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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은 백년전 봉은사주지 청호선사의 환생으로 이세상에 오셨을까?
봉은사에는 불괴비첩(不壞碑帖)이라는 소중한 화첩이 전해진다.
돌에 새긴 비석은 무너질때가 있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한 공덕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925년 한반도를 덮친 최악의 재난으로 을축년 대홍수가 있다.
한강변에 살던 사람들의 집과 가축 사람들이 거센 물길에 힙쓸려 버렸다
거센 물살에 휩쓸려가는 708명의 생명을 살려낸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 1875~1933)의 구제행과 보살행을 기리기 위해 당대 대표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시·서·화를 모아 엮은 헌정 서첩의 이름이 불괴비첩이다.
역사적 배경 (1925년 을축년 대홍수)
1925년 7월, 한강이 유례없이 범람하여 송파, 잠실, 뚝섬 일대가 완전히 물에 잠겼다.
관(官)과 민간 구조대조차 거센 물살과 야간 암흑 탓에 구조를 포기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청호 스님은 사찰의 재정을 털어 뱃사공들에게 "한 사람을 구할 때마다 10전씩 주겠다"며 큰 보상을 걸고 직접 거센 강물로 배를 띄우게 독려했다.
나뭇가지와 지붕 위에 매달려 익사 위기에 처했던 주민 708명을 전원 구조해 봉은사로 데려왔다.
봉은사는 한순간에 수재민 피난소가 되었다. 청호스님은 절의 양식을 풀어 먹이고 입히며 치료까지 도맡아 수재민들을 온전히 보살폈다.
불괴비첩의 구성과 수록 내용
스님의 목숨을 건 활인(活人) 소식이 알려지자, 불교계는 물론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당대의 독립운동가·학자·서예가·화가들이 앞다투어 찬사와 감사의 글을 보냈고, 이를 165쪽 분량의 상·하 2부 서첩으로 엮어냈다.
월남 이상재(기독교 지도자·독립운동가):
종교의 벽을 넘어 청호 스님의 보살행에 깊이 감복하여 친필 찬시를 남겼다.
"반야의 거룩한 배 가는 곳마다 중생들이 다 함께 살아나네
般若慈舟所到處 群生同活
위당 정인보(국학자·역사가)
『불괴비첩』의 말미에 친필 발문(跋文)을 작성하여 스님의 의로운 행적과 서첩을 만들게 된 내력을 기록했다.
위창 오세창(서예가·독립운동가 33인 중 1인):
표제 및 스님의 활인 공덕을 찬탄하는 글씨와 제액을 남겼다.
청호 스님 본인의 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계를 지키고 10악을 짓지 않으면 병고액난의 재앙이 그칠 것이요, 이는 뭇 생명이 함께 구원을 얻는 길이라는 자비구제의 소회를 피력하였다.
문화적·역사적 의의
종교와 신분을 초월한 사회적 연대
일제강점기 암흑기에 불교 승려가 펼친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에 기독교계, 유학자, 서화계 등 사회 지도층 전체가 한마음으로 경의를 표한 보기드문 기록이다.
봉은사 수해구제 공덕비
『불괴비첩』의 발간에 이어, 1929년에는 목숨을 건진 주민들과 사부대중이 뜻을 모아 봉은사 경내에 「나청호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를 건립하였다.
봉은사 경내에는 초라한 작은 비석이 한점 서있다.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羅晴湖 大禪師 水害救濟 功德碑)가 바로 그것이다.
비문은 당시 불교학자이자 문장가였던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가 짓고, 당대의 서예 명필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가 썼다.
비문의 내용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 상황, 청호 스님의 결단과 구제 과정, 그리고 이를 기리는 찬탄을 유려한 한문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구성과 주요 내용
1925년(을축년) 여름, 억수 같은 폭우로 한강물이 범람하여 삽시간에 송파와 잠실, 뚝섬, 부리도(浮里島) 일대가 거대한 바다처럼 변했음을 묘사한다.
집들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수많은 남녀노소가 지붕 위와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울부짖으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던 긴박한 상황을 전한다.
관청의 구조선조차 사나운 급류에 휩쓸릴까 두려워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었다.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이 이를 목격하고 비통해하며 나섰음을 밝힌다.
스님은 사찰의 재정과 자금을 아낌없이 털어 뱃사공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한 명 구해 올 때마다 후한 삯(구조금)을 내리겠다.며 배를 띄우도록 독려했다.
스님 스스로도 물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두지휘하여 밤낮없이 배를 저어가 물에 빠진 이들을 건져 올리게 했다.
그렇게 물속에서 건져내 목숨을 살린 인원이 총 708명에 달했다.
스님은 구출한 이들을 모두 봉은사로 데려와 사찰 창고의 양식을 모두 풀어 밥을 지어 먹이고, 젖은 옷을 갈아입혔다.다치거나 병든 이들을 치료하고 안정시켰다.
수재민들이 집과 삶의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절에서 숙식을 온전히 책임지며 자비의 보살행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공덕의 찬양과 비를 세우는 까닭
세속의 도덕이나 말뿐인 자비가 아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수백의 목숨을 살려낸 스님의 행적은 진정한 불보살의 화현(化現)임을 찬탄한다.
살아남은 주민들과 은혜를 입은 사부대중이 그 거룩한 덕을 돌에 새겨 영원토록 잊지 않고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비를 세운다는 결구로 마무리된다.
비문 말미의 찬에서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게송을 새겨 청호 스님의 활인 공덕을 기렸다.
"거센 물결이 하늘에 닿아 뭇 생명이 어육(魚肉)이 될 찰나에,
스님의 자비로운 배(慈舟)가 험한 풍랑을 가르고 나아갔도다.
칠백여 목숨이 다시 살아나 새 삶을 얻었으니,
이 거룩한 음덕(陰德)은 산천과 더불어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청호스님이 대홍수로 죽어가는 사람들 708명을 구제한 백년후에 명진스님이 물속에서 열반에 들었다.
명진 스님이 봉은사 주지(2006년~2010년)로 재임하던 시절, 봉은사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사찰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명진 스님은 취임 직후부터 사찰 재정을 100% 투명하게 공개하고, 절에 모인 보시금을 사회의 가장 그늘지고 고통받는 이들을 구제하고 격려하는 데 집중적으로 사용했다.
사회적 참사·소외 현장 직접 방문 및 지원
스님은 어려운 일이 터진 현장을 직접 찾아가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금을 전달하는 등 현장 중심의 구제 활동을 펼쳤다.
용산참사 희생자 유가족 위로 및 지원
2009년 용산 4구역 철거 현장 화재 참사 당시, 강남 대형 사찰의 주지로서 직접 현장 분향소를 찾아가 분향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봉은사 신도들과 함께 모금을 진행하여 유가족들에게 1억 원이 넘는 위로금과 생계 지원금을 전달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 지원
대규모 정리해고와 파업 사태로 고통받던 쌍용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사찰 차원에서 긴급 생계비와 후원금을 지원했다.
천안함 희생 장병 유가족 위문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에도 희생 장병 유족들을 위로하고 사찰 차원의 위문금(1억 원 상당)을 전달하는 등 국가적·사회적 비극으로 슬픔에 빠진 이들을 두루 보살폈다.
일회성을 넘어선 상시 복지 체계 구축
명진 스님은 한 번의 구호에 그치지 않고,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 이웃들을 위해 상설 기구와 기금을 마련했다.
사회복지법인 '봉은' 설립 및 소외계층 지원
강남구 및 인근 지역의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기초수급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 밑반찬 배달, 결연 후원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매년 겨울 '자비의 쌀 나누기'와 '김장김치 나눔'을 대규모로 진행해 취약계층에 수만 포기/수천 포대를 지속해서 전달했다.
다문화가정 및 이주노동자 지원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되기 쉬운 다문화가정과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 쉼터 지원, 의료 봉사 활동을 정례화했다.
강남 구룡마을 등 빈민촌 긴급 구호:
화재나 수해가 자주 발생하던 판자촌 지역 주민들에게 긴급 구호물품과 복구 지원금을 사찰 차원에서 즉각 투입했다.
장학 사업과 미래 세대 격려
자비나눔 장학금 대폭 확대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잇기 힘든 저소득층 중·고·대학생들을 선발하여 매 학기 장학금을 지급했다.
단순 성적 우수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계와 학비가 곤란한 학생'들을 우선 선발하여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했다.
실천의 바탕: ‘사찰 재정 공개’와 ‘나눔 예산 배정’
명진 스님이 이러한 구제 활동을 대규모로 펼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사찰 재정의 100% 공개와 사회 나눔 예산 의무 배정이 있었다.
신도들이 낸 시줏돈의 수입과 지출을 인터넷 홈페이지와 사보에 매월 1원 단위까지 투명하게 공개했다.
이를 통해 절감된 관리 비용과 축적된 재정의 상당 부분을 사찰 내부 확장이 아닌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돕는 일에 최우선으로 배정함으로써, 과거 청호 스님이 보여주었던 봉은사의 ‘자비구제’ 전통을 현대 도심 사찰의 방식으로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명진스님 열반소식에 대통령부터.정치인사.이웃종교인등 각계의 안타까움과 추모사가 쏟아지고 있다.
백년전 봉은사에는 주지 청호스님의 활인공덕기리는 불괴비첩을 남겼다.
SNS에 쏟아지는 명진스님 기리는 추모사는 우리 시대의 불괴비첩이다.
봉은사가 명진스님 주지할때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피던 전통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사진 1번 봉은사 주지를 하면서 재정을 공개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핀 명진스님
사진 2번 을축년 대홍수때 708명 목숨을 구하고 봉은사를 수재민 피난소로 개방한 청호스님
사진 3번 청호선사의 공덕을 기리는 소박한 공덕비 봉은사 경내에 있다.
대홍수에서 구출된 사람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세운 작은 기념비이다.
/석현장

첫댓글 명진 중이 한 세상 잘 살았나 보네 추모 글들이 많은 걸 보니 하하.
이 땡초는 예전에 거 명진이란 중이 얕은 알음알이로 중생들이나 속이는 땡초 쯤 되나 보다 했었는데 거 추모 글들 보니
그도 아니었나 보구먼.
이 땡초는 하두 언론에 자주 나오는데 아주 입성이 깨끗하고 폼나고 뺀질빤질 해서 저 중은 옷 손질 하는 공력이면 득도 하고도 남았겠다 했었다. 하하하.
세랍 보니 살 만치도 살았고 거 더 늙어서 비엉비엉 하느니 적당한 때에 아주 잘 열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 늙어서 병원 들락 거리면 중 가오도 안서고 그럴텐데
하나 아쉬운 건 바다에 빠졌으면 떠오르지나 말았으면 좋았겠는데 그럼 아주 물고기 중생들에게 생공양 올렸다고 지금보다 더 야단법석이 났을 텐데 그게 쫌 아쉽네 하하하.
하여튼 잘 가시우 스님
지옥 가거든 이 땡초 자리나 하나 부탁 합세다.
거 염라국 명부전이 물 좋다는 소문 났습디다.
거 중은 사나 죽으나 무조건 생사람 다루는 소임을 맞는게 제일바라밀 입네다.
이 땡초 대종사도 염불에는 자신 있으니 거 잘하면 대박 나는 거 아니유?
거 지옥 중생들 모조리 천도재 지내서 往生 시키면 그 염불 값이 얼마유?
/최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