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8년, 제노바의 세력확장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부르고뉴 등의 국가가 제노바를 침공했고, 제노바는 오스트리아의 침공군을 맞아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었다.
그리고 이번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1478년 10월에 치루어진 '소프론 전투' 였다.
이 전투는 '15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투'로 알려져 있으며 오스트리아와 제노바가 각각 45000을 전투에 투입, 총 9만여 명이 넘는 군대가 소프론에서 치루어진 전투에 동원되었다.
이 전투에서 총 사령관을 맡은 도제 카밀로는 17000대 10000이라는 괜찮은 손실비로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적장은 전사했다.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지만, 제노바 공화국 역시도 전투 이후의 보급문제로 인해 상당한 규모의 사망자가 발생했기에 이 전쟁은 조속히 종료되어야만 했다. (1600년대가 넘어서 1700년대 초에도-;; 9만정도가 한자리에 모이면 손실이 상당하지요-;)
소프론 전투 이후, 더 이상 제노바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지속하는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부르고뉴 공은 제노바 공화국과의 평화조약에 조인하게 되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제 카밀로의 신망은 높아졌으며, 그는 공화국으로부터 '명예 원수' 칭호와 연 300두캇의 종신 연금을 받게되었다.
제노바 공화국의 승리와는 별개로 부르고뉴 공작은 프랑스 중, 서, 남부를 향해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시키고 있었으며, 프랑스 왕국은 거의 붕괴상태에 놓여있었고, 단지 명맥만을 이어갈 뿐이었다.
1482년 4월에는 동유럽 지역에 대규모의 곡물창고가 건설되었다.
이는 동유럽에서의 군사력 증강 및 동원과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었다.
(오오미!!!??? 이게 뭐시랍니까잉!!? 스... 스몰렌스크라니!!!! 그것도 수...수니파가!!! 모스크바가 뒤집어졌습니다!!!!!....-;; 유심히 보지 않아서 무슨일이 생겼던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모스크바는 운지했습니다;;;;.;;)
같은해 6월. 러시아로부터 급보가 전해져왔다.
이슬람 교를 신봉하는 수니파 스몰렌스크 술탄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을 뒤집고 러시아의 패권을 잡았다는 말도안되는 소식이었다.
제노바 공화국은 이 말도안되는 상황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했고, 그들은 정말로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는 서신을 본국으로 가져왔다.
제노바 공화국은, 인구의 절대다수가 정교도 신자인 러시아 땅에서 술탄국이 등장했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어찌 되었든 러시아에서 크리스트교인 정교회가 밀려나고 이슬람이 권력을 잡았다는것은 그다지 좋지 못한 사실이었다.
1485년 11월. 제노바는 대규모의 함대를 마르마라 해협에 배치시켰다.
발칸에서 위협이 되는 오스만세력을 먼저 밀어내 후방을 도모한 후 우크라이나 평원을 향한 동진을 시작하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당장 전쟁을 치르기에는 공화국의 준비가 완벽하지 못했고, 공화국은 이후 2년간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1487년 7월 2일. 수요일. 제노바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 그 떨거지들을 향해 성전을 선포했다.
병력은 오스만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제노바 공화국은 재해권이라는 측면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에 전쟁은 어렵지 않게 풀릴터였다.
같은달 10일. 제노바 공화국은 보헤미아 왕국과의 군사동맹을 체결. 서쪽에서 있을지 모르는 무력도발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같은해 10월. 오스만의 발칸 주둔군과 그 떨거지 세력들의 병력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공화국군은 발칸 전역을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1년 반에 걸친 포위전 끝에, 발칸 전 지역은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제노바 공화국의 깃발 하에 통치 되었고, 제노바 공화국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며 시리아로 진격해나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더는 버틸수 없었던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 일대의 7개 지역을 할양한다는 굴욕적인 평화조건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로써 제노바 공화국은 막대한 위신을 얻고, 이 승전 소식은 서방 곳곳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공화국 내부에서는 참전용사들을 위한 토지분배가 이루어졌고, 도제 카밀로는 '제노바 공화국 영웅' 칭호와 함께 테살로니카에서 발생하는 수입의 10분의 1을 종신토록 (사망 후 그의 아내까지) 지급받는 영광스런 특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두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제 카밀로의 재선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1490년 1월. 1일. 제노바 상공인 협회와 제노바 지주협회의 공동 주도로 새로운 도량형 제도가 대의회에서 통과, 농업과 상업, 수공업분야를 망라한 범위에서, 전국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로써 제노바의 경제시스템은 한층 더 발전할 것이었다.
같은해 9월에는 리투아니아로부터 독립한 소국, 우크라이나를 병합했다.
1491년. 알렉산데르 6세...?가 (뇌물을 통해..?) 교황으로 선출. 즉위했다. (아니!!! 그대는 설마!!! 체사레의 아버지!!! !!!- 에이 설마... 이름만 같겠지;;;)
1491년 10월에는 부르고뉴 공국이 도핀을 병합했다. 이로써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물론 포이투 근처에서 연명하고 있는 프랑스 왕국 대신 프랑스 지역에 상당한 영토를 확보한 '통일 잉글랜드 왕국이' 부르고뉴 공국의 새로운 적수가 될 것이었고, 제노바는 이 지역의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1494년에는 동맹국인 보헤미아의 라디슬라브 6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지만, 제노바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일이었다.
1495년 9월. 제노바와 보헤미아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을 향해 성전을 선포했다.
황제국인 보헤미아가 가세했기에 연합군의 총 병력수와 해군력은 모두 오스만 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으로는 어쩔수 없이 끌려나온 봉신국인 세르비아와 약소국 몬테네그로, 그리고 역시 약소국인 보스니아가 있었다.
제노바 군은 1차 대 오스만 전쟁보다 조건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발칸 전지역을 석권해 들어갈 수 있었다.
전 영토가 점령당한 후, 더는 버틸 수 없었던 보스니아는 평화조건으로 100두캇을 지불하고, 달마티아와 세르비아를 포함한 모든 외부지역에 대한 영토클레임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국들의 전쟁에 말려들어갔던 소국인 몬테네그로 역시도 패배, 평화를 구걸하게 되었다.
제노바는 몬테네그로를 병합하고자 하였으나, 치솟을 악평때문에 그리할 수 없었고, 가난한 소국인 몬테네그로 로부터는 거둘수 있는 배상금도 없었다.
하는수 없이 제노바는 몬테네그로의 패배를 인정해 주는 조건 하에서 강화협상을 체결해 주었다.
(퍼지기 시작한 개신교;;)
평화 조건으로 오스만제국은 수도인 이스탄불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발칸지역 전체를 할양하였고, 이로써 2차 대 오스만 성전은 제노바 공화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첫댓글 앙돼 오스만쨔응!
비잔틴... 훌쩍훌쩍...
이슬람 러시아가 눈에 띠네요. 알라 후 아크바르! 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