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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골의사 박경철 블로그 https://blog.naver.com/donodonsu/100010088072
무맥락 혐오 댓 지양 부탁해 ㅠㅠ
그때 할아버지의 상태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치 처참한 모습이었다.
양측 대퇴골이 모두 골절되어 허벅다리가 비틀어지고,
오른쪽 팔도 요골과 척골이 동시에 골절되어 팔꿈치 아래가 꺾여있는데다, 갈비뼈 양쪽이 무려 10개 정도가 골절되어 있었고 거기에다 횡격막과 인접한 우측 간이 길이 방향으로 찢어져서 배에는 피가 고여 있었고,
호흡마져도 부러진 갈비뼈로 인해 정상적이지 못했다.
그 해가 1992년
내가 레지던트 2년차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인근 소도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를 무시한 승용차에 치여 인근 종합병원에서
일차 응급조치를 받고 후송되어 오신 분이었다.
응급실에서는 외과분야 일년차들이
할아버지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었다.
외과 일년차는 정형외과 일년차에게 대퇴골 골절에 우측 전박 골절정도의 중상인데 당연히 정형외과에서 주치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정형외과에서는 다발성 늑골 골절로 호흡이 잘 안되는데 골절이 문제냐며 흉부외과로 입원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흉부외과에서는 갈비뼈 골절로 인한 가관절 현상은 인공호흡기를 달아주는 것 말고는 해 줄것이 없는데. 우선은 파열된 간을 수술하던 관찰하던 외과에서 해결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도리없이 이년차들이 개입했다.
사실 이 경우는 난감하다.
어느과로 입원을 하건 서로 협진해서
환자가 모든과의 치료를 받기는 하겠지만,
어느과로 소속되는가에 따라 집중치료의 방향이 갈리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년차들이 치프에게 보고하고 일단 우리과로 입원하되, 인공호흡기는 흉부외과에서 관리하고,
트랙션은( 다리가 골절이 되면 장딴지나 허벅지의 강력한 근육 수축으로 부러진 다리가 그자리에 있지않고 뼈가 원래의 방향에서 틀어져서 엇갈리게 되므로 근육이 이완 될 때까지 다리에 추를 달아 당겨줌으로서 뼈가 완전히 틀어지지 않게하는 장치) 정형외과에서 관리하기로 결정되었다.
결국 환자의 바이탈 체크는 우리몫이 되지만,
삼개과가 동시에 치료를 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나는 입이 일미터쯤 나온 우리 일년차에게
간 파열이 당장 수술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심 할 수도 없으니 간 조직이 어느정도 자리잡고 출혈이 멈춰지고나면 정형외과로 트랜스퍼를 하자고 다둑거렸다,
사실 일년차 입장에서는 중환자가 한명 더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생존권이(잠잘 권리) 침해되는 것이므로, 입이 나올만은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다른과에 맡기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실 그정도의 중상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수술실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중환자실로 가게되는 경우도 흔한 경우는 아니다.
물론 앞으로 2-3일 이내에 개복 수술을 해서 간 수술을 받을 확률도 있고, 2-3주 후에는 정형외과에서 골절 수술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래도 우선 이정도의 중삼에 수술을 하지않고 observation 하기로 결정이 나는 경우는 드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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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중환자실에 올라오면 먼저 루틴으로 할 일들이
경정맥을 천자해서 수혈 통로를 확보하고,
요골이나 척골 동맥을 천자해서 산소 포화도를 달 수 있는 라인을 연결한 다음, 병력을 체크하고.
거의 백여가지의 검사와, 포터블 방사선 촬영, 당장 투여 할 수액과 약품들을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치료계획을 세우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경정맥 천자와 인공호흡기 부착등을 위한 보호자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보호자가 계시지 않았다, 아마 길거리 교통사고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자마자 다시 이쪽으로 오시는 바람에 보호자에게 연락이 닿지 않은 듯 했다.
사실 경정맥 천자나 인공호흡기 장착이 그리 위험한 조작은 아니지만, 보호자의 동의가 없이 조작을 했다가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야말로 인생이 망가지는 것이라 의사들도 어지간해서는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상태는 그리 여유가 많지 않았다.
우선 흉부외과에서 인공호흡기를 세팅하는 동안 우리는 경정맥을 천자해서 굵은 수액로를 확보하고, 동맥라인을 연결하고, 검체를 보내고 우선당장 투여 할 약품들을 처방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환자가 중환자실에 처음 올라오면
처음 하루는 상당히 혼란스럽다.
환자의 병력이나 기타 환자의 상태가
모든 의료진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환자가 입원하고 최소 하루는 지나야 환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차차 안정되고 상황이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흉부외과에서는 PEEP , CMV 모드로 인공호흡기를 세팅하고, 노큐론, 베카론, 몰핀을 처방했다,
우리는 흉부외과에서 처방한 근이완제와 안정제를 우선 순위로 올리고, 우리가 필요한 항생제와 적혈구 농축액의 수혈, NaHCo3 등을 투약하고, 환자의 코를 통해 레빈튜브를 넣어 위가 팽창하는 것을 막은 다음, 금식 상태에서도 영양분이 공급 될 수 있도록 하루 3000 cc 의 수액과 포도당, 아미노산등을 추가 처방했다,
그러는 사이에 보호자가 뒤늦게 도착했다.
보호자는 60대 할머니 한 분 이셨다.
중환자실에 도착한 할머니가 덧가운을 입고
수위 아저씨의 안내로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침착하게 스테이션에서 우리에게
할아버지께서 평소에 지병이 없으심을,
그리고 당일 아침까지 건강하셨음을,
그리고 현재 다른 약물을 복용하고 있지 않음을 답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내민 처치동의서 ( 할머니가 오시기전에 이미 시행했지만 )에 사인하시고, 할아버지의 상태를 관찰하다가 만약 갑자기 응급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 오게되면 혹시 그순간 보호자가 자리에 없더라도 의사가 임의로 수술을 할 수 있음에도 동의하셨다.
우리는 현재의 병세에 대해 설명을 드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지금 좀 심각하시거던요.. 대퇴골이 두군데가 다 부러지면 자체에서 흘러서 허벅지 안에 고이는 피만도 2 리터가 넘고요, 지금 간도 파열이 되었는데 잘하면 그냥 아물거도 같은데. 만약 피가 멈추지 않으면 간을 자르거나 꿰메는 수술을 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되면 그때 흘릴 피까지 생각하면 수술 결과를 점치기가 어렵고요,,,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갈비뼈가 4.5.개 이상 심하게 부러지면 비닐하우스 눈이 쌓이면 주저 않듯이 가슴도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쉴 때 가슴이 충분히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아서 호흡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숨을 스스로 못쉬도록 약을 써서 근육을 마비시키고요.. 또 할아버지가 의식이 있으셔서 인공호흡기가 괴로우실테니 저희들이 약을 써서 할아버지를 3일간 재울거에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혹시 폐렴이 생기거나 무기폐라는 병이 생기면 또 위험 할 수 있어요..
얘기하는 내가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할머니께 계속 비관적이고 무서운 이야기들만 줄줄 늘어놓았다.
의사는 왜 중환자에게 낙관을 이야기 할 수 없을까?
"만약 낙관적으로 이야기를 했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보호자는 의사를 공격한다, 최대한 비관적으로 얘기했다가 결과가 안좋으면 그나마 수긍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곤란하다."
처음 가운을 입자마자 선배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받는 이야기들이고 실제 일선에서는 나역시 그럴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절박한 사람들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얘기하는 자신이 저승사자처럼 여겨 질 때가 있었다.
그때가 그랬다.
그냥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같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 할머니 아무 걱정 마세요..
요즘 의술이 얼마나 좋은데요..
할아버지 저 정도면 거뜬히 일어나실거에요.."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하게 대처하시던 할머니께서 다소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셨다.
" 선생님. 나 이 안에 그냥 있게 해주면 안되겠소?
여기 하루에 10분씩 밖에 면회가 안된다는데,
나 정말 귀찮게 안하고 가만히 있을테니.
나 그냥 할아버지 옆에 그냥 있으면 안되겠소,,?"
당연히 안되는 일이었다.
일반인들의 옷에 묻어 있는 병균이 중환자실 내로 유입되는것도 문제고, 보호자들이 들락거리면 환자들의 안정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병원에서 보호자들의 출입을 금하는 중환자실에 하루종일 환자 옆에 그냥 있게 해달라는 부탁은 무리였다.
야박하지만 도리없었다.
"할머니.. 죄송하지만,, 그건 안되거던요.. 다른 환자들께도 방해가되고 할아버지도 지금 약때문에 주무시기 때문에 할머니가 옆에 계셔도 못 알아 보시니까. 할머니 차라리 보호자 대기실에서 누워서 쉬세요, 저희들이 일이 생기면 인터폰으로 연락을 해 드리거던요.. 그리고 아드님이나 다른 보호자는 안계세요..?"
그때 할머니가 긴 한숨을 쉬시면서
넋두리처럼 하신 대답이 뜻밖이었다..
" 우리는 아들도 딸도 없고, 할아버지하고 단 둘이라오.... 내 저어른 만난지 이제 겨우 두달됐는데....
저 어른 이대로 이렇게 가버리면 원통하고 원통해서 이일을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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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머니가 힘없이 돌아서서
중환자실 문을 열고 나가신 후
잠시 "만난지 두달"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양로원에서 노인들이 만나셔서 같이 사시는건가, 아니면 무슨 사연으로 긴 세월 헤어지셨다가 다시 만나신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우선은 호기심이 문제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살리는 일이 급했으므로 그것은 일단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서너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시간은 저녘시간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1년차와 인턴 선생에게 주말에 삼겹살을 가겠노라고 공언을 해둔터라 할아버지가 어느정도 안정 상태에 접어들자 병원 길건너편에 있는 삼겹살집으로 가기 위해 다들 가운을 벗어들고 중환자실을 나섰다.
마침 토요일이라 오랜만에 이머젼시 온콜팀이 아닌 사람들은 소주도 한잔 할 수 있는 모처럼의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우리가 중환자실 문을 열고 나서는데 맞은편 복도에 할머니가 두손을 모으고 앉아 계셨다.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누워서 쉬시지 않고 오늘은 면회시간도 이미 끝났는데 그자리에 그렇게 계속 앉아 계셨던 모양이었다.
"할머니 저녁은 드셨어요? 할아버지 아마 밤새 별일 없으실 거에요. 어서 저녁 드시고 대기실에가서 좀 누우세요,, 이러시다가는 며칠 못버티실거에요.."
우리 일년차가 할머니의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가서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머리를 흔드셨다.
저녁을 안드셨다는 말씀인지. 내려가시지 않겠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신건 분명해 보였다.
" 할머니 우리도 마침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세요 그럼,, 밥먹으면서 할아버지 상태도 저희가 자세히 설명해 드릴께요.."
그냥 가자고 하시면 따라나설 것 같지가 않아서,
할아버지 상태를 설명해 드리겠다는 핑계로 같이 식사하러 가실 것을 권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리를 따라나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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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삼겹살이 그렇게 맛있었다.
그때는 일주일내내 시달리다가 비록 허리에 삐삐를 한두름씩 차고서라도 병원을 벗어나서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는 것이 그렇게 맛있고 귀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사람수 곱하기 삼인분 정도의 분량의 고기를 주문하고 달구어진 불판에 신김치 구워가며 고기가 채 익을 겨를도 없이 삼겹살을 먹어댔지만, 할머니는 그저 젓가락을 드는둥 마는둥 하시면서 이제나 저제나 우리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드리기만 기다리시는 듯했다.
"할머니 고기 드세요,
할머니 안드시면 할아버지 열심히 치료 안해드릴 겁니다.."
심성 착한 일년차가 억지로 할머니앞에 고기를 놓아드리면서 협박아닌 협박을 해서,겨우 몇 점을 드시게 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그제서야, 잘하면 수술을 안하고 할아버지 쾌유가 가능할 거라는 점, 그리고 다리는 어차피 2,3주는 지나야 수술을 하는것이고, 어지간해서 다리 수술은 문제가 없다는 점, 지금 가장 문제인 호흡은 인공호흡기를 3,4일만 잘 이겨내면 저절로 갈비뼈가 균형을 이룬다는점을 강조하면서 가능한 할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그런데 할머니...
아까 할아버지 만나신지 두달이라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무슨 사연으로 그렇게 만나신거에요?
두분이 양로원에서 만나셨어요?
내가 드디어 궁금증을 못 참고 할머니께 사연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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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내 질문에 먼저 긴 한숨을 내쉬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 내가 저 어른한테 18살에 시집을 갔었지요..
처음에 얼굴도 모르고 어른들이 혼사를 하라고 해서 시집을 갔는데, 그때야 신랑이 괴물인지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냥 가라니 간거지.. 그런데 시집가서 보니까 신랑이 참 좋은 사람이라,, 시집살이 힘들다고 밤에 몰래 다리도 주물러주고,, 참 저 어른이 그때 사람들 답지않게 그렇게 정이 많았었지요..
하여간 시집가서 한 두달이 지나서 이제 시집 식구들도 덜 무섭고,, 남편한테도 막 정이 붙으려는데.. 갑자기 동네에 순사들이 들어와서 장정들을 다 잡아 가버렸지요,, 그길로 일본군에 징용을 당한거라,...,"
순간 내 머리속에 어떤 기억이 스쳐갔지만
일단 할머니 말씀을 더 듣기로 했다.
" 나는 그길로 지금까지 50년을 넘게 청상으로 살았지요.. 시부모 모시고 이제나 저네나 소식을 기다리며 목을 빼고 사는데. 한 십 년 있으니 시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참 별거 다 겪었지요.. 중간에 해방되길래 돌아오나 했더니 소식도 없고,, 그러다가 육이오 터져서 시어머니 손잡고 피난도 가고.., 먹고 살길이 없어서 나물도 뜯고, 바느질도 하고, 묵도 만들어 팔고,, 참 별 짓 다했지요..
두 과부가 그렇게 억지로 사는데,, 친정 오빠가 재가하라고 몇 번이나 등을 떠미는데,, 그건 못하겠더군,., 곧 저 어른이 돌아오실것 같은거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좋은 양반이 그렇게 죽을리 없다 싶고, 저 어른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혀서 지금까지 매일 끼때되면 밥을 한그릇 더 퍼놓고 기다렸지요,,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중풍이 걸려서 한 오년 대소변 받아내다가 돌아가셨는데.. 육여사가 서울에 오래서 갔더니 효부상을 주셨어,, 참 고마운 일이지.."
할머니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식당 주인 아주머니와 그 딸까지 옆에와서 할머니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 이제 시어머니까지 가시고 혼자 사는데.. 저 어른 언제 오실줄 알고 내가 이사를 갈 수가 있나, 뭘 다른걸 할 수가 있나.. 나중에 친정 오빠도 죽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나중에는 명절에 전화 한 통 할 사람도 없어졌지요,, 그나마 하나있던 친정 조카도 그새 어째 죽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부엌에서 시장에 내다 팔 묵을 만드는데 대문밖에 왠 일본 사람들이 잔뜩 왔어,,간이 덜커덩 하더구...그 사람들이 일본 NHK 라는 방송국에서 왔다고 하는데 나는 일본말만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그런데 그사람들이 어른이 지금 사할린에서 살고 있는데, 자기들이 무슨 특집을 하느라고 가족을 찾는데 나를 찾아 온거라고 하더라구,,그래서 경망중에 그길로 그 사람들 따라나섰지요,, 그리고는 일본에 가서 테레비 방송국에서 뭘 잔뜩 찍더니 세상에 그길로 비행기로 사할린에 간다는거라,,"
그러고보니 나는 이미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사할린이라는데를 가게되었어,, 아이구 그런데 이게 왠일이래,, 정말 그때 새파란 청춘으로 가신 저 양반이 나이 70이 다되서 안죽고 그기서 살고 있는거라............. 저 양반도 내게 미안해서 그기서 여자도 하나 안만나고 그냥 그렇게 혼자 사신거라,,, 세상에 남벙네가 오십년 세월을...... 그 세월이 얼만데...,,,"
할머니는 눈에 눈물을 닦으신 다음 다시 이야기를 하셨다..
"그래서 그기서 한 일주일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와야한데.. 저 어른은 그 나라사람이라 지금은 못오고 나중에 방송국에서 꼭 다시 만나게 해준다고 약속해서 내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걸 억지로 돌아왔어,,
내가 그때 한 일주일 저 어른 밥상을 차려 드리면서 세월이 아무리 야속해도 그래도 이래 살아서 서방님 밥상을 올릴 수 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싶었어,, 그때 둘이서 밤새 울기는 얼마나 울었나,, 저 어른도 내가 떠날 때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았지요...,,"
"내 다시 가리다,, 내 꼭 다시 가리다,,
미안소,,여보 잠시만 참으소.. 내 꼭 다시 가리다"
"저 어른이 다시 온다는 말만 계속하시는데 저 어른 놔두고 그길을 어째 혼자 돌아왔나 몰라., 그리고 나는 다시 한국에 와서 이제 어른 오시는 날만 기다리는데,, 그길로 곡기를 딱 끊어 버렸어,, 저 어른 거기서 뜨신 밥 한그릇 못 올리는데 내 목에 어째 밥을 넘길수가 있나.. 그런데 며칠있다가 이번에는 우리나라 방송국에서 인간시대 라는거를 찍는다고 다시 사할린에 같이 가자고 하길래,, 아이고 기자양반이 나 살려줬소,, 하고 다시 따라나섰지.."
내가 본 것이 바로 그 인간시대 프로그램이었다..
" 세상에,,고맙지..그렇게 고맙지.. 사할린에 다시가서,, 그길로 돌아올 때 방송국에서 어른까지 같이 모시고 온거라,,일본방송하고 우리방송하고 같이 애써서 이렇게 모시고 온거라,, 그런데.......그런데.......그런데......"
결국 할머니는 오열을 하시고 말았다..
"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 오신지 이제 두달짼데,,이제 겨우 두달인데.. 이렇게 사고를 당해버렸으니,, 이를 어떡해,,이럴 어떡해,, 아이고 이를 어떡해...."
"의사양반들 우리 어른 좀 살려주소,, 저 어른 저렇게 돌아가시면 억울해서 어째 눈을 감아,,.의사양반 저 어른 좀 살려주소,, 내 나라에서 얻은 돈이 있으니 돈일랑 걱정 말고 제발 좀 살려주소,., 저 어른 이태까지 혼자서 밥해먹고 살았던 어른인데.. 이제 다문 몇 년이라도 수발받고 가시게 좀 살려주소,, 의사양반들,, 좀제발 좀 살려주소,,"
그 자리가 완전히 눈물바다가 되버렸다..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들으면서 우리는 눈물을 멈출수가 없었고, 우리뿐 아니라 식당 아주머니와 그 딸까지 눈이 벌개져서 펑펑 울었다..
할머니도 울고, 일년차도 울고, 인턴 선생과 나도 울고, 아주머니까지 우리는 모두 할머니의 그 한많은 피울음에 전염이되어버렸다..
그후 할머니는 본의 아니게 병원에서 스타덤에 올랐다.
인간시대를 봤던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기억해 냈고,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전한 그 뒷이야기들은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할머니가 병동 복도를 지나시거나,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 계시면 거의 모든 직원들이 할머니께 먼저 인사를 하고, 할머니를 뵐 때마다 할머니의 가슴 아픈 인생과 그 못지 않게 애절한 사랑 (?) 이야기에 가슴을 적셨다.
우리도 어떤 의무감에 사로 잡혔다.
할아버지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야 한다는 일종의 목표가 형성되었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누가 뭐라기도 전에 할아버지에 대해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거의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기로 묵계가 이루어졌다.
흉부외과 치프가 할아버지의 인공호흡기를 아예 전담하다시피하고, 우리도 할아버지의 상태를 놓치지 않기위해 아예 수술실 담당 3.4. 년차중에 한 사람을 중환자실에 따로 배치했고. 스텝들도 당연히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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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외부 압력도(?) 만만치 않았다.
NHK 에서 와서 실시간으로 현장을 스케치하고 , 일본에서 NHK 가 파견한 교포출신 일본인 의사가 자주 우리들에게 들러 할아버지의 용태를 수시로 문의하고 체크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생명지수가 높아지는 가운데 약간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개 노큐론,베카론, 몰핀을 투여하면 인간의 모든 근육은 ( 심장이나, 장 근육을 제외한 모든 골격근)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런 약제들은 근육의 수축 기능을 마비시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고, 당연히 가슴 근육도 움직여 지지않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환자의 경우에는 기계가 불어주는 숨과 빼내는 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워낙 긴 시간 노동에 종사를 해서인지 약제가 잘 반응하지 않았다.
근육이 완전히 늘어지지 않아서 환자가 기계호흡에 저항을 하면 인공호흡을 하면서 갈비뼈가 부러진 자리를 순응시키려는 우리의 시도가 먹히지 않는 것이다.
자연히 몰핀과 노큐론의 투여량이 증가했다.
그렇게 억지로 4일을 버틴후 부러진 갈비뼈가 자리를 잡고, 자기 호흡이 가능해지는 시점에 우리는 할아버지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스스로 호흡을 하시게 했다. 다행히 간파열부위에서는 출혈이 진행되지 않았고, 대퇴골의 골절 상태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4.일이 지나면서 이제 우리가 할일은 거의 없어졌다.
할아버지 옆에서 밤을 새울 필요도, 매일 사진을 찍고 검사를 할 필요도 없고 안정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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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5일째 일반병실로 보내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일단 죽고사는 문제를 벗어난 할아버지께서 저녘 때만 되면, 발작을 하셨기 때문이다. 저녘 시간이 되면 온몸을 뒤틀면서 알아 듣지 못할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양 팔과 다리를 침대에 부딪치며 거의 통제 불능상태로 들어갔다.
그때는 할머니도 소용이 없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특별 대우를 받아 늘 할아버지 곁에 계셨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녹색 수술가운을 입히고 에어샤워를 하시게 한 후 중환자실에 항상 계실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만의 하나 할아버지가 그길로 돌아가시면 이 두분의 한을 도저히 풀 도리가 없을 것 같아서 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인공호흡기를 달고 의식을 잃고 누워계시는 동안에 하루종일 두손으로 할아버지의 왼 손을 꼭 잡고 계셨다, 그리고 물수건으로 매일 얼굴과 손발을 딲아 드리고, 짬짬이 정성스레 다리를 주무르면서, 하루종일 작은 소리로 할아버지 귀에다 뭐라고 얘기를 하셨다,
그간 살아오시면서 겪었던 아픔을 하소연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할아버지가 회생하시라는 기도를 하시는 것일까?
사랑하는것과 반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가 늘상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열렬히 불꽃을 태우다가도, 금새 돌아서서 증오하는데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 이름 할 수 있을 까? 그렇다면 그렇게 잠시간의 인연으로 이어진 이 두분은 사랑은 참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들은 모두 사랑하는 것과 반하는 것을 착각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엉뚱하게도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몰핀에 잠들어 있는 할아버지와 그 손을 잡고 귀에다 말씀을 전하시는 두분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전해졌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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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이제 낮에는 의식을 회복해서 할머니와 두 손을 꼭잡고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시고,할머니가 떠먹여 드리는 죽을 받아 먹으시면서 어린아이처럼 마냥 행복해했지만, 밤만되면 다시 발작을 하는 일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정신과 의견으로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이었지만, 나는 혹시 몰핀 과량 투여에 의한 환각작용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할아버지의 발작과 다시 안정을 위한 몰핀투여,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다가 그래도 그로부터 10일정도가 지나면서 차차 할아버지가 안정을 찾으셨다, 아마 할아버지의 발작증상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무의식의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교통사고에의한 외상증후군일 수도, 혹은 지난 50년 세월을 사할린에서 중노동을 하며 겪었던 억압기제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몰핀때문이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발작을 할 때마다 외치는 고함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뭐라고 알아 듣기 힘든 소리로 중환자실이 떠내려 가도록 소리를 질렀고 우리는 그때바마다 황급히 몰핀을 투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할머니께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 지르시는거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 들으시겠어요?"
여쭈어보았더니,
놀랍게도
" 저거 ? 마르크스 레닌 만세 라고 하는거지.."
... 그러고보니 그 소리는 "마르크스 레닌 만세"라는 말이었다.
" 마르크스 레닌 만세 !!!" " 마르크스 레닌 만세!!"
할아버지는 의식이 가물거릴 때마다, 환영이 보일 때마다, 그렇게 마르크스 레닌 만세를 외치셨던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어지럼증이 일었다.
어느날, 결혼한지 두달된 어느 평법한집 외아들이, 순사에게 끌려가서 전쟁터로, 노동수용소로 끌려다니길 50년, 그리고 50년만에 귀향해서 아내를 재회하고 다시 두달만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당한 교통사고,, 그리고 인공호흡과.. NHK..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 만세...
내 가슴속에서 무언가
핏빛 구토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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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 보름만에 할아버지가 위험한 상태를 벗어났다
호흡도 정상이고 간이나 기타 다른 부위는 자리를 잡았다, 출혈도 없었고, 의식도 맑았고, 오히려 병원에서 두 노부부의 가혹한 운명과 대한 뜨거운 사랑(?)을 재확인 하는 난관이자 시험이었는지도 모른다 싶을 정도로 두분의 모습이 안정궤도에 들어섰다.
할아버지는 보름만에 중환자실 식구들의 박수를 받으며 일반 병실로 모셔졌다,
이제 남은 것은 약 일주일 후 정형외과에서 대퇴골과 팔의 골절 수술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수술도 만만치는 않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생명력이면, 그리고 두분의 우정 혹은 애정이면 마지막 관문은 쉽사리 통과 하리라 믿어졌다,
할아버지는 드디어 정형외과로 전과가 되었고,
이제 할아버지의 치료도 내 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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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놀라운 일이라도 병원에는 그보다 더 놀란만한 일들이 일상으로 일어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픈 사연도 이젠 다시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앞에서는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퇴원한 중환자실에는 어느새 다른 누군가가 누웠고, 그는 또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고 우리는 사선을 넘으려는 그들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끌어당기면서 이승의 문턱을 지키기위해 싸워야했다.
그러던 어느날 정형외과에서 컨설트 쉬트가 도착했다.
할아버지가 정형외과 수술을 앞두고 열이나고 혈액검사 결과가 안좋다는 것이다.
스텝을 필두로 우리팀이 정형외과 일반병실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진찰하기위해 정형외과 병동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보니 할머니를 뵌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할아버지를 진찰하던 스텝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 역시 직감적인 불안감이 들었다, 인턴 선생이 가져온 검사 결과지는 무언가 불길한 시그널을 품고 있었다,
혈색소가 감소하고, 혈소판이 절반정도로 떨어진 채, 백혈구마져 3000 수준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설마?"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패혈증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스텝의 지시로 황급히 혈액배양 검사를하고 일단 정형외과에서 다시 우리과로 전과를 한다음에 다시 중환자실로 모시기로 했다.
그런데 중환자실에 빈 베드가 없었다.
도리없이 비상용 장비들을 이용해서 일인용 병실에 임시로 중환자실을 차렸다.
일단 패혈증이라는 가정하에 반코마이신을 투약했다, 이 경우에 만약 패혈증이 아니라면 우리는 또 의료보험조합으로부터 부당진료로 낙인이 찍히고, 병원 행정당국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패혈증이 올 이유가 없었다, 중심정맥관이나 동맥관과같이 혈관에 열결된 관들은 이미 일주일전에 제거 된 상태였고, 인공호흡기도 제거된지 오래였으며, 골절상도 폐쇄형이라 세균 감염의 경로가 없었다,
부디 아니기만을 빌수 밖에 없었고.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빠른 조치가 취해졌으니 회생이 가능할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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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할아버지의 상황이 하루가 지날수록 악화되었다,
다시 호흡이 어려워지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가슴 사진상 폐주변으로 삼출액이 차기 시작했고.배에도 복수가 차고 팔다리가 퉁퉁 부어 올랐다, 어렵사리 중환자실의 베드가 비워지고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진 채 전 병원의 의료진이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결국 할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길로 떠나시고 말았다.
원인 미상의 패혈증,,
그 길고 고달픈 삶이 그렇게 끝났다.
할아버지의 삶에서 그나마 두달간의 귀향이라도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마치 손을 잡아줄듯 희망을 내비치던 운명의 여신의 냉정함을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시던날, 할머니는 아무말도 하시지 않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게되는 호곡성도, 울부짖음도 없었고 그전처럼 할아버지의 성한 한쪽 손을 모아쥐고,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장면과 심전도기기의 파동이 잦아드는 아득한 순간을 꺽꺽울음을 삼키면서 망부석처럼 그렇게 지켜보셨다.
중환자실 밖에는 NHK 와 우리나라 방송국의 방송 카메라 불빛들이 분주하게 오갔지만, 중환자실 내에는 깊고 깊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하얀포에 몸이 덮여진 채, 할머니에게 손을 맡긴 채, 그렇게 중환자실을 떠나셨다.
마르크스 레닌 만세 !!!
마르크스 레닌 만세!!
할아버지의 그 고함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를 유령처럼 맴돌고 있다..
2005/02/17 시골의사
첫댓글 너무.... 너무 슬프고 마음이 저리다
좆본인들시발…
할아버지ㅜㅜㅜㅜㅜ하
참... 뭘까 인생은..
일본방송국은 뭐야ㅅㅂㅜㅜ지들이 그렇게만들어놓고.,.ㅜ 마음아프다...
진짜 마음이 찢어지는 글이네....
할머니를 설득해 같이 삼겹살 먹으러가다니 정말 좋은 의사분들이시다
가슴이 턱 막힌다
하 너무 슬프다 ……..
시발 좆본 다 뒤져 ㅠㅠ 하 너무슬퍼
좆본새끼들 죽여라 미친것들 진짜 좆본 제발 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