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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알고부터 이 마음은 화학 변화를 일으켜 혼자서 살아가는 게 쓸쓸해졌어
그래 어떤 순간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있다면 가슴속에서 사랑의 시가 왜인지 솟아오지
있지 사랑은 하늘이 준비한 멋진 선물이니까 좋지 않아?
함께 걷고 싶어 같은 하늘을 보면서 슬플 때는 그래 함께 우는 거야
함께 웃고싶어 언제나 목소리를 맞춰서
네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
한 눈 팔 때에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겠어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닌 생각이니까
어느 쪽으로 갈까 고민된다면 동전을 던져서 정하자
언제나처럼 가면 되는 거야
- 안젤리크 「一緖に步こうよ」
Pleasure Line
- Xenal's Story
바다가 보인다.
시원하게 뻗은 수평선이 발하는 눈부신 빛에 자그마한 소녀가 눈을 가린다.
억지로 바다를 쳐다보려 한쪽 눈을 찡그린 소녀는 곧 보기를 포기하고 뒤따라오는 한 남자에게 돌아선다.
푸른빛의 바다와는 대조적인 색의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넘실거린다.
“아빠! 빨리 오세요~ 빨리요~”
소녀의 왼쪽 머리 위에 매여져 있는 분홍빛 리본의 레이스 끈이 귀엽게 흔들린다.
10세쯤 되었을까.
소녀의 머리칼보다 더 붉은 빛을 띄고 있는 둥근 보석이 달려 있는, 자기의 키보다 큰 나무석장을 들고 해맑게 웃는 모습에 뒤따라오던 그가 걸음을 멈추며 미소 짓는다.
소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간 바람이 그의 보랏빛 머리칼을 흔들어 놓는다.
그리운 추억이 묻어있는 작은 바람.
침묵속에서, 그의 자줏빛 눈동자가 앞서가는 소녀를 비춘다.
오늘따라 시장통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씩 두꺼워질만한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많았다.
덕분에 아멜리아는 마이페이스로 성큼성큼 걸어가버리는 제르가디스를 놓치고 말았다.
“아앗... 제르가디스 오빠!”
추위에 얼어붙은 팔을 내뻗어 보았지만 닿는 것은 그의 새하얀 망토 뿐.
조금씩 인파들 사이로 파묻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슬프게 느껴진다.
내뻗은 팔을 힘없이 떨어뜨리며 안타까움이 섞인 새하얀 한숨을 내뱉던 아멜리아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깊은 바닷속을 닮은 눈동자가 혹여나 잘못되었다는 양, 팔로 슥슥 문질러 보았으나 붉은 시야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
붉은 시야 속에서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버린 존재가 보인다.
하지만....
하지만!!
밀려오는 아련한 기억에 아멜리아가 오른손을 꼬옥 쥔다.
“자..잠깐만요!!!”
자신과는 다른 쪽으로 튀어 나가는 아멜리아를 발견한 제르가디스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쪽으로 한발 내딛었다.
“후우, 아멜리..”
하지만 그도 곧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덜컥 멈추어버린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멈춰세운 아멜리아의 주먹 쥔 손이 작게 떨린다.
“네?”
소녀의 붉은 머릿결이 흩날린다.
분명, 아멜리아와 제르가디스의 기억속에도 붉은 머릿결을 가진 그녀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없어.
아멜리아가 불러 세웠던 소녀는 커다란 붉은 눈을 깜빡이며 아멜리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붉은 머릿결속의 추억에 빠져들었다가 현실로 돌아온 아멜리아는 ‘왜요?’ 라고 묻고 있는 소녀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설프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제르가디스 역시 현실로 돌아오고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아멜리아가 수습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자 소녀가 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망토자락을 잡았다.
“아빠를 잃어버렸어요.”
“...에?”
이번에는 당황한 표정으로 소녀를 내려다본다.
아멜리아의 망토를 쥔 소녀의 손이 추위에 질린 듯 하얗다.
“아빠... 아빠를 찾아주세요...”
울먹이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에 아멜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손을 잡았다.
오랫동안 찾아 헤맸는지 손이 차다.
조용히 소녀를 내려다본다.
길게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
커다란 붉은 눈동자.
아직도 아멜리아의 기억 속에는 그녀가 미소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다.
자꾸만 겹쳐 보이는 모습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조금씩 서글퍼진다.
아멜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제르가디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의 표정 역시, 아멜리아 못지 않다.
그러던 중, 소녀가 한팔로 꼬옥 감싸고 있는 석장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로 된 투박한 몸체.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있는 소녀보다 더 붉게 빛나는 구슬 하나.
그리고...
석장을 장식하고 있는 레이스가 달린 커다란 리본.
불길한 느낌에 아멜리아를 떨어트려 놓으려던 제르가디스는 리본을 보곤 비틀거리고 말았다.
리본... 리본이라니?
소녀의 키보다 한참이나 큰 석장은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분홍빛 리본을 조용히 뽐내고 있었다.
리본, 그것도 너무나도 귀여운 레이스가 달려 있는 리본에 잠시동안 할말을 잃었던 제르가디스가 한차례 머리를 흔들고는 가볍게 아멜리아의 어깨를 툭쳤다.
그러자 눈시울이 붉어진 아멜리아가 눈가를 훔치며 그를 돌아보았다.
“왜요, 제르가디스 오빠?”
제르가디스는 그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다독여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애가 들고 있는게 뭔지 알겠어?”
제르가디스의 손길에 잠시 얼굴을 붉혔던 아멜리아가 소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매우 낯이 익은 석장을 보고서는 깜짝 놀란 듯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스르륵, 소녀의 손에 잡혔던 망토가 떨어져 나간다.
“제...로스님....?”
한순간, 아멜리아의 눈에 혐오감이 스쳐지나간다.
너무나 소중했던 사람을 빼앗아 가버린 존재.
그렇기에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존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려오는 그런 존재.
아멜리아와 제르가디스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으나 정작 소녀는 그런 그들을 멀뚱치 쳐다만볼뿐이다.
“무슨 속셈인거야?”
“네?”
제르가디스의 차가운 말투에 놀란 듯, 소녀의 몸이 움츠러든다.
“시치미떼지마, 제로스.”
“제나는 제로스가 아니예요.”
“그럼 그 모습과 이건 뭐냔 말이다!”
크게 소리 친 제르가디스가 석장을 향해 손을 뻗자 소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석장을 감쌌다.
“손대지 말아요!”
“역시 그 석장에 무언가가 있다는건가?”
“아저씨, 아까부터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정말 소중한 듯 석장을 감싸 안은 소녀의 붉은빛 눈동자에 눈물이 맺힌다.
소녀가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으로 제르가디스를 쏘아보자 주위 사람들이 그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시선에 옆에 서 있던 아멜리아가 당황한 듯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제르가디스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습을 바꿔 나에게 접근할 것이었다면 그 석장은 왜 들고 온거지?”
“이건...”
“왜 하필 그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거냐, 제로스!!”
제르가디스의 절규 섞인 고함 소리에 질끈 눈을 감은 소녀가 다시금 석장을 감싸 안는다.
“이건 아빠가 제게 준거예요!!!”
....아빠?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아 올랐다가 한순간에 식어버린 제르가디스를 한쪽으로 밀쳐낸 아멜리아가 소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저기... 이름이 뭔가요?”
“...제나르.”
“정말로.. 제로스님이 아닌거예요?”
“...제나는 그런 사람 몰라요.”
아멜리아의 시선이 석장으로 향한다.
“그럼 이 석장은...”
“이건 아빠가 제나에게 주신 거예요.”
눈가에는 커다란 눈망울을 그렁그렁 매단 채 소녀가 또박또박 대답한다.
다리를 펴 몸을 세운 아멜리아가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하니 소녀만 바라보고 있는 제르가디스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소녀가 아멜리아의 뒤를 쫓아간다.
투박한 석장과 묘하게 잘 어울리는 분홍빛 레이스 리본이 소녀의 걸음에 맞춰 흔들린다.
그리고 또다시 붉은 물결.
‘처박혀있다’ 라는 표현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던 제르가디스가 한숨을 쉬며 일어난다.
오랜만에 잊고 싶었던 옛 기억을 되살려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기로 할까?
분명, 저 석장은 제로스의 것.
그것을 저 소녀가 갖고 있다는 것은 언젠간 제로스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는 것.
오랜만에 장단을 맞춰주는것도 재미있겠지.
“꼬마. 아빠를 찾고 있다고 했지?”
조금은 차가움이 사라진 제르가디스의 말에도 소녀는 잔뜩 움츠러들며 조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도와주마.”
“제르가디스 오빠?”
갑작스런 그의 말에 놀란 것은 아멜리아였다.
도와주겠다는 제르가디스의 말에 소녀는 눈가의 눈물을 훔치고는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네 아빠 이름을 모른다고?”
“네에.”
“너희 아빠 머리색이 보라색 맞고?”
“네에. 보라색에 엄청 길어요.”
석장만으로도 제나르의 아빠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지만 애써 부정하려고 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지끈거림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듯, 제르가디스가 거칠게 머리를 부여잡는다.
붉은 머리칼의 소녀, 제나르는 그런 제르가디스가 아직도 무서운 듯, 고개를 숙인채 힐끔 그의 안색을 살핀다.
그러나 제르가디스는 오로지 저 소녀의 아빠로 짐작되는 인물에 대해서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뿐, 소녀에게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쪽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이 소녀는 그녀를 닮았으니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
제르가디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를때쯤 아멜리아가 나타났다.
겨울의 낮은 짧기 때문에 그만큼 활동시간도 짧아진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이제 이 자그마한 소녀가 있었기에 가급적 빨리 숙소를 잡았다.
아멜리아는 제르가디스와 제나를 앉혀 놓고 방을 잡으러 갔다가 온 것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 있었고, 그 쟁반에는 세 개의 컵이 들려 있었다.
“자, 제르가디스 오빠는 여전히 홍차죠?”
“아아.”
“자, 제나르씨는 밀크티죠?”
“네. 감사합니다.”
아멜리아가 제르가디스의 앞에 홍차가 든 컵을 내려놓고 제나르에게 밀크티가 든 컵을 내려놓은 후 가지런히 놓여져 있던 의자를 빼서 앉는다.
그리고는 제르가디스와 제나르를 번갈아 쳐다본다.
“제르가디스 오빠, 샌드위치 한조각으로 되겠어요?”
걱정스러운 아멜리아의 말투에 무뚝뚝하게 고개만을 끄덕이는 제르가디스.
그런 그를 보던 아멜리아에게서 한숨이 터져나온다.
그녀는 곧 시선을 제나르에게로 돌렸다.
“리.. 아니 제나르씨도 밀크티로 되는거예요?”
“네에. 걱정 마세요.”
사기로 된 매끈한 컵을 두 손으로 잡고서는 생긋 미소 짓는다.
잠깐, 아주 잠깐 아멜리아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스친다.
모습은 같지만 전혀 다른 식성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라고나 할까...
그런 그녀를 보고 제르가디스가 위로하듯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따듯한 밀크티를 홀짝이던 제나르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저기요-”
제나르의 말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저.. 성함을 못 들었거든요...”
“아..”
그러고보니 두 사람은 다른 것에 신경이 쏠려 있어서 이름을 안 밝힌 상태. 아멜리아가 재빨리 의자를 끌고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는 생긋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멜리아. 아멜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아.. 네에. 그리고...”
아멜리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제나르의 시선이 홍차를 마시는 제르가디스에게 향한다. 그러자 아멜리아가 재빨리 팔꿈치로 그를 꾹 찌른다. 하마터면 홍차를 엎지를뻔 했던 제르가디스가 외면하는 아멜리아를 한차례 쏘아보고는 헛기침을 한다.
“제르가디스다.”
“제나르 인버스라고 해요. 잘 부탁 드려요. 아멜리아씨, 제르가디스씨.”
예의바르게 다시금 자기소개를 하던 제나르가 깜짝 놀라 표정이 굳어버린 두 사람의 안색을 살피지 못한 채 석장의 리본을 만지작거린다.
“에효, 그래도 다행이예요. 이렇게 아빠를 찾아주신다는 분들이 있어서요. 제나 혼자였다면 아직도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거예요.”
마냥 기쁜지 생글생글 웃던 제나르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고보니... 두 분 성함을 들어본 적이 있....”
아멜리아와 제르가디스의 창백하게 굳어버린 얼굴을 보며 제나르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왜 그러세요..?”
“인버스... 인버스라고?”
냉기가 도는 제르가디스의 말에 제나르는 또다시 겁에 질린다.
“네, 네에... 왜 그러세요...?”
콰당-
아멜리아가 앉았던 의자가 뒤로 넘어간다.
“하..하하. 그런 말도 안되는...”
무척 기가 막혀하는 제르가디스의 옆에 위태롭게 서 있던 아멜리아가 한발짝, 제나르에게 다가갔다.
“그럼... 그럼 제나르씨가...”
차마 다음에 이어질 말이 나오지 않는다.
“....리나... 언니의...”
“아, 저희 엄마를 아세요?”
‘엄마’ 라는 제나르의 말에 아멜리아의 두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힘겹게 걸어가 제나르를 끌어안은 아멜리아는 계속 울기만 했다.
영문을 모르는 제나르는 멀뚱히 있다가 아멜리아가 슬프게 울자 따라 울기 시작한다.
두명의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덕분에 냉정을 차린 제르가디스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이번엔 제르가디스에게 달라붙어서 울기 시작한다.
변하는 시선의 오묘함을 느끼며 제르가디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복잡한 감정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힌다.
“지금 막 잠들었어요.”
한참을 울다 밀크티를 다섯잔이나 마신 후 잠이 든 제나르를 침대에 눕히고 아멜리아가 방에서 나왔다.
방 밖에서 벽에 기대어 무엇을 생각이라도 하는 듯, 눈을 감고 있던 제르가디스가 아멜리아의 말소리가 들리자 눈을 뜬다.
제르가디스가 말없이 맞은편의 벽을 응시하자 그의 시선을 쫓던 아멜리아가 고개를 떨군다.
“...아멜리아.”
“네?”
고요를 뚫고 전달되는 제르가디스의 저음에 화들짝 놀란 아멜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
“네? 뭐를요?”
반문하는 아멜리아를 한번 쳐다본 제르가디스가 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아멜리아도 그의 뒤를 따른다.
1층의 식당에는 잠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제르가디스는 작은 등불이 타오르고 있는 구석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저 꼬마의 정체 말이야.”
졸린 듯, 눈을 비비며 다가오는 점원에세 홍차 두 잔을 시킨 후 자리에 앉던 제르가디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의자에 앉지 않고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왜그래?”
“솔직히 저는...”
“리나의 딸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겠지. 안 그래?”
“...네.”
여러 사람이 흔적이 남아 있는 투박한 탁자에 하얀 김에 피어오르는 잔이 놓여지고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아멜리아는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제르가디스의 시선을 피해 홍차가 찻잔 속의 둥근 파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멜리아. 네가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야. 하지만...”
투명한 잔이 제르가디스의 푸르스름한 피부를 반사한다.
“스물도 채 안되어서 죽은 그녀에게 아이가 있었다는건 말이 안돼.”
“하지만 제나르씨는 리나 언니와 너무 닮았는걸요!”
의자의 등받이를 움켜쥔 아멜리아의 손이 미세한 떨림을 보인다.
“그 붉은 머리카락도... 그 붉은 눈동자도... 심지어는.. 생김새까지도......다 닮았는걸요... 마치... 마치 리나 언니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요.”
아멜리아의 말에 제르가디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느끼는 감정 역시 아멜리아와 다를게 없었으니까 말이다.
현자의 돌과 관련되었을때 처음 만난 리나보다는 조금 더 앳되어 보이는 모습.
앞으로 몇 년만 더 지난다면 제르가디스의 기억속에 있는 리나와 무척이나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아니..
‘똑같다’ 라고 하는 편이 나으려나..
피식 터져나오는 웃음을 외면한 채 그의 머릿속에는 또다른 생각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꼬마... 제나르가 아빠라 부르는 인물.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식 밖에 안 떠오른다.
선물로 주었다는 리본이 달린 석장.
꼬마가 엄마라고 부르는 존재의 피를 머금은 저주스러운 물건.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의 가우리가 그랬었지...
석장을 타고 흐르는 리나의 피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아름답다고 생각될 정도로 소름끼쳤다고..
조금은 풀린듯한 눈을 한 가우리를 생각하니 온몸이 오싹해진다.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버린 홍차를 가만히 바라보던 제르가디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떨고 있는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만 같은 궁중에서 뛰쳐나와 만난 단 한 명의 친구이자 친언니같이 생각하던 리나의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한 작은 공주님.
리나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한 이 작은 공주님은 하루종일 리나의 무덤 앞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했었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살얼음판 위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 사랑하는 이의 추억을 묻고..
.....가엾은 아멜리아.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렸다고 생각될 정도로 정이 많은 아이.
역시 지금도 울고 있었다.
제르가디스가 그런 아멜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토닥여준다.
‘그래, 아멜리아.. 울지 못하는 내 몫까지... 부디 그녀를 위해 울어줘...’
방 안으로 들어온 아침바람이 작은 손을 내밀어 곤히 잠들어 있는 제나르의 볼을 두드린다.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뜬 제나르가 기지개를 피며 조용히 일어난다.
잠에서 깬 제나르는 방 안에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는 재빨리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질적인 느낌을 받게 한 그 존재는 날카롭게 변한 소녀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변하게 했다.
“아빠!!”
제나르가 재빠르게 움켜쥔 석장을 침대로 내던지며 그 존재에게 안겼다.
그러자 그가 제나르의 작은 몸을 안아 올렸다.
그제야 제나르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언제 오신거예요? 제나, 아빠 잃어버려서 많이 무서웠다구요.”
부드러운 보랏빛 머리칼에 얼굴을 부비며 미소짓는 제나르의 붉은 머리칼을 쓸어주던 그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겨서요. 그나저나... 그분들은 만난 모양이군요.”
“그분..들요?”
그가 제나르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리나님의 예전 동료분들 말이예요.”
“아...”
그의 말에 제나르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런데요, 아멜리아씨가 제나의 엄마 이름을 듣고는 제나를 안고 우셨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제나르의 물음에 그가 피식 웃으며 살짝 몸을 돌린다.
그러자 그의 긴 보랏빛 머리칼이 망토와 함께 고운 곡선을 그린다.
“아멜리아 씨는 여전하시군요.”
“뭐 아시는거 있으세요?”
제나르의 물음에 그는 머리를 가로로 흔든다.
조용히 창가로 다가간 그는 분홍빛 커텐을 걷어낸 후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하는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제나르씨-. 일어나셨나요?”
아멜리아의 목소리.
두어번 소리를 낸 작은 비명 소리를 내며 열린다.
작은 문틈 사이로 검은빛 머리칼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아멜리아씨-.”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제나르가 문으로 뛰어간다.
문까지 뛰어온 제나르를 발견한 아멜리아가 생긋 미소를 짓는다.
“일어나 계셨네요. 식사하러 가야죠.”
너무나도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에 제나르는 저절로 번져 나오는 미소를 주체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아빠, 아침밥 먹고 올게요!”
“아..빠?”
오직 제나르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던 아멜리아가 그제야 고개를 든다.
검은빛 망토의 끝자락을 발견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망토와 같이 어우러져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는 긴 보랏빛의 물결.
저 사람은...
비틀.
꿈속에서조차 만나고 싶지 않았던 존재와의 만남에 아멜리아의 몸이 흔들린다.
간신히 문고리를 잡아 균형을 유지했지만 문고리를 잡은 손은 여전히 떨림을 멈추지 않는다.
“...아멜리아씨?”
크게 흔들리는 군청색 눈동자 속에 제나르가 비친다.
제나르는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는다.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제나르를 쳐다보던 그녀가 거칠게 제나르를 감싸 안았다.
“왜...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거죠?”
아멜리아의 거친 행동에 깜짝 놀란 제나르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와 아멜리아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가 몸을 돌린다.
예의 익숙한 검은색 신관복 차림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는 얼굴.
하지만 아멜리아는 더 이상 어리석기만 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리나 언니를... 리나 언니를 빼앗아 간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언니의 딸까지 빼앗아 가려는 건가요? 안돼요! 제나르씨는 당신에게 줄 수 없어요!”
말 그대로 온 힘을 다해 소리친 아멜리아 덕분에 누군가가 2층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앞에서 미소짓고 있는 그와 대조적인 색의 남자.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푸른 피부를 가진 그 남자는 부들부들 떨며 제나르를 품 안에 안고 있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일이야, 아멜리아?”
“아.. 아아...”
말을 잇지 못하는 아멜리아를 바라본 그가 낯선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곧 서늘한 표정과 함께 검을 뽑았다.
제르가디스의 검 끝이 그에게 향하자 제나르가 화들짝 놀라며 아멜리아의 품에서 빠져나온다.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간 제나르가 그의 망토자락을 두 손으로 꼬옥 쥐며 제르가디스를 쏘아본다.
“아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제나르씨, 안돼요!”
제나르가 한사코 그의 앞에서 비키길 거부하자 계속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친다.
그러자 제나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나르. 저분들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비켜주겠어요?”
“아빠...”
제나르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감정을 읽은 제르가디스가 검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나르가 비켜서자 그가 생긋 웃으며 한발, 앞으로 다가선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아멜리아씨, 제르가디스씨.”
“...역시 너였군, 제로스.”
한숨과 함께 말을 잇던 제르가디스가 아직도 떨고 있는 아멜리아를 감싸 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평정을 잃은 아멜리아의 모습이 안쓰러운 듯 제르가디스의 얼굴은 씁쓸한 표정으로 가득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네? 무슨 생각이라뇨?”
자신의 망토자락을 잡고 놓지 않는 제나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제로스가 반문한다.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묻는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려던 제르가디스가 제로스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는 아멜리아의 기척에 제정신을 차린다.
“저 꼬마 말이다. 내 속을 긁을 장적인가?”
“예에~? 도통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닥쳐!”
갑작스런 큰소리에 놀란 척을 해보이던 제로스가 연기가 통하질 않을거라 생각했는지 빙글 웃는다.
그의 미소에 기분이 상한 제르가디스의 미간이 신경질적인 주름으로 인해 좁아진다.
“저 꼬마의 이름이 뭔지 알겠지?”
“예. 제나르죠. 애칭은 제나. 제가 지어줬습니다만.”
“그 이름 뒤에 붙는 성은 뭐지?”
제로스가 곧게 향하는 제르가디스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본다.
“...인버스죠. 리나 인버스의 인버스.”
“웃기는 소리. 리나는 스물도 안되어서 죽었다. 바로 네놈의 손에 말이다.”
“....”
제로스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다.
“자, 말해봐. 리나를 네 손으로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에게 절망감까지 심어주려고 일부러 그녀와 미쳐버린 가우리를 실피르의 집 앞까지 옮겨 놓은 주제에, 도플갱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닮은 저 꼬마를 우리 앞에 보인 이유를!!”
고개를 숙인 제로스에게서는 여전히 말이 없다.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조차도 미동이 없었다.
지금까지 어머니라 굳게 믿고 있던 존재가 아버지라 자처하는 존재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리를 들은 제나르 역시 제로스를 똑바로 바라볼 뿐,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뭔가 애매한 시선의 교차.
그만큼 제나르의 정체성은 알 수 없다.
“제나르는....”
살짝 고개를 든 제로스가 슬프게 미소 짓는다.
“리나님의... 딸이예요....”
“허튼소리하지마!!”
어느새 제르가디스의 품에서 빠져 나온 아멜리아가 제나르를 꼬옥 끌어안는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제로스를 바라보던 제나르는 그 따스함에 긴장했던 몸이 풀림을 느끼며아멜리아에게 힘없이 몸을 기댄다.
“...있었을지도 모르는... 존재이지요, 제나르는...”
“무슨 소리지?”
“제가 인간이었다면... 제나르와 똑같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리나님을 닮은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존재.”
그가 빙긋 웃는다.
“그런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멜리아가 힘겹게 고개를 든다.
군청색 눈동자에는 투명한 눈물로 가득하다.
“제나르씨는... 제로스님이 만들어내신거군요...”
“그렇다는 것은...”
아멜리아의 말을 받아낸 제르가디스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문다.
뿌옇게 변해가는 창문에 손을 대며 제로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제나르는 리나님을 본따 제가 만든 마족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다.
침묵을 지킨 채 아침식사를 마친 아멜리아가 제르가디스에게 말도 안한채 급히 거리로 뛰쳐나간다.
한참만에 무언가를 사온 아멜리아가 제로스의 옆에 앉은 채 밀크티를 마시고 있던 제나르를 데리고 2층 방으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앙고라털로 만들어진 분홍빛 장갑과 토끼모양의 털모자를 쓴 그녀를 데리고 내려온다.
보기만 해도 따뜻할 것 같은 분홍빛 코트를 입은 제나르가 수줍게 웃어 보이자 아멜리아는 그런 그녀가 귀여운 듯 끌어안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제르가디스와 제로스 역시 깜짝 놀랐는지 찻잔을 든 채 멍하니 그 둘을 바라본다.
제나르와 색깔만 다른 옷을 똑같이 입은 아멜리아가 제르가디스의 앞에서 한바퀴 빙글 돌자 쑥스러운 듯 그가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한번 한다.
“자, 가요!”
“네-”
어디를 간다는 건지...
재빨리 여관 밖으로 나가는 둘을 잡아세우려던 제르가디스가 그녀들이 왜 그렇게 무장을 했는지 열린 문으로 보이는 새하얀 눈을 보고는 알아차렸다.
눈장난인가...
그의 마음속에도 새하얀 눈이 내린다.
하지만...
리나의 추억을 덮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여관 뒤의 공터로 달려가는 그녀들을 따라간 제르가디스의 옆에 어느새 제로스가 와 서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제르가디스가 무덤덤한 시선으로 하얀 눈을 뭉치기 시작하는 제나르를 바라본다.
꺄르르 웃어대며 서로에게 눈을 날리던 제나르와 아멜리아가 이번에는 작은 눈덩이를 이리저리 굴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밝게 웃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제르가디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 미소는 제로스로 인해 아쉽게도 사라져버린다.
차가운 벽에 등을 대고 있는 제로스가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왜지?”
“네?”
갑작스레 물어오는 물음에 제로스가 반문한다.
“왜... 꼬마를 만든거냐.”
제르가디스의 물음에 제로스는 침묵을 지켰다.
눈덩이를 굴리던 제나르가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울기는커녕 웃기다는 듯 크게 웃어댄다.
제나르가 넘어지자 깜짝 놀라 걱정스러운 듯 제나르에게 뛰어가던 아멜리아가 그녀가 웃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 짓는다.
....아멜리아의 감정은 현재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지금부터의 제 말.. 믿어주실겁니까?”
“들어보고 생각해보도록 하지.”
“전 리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한치의 주저함 없이 내뱉은 제로스의 말에 몇초간 그의 말을 생각하던 제르가디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제로스의 얼굴은 고요하다.
“사랑?”
“...네.”
“웃기지마. 마족인 네가 인간을 사랑했다고?”
“물론 리나님과 똑같이 만들 수도 있었어요.”
제르가디스의 물음을 싹 무시해버린 채 하던 말을 계속하던 제로스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린다.
“리나님을 닮으려고 머리칼도 길게 해보았지만 소용없었어요. 결국에는 리나님과 똑같은 모습을 한 존재를 만들어보았지만 그건 리나님이 아니었어요.”
“제로스...”
“제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그것을 제 손으로 없애 버렸죠.”
제로스가 피식 웃는다.
“또다시 리나님을 내 손으로 죽이는 듯한 기분을 맛보면서 말이예요.”
제로스의 말투에서 배어나오는 시린 서글픔에 제르가디스가 굳게 입을 다문다.
뼛속까지 사무친 그리움...
그것을 제로스도 느끼고 있었다는 건가?
“수왕님의 명령을 수행하다가 한 마을에 가게 된 것이 제나르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죠. 무척 사랑스러운 존재더군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것은.”
제로스는 슬픈 미소로 제나르를 바라보고 있을 뿐 무엇을 보았는지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제르가디스 역시,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리나님만큼 제나르가 정말로 소중합니다.”
차갑게 떨어지는 기온과 같이 머릿속이 차가워짐을 느끼던 제르가디스는 너무나도 부드러워진 제로스의 눈빛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멜리아와 제나르는 어느새 커다란 눈덩이를 두개 만들어 놓고 그 중 하나를 다른 것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끙끙대며 눈덩이를 들어 올리는 제나르의 모습에 아멜리아가 기분 좋게 웃는다.
간신히 눈덩이를 올린 제나르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여관 안으로 쪼르르 뛰어 들어갔다.
그 사이 아멜리아가 출처를 의심케 하는 작은 돌과 나뭇가지로 눈사람을 장식하고 있었다.
제르가디스가 곡선이 완만하지 않은 울퉁불퉁한 눈사람을 보고 웃는다.
“저와 제나르씨의 사랑의 힘으로 만들어진 합동작품을 보고 왜 웃는 거예요, 제르가디스 오빠!!”
“아아, 미안미안.”
부루퉁, 양 볼을 부풀리며 통통 뛰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제르가디스는 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여관 안으로 들어갔던 제나르가 뛰어 나온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제로스의 석장.
석장에 매여져 있는 분홍색 레이스 리본은 언제나 언밸런스함을 자랑하고 있다.
눈사람 앞에 도착한 제나르가 헤헤 웃으며 눈사람 옆의 땅바닥에 눈을 모은다.
그리고는 그곳에 석장을 세워 놓는다.
어디선가 구해온 짚단으로 눈사람의 머리를 만든 제나르가 제로스에게로 뛰어가며 차가운 그의 두 손을 붙잡았다.
“아빠 아빠, 어때요? 눈사람 버전의 아빠예요!”
“-!”
이리저리 볼품없이 솟은 짚단 머리카락.
콩알 만한 작은 짱돌로 만들어진 눈동자.
앙상한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팔.
원만한 곡선이라고는 눈을 씻고 쳐다봐도 없는 울퉁불퉁한 머리와 몸통.
그리고 그 옆에 우뚝 솟아 있는 석장.
아무리 좋게 봐도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없을 법한 그 눈사람이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 건지...
왜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건지..
아멜리아가 눈구경 가자고 나가자고 할때, 생전 처음 보는 눈이란 것으로 아빠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 제나르의 말에 눈사람 만들기를 동참해 주었던 아멜리아는 시큰거리는 코를 슥슥 문지른다.
반짝 반짝 눈을 빛내는 제나르의 손에 이끌려 눈사람 앞까지 걸어간 제로스가 떨리는 손을 눈사람의 짚단 머리에 가져간다.
제르가디스는 그제야 제로스가 제나르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따뜻함.
제나르는 리나를 잃어 차가워질대로 차가워진 제로스의 마음을 조금씩 녹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제로스에게 인간들의 가족이라는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고마워요, 제나르...”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던 제나르가 제로스가 안아들자 꺄르르 웃는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제로스를 보며 제르가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은 제로스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멜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아멜리아...”
제르가디스가 조용히 부르자 아멜리아가 그에게로 다가온다.
무언가 감추고 싶었던 것을 들킨 듯한 표정이다.
“꼬마는 포기하자.”
“하지만...!”
제르가디스는 차가워진 아멜리아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며 미소 지었다.
“웃어봐, 아멜리아.”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드는 아멜리아는 금방이라도 울듯하다.
그러나 제르가디스는 계속 미소 짓고 있었다.
“네가 꼬마를 데려가면.. 그 자리에 멈춰서는 것 밖에 안되는거야. 리나도 너의 족쇄가 되는 것만은 질색을 할거다.”
“제르가디스 오빠 저는...”
“리나가 죽어버린 때부터 멈춰버린 제로스의 시간은 꼬마가 돌려줬어.”
그가 차가워진 그녀를 품에 안는다.
“얼어붙어버린 너의 시간은... 내가 녹여줄테니까... 이제는 웃자, 아멜리아.”
제르가디스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멜리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그게...흑..”
어울리지도 않은 낯간지러운 그의 말투에 피식피식 웃으며 아멜리아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제나는 아빠가 마족이든, 제나가 인간이 아니든, 그런건 상관없어요. 제나는 아빠가 소중해요. 물론,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분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아빠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계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계속 괴로워하실거고...”
무언가 개인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멜리아에게 생긋 웃어주며 제나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나가 있음으로 인해 아빠가 조금이라도 웃어주신다면.. 그걸로 족해요.”
“제나르...”
“같이 못 가서 미안해요, 아멜리아 언니. 그리고 고마워요.”
어느새 호칭을 ‘언니’ 로 바꾼 제나르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제로스에게로 뛰어간다.
그런 제나르에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어주던 아멜리아에게 제르가디스가 다가온다.
그러자 아멜리아가 그에게로 돌아선다.
“거절당했어요. 저보다 제로스님이 더 소중하대요.”
힘없는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아멜리아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제르가디스가 그녀의 머리를 토닥인다.
“이제 괜찮아요.”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맑은 하늘만큼 상쾌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아멜리아가 시선을 돌려 다정하게 걸어가는 두 부녀를 바라본다.
쇠사슬처럼 과거의 추억에 얽매여 있는 듯한 긴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존재.
딸처럼 생각하는 만들어낸 존재에게 의지하는 당신이 저보다 더 불쌍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하지만 제나르에게서 느끼는 감정..
그 따뜻함을 느낀다면..
당신의 차가워진 심장도 언젠가는 따뜻하게 변할지도 모르겠죠.
그리운 추억이여, 사무치게 그리운 이여.
안녕히.
우리들은 어디 가는 걸까요?
답을 확인하고 싶어요.
너무나 불안해져서 울고 싶은 건 어째서일까요
하얀 구름의 위에서 조용히 춤추며 내려오는
조그마한 겨울의 요정들은 세상을 은빛으로 변화시켜요.
말로는 할 수 없는 마음을 꼭 묶어서 전하러 가요.
눈길을 달려가고 있는 발자국은 아직 제 것 뿐이네요.
상처입기 쉬운 마음은 얇은 유리 같네요.
슬픈 듯한 얼굴을 하고 깊은 어둠을 방황해요.
좀 더 강해지고 싶어 당신을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언제나 안아주었지요.
저를 놓지 말아주세요.
계속 내리는 눈 속에서 당신의 팔에 뛰어 들어가요.
투명한 결정이 빛나고 있어요.
계속 바라보고 싶네요.
말로는 할 수 없는 마음을 꼭 묶어서 전하러 가요.
눈길을 달려가고 있는
발자국이 이제 두 개가 되어요...
栗林みな美 -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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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습니다_(__)_
에에..제가 이 단편에 얼마나 달라붙고 있었는지 누구씨는 알테죠..[웃는다]
제가 원하는 이미지대로 안나와서...엉엉 ;ㅁ;)
크르노 크루세이드 오프닝 제목인 플레져 라인이 좋아서 따왔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저도 잘 몰라요[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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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아아... 역시 미드언니;!!!! 너무너무너무너무 멋지잖아!!!! 우와아아아아;; 정말 부러운 필력!!!! 으아아아아... [흐느적] 언니 너무 재밌었어요;ㅅ;!! 그런데 누구씨란, 나 말이에요? [...]
너무 멋지고 존경스러워요!! -_ㅠ 스크롤바와 글을 보니 쓰느라 엄청 고생하셨을거 같네요.. -_ㅠ 아무튼 잘 봤습니다!!
으흐흐흑....ㅜㅜ 정말 감동적이였습니다...ㅜㅜ
아아 얼마나 기다리던 미드님의 소설인가...! 행복해!!!!!!! 너무재밋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대단해요!!! 미드님소설은 언제봐도 대단해요!!! 잘봤어여... 다른단편도 기대할게여...
우어어....역시 미스..[퍽] 미드누이 소설은 언제봐도 재밌네요~
................ 정말, 대단해요!! ㅠ_ㅠ 감동입니다 ㅠ 아아 정말 눈시울이 글썽... 잘봤습니다~ >_<//
"죄" 다음에 쓴다던 단편 이제야 나왔네? ^^' 오랜만에 소설 읽었다아~ ㅋㄷ 수고수고 ^^
.....ㅇㅁㅇ........... 당신은 인간이 아닙니다!! ㅠ, 어떻게 이렇게 잘 쓸수가 있는거지..(중얼중얼), 미드님의 머리를 해부해볼수있는 기회를 갖게 해줘요!! (퍼억-)
...... 너무 잘봣어요..^^[환호&감동] 잘쓰셧어요..^^
앗, 미드님 소설! 정말 오랜만이에요- 멋졌어요~
;ㅁ; 와아ㅜㅜ 이렇게 잘쓰시다니;ㅁ;....너무 잘 봤습니다[감동감동]
멋있다...ㅇㅁㅇ 부럽다.. 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