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11월 13일(중산간 마을 초토화)
새벽 2시께, 제주도 중산간마을인 조천면 교래리(이하 당시의 지명임)를 포위한 토벌대는 집집마다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불기운에 놀란 주민들이 황급히 집밖으로 뛰어나오자 군인들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 나왔다. 드넓은 교래리 벌판에 총성과 비명이 뒤섞였고 불바다를 이룬 마을에선 하늘과 땅이 온통 붉었다. 1백여 가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던 설촌 7백년의 유서깊은 마을이 하룻밤새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제주도에서는 거주지역을 크게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로 나눠 부른다. '중산간'이라 함은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마을 뿐아니라 불과 2~3km 거리에 있는 마을까지도 통칭한다. 통상 해변을 따라 형성된 일주도로변의 마을을 제외하고는 대개 '중산간'이라 부른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날 '폭도'라고하여 학살된 희생자 중 파악된 신원은 다음과 같다. 김인생의 어머니(당시 70살) 김성진(65) 김성지(63) 김성지의 아내(60) 양재원(60) 양재원의 아내(60) 김만갑((57) 양관석(여, 50) 김채화(여, 45) 김채화의 아들(5) 부자생(44) 부영숙(여, 38) 부영숙의 아들(3) 신보배(여, 25) 양남선(여, 25) 양남선의 아들들(5, 3) 고계생(여, 18) 김영자(여, 15) 고옥심(여, 14) 김순재(여, 14) 김순생(10) 김문용(9) 등이다.
이건 토벌이 아니라 무자비한 살인극이었다. 시신들 대부분은 총에 맞은 채 불에 탔고, 열네살난 한 소녀의 시신에는 대검이 찔려 있었다. 주로 노약자들인 이들의 '죄'는 재빨리 도망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날 양복천 할머니(81세)는 어린 딸과 함께 총상을 입었고 아홉 살난 아들(김문용)을 잃었다. 양 할머니는 그날을 이렇게 증언했다.
"새벽에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자 젊은이들은 황급히 피했습니다. 난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그냥 집에 있었어요. '설마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이겠느냐'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집에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요.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빌었어요.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 픽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 하며 내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발을 쏘았습니다. '이 새끼는 아직 안죽었네!' 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들은 가슴에 총을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군인들이 가버리자 나는 우선 총맞은 아들이 불에 타지 않도록 마당으로 끌어낸 후 딸을 살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딸이 울지 않았기 때문에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지요.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리려는데 담요가 너덜너덜해요.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왼쪽 무릎을 부숴놓은 겁니다. 두 번째 생일날 불구자가 된 딸이 벌써 쉰두살입니다."
초토화작전의 학살극은 중산간마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개령(疎開令)에 따라 해변마을로 내려온 사람들의 희생도 컸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수시로 학살했다.
*1948년 12월 22일 표선리로 소개한 가시리 주민 76명이 속칭 '버들못'에서 집단학살됐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이 대조했다. 그 결과 젊은이가 사라진 경우엔 '폭도로 산에 오른게 분명하다'며 총살했다.
본래 해변마을이 고향인 주민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보초를 서며 목숨을 이어갔지만 고초를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끼니를 굶으면서도 토벌대의 밥상에는 고기반찬을 올려야 했다. 토벌대는 걸핏하면 무장대 지원혐의가 있다며 총질을 했다. 보초서다 졸았다고 총살하기도 했다. 안덕면 화순리의 박갑송(당시 25세)은 밤새워 보초를 서다 이상한 물체가 보이자 큰소리로 수하를 했다. 술에 잔뜩 취해있던 토벌대는 자신을 놀래켰다며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함께 보초서던 한 사람은 목숨은 구했으나 심한 구타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정신이상자로 살다 얼마전 작고했다.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해 여성들의 수난도 컸다. 성산면 시흥리의 박태수 할머니(당시 60대 중반)에게는 스물살 가량의 손녀 오아무개가 있었다. 오아무개는 주변에 소문난 미인이었다. 서북청년단원이 그녀를 탐했지만 할머니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화가난 토벌대는 할머니를 대낮에 길가로 끌어내 총살했다. 안덕면 감산리의 강매옥(당시 19살)은 군인들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았다. 강매옥의 언니인 강경옥 씨(78)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 주둔했는데 그중에서 '최 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지요.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맘대로 되지않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교전 중에 숨진 무장대가 아니라 불가항력의 주민들이었다. 무장대의 기습공격을 받은 직후엔 반드시 화풀이 학살극을 벌였다. 해변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는 50년 전부터 매년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마치 명절처럼 집집마다 제사를 지낸다. 사건의 발단은 *1949년 1월 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일부 병력이 이동 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두명이 숨졌다. 당황한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담아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노인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총살했다. 곧이어 2개 소대의 병력이 북촌리를 덮쳤다. 군인들은 모든 가옥에 불을 붙이면서 주민들을 북촌국민학교에 집결시켰다. 이때부터 자행된 학살극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돼 남녀노소 약 300명이 숨졌다.
군인들은 '내일 아침까지 대대본부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남기고 돌아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미 학살극을 치렀으니 더 이상의 희생은 없을 거라는 사람들과 군인들의 행태로 보아 또다시 총살할게 분명하다는 사람들로 의견이 나뉘었다. 그런데 산으로 피한 사람들은 무사했지만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대대본부로 갔던 주민들 가운데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빨갱이 가족 색출작전'에 휘말려 총살됐다. 흔히 '북촌사건'으로 알려진 이때의 희생은 북촌리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북촌리 옆마을인 구좌면 동복리 주민들도 마을의 속칭 '굴왓'으로 끌려가 집단학살됐다.
4·3 때 제주는 이미 사람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집단 광기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곳곳에서 잇따라 벌어졌다. 서귀면 서호리의 오방화 여인(당시 36세)은 물동이를 지고 가다가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에 얼굴 광대뼈 밑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오방화는 총에 맞은채 필사적으로 집을 향해 기어갔다. 오방화의 아들 김만오(당시 16세)는 깜짝놀라 어머니를 감싸 안았다. 그때 뒤쫓아온 군인들이 김만오의 뒤에서 총을 쏘았다. 총알은 엉덩이에서 사타구니까지 관통한 후 다시 그의 어머니의 허벅지를 뚫었다. 50년 세월 한을 삭히며 살아온 김만오 씨(66)는 취재반에게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날의 사건은 내 인생을 바꿔버렸습니다. 난 지금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흉칙한 상처에 약을 발라야 합니다. 일제 때 읽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타메시키리(試斬)'란 악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새 칼을 만들면 과연 진검인지 그 성능을 시험하는 것인데 실제로 사람을 베었다는 것이지요. 인간에겐 칼을 쥐면 찔러보고 싶고, 총을 잡으면 쏘고 싶은 잔인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엔 그런 심리가 숨어있다가 난리가 나면 드러나지요. '4·3'이라는 난리가 군인들을 광기로 몰아넣은 것 같습니다"
광기의 조짐은 사태 초기부터 있었다. 처음엔 '말 태우기'와 '뺨 때리기'가 유행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 돌게 했다.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곧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의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표선면 가시리 안공림 씨(58)는 여덟살 나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안 씨는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했다"고 말했다.
미친 짓거리는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마당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했다. 4·19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국회에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위가 구성됐다. 이 때 한 증언자는 내도한 국회의원에게 "군인과 서북청년단들이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고 폭로했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제주도민들이 4·3을 이야기할 때 가장 흔히 듣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서청의 만행은 4·3발발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 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을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됐다.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출신은 경찰들도 꼼짝못했다.
중문면 상예리의 강기주는 당시 제주경찰청 고위간부인 강기천 총경의 동생이었다.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되던 1948년 11월 중순께 서청이 상예리에 들이닥쳤다. 모두 죽을 위험에 놓였을 때 강기주는 "나는 강기천 총경의 동생입니다. 무고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청은 "경찰간부면 다냐. 이 새끼는 더 악질이다"며 그 자리에서 먼저 총살했다.
1948년 말 경비대총사령부는 제주주둔 토벌대를 9연대(연대장 송요찬)에서 2연대(연대장 함병선)로 교체했다. 2연대가 들어오면서 서북청년단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승만은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며 서청의 제주파견을 앞장서 독려했다. 미군 장교들 역시 이에 개입했다.
연대 내에 서청으로만 구성된 '특별중대'가 편성될 정도였다. 서청 특별중대가 주둔했던 성산포, 구좌면 월정리, 한림면 한림리에서는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연일 총살극이 벌어졌다. 성산포의 속칭 '터진목'은 대표적 학살터이다. 한 증언자는 "얼마나 끔찍했으면 그곳에서 보초서던 순경조차 충격을 받아 입이 삐뚤어졌다"며 "그 순경은 병을 고치려 무당 불러 굿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날의 사연들은 너무도 처절해 상상력을 압도한다. 비슷한 증언을 들었으면서도 언제나 머리가 쭈삣 서고 소름이 돋는다. 단순히 총맞아 죽은 희생은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애써 증언을 듣다가도 갑자기 가뿐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하는 연로한 증언자를 대하면 은근히 걱정도 되고, '도대체 지금 내가 뭘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던 홍경토 씨(70)는 학교의 등사판이 없어지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겪었다. 서청이 "폭도들 삐라제작을 위해 빼돌린게 분명하다"며 교사들을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홍 씨는 자신이 목숨을 구하게된 가슴아픈 사연을 이렇게 털어놨다.
"서청이 이런 저런 구실을 댔지만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난 주정공장 창고에 갇혔는데 내 옆에는 형도 있었습니다. 끌려나가는 형의 발목을 한 번 만진게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창고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엔 그 냄새로 잠을 못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정아무개 선생 덕분입니다. 정 선생은 나의 약혼녀인데 한달만에 풀려나와 보니 정 선생은 차아무개라는 서북청년단 간부와 결혼해 있더군요. 날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겁니다. 현재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정 선생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밖에도 더 이상 차마 글로 표현키 어려운 참혹한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어떻게 문명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공공연하게 자행될 수 있었는가. 서청도 인간인데 갑자기 악의 화신이라도 됐다는 말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을 때는 불가항력의 주민들을 학살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가. 의문은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도 역사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집단 광기는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집단광기로 몰아넣었는가. 도대체 누가 사설단체인 서북청년단에게 무기를 주어 학살극을 조장했는가.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살피는 것이 4·3진상규명의 열쇠라 할 것이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바로 이승만과 미군에 그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초토화작전 기간 중에서도 *19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은 집단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때이다. 이무렵 토벌대는 입산한 사람들을 총살한 후 목을 잘라오기도 했다. 그래야 전과(戰果)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 서청 출신 증언자는 "목을 잘라오면 승진을 시켜주었다"고 말했다.
*1948년 12월 25일 서귀면 주둔 토벌대는 작전을 마치고 내려올 때 길목인 서홍리를 들렀다. 서홍리 주민들은 그 때 토벌대의 손에 들린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다. 한 할머니는 "어떤 여인에게는 자기 아들의 목을 들고 내려오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전과를 확인시키기 위해 목을 잘랐다는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난 1992년 북제주군 중산간의 속칭 '다랑쉬굴'에서 시신 11구가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취재결과 그 유골들은 *1948년 12월 18일 중산간에 대대적인 수색전을 펼치던 토벌대가 굴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발견, 연기를 피워 질식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희생자 중에는 여자와 아홉 살 난 어린이가 포함돼 있었다.
*19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킨 후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를 따로 세웠다. 또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달빛에 비춰가며 젊은여자들을 불러냈다. 불려나온 150명이 군인들에게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이들은 18일과 19일 이틀동안 총살했다. 한 유족은 "만일 사상문제를 구실삼는다면 18세부터 40세까지만 사상이 있으며, 유독 젊고 예쁜 여자들만 사상에 연루됐겠느냐"고 항변했다.
또 그즈음에는 '함정토벌'과 '자수사건'이 잇따랐다. 토벌대는 무장대처럼 낡은 옷으로 변장해 민가에 들어가 "산에서 왔다"며 식량을 요구하거나 숨겨줄 것을 애원했다. 측은하게 여겨 밥을 주는 사람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토벌대에게 총살됐다. 또한 여기저기서 소위 '자수강연'이 열렸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산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했다.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 뒤따랐다. 사태 초기 무장대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을 때 주민들 어느 누구도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옷가지를 올렸고, 쌀 한되 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나 둘 자수자가 나오자 토벌대는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렇게하여 *1948년 12월 13일 대정면 하모리에서 48명이 희생됐다. 주민들은 이를 '자수사건'이라 부른다. 조천면에서는 '자수'한 사람 150명 가량이 1948년 12월 21일 제주읍내 속칭 '박성내'로 끌려와 총살됐다. 토벌대는 몇몇 사람이 총에 맞은채 꿈틀대자 모든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박성내에서의 학살극은 형살장에서 총에 맞고도 탈출에 성공한 유일한 생존자 김태준 씨(작고)에 의해 가족들에게 알려졌다. 김 씨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팔에는 총알 자국이 움푹 파져있었다.
그무렵 무장대 협조자의 명단이 발각됐다며 집단총살하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토벌대의 고문이 워낙 가혹해 일단 취조를 받으면 허위로라도 자백을 해야했다. 남원면 신례리 양경수 씨(78)는 당시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유행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토벌대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있을 때 앞서가거나 근처에 있다가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양 씨는 "매에는 장사가 없다. 고문을 받으면 아무 이름이나 튀어나오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남원면 신흥리 주민들은 당시 김성홍 구장에게 '몰라 구장(區長)'이란 별명을 붙였는데 이 별명은 지금도 인근 마을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토벌대는 김 구장에게 자꾸 주민들의 성향을 캐물었다. 이에 대한 답변이 희생으로 이어질게 뻔했기 때문에 구장은 '모른다'로 일관했다. 심지어 공문조차도 모른다며 처리하지 않았다. 그후 그에겐 '몰라 구장'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이 붙여졌다.
경기도 파주 출신인 김호겸 씨(82)는 4·3발발 직전 내도해 1951년 경남경찰국으로 옮겨갈 때까지 서귀포경찰서장 등을 역임하는 등 사태 한복판에 있었다. 김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서청 출신 등 일부 경찰은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극구 말렸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무조건 주민을 잡아다 고문을 했고 '어수다, 모르쿠다(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하면 들녘으로 끌고가 총살했습니다. 그리고 보고서에는 '현장 답사차 갔는데 도주. 정지명령에도 불구 도주.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습니다"
이상 살펴본 사건들은 모두 1948년 12월 중순부터 말까지 벌어진 사건들 중 일부이다. 이 기간동안 이같은 사례는 너무도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토벌대는 왜 이렇게 무모한 '작전'을 펼쳤을까. 자수사건이든 함정토벌이든 희생자들은 산중에서 잡아온 무장대가 아니라 멀쩡히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 시기 토벌대의 행태는 마치 총살시킬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광분한 듯 보인다.
이와 관련, 한 미군보고서는 9연대의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를 "수준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 기록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다"고 분석했다(주한미군사령부, G-2보고서, 1948. 12. 17). 당시 제주주둔 9연대는 12월말로 2연대와 교체하기로 되어있었다.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여순사건 진압을 완수했던 2연대의 성과에 맞서기 위해 '전과' 올리기에 열을 냈다는 분석이다.
1949년 봄 사태는 완화됐다. 약간의 희생은 이어졌지만 집단학살극은 그쳤다. 무장대는 궤멸했고 이제 '4·3'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6·25'는 또다시 큰 희생을 몰고왔다. 정부는 전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예비검속'했다. 제주에서는 과거 한 번이라도 토벌대에게 끌려갔다 온 사람들이 또다시 대거 구금됐다. 무죄로 판명돼 석방됐다 하더라도 한 번 붙은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닌 것이다. 대정면의 한 공동묘지에는 이때 희생된 132명의 집단묘역이 있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 섯알오름 부근 일제시대 탄약고 터에서 집단학살된 희생자들의 묘역이다. 토벌대는 수년간 현장에 접근조차 못하게 했다. 유족들이 찾았을 때 이미 살이 썩고 뼈가 뒤엉켜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유족들은 대충 뼈를 맞춰 무덤을 조성했다. 그리고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란 뜻에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 명명했다.
백조일손지묘의 희생자들은 비록 유족들이 자기 조상을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뼈라도 남아있는 경우이다. 도내 곳곳에서 벌어진 예비검속자 학살은 주로 배에 태워 바닷물에 빠뜨려 죽이는 방법이 동원됐다. 이들 유족들은 조상의 무덤도 없다.
이무렵 제주의 젊은이들이 대거 자원입대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3기와 4기는 대부분 제주출신이다.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고향은 전쟁터보다도 무서운 곳이었다. 대정면 안성리의 이두생 옹(82)은 "오죽했으면 자원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나갔겠느냐"면서 "나는 당시 35살이라 징집대상이 아니었지만 부득불 우겨가며 육군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초토화작전은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불법적으로 선포한 계엄령을 근거로 전개됐다.
무분별한 학살극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초토화작전 때는 전도에 걸쳐 동시에 집단학살극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4·3의 전개과정에서 계엄령만큼 제주도민들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진 용어도 드물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의 4·3증언 속에는 반드시 "계엄령 시절이니까…" 또는 "계엄령 때문에…"라는 말이 나온다. 그들은 심지어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도 되는 제도' 쯤으로 계엄령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증언 말미엔 '시국 탓'이라 체념하며 애써 분을 삭인다. 실제로 토벌대는 총살극을 벌이며 "계엄령은 사람 죽이는게 계엄령"이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그때의 충격이 워낙 커서 계엄령이 선포된 11월 중순께 4·3이 발발한 것으로 생각하는 할머니들도 많다.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은 이승만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친일파를 처단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것은 시대적 과제였다. 그러나 친일파는 해방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이미 경찰과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비호했다.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에게 친일파는 가장 큰 정치적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군정이 일제경찰을 옹호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12월 1일 공포).
전날인 11월 19일 국회는 주한미군 계속주둔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정치권은 '친일파 정국', '통일 정국'에서 급속히 '반공 정국'으로 변했다. 국가보안법의 경우 '일제 치안유지법의 재판이다', '이 법률을 발표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등 소장파 의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피를 한 포기 뽑다 보면 나락이 다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피를 안 뽑을 수 있느냐'는 살벌한 논리에 밀렸다.
국가보안법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이 법에 의한 첫 상징적 희생양은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소위 '국회프락치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조작임이 밝혀지고 있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바로 반민법 제정과 반민특위 활동에 앞장섰고 국가보안법을 반대했던 의원들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 피습사건, 김구 암살사건과 함께 모두 1949년 6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이승만은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비로소 권력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미군철수는 바로 이런 일들이 있고 난 직후인 1949년 6월말 완료됐다.
'제주4·3' 때 벌어진 초토화작전과 미국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48년 8월 24일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전적으로 미군이 갖고 있었다. 또한 미군은 제주에서 벌어졌던 학살극의 현장에 있었고 배후의 정점에서 작전에 개입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미군과 초토화작전을 불가분의 관계로 묶는다.
박명림은 그의 석사학위논문 「제주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에서 미군이 초토화작전에 개입하게된 이유로 '상황론'과 '음모론'을 아울러 제시했다.
'상황론'은 당시 정황에 근거한다. 즉 "철수에 앞서 친미반공기지를 구축한다는 미군의 점령목표가 여순사건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고, 제주도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전율할 학살극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음모론'의 요지는 "미군은 대공투쟁의 전초기지로서 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박명림은 그 근거로 4·3초기 무장대와 경비대간의 '4·28 평화협상'이 미군정 경찰의 방해로 무산된 점과 1949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 미군이 그리스민주주의군대의 온건한 정전협상 제의를 거부하고 초토화전술을 구사한 것과의 유사성을 들었다. 일각에서는 "4·3봉기는 오히려 미제국주의가 먼저 민중을 유도하여 민중이 일어나면 되받아치는 작전으로서 계획적이요 의도적인 하나의 민중공격작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4.3을 연구했던 미국학자 존 메릴은 "전후 점령군에 대하여 제주도에서와 같은 격렬한 대중적 저항이 분출된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1988년 봄 취재반이 처음으로 현장 증언채록에 나섰을 때 이 표현은 너무도 무색했다. 일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취재반을 문 앞에서 쫓아냈다. 어쩌다 할아버지가 증언을 할라치면 어느새 부엌에서 나온 할머니가 이를 막았다. "이 하르방(할아버지) 또 잡혀 가려고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지금까지 4.3으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거나 연구된 바는 없다. 여기서는 취재반이 10년간 현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몇가지 소개함으로써 그 흔적들을 드러내려 한다.
반발심도 '적당히' 당해야 생기는 걸까. 체험자들은 철저하게 좌절해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고 큰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모가 죽을 때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러야 했던 유족들은 진상규명 의지는 커녕 '4.3'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오랜 기간 계속된 군부독재는 도민들을 더욱 위축시켰다.
4·19는 유족들이 한을 풀어낼 호기였다. 국회에 양민학살진상규명을 위한 특위가 구성됐고 희생자 조사도 벌였다. 그러나 곧 이어 발생한 5·16쿠데타는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진상규명에 앞장서던 사람들은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그 후 누구도 4·3을 입에 담지 못했다. 몇몇 문인들에 의해 4·3의 잔혹상이 폭로되긴 했지만 일부나마 유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40년이나 흐른 뒤였다. 이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조성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흘러 사건발발 50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유족들의 피해의식은 상상을 넘어선다. 취재반은 한 마을을 조사하기 위해 가급적 그 지역에서 발이 넓고 평판이 좋은 노인들을 찾는다. 그런데 이들을 취재하다가 깜짝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취재반의 질문에 마을의 온갖 사건들을 증언하던 한 노인은 정작 자신의 어머니가 희생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취재반이 다른 곳에서 그 사실을 알고 다시 확인하면 그때서야 실토했다.
제주도의회 4·3특위가 희생자 조사를 벌일 때도 많은 유족들은 신고를 기피했다. 농민들 보다는 공무원이나 사업가 등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일수록 신고를 기피했다. 그들은 연좌제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했다. 자신이 겪었던 연좌제 피해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자식에게 만큼은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대부분의 유족들은 자신의 부모가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촌로였음을 강조했다. 사상범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낳은 현상이다. 그리고 일부는 자신의 부모를 총살한 토벌대 보다 '사태를 유발시킨' 무장대를 원망했다. 심지어 위령제 때 무장대로 추정되는 사람의 위패가 보인다면서 자기 부모의 위패를 거둬가기도 했다.
그동안 유족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증언했을 때는 바로 '광주청문회'가 벌어질 때였다. 뒤이어 등장한 이른바 '문민정부'도 도민들에게 한가닥 기대감을 심어줬다. 그러나 그후 아무런 진상규명 조치가 없었고 걸핏하면 터지는 간첩사건도 유족들에겐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최근에 취재반이 증언채록에 가장 애를 먹었을 때는 바로 '황장엽 리스트'가 연일 언론에 보도될 때였다. 취재반은 유족들의 이런 심정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인들은 '세상이 다시 어지러워지면 내가 한 증언이 문제가 될게 아니냐'고 걱정했다.
정면에서 진상규명 요구하는 일부 유족들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말없는 다수'일 뿐이다. 이들의 상처는 속으로만 곪아가고 있었다.
당시 아들을 잃었던 90대 할머니의 가슴에는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고 목에는 아기 주먹만한 혹이 나 있었다. 가슴을 치며 목으로 피를 토하다 보니 그리됐다는 것이다.
구좌읍 한동리의 한 할머니는 육지형무소로 보내진 후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 10년간 경상도와 강원도를 헤맸다고 했다. 당시 유복자로 태어났거나 젖먹이이던, 현재 50대의 유족들중에는 혹시 아버지 사진이나 남아있을까하여 육지의 형무소를 찾고 있었다.
이 상처를 어찌할 것인가.
▲ 김종민, <제주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42 (1998)..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수만 박진영 홍승성(큐브) 등이 다 달려도 내부의 적인 리지은 하나를 못죽이는 게 한류의 실체이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한중FTA에 대해서는 해무님과 의견을 달리합니다
지금 국익이 아니라 민심선동을 위해 반대하는 진보팔이들이 노무현정부때 보고서를 제출했을때 한미fta보다는
한중fta다 더 유리하다고 보고한적이 있습니다. 한미fta 관련 제 글 보면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국의 인건비가 많이 올라서 앞으로 메이드인차이나 제품이 경쟁력을 잃을겁니다. 그러면 실업률도 늘어나겠죠. 또한 중국의 부동산 거품이 걷히면 90년대 일본처럼 부동산경제가 몰락해서 헤어나기 어려운 긴 수렁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인건비는 비싸지고 실업률은 높아지고 그렇게 되면 중국 제조업도 몰락할 가능성도 높고
사실 지금 메이드인차이나 제품이 가격이 싸서 경쟁력이 있는것이지, 제품퀄리티면과 기술력에 있어서는 한국보다는 떨어집니다 가격이 상승하면 중국제품은 경쟁력을 잃을게 뻔합니다.
그래서 한중fta가 더 유리해질수 있는데 저는 한중이든 한미든 fta는 신자유주의 부산물로 장기적으로 볼때
국내 산업과 고용을 크게 유동화시켜 산업기반을 뒤흔들어놓고 실업률을 높일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보고 또한 장벽없는 국제투기자본이 핫머니로 국내증권시장을 뒤흔들어놓으면 일부 유리한 분야에서 득을 얻었던 부분이 상쇄되어 결국 막대한 경제손실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하준 교수도 영국이 대영제국이 될수 있었던 배경에 강력한 보호관세정책이 있었고, 일본이 자국산업보호의 일환으로 당시 국제적 경쟁력 없었던 도요타자동차를 키워 렉서스를 만들어낼수 있었던 것을 지적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말에도 일리가 있네요. 중간재는 제가 생각 못했네요.
요즘 중국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다는데, 만약 민주화되면 해무님 말처럼 경쟁력이 약한 수출보다는 내수를 유도하여 중국경제를 활성화하려고 하겠죠. 그렇게 되면 위안화가 많이 쓰여질텐데.. 그래서 혹자는 기축통화로서 흔들리고 있는 달러를 대체할 통화로 위안화가 부상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서북청년단은 여진인의 후예입니다. 제주도민을 쓸어버리기에는 아주 적당하지요. 저 자신도 여진인의 후예이지만 (족보나 증거자료는 없음. 그냥 구전으로 들어 알고 있음), 북한과의 1차 대전의 승리에 여진인 후예인 서북청년단과 구월산유격대 등의 공이 작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라의 힘이 없었던 결과입니다. 남의 탓할 시기는 지났습니다. 우리 스스로 각성하고, 반성하여 훌륭한 정치지도자들을 선출하여 국력을 키워, 다시는 이런 과거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대한제국의 말기적 현상, 제국주의와 팽창주의의 확대와 세계화, 군국주의 부활과 2차대전, 대전 종료후의 민족주의의 탄생과 서양세력들의 땅뺏기, 냉전의 탄생은 힘없는 나라와 종족, 민족들의 희생을 강요한 것입니다. 우리 경우뿐만 이 지구상에 수많은 곳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죄없는 자들이 참혹한 일을 겪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힘을 키우지 못한 것입니다.
언제까지 남의 탓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내 나라가 단결치 못하고,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과 사대주의에 사로잡힌 자들이 득실거리는 이 사회에서 언제까지 남의 탓만 할 것인가? 미국! 일본! 중국! 그들 입장에선 정당한 짓을 하는 것이란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터! 힘없는 무리는 언제든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금이 똑같습니다. 물론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만, 나의 생각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탓 하는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힘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뭉칠 생각은 않고 언제까지 인접국 탓만 할 것인지 정말 가슴 아픕니다.
왜는 수천년 변방의 억울함과, 참혹했던 수천년 변방 나라로써, 주류에 끼이고자 수많은 희생을 치루고, 자국의 여성들을 점령군의 성노리개로 매개하면서까지 오늘의 부를 이루었습니다. 중국은 조선을 해체한 후, 남방의 수천년 변방생활을 청산하고 "한족"이란 대동단결체를 만들고 적절하게 이용하여 오늘의 명성을 쌓았습니다. 대한민국은 무엇을 무엇을 했습니까? 쌈질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의 경제적 부! 하루아침에 쪽박 차기 딱 알맞는 규모입니다. 정치판도를 보세요. 매일 쌈질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사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