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있으면,
이에 따라 증상이 나타납니다.
증상이 나타나면
이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증상에 대응하여 증상을 완화하는 대증요법입니다.
증상이 나타나면 대증요법을 실시하고
대증요법을 실시하면 증상은 완화합니다.
하지만 대증요법은 부작용이 있습니다.
문제를 방치한다는 점입니다.
증상은 빠르게 완화하는 반면
문제는 느리게 악화합니다.
대증요법은 증상에만 대응하므로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결국 일시적으로 증상이 빠르게 나아지므로 문제를 해결한 듯 판단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방치되어 악화한 문제는 더 심한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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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증 요법에 비하여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근본 요법입니다.
근본 요법으로 문제를 발생시킨 원인에 대응합니다.
근본 요법은 문제를 완화하여 결국 증상도 완화시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근본 요법은 시간 지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본 요법에 따라 증상이 완화되기를 바라려면
대증 요법 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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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에 따른 증상을 대하는 방법은
대증 요법과 근본 요법이 있습니다.
되먹임 고리 또한 두 가지가 있는 셈입니다.
이 두 가지 고리 중 어떤 것을 주요 되먹임 고리로 살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단기간의 성과를 중시하는 상황에서는
대증 요법에 치우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기간의 성과를 위해 문제를 악화시키는 줄 알면서도
대증 요법을 선택하는 셈입니다.
이와 같이 대증요법으로만 대응한다면
결국 더 크고 악화된 문제와 증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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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증요법과 근본요법 중 어떤 되먹임 구조를 강조할 것이냐에 따라
행태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사회사업은 생태체계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사회사업이 다루는 문제와 증상은
생태체계 내 공생성이 약화될 때 나타납니다.
생태체계 내 공생성이 약화되면
문제와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 때 복지기관이 직접 지원하는 방식은 대증요법에 가깝습니다.
생태체계 내 공생성을 살리는 것과 무관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공생성을 해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대증요법은 당장 문제 증상이 완화되는 듯 보여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문제 증상이 악화합니다.
악화된 증상은 더 많은 복지기관의 직접 지원을 요구하는데,
이미 복지기관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도달한 상황입니다.
사회사업은 생태체계 공생성을 살리는 근본 요법을 강화해야 합니다.
복지기관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악화된 되먹임 구조를 고려한다면
더욱 생태체계 공생성을 살리는 근본 요법을 강화해야 합니다.
때로는 대증 요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무엇이 주된 방식이고, 무엇이 부수적 방식인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되먹임 구조 전반을 살핀다면
생태체계 공생성을 살리는 것이 '주',
복지기관의 직접 지원이 '부'로 정립하는 것이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첫댓글 복지기관이 직접 지원하는 방법이 보통은 대증요법이며, 이것은 지속적이거나 삶으로 풀어내는 방법이기 보다 보통은 '임시방편'이 되는 군요... 사회복지기관들이 대증요법에 가까운 접근을 하는 이유는 왜일까요? 공생성을 해치면서까지 대증요법에 가까운 방법으로 '직접'지원하는 밥벙을 취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공생성을 해치는 것에 공감할까요? '공생성'에 대해 민감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배우고 갑니다~
공생성, 사회통합 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두는 관점,
공생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해도 눈에 보이고 단기간에 드러낼 수 있는 성과에 몰두하는 자세,
이런 이유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만...
함께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제게는 사회사업을 읽는 방법 - 사회사업 讀法이 있습니다.
‘당사자의 삶 지역사회 사람살이’를 세우고자 하는가? 사회사업가나 복지기관의 ‘복지사업’을 이루고자 하는가? 어느 쪽을 이야기하는가? 어느 쪽에서 비롯하며 어느 쪽에 중심이 있는가? - 사회사업은 이로써 아주 달라집니다. 사회사업 이론과 실제가 대개 이로써 좌우됩니다.
복지기관이 직접 지원하는 까닭도 이런 독법으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는 복지기관의 업적 곧 복지사업에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육지책이라고 양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복지사업 세우는 데 힘쓰는 모양새입니다.
당사자의 삶이나 지역사회 사람살이에 대한 평가보다
복지사업에 대한 평가를 더 엄중한 현실로 여기는 데서 오는 현상입니다.
이곳 미국에서 한덕연 선생님의 방법을 적용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가슴만 뜨겁고 배운바가 적으니, '당사자의 삶과 지역사회의 살람살이'를 살피며 풀어나가기 보다는, '직접적 도움' 혹은 '임시방편'에 귀를 기울이곤 합니다. 한덕연, 김동찬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양원석 선생님 만나고 싶네요.
아~ 우정수 선생님께서 미국에 계시는군요. 저 또한 뵙고 싶습니다. 기회 될 때 뵙겠습니다. ^^
반갑습니다. 한덕연 선생님 2002년 여름에 사회복지 정보원 팀이 저희 가정(전남 광양 망덕포구)을 방문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중 사회복지정보원이 생각나서 검색하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덕연 선생님의 모습이 11년이 지났지만 생생합니다. 그리고 제결혼식에 온 김상진이라는 친구와도 몇년에 한번씩 통화합니다. 선생님 기회되면 뵙고 싶습니다. 지금은 특수한 환경속에 처하여 시간을 많이 내지는 못하지만 기회가 되면 한번 뵙겠습니다.
아~ 망덕포구 홍식네 집...
잊을 수 없지요.
보고 싶다.
예수병원에 근무하고 있나요?
제 전화는 010-3080-8197, 070-8102-2643 입니다.
망덕포구 집에 또 가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