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시대 의종임금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을 나갔다가 깊은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히 민가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을 했지만,
집주인(이규보선생)이 조금 더 가면 주막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여
임금은 할 수없이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런데 그 집(이규보)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의 한이다."
有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도대체 개구리가 뭘까..?"
한나라의 임금으로써 어느 만큼의 지식은 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 걸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막에 들러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주모에게 외딴 집(이규보 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과거에 낙방하고 마을에도 잘 안 나오며,
집안에서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 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안 오고해서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는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有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까마귀가 꾀꼬리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다.

바로 "3일 후에 노래시합을 하자"는 거였다.
백로를 심판으로 하여 노래시합을 하자고 했다.
이 제안에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 하기는커녕,
목소리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시합을 제의하다니...
하지만 월등한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에 응했다.
그리고 3일 동안 목소리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반대로 노래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연습은 안하고
자루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백로한테 뇌물로 가져다주고 뒤를 부탁한 것이었다.
약속한 3일이 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 곡씩 부르고
심판인 백로의 판정을 기다렸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결국 심판인 백로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동안꾀꼬리는 노래시합에서 까마귀에 패배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백로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주고,
까마귀가 뒤를 봐 달라고 힘을 쓰게 되어 본인이 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라는 글을 대문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글은 이규보선생이 임금한테 불의와 불법으로 뇌물을 갖다 바친 자에게만
과거급제의 기회를 주어 부정부패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해서 한 말이었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란 말이 생겼다.
개구리 와
이로울 이
백로 로
이규보선생 자신이 생각해도 그의 실력이나 지식은 어디에 내놔도 안떨어지는데
과거를 보면 꼭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돈도 없고, 정승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과거를 보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와 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백로한테
개구리를 상납한 것처 뒷거래를 하지못하여 과거에 번번히 낙방하여
초야에 묻혀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말을 들은 임금은
이규보선생의 품격이나 지식이 고상하기에
자신도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고 전국을 떠도는 떠돌이인데,
며칠 후에 임시과거가 있다하여 개성으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여기까지는
바람새 개인적으로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규보선생님이 초야에서 지내기엔 아까운 분이었음을.
또한 궁궐의 비리가 소멸되길 바라면서.....

그리고 궁궐에 돌아와 즉시 임시과거를 열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과거를 보는 날,
이규보선생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시험관이 내걸은 시제가 바로
"有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이란 여덟 글자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선생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절을 한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서
장원급제하여 차후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고한다.ㅣ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有我無蛙 人生之恨)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와이로는 일본어로도 뇌물이란 뜻으로 쓰여 지고 있다.
지금의 정치를 두고 비유들을 많이 하지만 어디 정치뿐이겠는가?
개구리는 지금 어떤 형태로 변했을까?
그런데 말입니다....ㅎㅎ
[출처] 와이로(蛙利鷺/有我無蛙 人生之恨)의 유래|작성자 규라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년)
고려 후기(의종-명종-고종)의 문신·학자·문인.
본관은 황려(黃驪). 초명은 이인저(李仁氐),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만년(晩年)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文)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14세 때 私學의 하나인 誠明齋의 夏課(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여름철에 절을 빌려 학습하는 일)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奇才라 불렸다.
이때 이규보는 문한직(文翰職)에서 벼슬해 명성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은 과시의 글(科擧之文) 등을 멸시하게 되었고,
이것은 사마시(司馬試)에 연속 낙방하는 요인이 되었다.
1189년(명종 19) 柳公權이 座首가 되어 실시한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知貢擧 任濡, 同知貢擧 李知命 등이 주관한 禮部試에서 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을 받지 못하자, 25세 때 개경의 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짓는 등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莊子의 無何有之鄕(어떠한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낙토)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白雲居士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었다.
26세 때인 1193년(명종 23)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빈궁에 몹시 시달리면서 無官者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이규보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하고 양심적인 관직자였으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때그때 마다 떠오르는 바를 그대로 표출한 것이었다.
<옮겨 오면서 >
임금님은 왜 이규보만이 알고 있는 시제를 내었을꼬.
참석한 다른 선비들에게 공평성이 없지 않은가?
만일 바람새가 과거장에 있었다면 분명 낙제했겠군요.쩝
다른 방법이 분명 있을텐데.....
와이로를 설명했지만 결국 특헤가 된 셈.
첫댓글 한자가 뜻 글이라 선비들이 장난을 많이 첬다고 하드라고요 이두문과` 연계해서 기방에서 남녀관계 거시기^^^ 부터
그러다가 보니 "와이로" 분명히 일본 말이고 뇌물 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누가 그럴사한 이바구로 재미있게
만들었는데 그 양반 대가리 좋다 ㅎ^ㅎㅎ^ㅎ 가짜 뉴스 만드는 원조인가 봐 ㅋ^ㅋㅋㅋ^ㅋ
일제하에서 사용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말이라고 해서......
`와이로`의 어원이 햇갈립니다. 한자? 일본어?
선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일본어 '賄賂'를 읽으면 와이로 입니다. 우리말의 '受賂(수뢰)', '賂物(뇌물)' 등과 같지요. 하기야 受賂 賂物 등도 우리말이 아니라 봅니다.
한글은 문자가 아니고 발음기호라는 학설에 크게 공감합니다. ㅎㅎㅎ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