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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갈회옥(被褐懷玉)
겉에는 거친 옷을 입고 있으나 속에는 옥을 지녔다는 뜻으로, 겉은 보잘 것 없어도 속이 알차다는 말로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려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被 : 입을 피(衤/5)
褐 : 굵은 베 갈(衤/9)
懷 : 품을 회(忄/16)
玉 : 구슬 옥(玉/0)
출전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70장
속에 든 것은 보잘 것 없어도 잘 꾸미면 돋보인다. '의복이 날개'라 옷을 잘 입으면 한 인물 더 잘나 보인다. 하지만 추잡함을 감추려고 의도적으로 겉포장에 힘쓴다면 언젠가는 들통난다. 내면은 형편없는데 겉모양만 금옥처럼 꾸민 금옥패서(金玉敗絮)가 되고 더 낮춰 금보리견시(錦褓裏犬矢), '비단보에 개똥'이라 욕만 먹는다.
양고기 간판에 개고기를 팔면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사기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검은 가마솥의 속에는 하얀 밥이 소복하여 군침을 돋운다. 온갖 지혜로 가득한 현인이 겉보기에는 어리숙하게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겉에는 굵은 베옷(被褐)을 입고 있으나 속에는 구슬을 품고 있다(懷玉)는 성어가 이것을 말한다. 꽉 찬 속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위서 알게 된다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노자(老子)가 한 말이다. 도(道)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니 인위적인 것을 배격한다.
갈색의 거친 베옷을 입은 남자 갈부(褐夫)는 너절한 옷의 천한 남자다. 그런 사람의 품속에 소중한 보배 옥(玉)이 들어 있으니 겉보기만으로 대할 수 없다. 노자가 관문을 지날 때 그곳을 지키던 윤희(尹喜)가 부탁하여 남겼다는 '도덕경(道德經)'의 70장 지난장(知難章)에 나온다.
노자의 말은 '알기도 매우 쉽고 행하기도 쉬운데(甚易知 甚易行/ 심이지 심이행)' 세상 사람들은 깊이 알려고 하지 않고 겉핥기로 다만 도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인이 남루한 굵은 베옷을 입고, 가슴에는 보옥을 품은 것(是以聖人 被褐懷玉/ 시이성인 피갈회옥)' 처럼 품에 가득 도덕을 안고 있는 사람을 겉보기에 어리석다고 하여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
그렇더라도 드러날 때가 있으니 다음 장에서 말한다. "알면서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좋고,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知不知上 不知知病/ 지부지상 부지지병)"이란 가르침이다.
속이 찬 사람은 겸손하다. 학문과 지식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실력이 있어도 속이 텅 빈 사람처럼 겸허했던 안회(顔回)를 가리켜 "꽉 차 있어도 텅 빈 것처럼 보인다(有若無 實若虛/ 유약무 실약허)"고 증자(曾子)가 표현한 말과 통한다.
자기를 내세워야 남이 알아준다며 큰 지혜도 없이 화려한 겉모습을 꾸미고 떵떵거리는 자리만 찾는 사람이 많은 요즘 시대에 노자의 탄식과 안자(顔子)의 자세가 더욱 절실하다.
■ 피갈회옥(被褐懷玉)
피갈회옥(被褐懷玉)이라는 말이 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70장에 나오는 말이다. "겉은 허름한 베옷을 입고 있지만, 가슴 속에는 영롱한 옥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진정 강한 자는 겉으로는 그렇게 강하게 보이지 않는다.
늘 유연하고 부드러움으로 세상을 살아가기에, 진정 강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정말 강한 자는 겉은 강하게 보이지 않고, 정말 위대한 사람은 보기에 그렇게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섬기기에 더욱 강하고 위대할 수 있다는 노자의 가르침은 지난 2,500년 동안 '진정 강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깨우침을 준다.
진정 위대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그 능력을 가슴 속에 품고 겉으로 굳이 내보이지 않는다. 또한 빛나는 광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빛을 뽐내어 남을 눈부시게 하지 않는다. 자신을 낮추고 섬기고 비우는 것이야말로 강하고 높고 채운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이다.
비움은 채움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섬김은 높음을 전제로 한다. 열심히 노력하여 채우고, 강해지며, 높아진 사람만이 위대한 비움과 섬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채우지도 않고 무조건 비우라는 것은 열심히 살지도 않고 무조건 버리라는 것은 공허(空虛)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에서 양대 명문사학을 꼽으면, 동부의 하버드대학교와 서부의 스탠퍼드대학교를 말한다. 어느 날, 허름한 옷차림의 노부부가 사전약속도 없이 하버드대학교 총장실을 찾았다. 사전 약속도 없이 총장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시골촌뜨기 노인들이 곱게 보일 리 없다.
비서는 총장이 오늘 하루 종일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그 노인들의 요구를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끈질긴 노부부의 간청에 비서는 면담을 주선했다. 총장은 초라하고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들을 만나는 것이 자기의 권위와 사무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먼저 부인이 총장에게 말을 건넸다. "이 학교에 1년 다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무척 행복하게 생활했었습니다." 그리고는 눈시울을 적시면서 1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오늘 총장을 뵈러 온 것은 캠퍼스 내에 그 아이를 위한 기념물을 하나 세우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총장은 감동은 커녕 놀라움만 나타냈다. "우리는 하버드에 다니다 죽은 사람 모두를 위해 동상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은 아마 공동묘지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노부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총장님 그게 아닙니다. 동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위해 하버드에 건물 하나를 기증하고 싶어서 오늘 총장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총장은 의아해 했습니다. "건물이라고요? 건물 하나에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나 하시는 말씀입니까? 현재 하버드에는 750만 달러가 넘는 건물이 여러 채 있어요." 잠깐 말이 끊기고 총장은 내심 이제 돌아가겠거니 하고 기뻐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부인은 남편에게 조용히 말했다. "대학교 하나 설립하는 데 비용이 그것밖에 안 드는가 보죠? 그러지 말고 우리가 대학교 하나를 세우지 그래요."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총장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고, 두 노부부는 말없이 바로 일어나서 곧장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고향 '팔로알토'로 향했다.
이곳에 바로 하버드대학교에서 푸대접받고 더는 돌보아주지 않는 아들의 영혼을 위해 자기들의 이름인 '스탠퍼드 리랜드(Leland Stanford)'에서 따온 이름인 서부의 명문 '스탠퍼드대학교(Stanford Univ)'를 설립한 것이다.
하버드대학교 총장은 겉모습이 남루한 노인을 보고 오만함과 편견으로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차 대학을 더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 오히려 속이 알찬 사람들은 겉으론 검소하고, 그 빛남을 속으로 감추고 있다.
실력이란 '어떤 일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대개 나타나 보이는 것은 믿으나 나타나지 않는 것은 믿지 아니하며, 외부의 영화에는 정신이 몰두하나 내면의 진실은 찾아보지 아니한다.
꼭 화려한 제 뿔만을 사랑하고 잘못 생긴 제 다리는 미워하던 사슴이 포수에게 쫓기어 숲속을 헤쳐 나올 때 저를 살려 준 것은 잘못 생겼으되 잘 뛰어준 다리였고, 저를 죽일 번하게 한 것은 화려하되 숲에 거리끼기만 하던 뿔이었다는 얘기는 한낱 우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70장 : 말에는 근원이 있다
吾言甚易知(오언심이지)
甚易行(심이행)
天下莫能知(천하막능지)
莫能行(막능행)
내 말은 쉽고 따라 행하기도 쉬운데, 사람들 중에 아는 자도 행하는 자도 없다.
言有宗(언유종)
事有君(사유군)
夫唯無知(부유무지)
是以不我知(시이불아지)
말에는 근원이 있고 사물에는 주재자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를 모르는 것이다.
知我者希(지아자희)
則我者貴(측아자귀)
나를 아는 자는 드물고, 나를 따르려는 자도 귀하다.
是以聖人(시이성인)
被褐懷玉(피갈회옥)
그런 까닭에 성인은 남루한 베옷을 입은 속에 구슬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解釋) 1
나의 말은 아주 알기 쉽고, 실천하기도 쉽다. 그것은 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도의 자연스러움을 본받으면 되는 것이다. 나의 말과 일에는 원리가 있고 근원이 있다.
그러나 원리를 알고 근원을 캐고자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야만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도를 아는 이는 드물다. 만일 그것을 알고 본받게 된다면, 그는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인은 거친 베옷을 입고 일개 평범한 서민으로 살아가므로 세인들은 그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옥에 흙이 묻어 있으므로 행인들이 그저 예사로운 돌덩이 정도로 알고 주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범속한 사람들은 사물의 이면과 그 본질을 캐고자 아니하고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노자는 진리를 깨달으며 홀로 살아가는 자신의 고독과 비애를 피력하고 있다. 노자 '서'에서는 이와 같은 감회를 독백 조로 기술하고 있는 장이 많다.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와 무관심에는 달관한 그도 인간적인 슬픔을 이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대목은 논어(헌문편)에도 나온다.
공자께서 한탄하셨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이 말을 들은 자공이 말씀드렸다. "왜 선생님을 몰라준다고 말씀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으리라. 일상생활의 비근한 일을 배우기 시작하여, 차근차근 하늘의 이법에 통달하게 되었으니 나를 아는 것은 저 하늘일 꺼야!"
한평생 자신의 정치철학을 채택해 줄 밝은 임금을 만날 수 없었던 공자의 탄식과 무위자연의 도를 현실 정치에서 단 한 번도 펼쳐 볼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노자의 비애에서 현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그들의 고독과 좌절감은 더욱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解釋) 2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나의 말은 아주 알기 쉽고 아주 행하기 쉽지만 천하는 능히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
나의 말은 매우 알아듣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도, 천하가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잘 행하지도 못한다.
노자 당시에도 사람들은 노자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던 같다. 그 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노자의 도(道)가 너무 크고 그 뜻이 너무 높아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노자의 말을 똑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주의 깊게 읽지 않아서이고, 성현의 말씀을 대할 때 진지하지 않아서이고, 고매한 사상을 논함에 너무 경박해서이다. 이는 실로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노자의 말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고 책으로 펴낸 사람들조차도 노자의 말을 실천하고, 생활로써 보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나도 감히 도를 실천하며 산다는 말은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늘 노자의 가르침을 새기며 살아 왔다. 이런 책을 쓰는 것조차 그토록 망설이고 미적거린 이유가 그래서이다. 아마도 노자의 말이 절반만이라고 제대로 전하여지고 있었다면 내가 이런 책을 펴내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말에는 근원이 있고 일에는 주체가 있다. 오직 알지 못하므로 내가 아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말에는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이 있고, 일에는 (그 일을 하는) 주체가 있는 법이다. 대저 오로지 무지(無知)하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에는 근원이 있고, 일에는 통솔자가 있거늘, 오직 (그런 이치를) 알지 못하므로 내가 아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번역 되어져 왔는데, 아주 잘못된 것이다.
지금까지 노자는 입만 열면 '무지(無知)하라'고 말해 왔는데, 갑자기 이 장에서 '무지'하기 때문에 자기를 알지 못하다고 '무지' 탓하고 있는 것으로 된다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터무니없는 번역이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터무니없는 해석들이 2천5백 년 동안 수정 되어지지 않고 전해져 올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할 뿐만 아니라 동양학과 고전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의 나태함과 안일함 그리고 후안무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모든 말에는 종(宗)이 있다'는 말은 어떤 말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유포되고 전해지든지 간에 최초로 그 말을 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그 일의 주체(관련자, 주관자, 당사자)가 있다는 말도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지식도 마찬가지로 자기에 대해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왜 무지(無知)하여야 한다고 (노자가) 말을 하느냐 하면, 세상의 지식이라 하는 것들이 자기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역으로 이해하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필요하고도 소중한 일이므로 노자가 말하는 '무지하여야 하는 것'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이 다 무가치하고 번거로울 뿐이라 해도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큼은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강조하여 마지않는 것이 바로 '지기(知己)'이다. '내가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하는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불자의 수행이다. 그것에 대하여 진실 된 답을 주는 것이 불교요, 그 대답이 바로 불법이다.
팔만대장경이 설명하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을 아는 방법'이다. 자기를 아는 공부가 가장 참된 공부이므로 노자는 '모든 말에는 그 말을 최초로 한 사람이 있고, 모든 일에는 주체가 있으니, 세상에 오직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너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고 하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도덕경'에도 나오고 '불경'에도 나온다. 모든 학문, 종교, 철학, 사상의 정수가 바로 '자기에 대한 성찰'인 것이다.
시이(是以) 불아지(不我知)라는 말을 똑바로 옮기면 '자기를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가 된다. 무엇이? '노자가 무지(無知)하라 말하는 이유가!' 자신을 아는데 도움도, 소용도 안 되는 헛된 지식들이기 때문에 노자는 그런 것들을 익히고 배우지 말라는 것이다.
知我者希 則我者貴
是以聖人 被褐懷玉
나를 아는 자는 드물고 나를 본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거칠은 베옷을 입고 품에는 보배를 품고 있다.
자기를 아는 자는 드물고, 자기를 본받는 자도 귀한지라, 그러므로 성인은 허름한 옷을 입어도 가슴에는 구슬을 품고 있다.
'갈(褐)'은 삼실로 짠 거친 옷이다. 때문에 그것을 입는다는 말은 남루하고 허름한 옷을 걸치고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품속에는 귀하고 값이 비싼 구슬을 품고 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몸에 걸친 남루한 삼베옷은 가난하다 것의 비유이니 지적(知的)으로 빈곤함을 뜻한다. 즉 무지하여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성인은 이와 같이 세상의 지식에는 아는 것이 없어 허름하고 거친 베옷을 입는 사람처럼 가난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빛나는 구슬을 품고 있으니 그게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요, 자기에 대한 지식이다.
비교해서 말하면 속세의 현명한 자들, 지식인들이란 속에는 진실로 가치로운 것을 품고 있지 못하면서(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 겉으로만 화려한 옷(세상에 대한 잡지식)을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석가가 가르친 부처의 길과 노자가 말하는 성인의 길이 그 본질에서 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본다. 자기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이 부처고, 자기를 아는 자가 곧 성인이다.
▶️ 被(이불 피)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옷의변(衤=衣; 옷)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가리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皮(피)를 합친 글자이다. 잘 때 뒤집어 쓰는 옷의 뜻에서 뒤집어 쓰다, 쓰다, 입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被자는 '씌우다'나 '덮다', '당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被자는 衣(옷 의)자와 皮(가죽 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皮자는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죽'이나 '겉면'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被자는 이렇게 '겉면'이라는 뜻을 가진 皮자에 衣자를 결합한 것으로 겉에 덮는 옷이라는 의미에서 '이불'을 뜻하게 되었다. 이불은 내 몸을 덮는 침구이기 때문에 '씌우다'나 '덮다'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불을 '被子'라고 한다. 그래서 被(피)는 어떤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동작을 받거나 입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 ①(옷을)입다 ②당하다 ③씌우다, 덮다 ④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닿다 ⑤더하다, 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⑥받다, 받아 가지다 ⑦꽉 차다, 두루 퍼지다 ⑧합치다, 맞다 ⑨주다 ⑩두루 갖추다 ⑪떠맡다 ⑫등지다 ⑬의지(依支)하다 ⑭흐트러뜨리다 ⑮풀어 해치다 ⑯옷 ⑰겉, 거죽(물체의 겉 부분) ⑱이불 ⑲머리꾸미개 ⑳길고 큰 모양 ㉑저, 저것,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불 금(衾)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람이 재물을 잃거나 신체적 정신적으로 해를 입은 상태를 피해(被害), 살해를 당함을 피살(被殺), 납치를 당하는 것을 피랍(被拉), 민사소송에서 소송을 당한 측의 당사자를 피고(被告), 습격으로 사격을 받음을 피격(被擊), 남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일을 피동(被動), 억지로 빼앗김을 피탈(被奪), 습격을 당함을 피습(被襲), 제소를 당함을 피소(被訴), 선거로 뽑힘을 피선(被選), 덮어 싸고 있는 막을 피막(被膜), 의심을 받음이나 혐의를 받음을 피의(被疑), 저지를 당하여 막힘을 피색(被塞), 강압에 의하여 억지로 참가하게 됨을 피참(被參), 탄핵을 당함을 피탄(被彈), 비방이나 비난을 받음을 피방(被謗), 겉에는 거친 옷을 입고 있으나 속에는 옥을 지녔다는 뜻으로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려 함을 이르는 말을 피갈회옥(被褐懷玉),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관을 쓴다는 뜻으로 머리를 손질한 틈이 없을 만큼 바쁨을 이르는 말을 피발영관(被髮纓冠), 수놓은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다는 뜻으로 공명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야행피수(夜行被繡), 덕화가 사람이나 짐승 뿐만 아니라 초목에까지도 미친다를 이르는 말을 화피초목(化被草木) 등에 쓰인다.
▶️ 褐(갈색 갈/굵은 베 갈)은 형성문자로 褐과 동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옷의변(衤=衣; 옷)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曷(갈)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褐(갈)은 ①갈색 ②베옷 ③굵은 베 ④털옷 ⑤다색(茶色) ⑥천한 사람 ⑦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밤색으로 거무스름한 주황빛을 갈색(褐色), 과일이나 채소 따위를 칼로 깎았을 때 그 부분이 갈색으로 변하는 일 또는 식물의 어느 부분이 병들어 갈색으로 변하는 일을 갈변(褐變), 갈색의 반점을 갈반(褐斑), 옷을 어깨에 엇멤을 단갈(袒褐), 천복인 갈을 벗는다는 뜻으로 과거에 합격한 자가 평민의 옷을 벗고 새로이 관복을 입음 곧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함을 일컫는 말을 석갈(釋褐), 거친 베옷을 입은 남자라는 뜻으로 너절한 옷을 입은 천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갈부(褐夫), 갖옷과 털옷이라는 뜻으로 곧 검소한 옷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구갈(裘褐), 갈색 조류에 딸린 식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을 갈색조(褐色藻), 붉은 기운에 비하여 검누른 기운이 더 짙은 갈색을 일컫는 말을 다갈색(茶褐色), 짙은 갈색으로 검은빛이 도는 어두운 갈색을 일컫는 말을 암갈색(暗褐色), 붉은 빛을 띤 갈색을 일컫는 말을 적갈색(赤褐色), 검은빛을 띤 누른빛을 일컫는 말을 황갈색(黃褐色), 거친 천으로 통이 넓게 지어 입은 추레한 옷 또는 그런 옷을 입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갈관박(褐寬博), 겉에는 거친 옷을 입고 있으나 속에는 옥을 지녔다는 뜻으로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려 함을 이르는 말을 피갈회옥(被褐懷玉) 등에 쓰인다.
▶️ 懷(품을 회)는 ❶형성문자로 懐(회)의 본자(本字), 怀(회)는 간자(簡字), 褱(회)는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되풀이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褱(회)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懷자는 '품다'나 '위로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懷자는 心(마음 심)자와 褱(품을 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褱자는 衣(옷 의)자에 目(눈 목)자를 결합한 것으로 '품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품다'라는 뜻은 褱자가 먼저 쓰였었다. 금문에서 나온 褱자를 보면 衣자 안에 눈과 눈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눈물을 가슴에 묻고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褱자는 자신의 슬픔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품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소전에서는 여기에 心자를 더해 懷자가 감정과 관련된 글자라는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懷(회)는 마음에 돌이켜 생각하다의 뜻으로 ①품다 ②임신하다 ③생각하다 ④싸다, 둘러싸다 ⑤따르다 ⑥위로하다 ⑦달래다 ⑧보내다, 보내어 위로하다 ⑨길들이다, 따르게 하다 ⑩편안하다 ⑪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다다르다 ⑫품, 가슴 ⑬마음, 생각 ⑭기분(氣分)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이 밸 잉(孕), 안을 포(抱)이다. 용례로는 마음속에 품은 의심을 회의(懷疑),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회포(懷抱), 교묘한 수단으로 설복시킴을 회유(懷柔), 감각이 있는 모든 생명을 회생(懷生), 옛 자취를 돌이켜 생각함을 회고(懷古), 고향을 그리며 생각함을 회향(懷鄕), 마음에 품은 정의나 애정을 회정(懷情), 성숙기에 이른 여자가 춘정을 느낌을 회춘(懷春), 안락한 거처를 생각함 또는 고향을 생각함을 회토(懷土), 옛 자취를 돌이켜 생각함을 회구(懷舊), 흰빛을 피하기 위하여 가사에 어떤 물을 들임을 회색(懷色), 위태롭게 여김을 회위(懷危), 마음에 있는 사람을 생각함을 회인(懷人), 마음속에 품고 있는 회포를 소회(所懷), 지난 일이나 사람을 생각하여 그리워함을 추회(追懷), 그윽한 회포를 유회(幽懷), 객지에서 품게 되는 울적한 느낌을 객회(客懷), 언짢은 일을 마음에 끼워 둠을 개회(介懷), 객지에서 품게 되는 울적한 느낌을 여회(旅懷), 마음에 품은 생각을 말함을 술회(述懷), 거리낌이 없는 마음을 탄회(坦懷), 괴로운 생각을 고회(苦懷), 품은 생각을 풀어 말함을 서회(敍懷), 마음속을 헤쳐서 시원하게 함을 창회(暢懷), 고상한 생각이나 마음을 고회(高懷), 오랜 회포를 구회(久懷), 이별할 때의 슬픈 회포를 별회(別懷), 병을 앓고 있는 동안의 회포를 병회(病懷), 본디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이나 회포를 본회(本懷), 마음속에 서린 슬픈 시름을 비회(悲懷),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터놓음을 일컫는 말을 허심탄회(虛心坦懷), 구름을 바라보며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타향에서 고향에 계신 부모를 생각함을 이르는 말을 망운지회(望雲之懷), 쫓기던 새가 사람의 품안으로 날아든다는 뜻으로 사람이 궁하면 적에게도 의지한다를 이르는 말을 궁조입회(窮鳥入懷), 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죄가 된다는 뜻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귀한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훗날 재앙을 부를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회벽유죄(懷璧有罪), 임금의 총애를 믿고 물러가야 할 때에 물러가지 않고 벼슬자리만 헛되이 차지함을 가리켜 이르는 말을 회총시위(懷寵尸位) 등에 쓰인다.
▶️ 玉(구슬 옥)은 ❶상형문자로 세 개의 구슬을 끈으로 꿴 모양으로, 중국 서북에서 나는 보석을 말한다. 처음에는 王(왕)으로 썼으나 나중에 丶(점)을 더하여 王(왕)과 구별하였다. ❷상형문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쓸모 있게 만들어야 값어치가 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구슬이란 호박이나 옥을 뜻했다. 옛사람들은 옥도 가공해야 장신구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구슬을 뜻하는 玉자는 가공된 여러 개의 보석을 끈으로 연결해놓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갑골문에 나온 玉자를 보면 지금의 王(임금 왕)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해서에서는 王자와의 구별이 어려워지게 되어 점을 찍은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주의해야 할 것은 玉자가 부수 역할을 할 때는 여전히 옛 글자인 王자로 표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珍(보배 진)자나 班(나눌 반)자처럼 王자가 부수로 쓰여 있다 할지라도 모두 '구슬'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玉(옥)은 (1)빛이 곱고 아름다운 광택(光澤)이 나며 모양이 아름다워 귀(貴)하게 여기는 돌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구슬 ②옥(玉) ③아름다운 덕(德) ④미칭(美稱), 상대편의 것을 높여 이른 말 ⑤옥(玉)과 같은 사물의 비유 ⑥아름답다 ⑦훌륭하다 ⑧가꾸다 ⑨소중히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구슬 주(珠), 구슬 원(瑗), 구슬 경(瓊), 구슬 선(璿), 구슬 벽(璧),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돌 석(石), 쇠 철(鐵)이다. 용례로는 옥으로 만든 도장을 옥인(玉印), 옥으로 만든 패물을 옥패(玉佩), 옥으로 만든 함을 옥함(玉函), 옥과 같이 보배롭고 귀한 그릇을 옥기(玉器), 임금이 앉는 자리를 옥좌(玉座), 옥으로 만든 술잔을 옥배(玉杯), 옥과 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를 옥계(玉溪), 옥에도 티가 있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나 물건이라도 한 가지의 흠은 있다는 옥하(玉瑕), 옥같이 희고 고운 팔이라는 옥완(玉腕), 윗사람의 딸을 높여 이르는 말을 애옥(愛玉), 구슬과 옥을 주옥(珠玉), 옥을 갊으로 지덕을 닦음을 공옥(攻玉), 옥과 돌이 함께 뒤섞여 있다는 뜻으로 선과 악이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섞여 있음을 이르는 말을 옥석혼효(玉石混淆), 옥과 돌이 함께 불타 버린다는 뜻으로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함께 망함을 이르는 말을 옥석구분(玉石俱焚), 옥과 돌이 함께 부서진다는 뜻으로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망함을 이르는 말을 옥석동쇄(玉石同碎), 옥계에 흐르는 맑은 물을 일컫는 말을 옥계청류(玉溪淸流), 옥과 돌이 한 궤짝 속에 있다는 뜻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나 혹은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한데 섞여 있는 경우를 일컫는 말을 옥석동궤(玉石同匱), 귀한 분의 걸음걸이와 몸이란 뜻으로 남의 건강을 비유하는 말을 옥보방신(玉步芳身), 빛이 썩 희고 고결하여 신선과 같은 뛰어난 풍채와 골격을 일컫는 말을 옥골선풍(玉骨仙風), 아주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음 또는 그러한 의복과 음식을 일컫는 말을 옥의옥식(玉衣玉食), 옥녀와 같이 아름다운 여자를 일컫는 말을 옥녀가인(玉女佳人), 아름다운 얼굴에 영걸스러운 풍채를 이르는 말을 옥안영풍(玉顔英風), 아름답고 얌전한 신랑이나 젊은이를 일컫는 말을 옥인가랑(玉人佳郞), 맑고 깊은 바다와 단단한 산이라는 뜻으로 고상한 인품을 비유하는 말을 옥해금산(玉海金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