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문득 '이대로 좋은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 끝에 기차표를 예약했습니다.
얼굴 보자시는 엄마의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잠시 청주 집에 들려 엄마 얼굴 보고, 저녁 얻어 먹고 조치원으로 향했습니다.
밤기차를 타고, 얼마전에 사두었던 사진작가 김영갑씨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었습니다. 제주의 풍경과 자유로운 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진작가의 삶을 들여다 보며 나도 이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저히 외롭고, 철저히 비우면서 사는 삶, 최대한 가볍게 살다가 인생을 받쳐 단 한가지의 진한 결과물을 남겨두고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 '바람 같은 삶'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기에는 지근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너무 무거워서 그럴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다들 자리에서 주워진 대로 살아야 하지 싶어졌습니다. 어떤 이는 바람처럼 살아야 하고, 어떤 이는 돌처럼 살아야 하고, 어떤 이는 흙처럼 살아야만 하는 것이 숙명이고 운명이라는 걸 조금 느꼈더랬습니다.
부부로 보이는 한쌍이 앞자리에 앉습니다. 실랑이가 오가더니 갑자기 남자가 여자를 때립니다. 말릴 겨를도 없이...주위 사람들이 잠결에도 다들 탄성을 지릅니다. 말리려는데 남자가 멈춥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두 사람의 실랑이...남자가 치밀하게 여자를 공격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잠시 눈을 붙였던 여자가 일어납니다. 일그러져있던 남자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여자를 향해 웃습니다. 그제서야 여자도 웃습니다. 다행이다 싶은 마음보다 불쑥 화가 납니다. 저렇게 웃을 걸 왜 그렇게들 소리지르고 때리고 그랬는지, 웃어준다고 같이 웃는 바보가 어디 있냐고...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그러나 다들 사는 방식이 다릅니다. 남들 눈에 어찌 보이던지 그저 자신이 만족스럽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 가슴 아리게 하지 않는다면 자기식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이해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이왕지사 말로들 해결하며 살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12시가 넘어 순천역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어리도 갈까 망설이다가 아영에 글을 남기고 24시 찜질방으로 갑니다. 불편한 하루의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순천 시장을 돌아다닙니다. 맛있어 보이는 떡을 사 아침을 대신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선암사로 향합니다. 벌써 사람들이 가득입니다. 버스에 내려 타박타박 걸어 갑니다. 지난 여름 잠시, 아주 잠시 들렀다가 공사중이라서 못 봤던 선암사 승선교를 보려고 했는데 아직도 보수 공사 중이랍니다. 흠...아쉽습니다.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절 경내를 구경합니다. 목련, 동백,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바람이 부는데...하~~~ 정말이지 바람 끝에 꽃향기 묻어 오는데...정신을 차릴수가 없을 정도 입니다. 너무 행복해서 잠시 그늘에 앉아 준비해온 엽서를 씁니다. 누군가와 함께 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싶다가도, 그저 이렇게 무심히 떠나 올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길 잘 했다 싶기도 하고...넉넉한 봄볕에 겨우내 눅눅했던 지난 시간을 잘 말립니다. 뽀송뽀송한 마음으로 살고 싶어서...^^ 엽서를 쓰고 차를 마시러 갑니다. 차를 마시며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행복해 보이네요... 산을 넘어 송광사로 가려던 계획을 변경합니다. 요며칠 혹사했던 몸이 갑자기 놀아주니 탈이 났나 봅니다. 다시 타박타박 걸어 나와 버스를 타러 왔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시장에서 산 떡을 꺼내 옆에 앉아 있는 노부부와 꼬마 둘과 맛있게 나눠 먹습니다. 아이스크림도 하나 먹고, 할머니께서 주시는 바나나도 받아 먹습니다. 청주서 왔다고 하니 너무 멀리서 왔다고 하십니다. 그냥 웃었습니다.
졸면서 역으로 나와 조치원행 기차표를 끊습니다. 몸 상태가 별로라 여수 바다를 포기하고, 송광사와 순천만을 포기하고 집으로 갑니다. 집으로 가는 기차에서 읽다 만 김영갑씨의 글을 제다 읽습니다. 여수 바다 보다도, 송광사 순천만 보다도 자유롭고 그리운 풍경이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여수 바다, 송광사, 순천만을 가지 못한 것 아쉽지 않습니다. 행복합니다.
가만 생각해봅니다. 어디 저 남쪽에만 꽃이 피었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가슴 속에도 꽃을 피울 수 있겠다 싶습니다. 조금만 여유롭게 생각하면, 조금만 따사롭게 마음 가지면 얼마든 꽃을 피울 수 있겠다 싶습니다.
조금은 닫쳤던 마음을 열어 봅니다. 맑은 봄 햇살과 바람이 들어와 제 마음에 예쁜 꽃 한송이 피우게요...^^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