇게 안식이 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 하십니다.
여섯째 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일곱째 날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
안식을 우리말로 한다면 ‘평안’(平安)이 제일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평안은 평화와 안녕, 혹은 안식이 합쳐진 말입니다.
안식일에 도달하려면 먼저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평화를 찾았다고 안식에 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일해야 합니다.
평화와 안식은 조금 다릅니다.
‘평화’는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셨음을 알고는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은 그렇게 하신 분처럼 나도 자녀로서 따라 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예를 들자면 저에게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을 때 가지게 된 것이 ‘평화’입니다.
‘아, 이렇게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구나!’라고 깨닫는 게 평화입니다.
제가 ‘내 어머니는 다리 밑에 계신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다가, 어머니가 해 주시는 사랑을 보고는 ‘아, 내 어머니가 저분이 맞는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를 얻었다고 안식에 이른 게 아닙니다.
부모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다면 나도 자녀된 도리로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고 부모처럼 양식을 먹이며 일을 마치고 나서 느끼는 평화가 바로 안식입니다.
받은 것처럼 해줄 때 비로소 부모 앞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의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세례 때 받은 성령과 말씀을 그에게 전해 주어 그도 당신처럼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후에 ‘안식’을 누리기 위함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분처럼 일해서 그분의 자녀라는 안도감이 들 때 비로소 안식일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아이유가 연기한 지안이란 한 상처투성이 젊은 청년의 성장기입니다.
이를 ‘지’(至), 편안할 ‘안’(安).
평화도 없던 한 사람이 안식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지안은 살인자입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며 구타당하는 할머니를 구하려다 사람을 살해한 21살 여자입니다.
이지안은 정당방위로 무죄입니다.
그러나 살인자란 꼬리표는 여전히 이지안을 따라다닙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들인 이광일로부터 여전히 빚 독촉에 시달립니다.
이광일은 빚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로 무조건 지안이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죽고 싶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지안은 어떤 회사에 들어갑니다.
이력표에 달리기 잘한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지안이를 박동훈이란 만년 부장이 뽑아주고 인간적으로 대해줍니다.
힘든 처지에서도 노모를 모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지안이는 그로 인해 점점 마음을 열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도 믿어갑니다.
박동훈도 가족들을 위해 후배에게 밀려도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붙어살아야만 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내가 자신을 앞질러 대표이사가 된 도준영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내야 합니다.
박동훈은 아내에게 자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집 밖에서나 집 안에서나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아나가야 합니다.
처음에 지안이는 박동훈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박동훈 부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됩니다.
도준영은 박동훈을 몰아내기 위해 이지안을 이용합니다.
이지안이 박동훈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지안은 많은 회사 중역들이 모인 곳에서 박동훈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박동훈도 그녀가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회사에 받아주었다고 말합니다.
박동훈에게 안 좋은 일을 벌어지게 한 자신을 탓하며 이지안은 또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나 박동훈은 그래도 지안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지안이는 그렇게 평안을 찾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런 희생을 실천해야 평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안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인 이광일도 용서합니다.
광일은 어느 날 자신의 어렸을 때의 관계를 기억하는 지안이의 말을 듣습니다.
“착했던 애예요. 걔네 아버지가 나 때리면 말리다가 대신 맞고…. 걘 날 좋아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난 걔가 착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미안해, 광일아.”
광일은 지안이가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서 자신에게 당해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어둠임을 지안이를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상처를 딛고 일어섭니다.
지안이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고 박동훈은 회사를 나와 개인사업을 합니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둘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만의 대화입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사랑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이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받는 감정이 안식입니다.
안식에 이르기 전까지 평안함은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피를 흘리며 나를 낳고 땀을 흘리며 키웠다면, 나도 그렇게 할 때 참 안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은총에 의해 얻는 것이고 안식은 진리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얻은 것이 평화입니다.
그리고 저의 안식은 이렇게 복음 묵상을 나눔으로써 완성됩니다.
나도 이웃에게 그렇게 다 내어주기 전까지는 안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평화를 거저 받았기에 빚을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갚아야 안식에 이릅니다.
먼저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 평화를 누립시다.
그다음엔 그 평화가 안식이 되도록 키워가야 합니다.
그분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법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 희망합니다>
예언서 중의 예언서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야서는 꽤나 흥미롭고 특별한 예언서입니다.
작품의 역사적 상황, 사용되는 언어와 문체, 주요 신학 사상 등을 고려할 때 이사야서는 통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세 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39장을 제1이사야서, 40~55장을 제2이사야서, 56~66장을 제3이사야서라고 요즘 칭하기도 합니다.
특히 제2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선포 대상자들은 더 이상 유다나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처절하게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유배를 당했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온 백성들은 비참하고도 굴욕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1이사야 예언자와 제2이사야 예언자의 활동 시기는 적어도 150년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제2이사야 예언서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창조주이신 주님께서는 가련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남의 나라 땅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바빌론 제국이 난다 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힘이나 위대함은 풀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임금 키루스를 이스라엘의 해방과 재건을 위한 도구로 뽑으셨다.
그를 통해 주님께서는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당신 백성을 유배에서 해방시켜 위로해주실 것이다.
제2의 출애굽, 새출애굽이 도래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시온의 재건이 이루어질 것인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구원에 도달할 것이다."
유다왕국이 멸망한 후에 바빌론으로 끌려와 살아가고 있던 유다인들의 하루하루는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참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도 참혹한 현실을 허락하시는지?
과연 주님께서 계시기나 한건지?
그분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 오래도록 남의 나라 땅에서 수모를 당하게 하시는지?
혹시라도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신 것은 아닌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난 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이사야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2이사야 예언자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절망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따뜻이 위로합니다.
첫 선포 말씀부터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이사야서 40장 1~2절)
특히 오늘 첫 번째 독서로 선포되는 말씀의 말미 부분은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위로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야서 49장 14~15절)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키루스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는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왕으로서 당대 ‘핵인싸’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벌이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페르시아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고 지지를 보냈습니다.
정복한 나라 백성들에게는 유화 정책을 써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서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강대국 바빌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설명에 따르면 바빌론은 천 개의 성문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며, 수많은 보화와 보물로 가득 찬 황금의 도시였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문과 성벽을 새로 세우고 튼튼하게 보수하고 증축했습니다.
성벽은 2층에다 높이는 6.5미터였습니다.
성벽은 일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열로 되어 있었는데, 두 성벽 사이의 폭은 3.72미터였습니다.
키루스는 이토록 강력한 바빌론을 함락하고 멸망시킵니다.
엉겁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를 통해 키루스는 주님 구원의 도구로 선포됩니다.
그는 주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키루스를 인도하시어 그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결국 키루스가 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일이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경우 그분이 계획하시는 일을 우리의 좁은 안목과 머리로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그저 그분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시리라 낙관하는 일입니다.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그분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고 희망하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아드님의 권한>
창세기에는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창세 2,2),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후에도 쉬시지 않고 인간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 하신다는 유대교 신학사상이 있었습니다.
그 사상은 하느님께서 단 한 순간이라도 인간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신다면 인간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즉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인간들을 돌보시고 보살피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심장이 한 순간이라도 멈추면 인간이 죽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도 인간의 심장은 잠깐 멈추었더라도 다시 뛰게 할 수도 있고, 다시 뛰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단 한 순간이라도 거두시면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천지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기본 믿음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쉬셨다.’ 라는 말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신다는 뜻이 아니라, 천지창조 작업을 마무리하신 다음에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당신도 당신의 일을 멈출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인간들을 돌보고 계시니” 라는 뜻입니다.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안식일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날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지만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요한 5,19-20ㄱ)
이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다.” 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히브 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요한 5,20ㄴ-23)
여기서 ‘그보다 더 큰 일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일들’, 즉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켜서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심판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권능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안 믿는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믿는 사람들은 당연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권능과 권한을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일과 예수님을 공경하는 일은 ‘같은 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나를 공경하여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예수님께서 당신을 공경하라고 요구하신 것은 아니고, 이 말씀은 당신의 일이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완성을 향해서 가는 중이고, 마지막 날이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의 시간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라는 말씀은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중단하면그것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지금이 마지막 날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는 일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르고 남아 있는 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과 ‘안 믿는 이들’로 구분하시지 않고, ‘선을 행한 이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로 구분하십니다.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선을 실행해야 합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악을 저지른다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루카 12,47).
믿는다고 무조건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로마 2,6-7)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삶의 중심인 하느님 -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한밤중 깨어나 카톡을 확인하니 아름다운 글이 도착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매입니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두편의 시에 매료되어 제 마음에서 정리, 연결해 보았습니다.’로 시작된 글입니다.
“성부께서 그리신 꿈의 바탕위에
성자께서 사랑의 봄꽃으로 생명주시니
우리 모두 꿈과 생명과 그 사랑에 매료되어
매혹의 찬미가로 화답하며
봄비처럼 젖어드네.”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고백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영성적인 민족이라는 일본학자의 글에 고무되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는 한국 고유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사상사를 꿰뚫고 흐르는 영성의 힘이랍니다.
단군신화부터 21세기 거리의 철학까지 ‘조선사상사’를 쓴 오구라 기조의 책에 대한 서평 일부를 인용합니다.
“조선의 사상은 두드러지게 영성을 띤다.
이 영성은 지성으로도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기에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영성은 새로운 사상과 함께 거대하게 약동하며 정치사회사적 변혁의 힘을 분출한다.
이때 영성은 기존의 모든 사상을 아우르는 어떤 회통의 정신을 가리킨다.
영성의 눈으로 사상의 차이를 넘어 전체를 꿰뚫어 보고 통합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런 영성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경우로 신라 원효의 불교 사상과 조선 퇴계의 성리학 사상, 수운 최제우의 동학 사상을 거론한다.
지은이는 이 영성이 21세기 오늘의 한국 사상에까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정확한 통찰이 참 통쾌합니다.
이런 영성을 저변으로한 한국이기에 역동적일 수 뿐이 없고 이런 한국의 천주교인들이기에 깊은 영성을 추구할 수 뿐이 없습니다.
몇 저명 인사의 컬럼에 나오는 글도 인용합니다.
“인간은 불행을 막지는 못하지만 불행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예술(신앙)인 것 같아요.”
“먹고 살기 힘들고, 밤길을 제대로 못 다니고 하지만 법 제도의 변화 말고 다른 식의 싸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내면의 강함, 즉 내적 힘이다.”
“유명해지기보다는 유일해져라.
맞아요. 이런 태도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유일하다는 것은 꼭 필요하다는 뜻이니까요.
많이들 하는 얘기지만 무난한 글이 가장 안 좋은 글이죠.
그런 글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유일한 존재가 되기는 어렵겠지요.
저도 명심할 일입니다.”
참 좋은 깨달음의 통찰들입니다.
내적 힘의 원천이자 ‘그렇고 그런’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이 아닌 자존감 높은 내 고유의 참나의 유일한 사람으로 살게 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이래야 비교로 인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신학교 시절 교수 신부님의 가르침이 생생합니다.
“인간답게 추상적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구체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 나의 고유한 영성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인 예수님이 그 결정적 모범입니다.
오늘 말씀이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줍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의 말씀은 유배지로부터 해방되어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참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한다.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바로 당신 자녀들인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하느님의 결연한 각오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본래의 유일한 참내가 되려고 평생 노력할 것이며, 이래서 하느님의 중심의 삶을 살며 평생 하느님 공부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보속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이사 43,4ㄱ)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의 결정적 모범을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구원의 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바로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영생을 살아야 할 자리는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도 심금을 울립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와 하나되어 사시는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망합시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
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이 되려는 것은 허영이요 환상이요 망상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며 참나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구원의 행복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하나하나 당신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자녀답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시편 145,17-1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서른여덟 해나 앓아오던 이를 고쳐주신 날이 하필 안식일이라, 유다인들은 안식일 법을 무시한다는 혐의를 씌워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수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그런데 이 말씀은 유다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맙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죄인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 운운하다니!"
분명 안식일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쉬신 일곱째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니 이를 수호하려는 유다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을 쉬라 하신 건 영육의 휴식이 필요한 모든 이들, 보호받지 못하는 종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제외됨 없이 차별 받지 않고 쉬게 하시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안식년에는 땅마저도 양분을 축적하도록 쉬게 놀리니까요.
쉼의 날을 통해 사람을 회복시키고 되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부를 축적하려고 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불균등한 거래를 금지하시려는 조치였지만,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정신은 희미해지고,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하는 세부 항목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사랑의 계명에 이바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간적·세속적 일은 목적 자체에서 구분이 되어야 하지만, 문자에 집착하면서 지킬 항목이 늘어나니 숙고와 성찰은 그쳐버렸습니다.
"아,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으니까,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결론만 말해주세요!" 하는 식으로 율법을 익히다 보니, 원 뜻과 정신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도는 묻혀버리고 그저 기계적으로 가부를 판별하는 방법론만 늘어나고 만 것이지요.
한번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릴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 복음사가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꽤 긴 부분을 반복해 할애하는 건, 성자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이 앞으로 펼쳐질 파스카 여정에 단초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에 대한 수용과 믿음이 듣는 이들의 구원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요한 5,22)
심판의 권한은 이제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이양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또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고 하시는데, 정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하며 탐욕으로 들끓는 자신의 실존적 처지를 처절히 체험하며 귀양살이 인생 순례길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이라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엄청난 위안을 받습니다.
사실 철저한 믿음으로 아무리 열심히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심판이라는 단어 앞에 온전히 자유롭기는 어렵기에 그렇습니다.
과연 내 주제에 심판이라는 관문을 제대로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서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심판을 뛰어넘는 구원의 열쇠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는 마치 목적지에 이르는 지름길을 만난 듯, 지루한 컴퓨터 작업에서 단축키를 익힌 듯 반갑기 그지 없는 말씀인데, 유다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이는 어떻게 심판을 피하게 될까요?
그 답은 오늘 독서에 들어 있습니다.
"설령 여인들은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 답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의 절정이 제 몸에서 낳은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이 그보다 더 짙고 깊고 뜨겁고 애틋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께서 아들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에게 어찌 심판의 항목들과 잣대를 들이대실 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는 도저히 못할 일이 바로 그런 심판일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심판에 대한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을 믿고, 그 사랑의 결정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어느 여인보다 애끓는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율법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 가득한 사랑의 프리즘으로 우리를 비춰보시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심판의 다른 말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입당송)
오늘 미사를 여는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과연 구원은 하느님의 자애를 입고 다가옵니다.
믿는 우리에게 자애는 심판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 있는 성 이윤일 요한 성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의 배려로 홍보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는 공소가 2개 있었습니다.
첫째, 셋째 주일에 가는 공소가 있고, 둘째, 넷째 토요일에 가는 공소가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공소에도 같이 갈 수 있는지 제안을 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공소에 같이 갔습니다.
본당에서 공소까지는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한 달에 2번 본당 신부님을 만나는 공소 신자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공소회장님은 신자들이 많이 못 나왔다고 미안해하였습니다.
그래도 해설, 독서, 복사는 다 있었습니다.
주일 본당 미사를 마치고 공소로 가는 신부님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한 달에 2번이나마 미사를 볼 수 있다는 신자들의 갈망을 보았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만나니 사랑의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2년 전입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사목회장이 전화를 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한국으로 갔는데 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당시는 코로나 상황이었고, 홍보를 갈 일도 없었기에 도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3개월만 도와 드리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한국으로 갔던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쉽게 돌아 올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도 쉽게 끝나지 않아서 계속 도와드리기로 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서 한인성당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신문사 운영과 홍보 때문에 쉽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는 미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더 좋은 방안을 찾을 때까지 저의 열정과 신자들의 갈망으로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신자들의 갈망을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부족한 저를 통해서도 좋고, 새로운 사제를 보내 주셔도 좋습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지만 교회에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열정’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열정이 잠들어 있는 신앙을 깨울 수 있습니다.
그런 열정이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계명과 율법이 아닙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소경의 갈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갈망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갈망을 아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태산이 높아도 하늘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반드시 정상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사람이 오르지 않고 산만 높다고 탓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산을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산을 보여주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산에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갈망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책 제목에 끌려서 구매한 책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에디 제이쿠, 동양북스)
보통 말년에는 후회할 일이 더 늘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00세라는 노인임에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의 인생이 너무나 궁금해서 책을 샀습니다.
책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탈출해서 구조되었을 때의 몸무게가 28kg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생활을 했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에디 제이쿠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수용소를 전전하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친척들의 죽음을 봐야만 했었지요.
그래서 자신도 죽음의 유혹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고, 이 책을 통해 희망을 사람들에게 지금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최고의 무게만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계속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신원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법을 무시하는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자기가 하느님과 같은 일을 한다고 하는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인으로 단정했습니다.
이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특권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특권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임받았다고 선언하시며, 동시에 사람들을 심판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자신 있게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원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아버지 아들 관계에 있으며 꼭 같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받지 않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혹시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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