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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엣 것을 찾으라 (민 21:4-9)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각양 동물을 만들어 산과
들과 바다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새가 불만이 많았습니다. 네 개의 튼튼한 다
리를 가진 다른 동물들에 비하면, 두 개 밖에 없는 자신의 다리, 그것도 부러질 듯한 연약한
다리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도 너
무하십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 주면서, 왜 우리들에게는 이렇게 가느
다란 다리를 주십니까? 또 양 어깨에 이 무거운 날개라는 짐을 매달아 놓으신 이유는 무엇
입니까?" 새들의 불평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다른 짐승들처럼 땅 위를 달릴 필요가 없단다. 너희들이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양 날개를
활짝 펴 보아라"
이 이야기를 들은 독수리가 맨 먼저 육중한 날개를 활짝 펴 힘껏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 순
간 독수리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창공을 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새들도 일제
히 날개를 펴서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 올랐습니다. 새들이 짐으로 여겼던 날개는 창공을 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새들은 더 이상 굵고 튼튼한 다리를 부러
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
을 부러워하고, 나에게 있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
리가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인생의 날개'인 경우가 많습니다. 뇌성마비 장
애인인 송명희씨가 지은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장애를 짐이 아니라 날개로 만든 것입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족과
친구, 나를 향한 주위의 기대, 나에게 부과된 막중한 사명과 산적한 난제들, 가난과 실패, 건
강하지 못한 몸, 부족한 능력... 이런 것들이 사실은 짐이 아니라, 비상의 날개 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축제라도 벌려야
할 기쁜 때였습니다.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광야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
으로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양식이 필요할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시고,
목이 마를 때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잠시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모든 광야의 여정을 뒤로 하고 곧 가나안에 들어 갈 것이기 때문
에 마땅히 감사하고 찬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불평불만은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불만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
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의 은혜에 대해 우리에게 소중한 말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시간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
를 보면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우리 인생 길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브엘세바에 거의 가까이 왔을 때, 브엘세바로 올라가면 됐건만 모세는
평탄한 왕의 대로(민 20:17)가 아닌, 요단 동편을 따라 올라가서 여리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겠다고 하자, 백성들의 불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우회로를 선택할 수밖
에 없었던 이유는 에돔이 자국 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과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었습
니다(20:18-21). 모세는 할 수 없이 평탄한 '왕의 대로'가 있는 에돔 동쪽으로 진입하지 못
하고, '홍해의 길', 즉 아카바 만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광야 길로 가기 위해 다시 바란 광야
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백성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38년간 광야에서 방황했던 이스라엘은 지름 길을
제쳐 놓고 또다시 고역스런 광야 길로 나서야 하는 현실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세를 향한 불평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
어하노라"(민 21:5)
이들의 불평은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할만합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가까이 왔으니 올라가기
만 하면 되는데, 가까운 길을 놔두고 멀리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가자고 하니,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동안 하나님과 모세를 불평해서 얼마나
어려운 일을 당했던가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출애굽 한 지 2년쯤 되었을 때도 바로
지금 그들이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평과 불만으로 심판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열 두 명의 지도자들을 가나안에 보내 정탐하게 하였는데, 열 명의 정탐꾼이 부
정적인 보고를 하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
이 내린 재앙으로 죽었고 그들을 지지한 백성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장정들은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어떠한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결
코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모세의 지도에 순종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
히 불평 불만을 일삼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눈앞에 닥친 상황에 절망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맞닥드리면 대부분 절망하고, 불평 불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
평 불만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입
니다.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가스펠 싱어 '레나 마리아'라는 여인은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
었습니다. 이분에게는 손가락이 없습니다. 다리도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유럽 장애인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88장애인 올림픽에도 참여했었습니다. 이분
이 장애를 극복하고 가스펠 싱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역경을 이
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아이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한 아버지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레
나 마리아는 My Life라는 찬양에서 '예수님 당신께 제 마음과 영혼을 드리겠습니다. 나를
당신께 드리고, 당신 손위에 내 인생을 올려 두겠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장애를 극복한 레나 마리아처럼 우리들 또한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절망하기 보다는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았더라면,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
과 같은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안전하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불평 불만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 불만을 터뜨리고 있을 때,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오던
지도자 그룹 중에서 미리암과 아론은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또한 최고 지도자 모세도 가나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민 20:12). 조만간 지도자의 공백
이 우려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럴 때는 백성들이 서로 단합해야 할 때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야 하는 때입니다. 서로 마음을 가다듬고 단합해야 합니다.
20여 년 전에 제가 영국에서 일년동안 신학 연구를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
는 부교역자도 제대로 없을 때였습니다. 송항열 준목이 바로 부임해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
칫 지도자의 공백상태로 큰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당회원으로는
조재윤 장로님과 김영근 장로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장로님을 비롯한 성도들의 기도
와 수고로 우리 교회는 제가 있을 때 보다 오히려 신앙이 더 단단해졌습니다. 저는 제가 없
을 때, 그렇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계신 모습을 보고 서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웠
습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성도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위기 상황을 맞아 서로 협력하고 조심하기 보다는 불평 불만으로 큰 고
통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 21:6)
하나님께서는 사막에 거하는 맹독성 뱀을 징계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불뱀'이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가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백성들은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뱀을 보내 징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불평과 불만은 개
인과 공동체를 파멸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빠져 나
갈 수 없습니다. 그 전에 스스로의 마음과 입술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두꺼운 노트 한 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인 불평록"이라고 써있었습
니다. 이 노트는 교인들 가운데 찾아와서 불평하는 말을 다 적어놓은 책이었습니다. 그 목사
님은 교인들이 찾아와 교회 혹은 교인들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으려고 하면 그 노
트를 꺼내 펜을 들고 받아 적으려고 기다렸습니다.
"자 여기 불평록이 있으니 말씀하시는 대로 내가 여기에 적어놓겠습니다. 그러면 끝에 싸인
이나 해 주세요. 내가 시간이 나면 그 문제를 정식으로 내놓고 문제를 삼아 바로 잡도록 노
력하겠습니다." 그러면 불평하러 온 사람은 당황하며 말하기를 "아니요, 뭐 기록에 남기고
사인까지 할 만한 이야기는 못됩니다." 그리고는 무안해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40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그 '불평록'에는 단 한 줄로 기록된 내용이 없었습니
다. 불평을 하기는 좋아하지만 그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는 못하겠다는 것이 사람입니
다. 그런 불평이라면 하나 마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안 하는 편이 오히려 유익한 말일 것
입니다. 불평은 꼭 파멸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징계를 깨닫고 모세에게 호
소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
서"(민 21:7). 비록 늦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위기 앞에
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훌륭한 신앙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라고 말
씀하신 것처럼, 환난 날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성전건축이라는 대 사업
을 하면서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
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위에 달라 물
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고 하셨습니다.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려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치유방법은 상식적인 것이 아니
었습니다. 신비한 약을 먹거나 바른다든지, 신비한 물 같은 것으로 씻는다든지 하는 것이 아
니라, 놋으로 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상한 치유방법을 그대로 행한 사람들은 정말로 해독이 되
고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가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이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 삽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있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삽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별 같은 인물들이 많이 나왔
습니다. 석가, 공자, 마호메트 같은 성자들도 있습니다. 아니 위대한 철인들, 영웅 호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도 있는데 예수만 바라보아야 산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러나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
니라"(요 14:6)고 하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 록펠러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
었습니까?" "저의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한 것뿐입니다"고 하면서 십일조 생활의 비밀을 털
어놓았습니다. 오늘의 경제적 위기에서도 성경은 온전한 십일조 헌금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손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순종하느냐를 보시고 계십니
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온전한 십일조를 결단하지 못하는 분은 오늘 결단하십시오. 하나
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땅엣 것을 바라보기보다 위엣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땅엣 것을 바라보면 불
평·불만 뿐입니다. 그러나 위엣 것을 바라보면 감사·찬양 뿐입니다. 땅엣 것을 바라보면
절망할 것뿐입니다. 그러나 위엣 것을 바라보면 소망이 넘칩니다. 땅엣 것을 바라보면 문제
는 더욱 꼬여갈 뿐입니다. 그러나 위엣 것을 바라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은
혜와 축복을 기대하고 감사하며 주님만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내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느냐? (민 21:4-9/히 5:7-10/막 10:35-40)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사순절에 몇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온 말씀, "내가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느냐?"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인 세베대의 두 아들이 오늘 예수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 두 사람이 와서 예수에게 요청합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왼쪽과 오른 쪽에 우리 둘을 좀 앉게 해주십시오." 요즘 말로 하면 대권을 잡으실 때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하여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들이 스승에게 요청하는 것은 어쩌면 큰 무리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영광을 받으실 때"라는 조건부입니다. 주님께서 어려움을 당하실 때 어떻게 해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요청을 좋게 여기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를 따라왔건만 고난받는 종인 스승의 운명은 생각지 않은 채 "영광을 받으실 때" 한 자리 차지할 것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두 제자는 한 가지 기억을 되씹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평소에 늘 제자들을 모아놓고는, 인자(人子)는 반드시 들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구약시대에서부터 전해진 한 가지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회상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아우성쳤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목마르다고 소리쳤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해서 백성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려고 하는데, 백성들이 참지 못하고 하나님까지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벌을 주셨습니다. 뱀을 풀어서 물리게 한 것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없는 광야에서 뱀에 물리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 백성의 탄원을 들어주십시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막대기에다 구리로 만든 뱀을 매달아 세워놓고, 누구든지 독사에 물린 사람은 이 구리뱀을 보면 산다고 했습니다. 그 구리뱀은 그래서 "들린 뱀"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자들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뇌리에 남아있는, 과거부터 배워서 아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인자는 들려야 한다고 했을 때 구리뱀과 마찬가지로 인자도 영광스럽게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높이 들림을 받으실 때는 분명히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라고 믿고서, 그렇게 되면 자기들에게도 영광의 자리를 나누어주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 요청에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이어서 묻습니다.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겠느냐?" 두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참된 영광의 자리는 고통의 자리 위에, 부활의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 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 뒤에는 수난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두 제자가 예수의 좌 우편에 앉혀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두 제자라고 하면 이 수난절에 주님께 무슨 요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높이 들린 예수의 좌 우편에는 강도 두 사람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혹시 세베대의 두 아들의 요구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두 강도 대신에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 좌 우편에 못박혀 있었더라면 수난절의 이야기는 아주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의 대답입니다. "좌 우편에 앉게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결정할 일이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수난의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고난의 세례를 함께 받으면 그 뿐이다." 예수가 받은 그 수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은 모든 사람들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엄청난 수난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서기 313년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해입니다. 그렇게 국교로 공인받기 전 3백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은 기독교의, 교회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수난의 절정기였습니다. 어떤 수난을 얼마나 받았느냐 하는 것은 너무 심하고 많아서 일일이 말씀드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십자가 형틀에 달린 예수보다 결코 덜하지 않는 심각한 수난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가장 큰 이유는 로마의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 숭배는 결코 종교행사만이 아닙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요, 통치의 방법이요, 그래서 로마의 기반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판과 저주와 수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밝은 지상에 있지 못하고 지하 무덤인 카타콤으로 내려가서 예배드려야 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내놓은 국정 홍보 책자에 보면(그런 책자는 없었지만, 요즘에 빗대서 말한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무신론자다. 이 사람들은 가족을 떠난 사람들이고,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들이다. 카타콤에서 부정하게 음행을 저지르는 자들이다. 성찬을 한답시고 피와 살을 뜯어먹고 마시는 흡혈귀들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정권 안보차원의 선전들이 유포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붙잡아 불로 달군 쇠로 몸을 지졌습니다. 눈을 뺐습니다. 귀를 잘랐습니다. 사지를 잘랐습니다. 그 사지가 잘린 몸뚱이를 굶주린 사자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야생동물의 가죽을 씌어서 사냥개들에게 던져 주기도 했습니다. 네 마리의 말에다가 사지를 묶고 말을 몰아서 사지를 찢어 죽였습니다. 이런 박해와 수난의 피 위에서, 313년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는 위대한 역사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고난받은 "주님의 몸 된 교회"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그대들도 마시겠느냐?" 수난
가운데서 가장 큰 수난은 몸이 아픈 수난은 아닐 것입니다. 차라리 몸의 고통은 그런대로 참고 견딜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인생살이에서 가장 큰 수난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육의 수난만이 아니라 우리가 능멸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몸과 마음을 합한 전인적인 수치일 것입니다. 예수는 고통과 수치를 동시에 당했습니다.
첫 번째 수치는 이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버림을 받아서 십자가에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의 수치, 이 수치가 예수에게는 수난의 절정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수치는 이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무능력의 상징이었고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의 상징이었습니다. 만약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서 처형당하는 것을 본다면, 휴머니스트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할 것이고, 세속주의자는 불필요한 일이라고 할 것이며, 오늘날의 합리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불합리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인간이 개발한 어떠한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보더라도 십자가 사건은 바보짓입니다. 광대극입니다. 이 모든 폄훼를 뒤집어 써야 하는 것은 예수의 수난에 담겨있는 또 하나의 수치입니다.
또 다른 수치가 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제자들의 배반, 그렇게도 몸을 바치고 마음써서 위해 주었던 민중의 배반, 이스라엘의 배반, 이런 배반에서 예수의 수치는 다시 극에 달합니다. 예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겪어야 할 이러한 수치를 너희가 알든 모르든, 이러한 수치를 나랑 똑같이 당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세베대의 두 아들은 여기에 답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수치 없는 영광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수난절의 참된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 던져지는 예수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나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런 수치를 당해도 나를 그리스도로, 구세주로 고백하겠느냐?" "내가 받은 세례를 너희도 받을 수 있겠느냐?"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결단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수난을 통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복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수난 가운데에서 복종하는 것을 배웁니다. 수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종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어떤 복종입니까? 제도에 의해, 신분 질서에 의해 강요된 복종은 오늘 성서가 말씀하는 복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종"이 아니라 "굴종"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굴종한 게 아닙니다. 예수의 복종은 자유와 평화의 나라, 하나님 나라,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한, 이미 하나님 아들의 복종, 곧 자유인의 복종이었습니다. 해방되고 자유한 사람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하는 하나님 찬양, 하나님 복종은 굴종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무조건 부모의 뜻을 따르도록 강요받고 자란 자식은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는 "굴종"을 배웠을 뿐입니다. 진실로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은 자식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자식들을 진정한 자유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젊은 세대에게 자유를, 책임 있는 자유를 주어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을 하게 될 때, 그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복종의 바탕은 주지 않은 채 복종을 강요하여서는 결코 복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복종을 합니다. 그 예수는, 그가 달린 십자가는 참된 복종의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가장 자주 받은 질문입니다. 당신이 오시겠다고 약속한 그분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겠다고 하신 메시아 그분입니까?" 예수의 대답입니다. 상징적인 대답입니다. "나는 미래로부터 왔습니다.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왔습니다. 나는 희망의 나라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희망의 나라로 돌아갈 것입니다. 미래로 돌아갑니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떠나온 고향이 확실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생각입니다. 두고 온 고향이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험난한 세월을 겪으면서 떠나온 고향과 돌아갈 고향이 다른 경우도 생깁니다. 여러분에게는 떠나온 고향과 돌아갈 고향이 같은 곳입니까? 우리는 죽어서 육신이 묻힐 수 있습니다. 흙에서 왔기 때문에 흙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미래로 돌아가는 것처럼 당신들도 미래를 향해서 갑니다. 과거에서 왔으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서 온 여러분은 다시 미래를 향해 갑니다."
예수님에게는 떠나온 고향과 돌아갈 고향이 같았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의 고향은,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미래입니다. 우리가 온 고향도 미래입니까? 이게 오늘의 질문입니다.
어느 신문에서 입양아에 관한 이야기하나를 읽었습니다. 작년에 홀트아동복지회 통계를 봤더니 홀트복지회를 통해서 외국에 혹은 국내에 입양한 입양아가 1,592명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해외로 1,065명이 입양해 갔고 국내로 527명이 갔습니다. 국내 입양의 두 배 가량이 외국으로 입양되어 갔습니다. 그 중에 지체장애아, 정신장애아 등의 장애아는 423명이 해외로 입양되어 갔는데, 국내 입양은 딱 2건밖에 없습니다.4월 5일 식목일에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개막전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시구(始球)할 사람이 정해졌습니다. 아담 킹이라는 중증 지체장애아인 한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네 살 때 중증 장애 상태에서 입양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양부모 킹 부부의 세 번째 양자 입적되어서 이제는 자기가 태어난 이 땅에 와서 프로야구 개막식에서 시구까지 할수 있을 정도로 잘 자랐다고 합니다. 이 아이의 양부모 두 사람은 모두 여덟 명을 해외에서 입양을 했는데, 그 중에 여섯 명이 장애아라고 합니다. 이 아버지는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냥 따랐을 뿐입니다. 장애아들은 더욱더 사랑이 필요합니다. 장애아라고 해서 쉽게 포기하는 한국 사람, 장애아이기 때문에 더욱더 입양을 꺼리는 한국 사람, 저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아담 킹, 시구할 아담 킹, 이렇게 물을 겁니다. "저를 낳아준 고향, 제가 돌아갈 고향은 어딥니까? 한국? 너무 멉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 저를 낳아준 어머니는 누굽니까?
저를 버린 어머니는 누굽니까?" 이 아이가 가야할 고향은 다시 자기를 버린 이 땅일까요? 시구하면서 이 아이가 이렇게 말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돌아가야 할 고향, 다시는 버림이 없는 다시는 나와 같은 고통이 없는 고향, 하나님이 주인이신 그 나라로 가고 싶습니다. 야구공이여 날아가라!"
십자가의 고향은 골고다입니다. 부활의 고향은 하나님나라입니다. 골고다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 현장입니다. 그 골고다 언덕 속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인 하늘나라가 현재화되어 있습니다. 골고다는 영광이 아니라 고난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음속에 담고 나면, 예수와 함께 죽고 나면, 바로 거기에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나라가 펼쳐집니다.
부활절 아침을 우리는 기대합니다. 골고다는 하나의 장소입니다. 수난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우리가 가야할 미래의 희망이 펼쳐집니다. 골고다 언덕은 하나의 시간입니다. 미래가 현재화되는 시간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합하면 바로 여기 이곳, 라틴말로 히크 앤 농(hic et non)입니다. 수난의 현장인 이곳에 하나님나라가, 수난이 이어지는 이 십자가의 시간 속에 부활의 시간이 잉태됩니다.
이 잔을, 이 세례를 여러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한테 수난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십자가의 부활을 잉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참예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