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나 영화, 레저산업이 없었던 조선시대의 3大 구경거리를 꼽는다면, 「불 구경」과 「싸움 구경」 그리고 「사람 구경」이었다. 전통 초가집과 목조 한옥이 사라지면서 불 구경은 쉽게 볼 수 없게 되었고, 싸움 구경은 K1리그와 이종격투기 프로로 대체되었지만, 사람 구경은 아직도 유효하다. 사람 구경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그 분야에서 一家(일가)를 이룬 인물을 만나는 것이다. 一家를 이루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많은 고비와 난관을 돌파해야 할 뿐만 아니라, 運(운)까지 같이 따라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훌륭하다」라는 말을 「리파나 데스네」라고 표현한다. 「리파나」를 한문으로 쓰면 「立派」가 된다. 「派를 세우다」는 뜻이다. 그만큼 派를 하나 세우는 일, 즉 一家를 이루는 일은 어렵다고 본 것이다. 어려우니까 이야깃거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 李俊九(이준구·74)씨도 역시 필자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워싱턴 D.C에서는 2003년 6월28일을 「준 리(Jhoon Rhee)의 날」로 선포했다. 「준 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이민자로 아인슈타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헨리 키신저와 함께 203人에 선정되어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미국에 그는 태권도를 가지고 가서 성공한 사람이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로마제국 보다도 더 센 나라 아닌가. 로마제국에 아시아는 포함되지 않았다. 로마가 강성할 때 중국의 唐(당)나라는 영향권 밖의 전혀 다른 세계였다. 하지만 이제 구라파는 물론이고, 중국·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도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에 가서 얼굴이 노르스름한 한국 사람이 얼굴을 내밀기는 쉽지 않다.
더군다나 李俊九는 미국 정치를 주무르는 본바닥인 워싱턴에서 입신양명하였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비디오 아트의 白南準과 함께 미국 상류사회에 진입한 또 한 명의 인물이 李俊九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白南準은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의 예술을 가지고 한 초식 보여 주었지만, 李俊九는 태권도라고 하는 한국의 무술을 가지고 한 초식 보여 주었다는 점이 다르다. 광복 이후에 맨주먹 가지고 미국에 가서 가장 출세한 사람이 李俊九인 셈이다. 비디오는 환상이지만, 주먹은 현실이다. 개인적으로 비디오보다는 맨주먹이 더 와 닿는다.
서울 여의도의 한 유기농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필자는 高手(고수)들을 만날 때, 첫 느낌과 인상을 예의 주시한다. 언어 이전의 느낌을 중시하는 편이다. 과연 어떤 에너지를 풍기는 사람인가? 첫 대면의 순간 시골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태권도의 代父」라고 들었기 때문에 강인한 눈매에 매부리코 같은 콧대를 지닌 표정을 예상했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 보니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얼굴이었다. 잘생긴 미남 얼굴은 아니었지만 긴장되어 있지 않고 편안한 표정이었다.
몸에서 풍기는 氣感(기감)은 어딘지 정리되어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따뜻하게 품어 주는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한눈에 자기를 관리하면서 정돈된 삶을 살아온 풍모였다. 중·장년에 酒色雜技(주색잡기)를 즐겼던 인생은 이러한 얼굴과 기감을 결코 풍길 수 없다.
필자의 첫 질문은 諸元(제원) 확인부터 시작되었다. 첫 만남에서 형이상학적인 질문보다는 형이하학적인 질문을 해야 서로 부담이 적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부담이 적어야 인터뷰당하는 사람도 긴장을 적게 하고, 긴장이 적어야 이야기가 술술 풀리게 마련이다.
―키하고 체중은 얼마나 되는가.
『키 165cm에 체중은 65kg이다』
무술 高手들의 키가 작은 까닭
태권도의 代父라는 사람이 170cm도 안 되는 작은 키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무술의 高手들은 키 작은 사람이 많다. 1970년대 중반 386세대가 중·고교에 재학 중이었을 때 우상으로 섬겼던 「부르스 리」. 무술 배우 李小龍(이소룡)도 큰 키는 아니었다. 쌍절곤을 귀신같이 휘두르던 그는 아담한 체구였다.
「한국의 소림사」라고 일컬어졌던 부산 범어사의 靑蓮庵(청연암). 청연암의 兩翼(양익) 스님은 한국의 佛家에서 전설적으로 회자되는 무술 高手이다. 범어사 일주문을 한 번에 뛰어넘었다는 일화가 따라 다니는 인물이다.
필자는 7~8년 전 양익 스님을 청연암에서 친견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170cm가 안 되는 키에다 왜소한 체구라서 놀란 바 있다. 고구려의 전통 무술을 연마하는 단체인 氣天門(기천문). 기천문의 2대 門主(문주) 박사규도 매일 아침 3시간씩 계룡산의 靈峰(영봉)들을 나는 듯이 오르내리지만 그 신장은 170cm가 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박사규의 스승이자 1대 門主인 박대양도 역시 큰 키가 아니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무림의 高手는 작은 키가 많다는 사실이다. 크다고 장땡이 아니다. 키 작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스피드이다.
무술의 高手와 下手는 스피드에서 결판난다는 결론이 나온다. 힘도 힘이지만 스피드가 더 중요하다. 스피드를 내려면 체구가 작아야 유리하지 않겠는가? 따지고 보면 힘도 스피드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동차가 시속 60km로 달리다가 충돌하는 것하고, 120km로 달리다가 충돌하는 것은 그 파괴력이 엄청나게 다르다. 차이는 오직 스피드이다.
제원 확인 다음 순서는 四柱八字(사주팔자) 확인이다. 내 나름대로 터득한 知人之鑑(지인지감: 사람을 보는 감식력)의 한 초식이다.
―생년월일시는 어떻게 되는가.
『1931년 음력으로 10월27일이다. 태어난 時(시)는 어머니로부터 밤 12시라고 들었다』
밤 12시이면 子時(자시)에 해당한다. 사주 볼 때 子時 사주 보기가 어렵다. 子時는 오늘과 내일의 중간 시점이라서, 日柱(일주: 태어난 날의 기둥)가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子時 사주를 잘 보면 사주에 어느 정도 물리가 터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만세력을 놓고 뽑아 보니 辛未년, 己亥월, 丙申일, 戊子시이다. 사주 전체의 物形(물형)이 특별하게 개성 있는 사주는 아니다.
兆候(조후)로 따져 보면 겨울에 태어나서 추운 사주이다. 추운 사주는 大運에서 봄(木)이나 여름(火)이 들어와서 사주를 따뜻하게 덥혀 주어야 한다. 大運이 인생 전반부에 오느냐, 후반부에 오느냐가 문제이다. 전반부에 오면 「소년등과(少年登科:10代에 벼슬에 오름)」에 해당되어서 초반에는 잘 나가지만 중년 넘어가면 불경기를 맞이해야 한다. 연예인들이 이 경우가 많다.
先困後泰의 사주
인생살이가 묘해서 少年登科하면 대부분 뒤가 좋지 않은 경우를 여러 번 목격했다. 반대로 大運이 후반부에 오면 전반전은 고생을 감수해야 하다. 하는 일마다 꼬인다. 되는 일이 없다가 중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좋아지기 시작한다. 이름하여 「先困後泰(선곤후태)」이다. 먼저 고생하고 뒤에 태평하다는 뜻이다.
준 리의 사주는 先困後泰의 사례에 해당한다. 대략 40세 무렵부터 運이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하여 50세부터 본격적으로 궤도에 들어오는 大運을 타고났다. 말년까지 運이 계속 좋아서, 밥은 떨어지지 않을 팔자이다.
「태어난 곳은 어디인가. 태권도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사람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 몰두하는 것 아닌가」 물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청도이다. 충남 아산의 鹽峙面(염치면) 山陽里(산양리) 193번지에서 태어났다. 전주 이씨 景明君派(경명군파) 18대 孫(손)이다. 景明君은 조선초기 성종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서울 성균관에서 박사를 했지만 벼슬은 하지 못하였다. 韓日합방으로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수원에서 운수사업을 하다가 張勉 정권 때 수원시장도 잠깐 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물러났다. 李俊九씨는 광복 후 서울 혜화동의 동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태권도를 열심히 했다. 당시 견지동에 있던 靑濤館(청도관)에서 태권도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다섯 살 때로 기억된다. 동네에 가위를 쩔그렁거리며 다니는 엿장사가 있었다. 어머니의 헌 고무신을 주고 엿을 바꿔 주었는데, 옆에 있던 계집아이가 널름 내 엿을 뺏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다시 그 엿을 뺏으니까, 그 계집아이가 내 뺨을 세게 때려 버렸다. 그 여자애의 아버지는 순사였다. 일제 때 순사라면 무서운 직업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울면서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계집아이에게 맞아서 울게 되었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던 어머니는 사내놈이 여자에게 맞고 다닌다고 화를 내시면서 내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 순간 「항상 내 편이었던 어머니마저 내 뺨을 때리니,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의지할 사람이 없구나. 내 몸은 내가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로부터 몸을 강하게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때부터 역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텍사스 주립大에서 토목공학 전공
―미국에 간 시기가 언제인가.
『내 나이 스물여섯 살인, 1956년에 갔다. 아는 목사님의 소개로 텍사스 주립大 토목공학과에 유학을 가는 케이스였다. 군대에서 장교로 근무하면서 경비행기와 헬리콥터 정비를 했는데, 이 분야를 공부하는 유학생으로 갔던 것이다.
미국에 처음 도착한 곳이 샌프란시스코 공항이었다. 공항에 내릴 때 내 주머니에는 고작 46달러가 들어 있었다』
―미국에서 태권도와 관련된 일화를 이야기해 달라. 도전을 받았던 경우는 없었는가.
『1962년 워싱턴 D.C에 태권도 도장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당시 워싱턴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유도 도장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태권도 도장을 열었다고 하니까, 두 달쯤 후에 일본계 미국인 유도사범이 내 도장에 갑자기 찾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도장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무례한 행동이었다. 대뜸 들어와서 나를 보더니만 느닷없이 내 얼굴에다 주먹을 쭉 뻗으면서 「이렇게 하면 어떻게 막느냐」고 물어 보았다. 기습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행위였다. 여러 미국인 수련생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의 주먹이 내 얼굴 쪽으로 들어오는 순간에,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주먹을 막으면서 돌려차기로 그의 턱을 가격하였다. 나의 오른쪽 발꿈치가 그의 턱에 적중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자 그 유도사범은 일본어로 『마이타(졌다)』 하고 외쳤다. 이 장면을 목격한 태권도 수련생들이 감동하였다. 이 사건이 워싱턴에 소문이 났다.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사실은 턱을 가격당한 유도사범이 이후로 나의 도장에 학생들을 많이 보내 줬다는 점이다. 실력에서 자기가 졌다고 생각했으므로 깨끗이 승복했던 것이다』
李小龍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다
―당신은 영화배우 李小龍과 친교가 있었다고 들었다. 李小龍의 인상은 어땠는가. 그는 진짜 무술실력이 있었는가.
『내가 李小龍과 처음 알게 된 시기는 1964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LA에서 열린 「가라테 챔피언십」에서 만나게 되었다. 서로 대결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각자의 무술 실력을 시범 보이기 위해서 참석하였던 것이다. 李小龍은 그의 主특기인 쿵푸를 시범 보였고, 나는 태권도를 선 보였다. 그때 李小龍의 나이가 25세였고, 나는 34세였다. 그가 액션배우로 유명해지기 전이었다. 미국에서 같은 아시아인이자, 같은 무술인이라는 공감대가 있어서 서로 친했다. 나이는 나보다 아홉 살이나 어렸으니 마음속으로는 동생 같다는 느낌도 들곤 하였다.
그는 손이 아주 빨랐다. 무술 용어로 手技(수기)가 발달한 스타일이었다. 쿵푸는 손을 많이 사용한다. 후에 그는 자신만의 무술 스타일을 창안할 정도였다. 손 힘도 좋았다. 왼손은 등 뒤에 대고 오로지 오른손의 엄지와 집게손가락만을 땅바닥에 짚은 상태로, 내 눈앞에서 팔굽혀펴기를 할 정도로 손 힘이 좋았다.
홍콩에서는 길거리 복싱에서 우승한 적도 있었다. 길거리 복싱이란 아마추어 복싱을 가리키는데, 길거리에서 힘 좀 쓴다 하는 주먹들을 전부 제압했던 것이다. 그만큼 실전 주먹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나는 足技(족기), 즉 발 기술이 상대적으로 발달한 상태였다. 태권도는 발차기를 중시하므로, 발 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에게 발 기술을 알려 주었고, 그는 나에게 손 기술을 알려 주었다. 서로 한 수씩 주고받았다』
―그때 李小龍하고 이야기를 해 보니까 어땠나. 李小龍은 무술에 대한 사상적인 기반이 있었는가.
『그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 가운데 물(水)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난다. 쿵푸는 물처럼 부드러워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물의 유연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물의 유연함을 강조하는 「道德經(도덕경)」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였다. 자신의 정신적 근거 내지는 정체성을 道德經에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 역시 태권도를 하면서 물을 많이 생각하였다. 이 세상에 물처럼 부드러운 것이 없다. 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떨어지면 가장 낮은 데를 찾아서 흘러간다. 얼마나 겸손한가. 지상에서는 온갖 동물과 식물에게 생명을 제공한다. 그런 다음에는 수증기가 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사명을 다하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물은 무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배우를 해보고 싶었지만 문제는 마스크였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李小龍은 세계 영화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가 세계적인 영화배우로 뜨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당신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법하다. 배우가 한번 되어 볼 생각은 없었는가.
『왜 없었겠는가. 당시에 나도 배우를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문제는 마스크였다. 나는 얼굴이 받쳐 주지를 못했다(웃음). 李小龍은 미남이지만 나는 미남이 아니다. 여기서 운명이 갈렸다』
1955년 준 리가 25세 때 미국 비자를 받아 놓고 있는 상태에서 어느 식당을 갔었는데 관상에 조예가 있었던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한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식당을 나오는 그를 보고, 「귀한 골상을 가졌다. 큰 일을 할 얼굴이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그 노인이 어떤 점을 보고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필자에게 건넨다. 관상을 보는 법 중의 하나가 物形法(물형법)이다. 동물의 형태로 환원시켜 보는 관상법이다. 그 사람의 얼굴 특징을 잡아서 「사자 얼굴이다」, 「소 얼굴이다」, 「말 관상이다」 등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조물주가 볼 때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같은 피조물이니까, 서로 互換(호환)이 가능한 것이다.
필자도 물형법을 배우기 위하여 관상의 大家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하였지만, 자질이 둔감한 탓에 제대로 마스터하지 못하였다. 관상도 역시 포인트를 집어 내려면 직관과 영감이 중요한데, 「먹물」이 많이 들어가면 이 직관과 영감이 퇴화한다. 먹물들은 더듬기만 하지 정곡을 찍어 내지 못한다.
물형법의 大家로부터 받은 가르침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멘트는 『「동물의 왕국」을 많이 보아야 한다』였다. TV에 나오는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보면서 끊임없이 동물들의 행태와 특성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사람들의 행태가 동물들의 행태에 오버랩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었다. 오버랩이 되면 物理(물리)가 터지는 순간이다.
준 리의 관상은 원숭이相
준 리의 관상은 원숭이 관상과 비슷하다. 원숭이 관상을 가진 사람 중에는 이름을 날린 인물이 많다. 동물 중에 가장 지혜가 발달한 동물이 바로 원숭이다. 나무에 올라가 멀리 쳐다보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원숭이相은 멀리 보는 안목이 발달한 사람이 많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 본 학봉 김성일은 히데요시를 「원숭이 같은 얼굴」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한국에서야 죽일 놈이지만, 일본에서는 최대의 영웅으로 친다. TV에서 도덕경 강의로 유명했던 도올 김용옥도 원숭이 관상에 가깝다. 한국 사회에서 도올만큼 자기 하고 싶은 말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가 하면 1970~1980년대 한국 역술계를 풍미했던 함양 출신의 「박도사」(朴宰顯·박재현·1935~2000)도 원숭이 관상이었다. 미국에서 태권도의 代父로서 일세를 풍미한 李俊九도 자세히 보니 원숭이 관상에 가깝다.
그가 미국 사회에서 이 정도의 위치에 오르기까지는 무술도 무술이지만, 원숭이 관상 특유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지혜와 사물을 멀리 내다보는 통찰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 않았을까! 그런가 하면 얼굴 전체 크기에 비해 人中(인중)이 길고 잘 발달되어 있다.
인중은 코의 아래쪽이요, 입의 위쪽 부위이다. 이 부분은 50세 이후 그 사람의 운세를 나타낸다. 「인중이 한 치가 되면 수명이 100세를 넘긴다」는 말이 있다. 또한 인중이 잘 발달되면 아랫사람을 잘 거느린다. 보스 기질도 있다. 李俊九는 그러한 인중을 가지고 있어서 말년까지 왕성하게 사회활동이 계속될 조짐이다.
태권도의 힘은 規範
―태권도가 미국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던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다시 말해서 태권도가 미국의 主流사회 사람들에게 먹힐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규범」이다. 절도 있는 행동, 어른에 대한 공경, 자기에 대한 책임감, 술이나 담배와 마약을 멀리하게 해주는 힘이 태권도에 있다고 미국인들이 인식하였다. 내가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에서 청소년들이 검은 띠를 따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학교에서 우등생이 되어야 한다. 우등생이 아니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검은 띠를 주지 않았다. 둘째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검은 띠를 따려면 반드시 「부모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세 번째는 인성교육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인간성이 좋지 않으면 검은 띠를 주지 않았다. 이러한 교육적인 요소들이 미국 사회의 학부모들에게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워싱턴은 미국 정치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세계 정치의 중심이기도 하다. 각국 대사의 자녀들이 워싱턴에 있던 태권도 도장에 많이 다녔다. 태권도를 배우면서 아이들이 변하는 것을 목격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본국에 돌아가면 본국에도 태권도 도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태권도 사범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이기도 하였다. 세계 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에서 태권도를 가르쳤던 것이 국제 태권도 보급에 유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
―태권도 홍보는 어떻게 하였는가. 1970년대 중반 워싱턴에 갔다 온 사람들이 TV에서 태권도 광고를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1967년부터 워싱턴의 TV에 광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부터 1980년까지 대략 10년간은 엄청난 규모로 광고를 하였다. 당시 워싱턴에는 5개의 TV 채널이 있었다. 매일 한 군데씩 돌아가게 광고 배치를 해서 일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태권도 광고가 나갔다. CF와 함께 CM송을 제작하여 내보내는 광고였다.
그때 유명한 슬로건이 「Nobody Bothers Me」였다.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광고가 나가다 보니 워싱턴에서 준 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니 광고비도 엄청 나갔다. 「광고비를 너무 지출해서 망한다고 하더라도 광고를 하자. 얼굴 알려지면 태권도 사업이 망하더라도 국회의원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하는 배짱이었다. 먹을 것만 남겨 놓고 모두 홍보비로 지출하였다.
「Nobody Bothers Me」는 워싱턴에서 아이들의 유행어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까지 워싱턴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청소년들은 거의 모두 내 태권도 CF를 보고 자랐다.
흑인 인권운동가로 유명한 재시 잭슨 목사가 있는데, 그 아들이 재시 잭슨 주니어이다. 이 아들이 커서 국회의원이 된 후 나에게 태권도를 배우러 왔다. 그때 나를 만나서 한 말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TV에서 보고 들었던 선생님 CM송을 지금도 외우고 있습니다」였다. 신통하게도 내 앞에서 그 CM송을 외워 보였다』
―미국 의원들과의 인맥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워싱턴의 국회의사당內에는 국회의원 전용 체육관이 있다. 농구장·헬스시설·수영장·사우나 등이 있다. 여기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오전 7~8시까지 의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이 태권도 모임을 「국회 클라스」라고 부른다. 이 국회 클라스를 운영한 역사가 40년이다.
보통 한 기수의 인원이 15명 정도 된다. 과정은 제한이 없다. 본인이 배우고 싶을 때까지 배운다. 지금까지 국회 클라스를 통하여 배출된 인원이 300명 가량 된다. 그 사람들이 내 인맥이 되었다. 어지간한 미국 국회의원들은 나를 다 안다. 물론 수업료는 받지 않고 40년 동안 공짜로 가르쳤기 때문에 나하고는 각별한 정이 있다. 의원들이 「왜 돈을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디 나가서 기회 있을 때마다 태권도가 규범 교육에 좋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대답하였다.
미국 국회의원들의 태권도 스승
미국 사회도 역시 인맥사회이다. 인맥이 있으면 전화 한 통화로 끝날 일인데도 불구하고, 인맥이 없으면 해결이 어려운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인간사회는 어느 사회이든지 인맥을 떠날 수 없다. 워싱턴 政街에서 많이 회자되는 게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누구를 알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특히 상류사회로 갈수록 인맥이 더 중요해진다. 인맥이 없으면 진입할 수 없다』
―친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레이건 대통령 때는 교육고문을 지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나하고 아주 친하다. 부시는 나에게 태권도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나를 좋아했다. 아버지 부시 때는 체육고문을 지냈다. 現 부시 대통령도 인연이 있어서 1기 집권 시절 「아태정책 자문위원」을 맡았다. 콜린파월 국무장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된 아널드 슈워즈제네거, 밥 리빙스턴은 하원의장을 지냈는데, 검은 띠이기도 하다. 역시 하원의장을 지낸 강그리치, 클린턴 때 하원의장을 지낸 톰 폴린, 영화협회 회장을 지낸 잭 발런티, 미국에서 4000만 부가 나가는 잡지인 「퍼레이드」의 회장인 월터 앤더슨 등이 내게 태권도를 배웠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워싱턴에 가면 당신에게 미국 의원들과의 연결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李會昌씨가 1999년에 미국에 왔다. 大選에서 패하고 난 뒤에 야당대표로서 미국 정치인들을 만나러 온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 정치인들을 쉽게 만날 수 없었던 것 같다. 갑자기 나에게 전화가 왔다. 「모레 한국에 귀국하는데, 내일쯤 미국 정치인들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느냐」 하는 부탁이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하니까, 「국회의장·외교분과위원장·국방분과위원장·세출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이 네 명에게 연락을 하였다. 다음날 李會昌씨는 이 네 명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한 사람당 만난 시간은 대략 20분이었다. 이 네 명이 다른 약속들을 20분 정도 뒤로 미루고 내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요즘도 한국의 의원들이 워싱턴에 오면 나에게 줄을 대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래서 내가 미국 의원들에게 「한국 정치인들을 좀 만나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면, 美 의원들 쪽에서 농담 비슷하게 물어보는 이야기가 「에니미(enemy) 당이냐, 프렌드(friend) 당이냐」고 물어보는 경우 많다. 「열린당이냐, 한나라당이냐」를 확인하는 질문이다. 예전에 묻지 않았던 질문이다. 요즘 워싱턴의 정서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문화계나 학계 사람들도 그에게 신세를 진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정부에서 파견하는 駐美대사가 양지의 駐美대사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음지의 駐美대사는 李俊九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태권도를 통한 신뢰구축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그가 쌓은 공덕은 태권도를 통한 신뢰감의 구축이었다. 그는 75세의 노인이지만 걸어 다니는 자세를 유심히 보니 흐트러지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아는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걸음걸이가 팔자가 된다. 골반과 고관절이 굳으면 팔자 걸음이 된다. 대략 50代부터 엉그적거리면서 걷는 걸음걸이로 변한다. 그러나 李俊九의 내딛는 걸음은 팔자가 아니라 11자처럼 반듯하다. 11자처럼 일직선으로 발을 내딛는 걸음걸이는 그가 고도의 수련을 쌓았다는 증거이다.
李俊九는 걷는 자세도 그렇고, 앉아 있을 때의 척추 자세도 곧다. 중년이 되면 척추 아랫부분의 命門穴(명문혈)이 뒤로 빠져서 구부정하게 변하는데, 李俊九는 명문혈이 안으로 들어가 있어서 앉는 자세가 수직이 된다. 명문혈이 곧으면 신장의 정기가 아직 충만해 있음을 뜻한다.
「어떻게 이런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매일 운동을 한다』고 한다. 균형성·유연성·근육강화에 초점을 맞춘 운동이다. 균형성을 위해서 한 발로 올려차기를 한다. 올려찬 발 끝에 손을 잡는 자세이다. 그리고 나서 머리에 물컵을 올려놓는다. 물컵이 흔들리면 안 된다. 그리고 근육강화를 위해서 팔굽혀펴기를 매일 1000번씩 반복한다. 이 세 가지 운동을 매일 한다는 것이다. 30代부터 시작해서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2시간씩 이 운동을 했다고 한다.
「매일 하는 것이 힘들지 않은가?」 하고 질문하니까, 『규칙적인 반복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어야 기술이 된다. 반복해야만 세포가 기억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습관, 좋은 기술이란 세포가 기억하는 것이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매일 2시간씩의 이 규범이 사바세계에서 준 리를 흐트러지지 않고 지탱하게 해준 비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사가 서울 강남과 같은 사바세계에서 자기의 정신세계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매일 2시간씩은 명상을 하든지, 요가를 하든지, 아니면 자기만의 규범을 실천해야 한다. 만일 이게 안 되면 얼마 못 가 무너져 버린다. 세속세계에 오염되어 버리는 것이다.
武의 예술
―요즘 한창 활동하고 다니는 「10021 클럽」의 취지는 무엇인가.
『사람을 패는 태권도, 싸움하는 태권도가 아니라, 거기에 정신과 혼 그리고 사랑을 담은 武藝(무예)로 발전시키고 싶었다. 태권도의 완성은 武의 예술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武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바로 眞(진), 美(미), 愛(애)를 지향하는 태권도이다. 이런 철학을 가지고 태권도를 하면 「100년의 지혜가 깃든 21세의 젊은 몸」이 된다. 그게 「10021클럽」의 취지이다. 내 말년 인생의 염원은 眞·美·愛를 실천하는 태권도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그는 성공한 인생이다. 그가 평생 살아온 삶의 궤적이 75세의 얼굴에 담겨 있다. 출발은 몸을 단련하는 무술인에서 시작하였지만, 그와 장시간의 인터뷰를 거치면서 정리한 느낌은 인생을 어느 정도 달관한 사람의 인품이 묻어 나왔다.
『이제 돈·자식·직업 등 아무 걱정이 없다. 그저 사람들에게 「10021클럽」에 대한 강연만 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또 대접도 해준다. 이만하면 복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는 고백이 필자의 귀에 남는다. 武에서 道로 넘어간 인생이란 이런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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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