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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
“세종 때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시와 문장에 깊이가 있고 자세하며, 온후하고 흥미가 진진하면서 매인 데가 없이 호탕하였다. 웅장 심오하고 우아(優雅) 건실함은 사마자장(司馬子長, 사마천)과 같고, 넓고 크고 뛰어나기는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같으며, 간결하고 예스러우면서 정밀하기는 유유주(柳柳州, 유종원)와 같았고, 빼어나고 자유분방하기로는 여릉(盧陵)의 문충공(文忠公, 구양수)과 같아서 당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중국의 명문장가 사마천ㆍ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에 비유되었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 그는 당시에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경사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조선 초기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동시에 강희맹은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3차례 공신에 책봉되었고, 왕의 총애와 신임 속에서 원자(元子)를 보양(保養)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궁극에는 종1품인 좌찬성에 이르렀다. 형 강희안(姜希顔, 1417~1464)과 함께 조선 전기 형제 문장가로도 명망이 높았다.
세조, 예종, 성종 3대의 굳건한 신임을 받다
강희맹의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경순(景醇)이며, 호는 사숙재(私淑齋)이다. 할아버지는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 1375?~1418)의 딸이다. 어머니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동생이었으므로, 세종은 강희맹의 이모부가 되며, 세조와는 이종사촌이 된다. “왕비 친가의 인척이 되어 경복(慶福)을 양성하여 문벌이 빛나게 번성했다”는 평가는 이러한 왕실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희맹의 형은 시ㆍ글씨ㆍ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린 강희안이었으며, 형제는 조선 전기 문장과 정치, 예술적 자질에서 각별한 능력을 보였다.
강희맹은 특히 이종사촌이었던 세조대에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였다. 경연검토관ㆍ세자보덕(世子輔德)ㆍ공조참판ㆍ이조참판ㆍ예조판서ㆍ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던 것이다. 강희맹에 대한 세조의 신임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졸기에서 세조가 그를 강명(剛明)함이 제일인 신하로 평가했던 것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1466년(세조 12)에 있었던 발영시(拔英試, 현직 중신과 문무백관을 대상으로 임시로 실시한 과거)에서도 세조의 각별한 총애가 드러났다. 5월 8일에 이미 시험을 마치고 김수온을 장원으로 하여 34인에게 상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참가하지 못한 강희맹을 위해 다음날 다시 시험을 실시했던 것이다. 세조는 강희맹이 그 시험에 복제(服制) 때문에 참여하지 못해 매우 서운하고 유감스럽게 여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신 1백여 인을 불러 다시 시험을 출제하였다. 추가 시험으로 강희맹 등 6인을 더 선발했다.
세조에 대한 강희맹의 충성도 컸다. 강희맹은 세조가 말년에 병환으로 눕게 되자, 날마다 궁에 출입하여 시중을 들었다. 이에 세조는 크게 감동하여 병의 차도가 있은 후에 더욱 총애하여 여러 번 물품을 내렸고, 형조판서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강희맹의 극진한 정성은 가족이 병이 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강희맹은 학문하는 여가에 의술을 익혀서 부모와 형이 아플 때 손수 약을 지어 받들었다고 전한다.
세조에 이어 조카인 예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강희맹에 대한 신뢰는 변치 않았다. 강희맹은 1468년 남이(南怡, 1441~146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익대공신(翊戴功臣)의 호를 처음에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예종에게 글을 올려 스스로 그 공을 열거하였고, 예종은 익대공신 3등에 오르게 하여 진산군(晉山君)에 봉하였다.
성종이 즉위한 후에는 성종을 잘 보필하고 정치를 잘해주었다는 이유로 강희맹에게 좌리공신(佐理功臣)의 칭호가 내려졌으며. 얼마 안 되어 병조판서ㆍ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세조, 예종, 성종 3대를 연이어서 왕들의 신임을 받자, 강희맹을 꺼려서 익명서를 지어 강희맹을 비판하는 자가 나타났다. 이에 성종은 친히 어서(御書)로 “나는 경(강희맹)을 의심하지 않고 경은 나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각별한 신뢰를 다시금 내비쳤다. 나아가 판돈녕, 좌찬성에 이르기까지 높은 관직을 제수해주었다.
강희맹의 집에서 자란 어린 연산군
성종은 강희맹에게 원자(元子) 시절의 연산군을 보호하는 중책을 맡기기도 했다. 1477년(성종 8) 3세인 원자가 병이 나자, 성종은 강희맹의 집에 원자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강희맹의 부인 순흥 안씨가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원자에게 춥고 따뜻함을 잘 조절해주고 젖을 알맞게 먹여 10일이 채 되기도 전에 건강을 되찾게 해주었다. 그녀가 원자를 보살필 때, 위기 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원자를 구했다는 일화가 적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원자가 잘못하여 실을 삼키는 바람에 목구멍이 막혀 매우 위급하였다. 여러 종자(從者)들은 너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부짖기만 할 뿐이었다. 부인이 달려와서 보고, “어찌 물건 삼킨 어린이를 반듯이 눕혀 물건이 더욱 깊이 들어가게 하느냐.”하며 즉시 안아 일으키고 유모를 시켜 양편 귀밑을 껴잡게 하였다. 이어 부인이 손가락으로 실을 뽑아내니 기운이 통하여 소리를 내었다. 여러 종자들은 부인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기를, “부인께서 우리들의 목숨을 살렸습니다. 어찌 다만 우리들을 살렸을뿐입니까. 나라의 근본이 부인 때문에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 [연려실기술], 성종조 고사본말
위의 기록에 나오는 강희맹의 부인 안씨는 안숭효(安崇孝)의 딸로, 1442년(세종 24) 강희맹과 결혼했다. 그녀가 원자를 잘 길러주고 위기에서 구해준 까닭에 강희맹은 성종의 신임을 더욱 굳게 받을 수 있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은 원자가 강희맹의 집에 있으므로 호위하는 군사들을 보내주었고, 원자가 준마(駿馬)를 보기 좋아하여 강희맹의 집으로 말 1필을 내려주기도 했다8). 1482년(성종 13)에도 원자가 강희맹의 집에 있었다는 기록9)으로 보아 원자가 강희맹의 집에 장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파악된다. 강희맹과 연산군과의 각별한 인연은 그의 문집인 [사숙재집(私淑齋集)]에 <연산사삼층(燕山辭三疊)>이 기록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산군 역시 왕이 된 후 강희맹이 도움을 준 것을 기억했다. [연려실기술]에는 “그때 매양 정원의 소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왕위에 오르고 나자 진시황이 소나무 다섯 그루에 대부의 벼슬을 준 것처럼 그 소나무에 벼슬을 주고 금띠를 둘러주고, 또 그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말에서 내리게 하였는데 지금의 순청동(巡廳洞)이 바로 그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관중과 포숙, 강희맹과 서거정
중국의 고사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알아준 벗을 언급할 때 거론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관계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권 62의 <관안열전(管晏列傳)>을 보면 관중이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요, 나를 알아주는 자는 포숙이다.’라면서 포숙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한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서거정이 강희맹의 비문을 써주면서 강희맹과 자신을 관중과 포숙과 비교한 것이 흥미롭다. 서거정은 비문의 말미에서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아! 내가 차마 비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 나와 공은 책을 끼고 교유하여 백수(白首)에까지 이르렀는데, 항상 말하기를, “나를 낳아 준 사람은 부모요, 나를 알아 준 사람은 공이다.”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간 이래로 두 번 과거를 함께 보았고, 또 훈맹(勳盟)을 같이 한 데다가 혹은 관각(館閣)에서 동료로 지냈고, 혹은 경연의 자리에 함께 있었으며, 혹은 사국(史局)을 함께 맡았고, 혹은 책 편찬을 함께 하기도 하며 40년 동안 일찍이 하루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공명(功名)의 진취(進就)에 있어 혹 앞서기도 하고 혹 뒤서기도 하였지만, 역시 대략적으로 서로 동등했다.
서거정은 경연관, 사관, 편찬 사업 등 모든 분야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강희맹의 죽음을 누구보다 아쉬워했고, 강희맹과 자신의 우정을 관중과 포숙의 관계로 비유한 것이다. 서거정이 강희맹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서거정과 강희안의 친분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서거정이 공(강희맹)을 강희안의 집에서 처음 보았는데, 이때 나이 겨우 15세였으나 재주가 노련ㆍ성숙하였었다. 거정이 일찍이 희안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그대의 자유(子由, 소동파의 아우인 소철)이다” 하니 희안은 “형이 자첨(子瞻, 소동파의 자)이 아닌데 아우가 어찌 자유(子由)가 되겠는가” 하고 서로 한바탕 웃었다.’는 기록이 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도, ‘무오년(戊午年, 1438년)에 나 서거정이 공의 형 인재(仁齋, 강희안)와 함께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날마다 서로 찾아다니며 어울리다가 인재의 집에서 처음 공을 보게 되었다. 공은 나보다 4, 5세 어리어 그때 나이가 15세였는데, 재주는 이미 노련했다. …… 공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나와 함께 다니며 공부하고 사귀었으니, 그 돈독하기가 얼굴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였다.’고 하여, 서거정과 강희맹과의 각별한 관계를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강희맹은 서거정과 함께 세조와 성종의 각별한 신임 속에서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세조가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6, 7명의 대신들에게 업무를 분장해서 의정할 것을 명하였는데, 강희맹은 서거정과 함께 선발되었다. 서거정은 ‘강희맹의 의론은 정밀하고 심오하며 환하고 원대하였으므로, 왕이 자주 불러 물어보면 아뢰는 대답이 뜻에 맞으니,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감복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1478년(성종 9) [동문선] 편찬, 1481년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있어서도 강희맹은 서거정과 더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재기 발랄한 문장력을 발휘하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장가라 하면 흔히 신숙주, 서거정 등을 꼽지만 강희맹 역시 문장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연려실기술]에는 ‘공의 문장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고대의 전적(典籍)을 연구하여 고금의 사실을 널리 통달하였다. 의논함에 있어서는 재기(才氣)가 발랄하니 듣는 이가 싫증을 내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강희맹의 문장에 특히 재기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성현(成俔, 1439~1504)은 수필집 [용재총화]에서 ‘진산(강희맹)의 시(詩)와 글은 법도에 맞고 우아(優雅)하며 타고난 기틀이 저절로 여러 사람들보다 숙성되어, 정제(精製)와 끊음에서 최고로 삼는다.’고 하여 강희맹의 문장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었다.
문장가로서 강희맹의 능력은 세조에서 성종대의 편찬 사업에서 특히 발휘되었다.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과 [경국대전] 편찬을 비롯하여 사서삼경의 언해 사업에 참여하였고, 성종 때는 [동문선]ㆍ[동국여지승람]ㆍ[국조오례의]ㆍ[국조오례의서례] 등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박학한 지식과 문장력을 최대한 발휘하였다.
강희맹은 국가에서 주도한 관찬서의 편찬 사업 뿐만 아니라, 개인 저작물을 통하여 자신의 취향을 문장으로 표현했다. 강희맹은 관료로서의 감각을 지닌 문인이면서도 농촌 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없앴다. 시골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촌담해이(村談解灑)]에서는 이러한 면모가 잘 나타난다. [촌담해이]는 짤막한 줄거리로 구성된 작품인데, 과부ㆍ중ㆍ호색한ㆍ머슴들의 애정 행각을 담은 내용이 대부분이다. [용재총화]와 더불어 조선 전기 골계문학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저술이다.
강희맹은 실용서에도 관심을 가졌다. 1486년에 편찬된 농서 [금양잡록(衿陽雜錄)]은 강희맹이 말년에 경기도의 금양현(현재의 시흥)에 퇴경(退耕)하면서 그곳의 농사 전반을 기록한 책이다. 후대의 학자 권별(權鼈, 1589~1671)이 쓴 [해동잡록]에는 ‘[금양잡록] 한 편을 보면 모든 곡식의 품질과 모양의 구별, 씨 뿌리기에 적당한 시기, 작업의 순서 등이 모두 사리에 들어맞는다. <제풍변(諸風辨)>, <농담농구(農談農謳)> 등의 편은 분별하여 기술함이 매우 자세하여 농가의 수고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고 하여, [금양잡록]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외에 강희맹이 쓴 여러 이야기들에서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훈구파 관료이자 문장가이면서도, 일상의 삶에 소소한 관심을 가졌던 저자의 캐릭터를 찾아볼 수 있다. [해동잡록]에 기록된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보기로 한다.
가. 강진산(姜晉山, 강희맹)이 <노기편(老妓篇)>을 지었는데, 그 소서(小序)에 이르기를, “같이 간 한 재상이 한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신축년에 다시 사신으로 가서 보니, 그 몇 명의 기생들이 더러는 기적(妓籍)에서 빠져나갔고, 혹은 행수기생(行首妓生)이 되었는데, 옛날의 아리따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무자년은 14년이나 지난 것이다. 늙어 추해짐이 오히려 이러하니, 그 아리따운 얼굴이란 잠깐 동안이요 오래가지는 못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이에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나. 오설(五說)을 지어 아들을 훈계하였는데, 1, 도자(盜子, 도둑의 아들) 2, 담사(啗蛇, 뱀을 잡아먹음) 3, 등산(登山), 4, 삼치(三雉), 5, 요통(溺桶)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옛사람의 찌꺼기[학문]를 늘어놓았으나 너는 그 정수(精髓)를 빨아먹고, 나는 옛사람의 가죽과 털[거죽]을 말했으나 너는 그 진수(眞髓)를 캐도록 하라.” 하였다. …… 세 번째는 등산(登山)이다. 노(魯)나라 백성에 세 아들이 있었는데, 갑은 침착하고 성실하나 절름발이였고, 을은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온전하였으며, 병은 경솔하나 날쌔었다. 하루는 서로 약속하고 태산(太山) 일관봉(日觀峯)에 오르기로 하였는데, 을은 산 밑에 있었고 병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해는 벌써 어두컴컴하였다. 갑은 쉬지 않고 천천히 걸어 바로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위의 ‘가’ 이야기는 외모에 대한 경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나’ 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성실하게 꾸준히 정진해야 목표에 이를 수 있음을 자식들에게 훈계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훈구파로 살아간 삶, 사림파의 비판을 받다
이처럼 세조에서 성종대에 걸쳐 문장력과 관료적 자질로 한 시대를 풍미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희맹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였다. “사람됨이 공손ㆍ근엄하고 신중ㆍ치밀하여 벼슬을 맡고 직책에 임함에 행동이 사의(事宜)에 합치하였다. …… 예제(禮制)를 참정(參定)할 때에 문장이 정밀하고 깊이가 있으며 속되지 않았는데, 종이를 잡기가 무섭게 곧 (문장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일견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듯이 보였지만, 후반부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강희맹은 책을 많이 보고 기억을 잘하며 문장이 우아하고 정밀하여 한때의 동년배들이 그보다 앞서는 자가 없었다. 다만 평생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은총을 희구하였다. 세조가 금강산에 거둥하였을 때, 이상한 새가 있어 하늘가를 빙빙 돌며 춤추었다. 세조가 부처의 힘이 신묘하게 응한 것이라 하였는데, 강희맹이 서울에서 그 말을 듣고 드디어 <청학송(靑鶴頌)>을 지어 바치었다. 세조가 일찍이 술이 거나하여 좌우에게 희롱하여 말하기를, ‘나는 중토(中土)를 횡행(橫行)하고 싶다’ 하였는데, 강희맹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이에 한 권의 책을 지어 바쳤다. 이름하여 [국세편(國勢篇)]이라 하였는데, 아첨하는 말이 많이 있었다. …… 또 그 공을 스스로 열거하여 공신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비방을 받음이 또한 많았다. 비록 사조(詞藻)의 아름다움이 있기는 하나, 무엇을 취하랴?” 하였다.
- [성종실록] 1483년(성종 14) 2월 18일
평생 왕의 뜻에 영합한 점이나, 공신 책봉에서 스스로 공을 논한 것에 대해 사관은 지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왕의 뜻에 맞추는 측면은 관료가 지니는 기본적인 속성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평가는 [성종실록]을 편찬한 사관이 사림파의 입장에 있었던 것과도 관련이 크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그와 비슷한 정치적ㆍ학문적 행보를 보인 서거정이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평가를 받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 강희맹은 송나라 붕당의 폐해를 언급하면서 신진 세력인 사림파의 견제에도 앞장을 섰다. “송나라 붕당의 화는 구래공(寇萊公, 구준(寇準))이 인물을 지나치게 공격하는 데서 기인한 것인데, 그 흐름이 가져온 폐단은 비록 정주(程朱)라도 붕당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요즈음에 보니 젊고 패기 있는 신진들이 날마다 인신공격을 일삼으니 그 폐단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하였다는 [필원잡기]의 기록은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어쩌면 강희맹은 당대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훈구파라는 이유로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흐름에 묻혀서 그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인물로도 볼 수 있다. 15세기 관료이자 문장가로 그 빛과 그늘을 모두 담고 있는 인물 강희맹에 대한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