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제1독서
<노아가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복음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떤 눈먼 이의 치유는 어제 복음에서 볼 수 있었던 제자들의 소경성을(마르 8,16-17 참조)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자주 눈의 상징을 활용합니다. 우리가 후회되는 일을 하고는 “내가 그때 눈이 멀었었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사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은 구원에 큰 장애가 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 받은 사람을 ‘빛을 받은 이’로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뎌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히브 10,32). 또 신앙의 눈으로 올바로 보는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이 세상을 살아가며 좋다고 하는 것들 사이에서 참으로 값진 보물을 구별해 내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속이고 기만하는 것을 만나 세상살이가 두렵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처럼 겉모습 너머를 보는 눈, 참생명을 위하여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선택은 늘 눈에서, 곧 욕망으로 가려진 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창세 3,6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의 치유를 위한 많은 가르침을 주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두 번 나오는 “마을”이란 말에 조금 더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실 때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라는 말씀과, 시력이 회복된 이에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보고 신앙의 눈을 뜨고 살아가려면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루기를 바라시는 새로운 탈출의 여정을 뜻합니다(예레 31,31-32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치유된 이를 “집으로” 보내시며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집으로 보내시면서 그가 살아갈 마을로는 가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 마을”이란 그리스도의 빛과 복음의 빛으로 보지 않고 세상의 기준과 자기 통념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그 모든 곳이 아닐까요? 세상의 기준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은총을 다시 한번 주님께 청합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어떤 물건을 인터넷에서 구매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물론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 가격 비교 사이트를 보고서 단 10원이라도 더 싼 쇼핑몰을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물건에 대한 비교를 많이 해서일까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교도 참 많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동차를 새로 장만하려고 하는데, 자동차와 자전거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아니, 그렇게 멍청한 비교가 어디 있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동차와 자전거는 둘 다 이동 수단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지요. 쌍둥이라도 성격이 다르고 특기와 재주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각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유한 ‘나’를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본당 신자가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임 신부님보다 여러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강론, 업무 처리, 신자들과의 친교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비교가 맞을까요?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어느 할머니께서 역대 본당 신부님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무엇을 잘하셨고, 저 신부님은 저것을 잘하셨고….”라는 식으로 각 신부님의 고유한 면을 바라보면서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의 습관적인 잘못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분히 하나씩 고쳐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고유한 면을 발견하면서 인정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간다면, 어느 순간 어떤 사람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냥 단번에 고쳐주시면 될 것 같은데, 여러 단계를 거치십니다.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곧바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으며 또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당 한 번 나갔다고 미사 한 번 참석했다고 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주님의 품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다(제임스 발리).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