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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노동예술제 기념 시집), 노동문학관 엮음, <붉은 노동의 얼굴>, 푸른사상, 2023년 4월.
【평론】
노동문학과 정치의식
맹문재
1.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는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참사 못지않은 충격을 준다. 참사의 상황을 보면 세월호 참사는 여객선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일어난 것에 비해 10․29 참사는 서울 한복판의 번화가 골목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사람들이 일상으로 다니는 그리 좁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장소에서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이다.
참사 직전 112 신고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정부에 대한 책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핼러윈 축제에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경찰은 통행 안내와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참사를 대비할 수 없는 사고라고 회피하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도 ‘참사’가 아니라 ‘사고’로,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는 용어를 쓸 것을 결정했다. 정부는 참사의 책임을 지고 희생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이 상황을 적당히 넘기고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도 경찰청이 유족은 물론 사회운동단체 등의 동향을 파악한 데서 볼 수 있다. 유족은 물론 국민에 대한 사과보다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억압하거나 회유해 잠재우려고 한 것이다. 또한 참사 당일 현장에 있던 참가자들 중에 몇 명을 범인으로 몰아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꼼수도 시도하고 있다. 참사 현장의 시시티브이(CCTV)를 확보해 사고를 일으킨 사람을 찾아내겠다고 하는데, 상황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다.
시민들의 112 신고에도 경찰이 제대로 조치하지 않은 것이 속속 드러나자 경찰청은 용산경찰서를 압수 수색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공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셀프 수사인데다가 경찰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기에 꼬리 자르기에 불과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했고 후속 조치에서도 진정성을 보이지 않은 정부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국민의 안전에 책임지지 않는 정부를 그대로 둘 수 없는 이유는 노동 정책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부는 “대기업과 부유층에게 5년간 세금을 60조 2,000억 원이나 감면해주기로 했”는데, 그 대가는 노동자 계층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금리를 계속 올려 가계 빚은 늘어나고, 물가가 올라 생활은 어렵고, 최저임금을 비롯한 임금 억제로 말미암아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다. 복지 예산의 삭감으로 빈곤층이 더욱 어려워지고, 여성가족부의 폐지 공약에서 보듯이 여성에 대한 사회구조적 차별도 심화시키고 있다.
정부의 반노동 정책은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노골화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250만 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노동단체가 특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할 만큼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가 발전했다고 볼 수 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노동자 수가 전체 인구수의 절반이 되는 현실에서도 양대 노총이 지지한 후보가 패배했다. 보수 언론과 검찰이 지지한 후보의 벽을 노동자들이 넘기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양대 노총은 민영화와 규제 완화로 재벌과 자본에 유리하고 노동시간 유연화와 임금 삭감 등으로 노동자에게 불리한 정책을 제시한 후보에 맞선 후보를 선택했는데도,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노총은 노조원으로부터는 물론 비회원인 일반 노동자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택배 노동자, 대리운전자, 보험 설계사, 학습지 교사 등등은 양대 노총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특수 고용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1인 사업자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없고, 산재 적용을 받기도 힘들고, 노동조합을 만들기가 어렵다. 하청 노동자 수도 계속 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9만 명이나 모인 노동자들은 10․29참사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며 윤석열 정부 심판론을 내걸었다. 중대재해를 처벌하고, 안전운임제를 실시하고, 건설안전특별법을 제정하고…… 이태원에서 시민들이 112에 신호를 보냈듯이 노동자들은 살고 싶다고 절규했지만 정부는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민영화와 공공기관의 정원 감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등도 노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노란봉투법으로 알려진 노조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노조법 개정도 요구했다. 노동자들이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정치 투쟁에 다시 나선 것이다.
노동문학은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노동문학이 노동 현실이나 노동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추구한 문학이라는 개념을 다시금 새겨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의 노동 상황이 이전 시대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예를 들어 대기업 및 정규직 노동자와 특수 고용 노동자 및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동자라는 이름만 같을 뿐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전체 노동자와 함께하는 정치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2.
당신이 가고 나서 비루해졌다
민중문학에서 민중이 슬슬 지워졌고
노동문학을 하던 이들이 교수가 되거나
평론가가 되어 노동문학을 더 지독하게
눈을 깔고 내려 보다가 밀쳐 두었다
사라진 건 없는데 사라진 민족문학은
한국문학이 되었다 이미 말로 일국을 이룬
통일문학이야 진즉에 사라져
세계문학이 되었다 국경 없는 욕망이 되어
일 년이면 이천여 명이 죽어 나가는
노동의 검은 눈빛 위에 오방색 감탕
신선로가 되었다 뜨겁지 않게 뜨거운
문학의 언어를 말아 삼키다가 간신히
당신을 보았다 새파란 불꽃이었다
―박관서, 「채광석」 전문
위의 작품은 오늘의 한국 문단에서 노동문학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 말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그 대신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유행병처럼 유입되면서 “민중문학에서 민중이 슬슬 지워졌”다. 아울러 “노동문학을 하던 이들이 교수가 되거나//평론가가 되어 노동문학을 더 지독하게/눈을 깔고 내려보다가 밀쳐 두”었다. 그 결과 노동문학은 한국 문단에서 관심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문학은 민중문학이나 통일문학의 토대이자 공동체이다. 그렇기에 노동문학의 침체는 “사라진 건 없는데 사라진 민족문학”이 “한국문학이 되었”고, “통일문학이야 진즉에 사라져/세계문학이” 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 이상의 손실을 가져왔다. 노동문학이 소멸하면 민중문학도 사라지고, 노동문학이 부활하면 민중문학도 되살아난다.
노동문학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일 년이면 이천여 명이 죽어 나가는/노동의 검은 눈빛”이 있기 때문이다. 몸을 써서 노동하다가 사망하거나 다치는 노동자들이 여전하므로 작가들이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이다. 그런데도 한국 문단은 급속히 보수화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함몰되고 있다.
화자는 “채광석”을 그 거울로 삼고 지금의 노동문학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다. 당신이 피운 “새파란 불꽃”을 한국 문단에 비추어 노동문학을 새롭게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다. “채광석”은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제기하며 1980년대의 시와 평론의 한 흐름을 이끌었다. 시집으로 『밧줄을 타며』, 평론집으로 『민족문학의 흐름』, 사회문화론집으로 『물길처럼 불길처럼』 등이 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계엄령·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재의 한국작가회의)의 총무를 맡아 문학의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우리 사회에는 노동자가 분명 존재하고 있기에 노동문학이 침체되거나 박제화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에게 불리하고 삶의 조건을 위협하는 상황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들과 함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노동문학의 범주를 넓히고, 주제를 심화시키고,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정치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3.
배가 기우는 사이, 배는 막장을 기억했다
막장의 옆구리 어딘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석탄 합리화가 아닌 자본의 합리화
광부들은 문 닫은 갱구 앞에서 잠시 주저앉았을 뿐
원망할 여유는 없었다
살려주세요, 구조대는 오고 있는 거죠?
산 자의 마지막 인사는 핏물 든 꽃처럼 붉다
또 만나자며, 안산으로 부천으로 떠나고
터 잡았다고 폐광촌 동료 부르던 세월
안산의 함태탄광 동지는 함우회 만들고
안산의 강원탄광 동지는 강우회 만들고
안산 아이들 탄 배가 기우는 동안
막장은 바다에서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탄광촌으로, 폐광촌에서 공단으로
끝없는 유랑의 세월
바다에다 자식 묻기까지 끝없는 막장
막장은 막장이었다.
― 정연수, 「막장의 세월」 전문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그린 위의 작품은 10·29참사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어서 다시금 눈길을 끈다. “살려주세요, 구조대는 오고 있는 거죠?”라는 “산 자의 마지막 인사는 핏물 든 꽃처럼 붉”기만 하다. 그런데 그 희생자가 다름 아니라 광부의 자식, 즉 노동자의 자식이라는 사실에 한층 더 가슴이 아프다. 1989년에 시행된 석탄합리화정책 이후 “막장의 옆구리 어딘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석탄 합리화가 아”니라 “자본의 합리화”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광부들은 문 닫은 갱구 앞에서 잠시 주저앉았을 뿐/원망할 여유”조차 없었다.
석탄합리화정책으로 말미암아 광산촌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실업자의 처지가 된 광부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부랴부랴 “또 만나자며, 안산으로 부천으로 떠”났다. 미처 떠나지 못한 광부들은 “터 잡았다고 폐광촌 동료”가 부르는 데로 이사했다. 그리고 “안산의 함태탄광 동지는 함우회 만들고/안산의 강원탄광 동지는 강우회 만들”어 새로운 삶을 영위해 갔다.
그런데 2014년 세월호 참사로 말미암아 광부들은 또다시 무너졌다. “안산 아이들 탄 배가 기”울어 희생되었는데, 그들 중에 광부의 자식도 있었던 것이다. “농촌에서 탄광촌으로, 폐광촌에서 공단으로/끝없는 유랑의 세월”을 지내온 광부들이 “바다에다 자식 묻”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 앞에서 광부들은 “막장은 막장”일 수밖에 없다고 아파하고 절망한 것이다.
몇 년째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는 내 손을 잡을 때마다 물어요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손이 이렇게 거치니? 어째 엄마보다 더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없는 난간이라도 붙잡고 싶어요
웃음 띤 얼굴로 건네는 정겨운 악수들을 기억해요 하지만 악어 등가죽 같은 내 손과 닿는 순간 다들 움찔 움찔 놀라죠 사이버대학의 녹화부스에서 혼자 두 시간을 떠들어도 고속도로를 120킬로미터나 달려가 세 시간 동안 온몸으로 열변을 토해도 내 손은 따뜻해지지 않아요 어쩌다 가끔 내 차지로 돌아오는 오늘의 일터로 가기 위해선 히터를 틀고 달리는 차 안에서도 장갑을 껴야 하죠
오늘도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돌아라 지구 열두 바퀴※ 오각형에 S자가 새겨진 파란 티셔츠는 없지만 크고 억센 손은 나의 신분을 숨기기에 딱 좋은 차밍 포인트죠
어디 알바 쓰실 분 없나요? 지역 불문하고 시급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불판 닦기, 화장실 청소, 소똥 치우기도 좋아요 혹시 꽃을 좋아하는 육우나 쥐잡기에 심드렁한 길고양이가 있다면 글짓기 수업도 가능하고요
출고된 지 9년 된 고물차는 벌써 지구를 다섯 바퀴째 돌고 있어요 그래도 나는 아직 더 달려야 해요 언제 교체될지 알 수는 없지만 스페어타이어는 항상 트렁크 밑에 있답니다
※ 노라조, 「슈퍼맨」
― 휘민, 「시간제 노동자」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시간제 노동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이버대학의 녹화부스에서 혼자 두 시간을 떠들”고 난 뒤 또 다른 일자리를 위해 “고속도로를 120킬로미터나 달려가 세 시간 동안 온몸으로 열변을 토”한다. 그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에는 “어디 알바 쓰실 분 없나요? 지역 불문하고 시급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불판 닦기, 화장실 청소, 소똥 치우기도 좋아요 혹시 꽃을 좋아하는 육우나 쥐잡기에 심드렁한 길고양이가 있다면 글짓기 수업도 가능하”다고 또 다른 일자리를 찾는다.
화자는 자신이 닥치는 대로 일하는 모습을 “오늘도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돌아라 지구 열두 바퀴”라고 노라조 가수의 노래 <슈퍼맨>을 인용해서 나타내고 있다. 희화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의 힘든 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다. 화자는 “출고된 지 9년 된 고물차는 벌써 지구를 다섯 바퀴째 돌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 더 달려야” 한다고 토로한다. 화자가 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토대로 사랑이나 안전이나 소속감이나 명예나 자기실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화자는 그것을 위해 달리느라 손이 거칠다. “몇 년째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는 내 손을 잡을 때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손이 이렇게 거치니?”라고 묻는다. 화자는 “어째 엄마보다 더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사실대로 대답하기가 어려워 “없는 난간이라도 붙잡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들과 악수하는 순간 상대방이 “움찔 움찔 놀라”는 모습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제 노동자”는 노동 시간이나 노동의 지속성 차원에서 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통상 노동자의 노동 시간에 비해 짧으므로 임금과 근무 조건 등에서 차이가 크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등장은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은 뒤부터 본격화되었다. 시장 가치를 철저히 추구하는 신자유주가 본격화되면서 사용주들은 이익 추구에 유리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한 것이다. 알바연대가 연간 근로 형태별 근로자 구성 추이 관련 통계청 자료를 이용해 공개한 것에 따르면 2022년 “8월 기준 시간제 노동자 수는 351만 2천 명으로 2012년 8월(182만 8천 명) 대비 92% 늘었다.” 또한 “계절근로자 등을 지칭하는 한시적 노동자 수는 같은 기간 342만 7천 명에서 517만 1천 명으로 51%, 계약직 등 기간제 노동자 수는 272만 9천 명에서 453만 7천 명으로 66% 각각 증가했다.”
우리 사회의 발전과 통합을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에 비해 두 배나 높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대책이 우선 마련되어야 한다. 정규직 노동자의 미래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자조적인 말도 있듯이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정규직 노동자의 문제이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할수록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황이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가 전체 노동자의 문제라는 점을 자각하고 연대 의식을 가지고 개선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4.
마산 수출자유지역으로
진주 상평공단으로
울산 석유화학단지로 떠나가고
호송이 따라 출가하고 싶었으나
자동차 하청 공장에 취직
중고차 사고 집사람 만나 살림을 시작했고
사십 넘어 운동판에 뛰어들어 머리띠 둘렀고
구호를 외치다가
빨갱이로 몰려
쫓겨나고
내게 공장은 집사람 만나게 해준 은인
늦은 나이 대학원까지 가게 해준 고마운 놈
빨갱이 소리까지 듣게 해준 원수 같은 놈
공장은 자본주의 세상을 찍어내는 공장
일률적인 모양을 대량으로 생산
기계적인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공장
자본의 각진 모양을 거부하면
고문관이라 손가락질하는 공장
감시의 눈초리를 모른 척 눈감아야 했던 공장
동기들이 출근하는 정문
복직을 외쳐야 하는 공장
돌아갈 수 있으리라 꿈꾸는 공장
지긋지긋한 공장
그래도 그리운 공장
인간을 찍어내는 지구라는 공장
신이라는 공장장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공장
― 정연홍, 「그래도 그리운 공장」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공장노동자로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사십 넘어 운동판에 뛰어들어 머리띠”를 둘렀다. 회사의 불평등한 구조와 제도를 알게 되어 개선하려고 나선 것이었다. 그렇지만 자본의 가치를 이념처럼 섬기는 회사는 화자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끝내 화자를 해고시켰다. 결국 화자는 “구호를 외치다가/빨갱이로 몰려/쫓겨”난 신세가 된 것이었다.
화자는 동료들이 출근하는 정문에 서서 “복직을 외”치면서 그동안 함께해온 공장을 생각해본다. 공장은 “집사람 만나게 해준 은인”이었고, “늦은 나이 대학원까지 가게 해준 고마운 놈”이었다. 의식주 해결을 마련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아의 실현에도 도움을 준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장은 “빨갱이 소리까지 듣게 해준 원수 같은 놈”이었다. “자본주의 세상을 찍어내는” 존재, 다시 말해 “일률적인 모양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시장에 파는 장사꾼이었다.
그런데도 화자는 공장을 떠나지 못한다. “자본의 각진 모양을 거부하면/고문관이라 손가락질하”며 모욕을 주는데도 자신과 뗄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긴다. 지긋지긋하다고 불평을 터뜨리면서도 공장을 그리워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다. 화자가 공장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이 그에게는 삶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공장은 삶을 이끄는 힘이었고 거울이었고 주소였고 명함이었다. 화자는 공장의 정보를 믿었고 기술을 배웠고 규범을 따랐다. 따라서 화자는 공장을 떠나기보다는 공장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자가 공장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곧 전태일의 자세이다. 전태일은 노동자의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고, 차별 속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그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자신의 차비를 아껴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었고, 노동자들에게 노예 의식을 버리도록 이끌었다. 그 일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고통스럽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자신을 불사르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친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인간해방의 불꽃”으로 피어 “오늘도 절규하며 싸우는 이름 없는 전사들 곁에”(송경동, 「전태일은 살아 있다」) 있다. 해고 노동자도, 하청 노동자도, 이주 노동자도, 배달 노동자도, 알바 노동자도 전태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성희직 시인이 “우리는 산업 폐기물이 아니다”(「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데서도 확인된다. 광부는 지하 수백 미터의 땅속으로 들어가 작업하는 극한 직업의 노동자이다. 작업 도중 갱도가 무너져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고, 사고를 당하지 않은 광부도 대부분 진폐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광부들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 조건을 딛고 우리나라의 산업 발전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했다. 그런데 그들은 정부로부터 산업폐기물로 취급당하고 있다. 성희직 시인은 그에 맞서 사북에서도 광화문에서도 갱목 시위를 하며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투쟁 방식이 디지털화된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무시되거나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캄캄한 발전소 지하에서,/버터 냄새 진동하는 빵 반죽 기계 속에서,/추락하는 공사 현장에서,/헛도는 오토바이 바퀴 밑에 깔려서”(김림, 「지워지는 이름」)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컨베이어 밸트에 목이 끼여 사망/프레스에 몸이 눌려 사망/유압기 수리 중 기계에 끼여 사망/추락 방지용 밸트에 감겨 사망”(박이정, 「폭설」)하기 때문이다. “홀로 작업하던 그녀”가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에 끼여 목숨을 잃”(이문복, 「그녀는 결국 파이팅할 수 없었다」)기도 한다. 따라서 “부당한 노동 현실에 맞선 투쟁과 연대는 우리의 사명”(김채운, 「분노는 불꽃보다 뜨겁대― 윤창열 노동열사를 위하여」)이라는 목소리는 시인의 본분과 역할을 일깨워준다.
노동문학이 소멸했다고 자괴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라는 조지 오웰의 말을 다시금 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체제는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개인의 분투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불평등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와 연대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가는 시인들의 정치의식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