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6월 22일경(※독립신문 1922. 5. 27. 일자 보도에 따르면 1921. 6. 20. 일경에 전체 회의가 개최되어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수개월간 대립하던 이르쿠츠크파 상해파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박일리야의 태도
이 무렵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소속이었던 차르 러시아의 이탈 방지, 공산혁명 차단, 체코군단 구원, 백파지원 등을 내걸고 1918년경 시작된 연합군의 러시아 내전 간섭은 1차대전의 종전, 체코군단의 귀환 등으로 일제를 제외한 연합군은 철군을 시작하였다.
일제는 러시아 간섭 전쟁과는 별 관계 없는 동시베리의 연해주, 이르쿠츠크,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니항, 만주 동청철도 등을 점령하여 다른 러시아 내전 간섭국들의 반발을 불러온다.
1920년 1월경 영국•프랑스•이탈리아는 볼셰비키 러시아에 대한 간섭전쟁과 봉쇄를 해제하였고, 미국도 곧 철군하였다.
그러나 1920년 3월 12일경 일제 시베리아 간섭군은 기울어져 가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아무르강 하류의 교통 요충지 니항에서 수백에서~ 천여명을 동원해 파르티잔 간부 트리피츤 등을 살해하려고 기습했다가 일본군과 일본 거류민 약 수백여명이 볼셰비키의 반격에 죽는다. 니항 사건 기간중 트리피츤 부대는 대략 500여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 4월경부터 일제는 니항사건을 “과격파의 일본인 대학살”이라는 명목으로 대대적으로 선전에 나서면서 동시베리아에 병력을 증파하고, 북사할린섬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와 탄광 유전지대 등을 점령한다.
이것은 일본의 러시아 내전 간섭 연합국이던 미국•중국 등의 반발을 불러온다.
오늘날까지 중국은 니항사건 당시 중국 군함의 함포 사격은 없었다는 주장이며,
박일리야는 니항 일본 영사관의 이시다 영사의 딸은 “영사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함포 사격으로 죽은 후였다.”고 주장한다.
남한에 온 이지택 등의 주장은 오늘날 러시아•미국 기록 및 한국 신문 보도와 대조하면 각종 허위 주장을 한 것으로 확인되지만, 당시 일제 주장과는 대부분 일치된다.
오늘날 일본 역사학자들은 니항사건에 관한 이지택과 박병길의 주장을 자주 인용한다.
(※ 오늘날 니항사건에 관한 주장중 독립유공자 이지택, 최호림, 박병길, 김낙현, 김창순, 박경리, 반병률, 윤상원, 존J스테판의 주장은 일치되는 점이 많다.)
러시아 내전과 시베리아에서 철군한 미국 정부는 일본의 북사할린섬 점령 등을 비난하기 시작하며, 1920년 8월경 일본 이민자의 캘리포니아에서의 토지 소유를 금하는 배일토지법(排日土地法)을 성립시키고, 이어 1921년 8월경에는 중국에 대한 항공 차관도 제공한다.
일본과 미국의 대립은 중국•만주 등지를 둘러싼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한동안 미•일전쟁의 위기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참고자료 : 강동진, 『일본근대사』, 1985, 302쪽 등)
따라서 일본은 지속적으로 볼셰비키와 교섭에 나선다.
볼셰비키 측도 동시베리아에 브루조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허수아비 국가인 『극동공화국』을 설립하고 미국•영국•일본•중국과 교섭에 나서지만, 이 무렵 주요 교섭국은 일본이었다.
일제와 친일파는 볼셰비키 러시아와 일본간의 회담인 대련회의 기간중 니항사건은 “한국 독립군이 무정부주의자 트리피츤의 선봉대가 되어 일본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불령 선인(不逞鮮人) 비적단이 만주•간도 일대에서 살인•약탈을 일삼고 있다” 등의 생떼를 쓰면서
러시아 영내에 있는 한국 독립군 활동을 탄압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1921년 5월에서 ~ 6월경 까란다리시비리가 총사령관이 오던 시기가 바로 이러한 시점이었다.
이 무렵 극동공화국과 볼셰비키 러시아 정부, 동양비서부는 자유시 일대에 모인 독립군의 한국 국경으로 진출을 허용할 입장이 아니었고 지켜보는 태도를 보인다.
결국 자유시 참변이후 2,000여명의 독립군들과 홍범도, 최고려, 오하묵, 김하석, 이청천, 류동열, 채영, 김승빈, 최호림 등은 극동공화국의 영내 밖인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제5단과 동양비서부의 지휘를 받게 된다.
(※ 일제의 주장은 이 무렵 『니항 한인회 혹은 조선인회』의 서기였던 박병길 등은 질서가 있고 살인•약탈을 안했다고 한다. 이 무렵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일제가 러시아 내전기간•간도 조선인 학살 사건 무렵 점령했던 만주지역의 『조선인(朝鮮人) 민회(民會)』, 『조선인회(朝鮮人會)』는 어용친일 단체로 지목되어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민중의 비난 대상이었다는 소리가 있다.
일본 영향아래 있던 지역 조선인회의 회칙을 간단히 살펴보면 “00영사관 관내에 살며 독립된 생계를 갖는 조선인으로 조직한다. 영사의 인가를 얻을 것”이라고 시작되며, 일본과의 협조를 명문으로 강조한다.)
(※ 참고자료 : 조선 총독부 만주 주재원이었던 히다카 헤이고로(日高丙子郞) 관계 서류)
박일리야를 비롯한 사할린 의용대와 동조한 독립군 부대원들의 기본 입장은 러시아 영내에 넘어온 이상 기본적으로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대립하는 러시아 공산당과 러시아 영내 한국 독립군의 지도 권한을 가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따르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1921년 6월 14일경 사할린특립의용대(니항부대, 국민회군, 총군부, 다반•이만 군대, 기타 만주•연해주 부대)가 마자나바에서 자유시로 이동한 것은
1921년 3월 15일 전후 아무르주 마자나바에서 조직된 『사할린 특립의용대』 소속 독립군 부대와 상해파는 러시아영내와 아시아 공산혁명의 지도권한을 가지게 된 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와, 1921년 5월 17일경(정확한 날짜 미상)부터 동양비서부의 지도하에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소속된 군부, 특립부 등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최고려•오하묵•김하석의 제외 요구
그러나 자유시로 다시 복귀하자 사할린 부대 측이 과거 행적이 불분명한 이르쿠츠크파의 최고려, 오하묵, 김하석 3인을 고려 혁명계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대한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는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 설치된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의 합동 임시 정부격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무장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고, 이 무렵 이동휘가 실력자로 있던 상해임시정부의 지휘를 받기로 한 적도 없었다.
연해주 일대 일부 한국계 주민의 모임에서 시작된 『대한국민의회』가 1918년경부터 시작된 일본•미국•영국•중국 등의 시베리아 간섭기 이르쿠츠크에 와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 되면서,
이르쿠츠크파를 중심으로 한 채, 상해파 공산당과 만주•연해주•중국영내 독립군 단체 간부를 배제하고 1921년 5월 17일경(정확한 날짜 미상) 조직한 것이 러시아영내의 모든 한국계 독립군들과 주민들까지 지도할 권한을 가진 『고려혁명군정의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