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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님과 함께하는 모험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믿는 자의 삶 속에는 두 가지의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거듭난 자 안에 내주하실 뿐 아니라 또한 성령세례를 통해 믿는 자 위에 임하시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자의 전도와 봉사 그리고 능력을 나타냄에도 관여하시지만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할은 주로 믿는 자의 내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믿는 자의 내적인 상태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반면 성령세례를 통해 임하시는 성령께서는 믿는 자의 전도와 봉사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이 능력의 세례입니다.
성령세례를 통해 부어지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고 자주 언급되는 반면에 믿는 자의 거룩함에 대해서는 종종 너무 적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 개인의 삶에서 동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바람을 모른 채, 능력만을 강조함으로써 불균형의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열매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며, 다른 열매들도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 ... 저(성령)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은 제자들이 어떤 실제적인 체험을 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 ...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24:49)라고 하셨을 때에는 또 다른 실제적인 체험을 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해서 어느 정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임하시는 성령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거듭나고 내주하시는 성령을 모시는 것은 믿는 자들이 확실히 체험할 수 있는 증거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순절날 120명의 제자들에게 하신 일을 오늘날에도 믿는 자들에게 똑같이 행하십니다. 이런 성령체험은 오늘날도 여전히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 ...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누가복음 24장 45절을 봅시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5). 주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때는 부활하신 이후였지만, 아직 오순절 성령세례는 있기 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근심이 가득했던 사람들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로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직 오순절 성령세례가 있기 전이었는데도, 누가는 그들이 이런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눅24:52-53).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가 기쁨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렇게 변한 것은 그들 안에 내주하신 예수의 영이신 성령 때문이었습니다.
◆ 능력의 옷을 입음
제자들을 이렇게 축복하시고 이어서 주님은 그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신 이유를 주의 깊게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심하기까지, 거듭나기까지,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까지, 또는 새 생명을 얻기까지 머무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회심,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이 됨, 새 생명을 얻음은 모두 거듭남의 경험을 나태내는 여러 가지 다른 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신 이유가 성령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 ... 성령을 받으라" (요20:22).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이 " ...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power)을 입힐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눅24:49)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읽어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power)을 받고 ... " (행1:8).
사도바울은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은 교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이므로 거듭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합니다(롬8:16). 그런데 우리가 사도바울의 편지를 읽을 때면 지금 이 시대의 우리들은 예전 초대교회가 가졌던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들은 전혀 권능을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전에 어느 지방에서 순복음 사업가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을 가졌었습니다. 저는 하루 저녁만 가르쳤지만, 집회기간 닷새 동안 내내 성령세례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집회 기간 동안 어느 침례교 목사님이 강단 앞으로 나오셔서 성령세례를 받으셨는데, 그분이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시 목회를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분은 예전에 어느 지방에서 목회를 했었는데 겉으로는 문제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목회하던 교회는 큰 교회여서 사례비도 넉넉히 받았고, 그분은 교육도 제대로 받아서 학사학위가 있었고 침례교 신학대학원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목회를 12년 동안 했는데 목회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성령으로 거듭났고 이미 성령을 받았지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이나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읽을수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들이 가졌던 것을 지금 나도 가진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그들과 달리 나에게는 역사하지 않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 합리적이며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자기가 경험한 것과는 다른 것임을 알게 될 텐데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성도들이 저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는데, 저는 그분들을 도울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에게 능력이 없었습니다. 물론 저는 구원은 받았어요. 그러나 사역은 더 계속할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그 목사님 부부에게는 십대초반인 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이 목사님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았으므로 하나님을 떠날 수는 없지만, 사역을 하면서 너무 지쳐버렸기 때문에 비록 신학을 공부했더라도 앞으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이 목사님은 이미 어느 사업가로부터 동업을 하자는 제의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 후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을 곧 잘해서 재정적으로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사업가 성경공부 모임에 참가해서 성령세례에 대해 들었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하, 내가 이것을 모르고 그동안 성령세례 운동에 대해서 반대하는 말만 해왔구나. 주님, 제가 영적으로 너무 갈급합니다. 방언을 받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저는 그것도 받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제가 가르치는 동안 강단 앞으로 나와 영광스러운 성령세례를 받았고 방언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역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못견디겠습니다." 이분은 이제 사역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지요.
사도들을 포함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저는 남침례교도로 거듭났고 성장했습니다. 언젠가 베일러 신학교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백발의 나이든 신사였고 그분은 신학교 졸업생들을 상대로 종종 강의를 하셨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곧이어 성령세례라고 불리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위로부터 능력을 받는 체험입니다. 이런 체험 없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전도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만일 조금만 더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궁금한 것을 여쭈어 보았더라면 참으로 대단한 것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단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훈계를 따랐을 뿐입니다.
◆ 하나뿐이며 유일한 방법
몇 가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되풀이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사역과 관련한 두 종류의 아홉 가지, 즉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와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는 꽤 중요합니다. 앞에서 짤막하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 중 사랑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맺게 되는 인격적인 열매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 " (요15:5) 나무가 살아있다면 가지에서 열매가 자라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므로 우리에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2장 7-11절을 봅시다. 성령의 나타남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도 성령으로 인해 나타나는 아홉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이것을 성령의 은사 또는 나타남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고전12:7). 즉 성령의 은사는 믿는 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배운 것을 근거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거듭남을 통해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성령의 열매 사역을 담당하시고, 성령세례를 통해 부어진 성령께서는 봉사 사역을 담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 1-4절에 언급된 성령세례는 완전한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받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오늘날에도 인도하십니다.
거듭난 뒤에 아직 성령세례를 받기 전이었지만, 저는 성령의 인도를 받곤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4).
제 안에 계신 성령께서 저에게 말씀하셨고, 때로는 보여주셨으며, 또 인도해주셨습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미리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한 이런 인도하심은, 성령세례를 받은 이후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지식의 말씀 같은 초자연적인 인도하심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 영이 거듭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 즉 성령과 교제를 하게 되면, 우리 영은 거의 자동적으로 많은 것들을 알아차리게 되는데 많은 분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듭나자마자 성령세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자신의 영이 무엇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그들은 자기가 (성령세례를 통한) 지식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세례를 통한 지식의 말씀의 은사 같은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어도 우리의 영이 어떤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1933년 4월 22일에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건강해지기까지 그 뒤로도 16개월을 병든채로 누워있었습니다. 열여섯 살이었던 1933년 8월 초순경에 두 살 위인 더브 형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 당시는 대공황 시절이었으므로 일자리를 얻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더브 형은 가족들 중 몇 사람에게 자신이 일자리를 알아보러 리오그란데 계곡에까지 내려갈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젊은 아이들은 지나가는 기차를 올라타고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곤 했는데, 기차는 이런 젊은이들을 유랑노동자(hoboes)라고 불렀습니다.
형이 집을 나간 후 어느 날, 제 영은 형이 위험하게 될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는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제 병수발로 고통을 겪으시는 어머니께 걱정을 더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저를 돌보시곤 했습니다.
제 영이 위험을 알아차린지 3일 만에 어머니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몸이 불편한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지만, 네 형 더브가 걱정이 많이 되는구나.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더브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 같구나." 어머니의 영이 저처럼 제 형 더브가 위험에 빠진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어머니는 형 더브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엄마. 형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에요. 저는 알고 있었어요. 이미 3일 전에 알고 있었는데, 엄마를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어요. 형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에요. 다만 형은 죽을 뻔했었지요. 제가 3일 동안 기도했는데 이제 그 일에 대해 평안함이 있어요. 형은 괜찮아요. 마음 놓으세요."
저는 내적 증거, 즉 내적 직감을 통해 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을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16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8:16).
이 말씀 속의 '증거'는 거듭남으로 인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거듭난 자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바로 그 영이 다른 것들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 내적 직감, 즉 내적 증거를 받아 형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했고, 그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제가 기도응답을 받았어요. 제 영이 평안해요."
"정말이니? 얘야, 정말이야?" 어머니나 저나 그 당시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엄마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그런 평안함을 느껴요. 형은 괜찮아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구나!"
어머니와 제가 이런 대화를 한지 24시간이 좀 더 지나서 더브 형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리오그란데 계곡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물열차에 올라탔는데, 화물열차가 코르시카나와 댈러스 사이에 이르렀을 때 그 열차의 승무원에게 적발되어 곤봉으로 머리를 맞고 열차 밖으로 내던져졌습니다.
1933년경에는 기차가 석탄을 사용해서 움직였으므로 기차길 주변엔 석탄을 태우고 남은 재덩어리가 널려있었는데 더브 형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가 던져져서 거친 석탄잿더미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셔츠는 다 찢겨졌고,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는 등이 거의 부러질 뻔했고, 엉덩이와 등의 살갗에는 화상을 입었습니다.
열차에서 떨어진 후 몇 시간이 흐른 뒤에 의식이 돌아왔는데 온 몸에 통증이 있는 채로 길옆 도랑에 누운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와 어머니가 영으로 형의 일을 미리 알고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브 형은 그 사고 직후 윗옷은 벗은 채였고,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떨어젼 나갔습니다. 속옷도 입지 못한 채였으므로 맨 엉덩이가 밖으로 드러난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옷차림으로 돌아다닐 수 없었고, 그랬다면 음란죄로 체포될 상태였습니다. 그는 도로에 나가 차를 태워달라고도 할 수 없었고 낮에는 돌아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밤을 이용해서 철로를 따라 사흘을 걸었고 낮에는 길옆 농장이나 과수원에 숨어 지냈습니다. 마침 그 시절은 수박이나 과일이 익는 철이어서 되는대로 그런 것들을 따서 먹었고, 밤에만 움직였으므로 체포되지 않은 채 철로를 따라 집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잿더미 위에 굴러서 등과 엉덩이의 맨 살에 검붉은 상처가 있었고, 온 몸이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몸은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통증도 심했는데, 집에 돌아와 이삼일동안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저와 어머니는 내적 직감으로 그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해긴 목사님은 선지자이시니까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지요."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선지자의 사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195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선지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형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도 제 가족 중 단 한사람도 제가 미리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중에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했던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한밤중에 종종 저를 깨우셔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준비시키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