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가 아닌 ‘성경도’가 되어야 하는 이유 여기서 ‘도(徒)’는 사람 무리이면서, 제자 하인 종의 의미를 지닌다. 성경도는 오직 성경의 사람 제자 하인 종이 되는 것이다. 청교도가 그 대표로 알고 높이고 숭앙했지만, 그 일부만 그랬을 뿐 다는 아니었다. ‘성경도’는 참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성경도’는 청교도들 중 핵심과 중심을 이루는 사람들을 일컫고, 익히 알려진 청교도들에 대비하며, 성경 경외의 신앙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이름이다.
청교도는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 받아 완성한 무리들로 여겨 왔다.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이 정말 초대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이어받았다는 것이 확실할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참다운 종교개혁은 13세기에 일어났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고, 16세기 종교개혁은 그 영향으로 그 일부를 흡수하여 성공한 지성주의 열매였다. 문서 곧 책 위주의 개혁이었고, 결국 율법주의의 변형인 지성주의 개혁이었다. 교리는 삶의 실천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리를 위한 교리, 방대한 책들은 성경을 어렵게 하고 멀리하게 만든다. 바울서신들은 앞 부분은 교리, 뒷부분은 이 교리의 실천을 다루는 것이 모범이다. 그들은 영적인 전통을 어거스틴에게 돌리고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전통을 집대성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로마교회의 소속이고 로마교회는 초대교회의 전통과는 다른 전통이다. 로마교회는 콘스탄틴 황제가 세운 국가 교회일 뿐. 초대교회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다. 초대교회의 전통은 알프스 계곡의 발도인들 바울인들 위그노들로 이어졌다. 로마교회는 십자군을 동원하며 이들을 말살시키려 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가 성경과 거리가 먼 교회임을 성경적으로 비판한 사람들이 이들이었고, 이들은 초대교회의 성경적이고 영적인 전통과 말씀으로 사는 삶의 모범을 보였고, 이들의 복음 선교와 삶의 변화를 보고 사람들이 이들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유대종교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과 같이 로마교회와 지도자들은 고문과 학살과 화형으로 이들을 죽여 없엘려고 하였다. 어거스틴도 이 전통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고, 이단시하였고, 로마교회 소속의 학자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주역인 루터 칼빈 츠빙글리도 이 전통과는 관계없이 개혁을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로마교회를 개혁할려고 하였을 뿐이다. 이들은 여전히 로마교회의 역사관과 영 줄기를 충실히 따랐다. 개혁교회의 학자들도 여전히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사는 로마교회의 주장들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유대교회 로마교회 개혁교회 현대교회는 초대교회와는 다른 영 줄기를 따르고 있다. 나도 16년 동안 청교도를 사랑하고 흠모하며 그 전통을 이어받을려고 충실하였다. 이제는 청교도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청교도가 아닌 성경도가 되어야 함을 확인했다. 유대교회 로마교회 개혁교회 현대교회는 시대와 표현은 달라도 같은 영 줄기의 연속이고 계승인 것을 알게 되었다. 사생자들이 아들 노릇하며 참 아들들을 핍박하고 존재를 무시하고 잊게 만들어 왔다. 묵은 포도주가 새 포도주 노릇하며 예수님을 죽이고 참 아들들을 죽여 왔다. 우리의 참 스승인 로이드 존스도 성경도들에게 돌려야 할 영광을 청교도들에게 돌림으로 나로 하여금 16년 동안 청교도에 붙들려 살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청교도가 아닌 성경도의 에베레스트이고, 다음은 존 라일, 기욤 파렐, 조나단 에드워즈의 순이다. 청교도로 알려진 이들 중에는 존 오웬 플라벨 퍼킨스 에임스 베일리 뷰케넌이 꼽힌다. 그리고 19-20세기에는 워필드 커닝함 메이첸 쉐퍼 호튼이 성경도의 스승이라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자. 나는 이제까지 ‘청교도 신학개요’를 가르쳐 왔는데, 이제는 그 중에서 성경도와 관련된 부분들은 살리고 ‘성경도 신학개요’를 다시 만들려고 한다. 사람들은 성경도에 돌려야 할 실체와 내용들을 청교도들에게 돌려왔다. 얼마나 이 작업에 성공할는지 몰라도 남은 생애 이 일에 헌신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16년 동안 청교도의 품속에서 살게 하셨고, 섭리 가운데 이제 성경도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심을 믿는다. 교회 개혁은 책들로 지성주의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발도인들 바울인들 위그노들처럼 초대교회의 가르침과 영적 전통을 따라 성경적 삶의 모범과 실천으로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16세기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중 누가 먼저냐 하는 논쟁을 해왔다. 역사서들은 르네상스가 먼저이고 그 영향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종교개혁 없이 어떻게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해서 교회는 순서를 뒤집는다. 13세기에 유럽 전체를 폭발적으로 변화시킨 종교개혁을 안다면 자연스레 해결이 된다. 13세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사회 전반에 변화가 오면서 르네상스가 일어났고, 그 영향을 분명 받으면서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참다운 종교개혁 없이 르네상스는 일어날 수 없고, 16세기 지성주의 종교개혁도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에게는 오늘 이 글이 황당하고 이단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성경으로 살며 성경을 사랑하며 높이며 사는 이들 중에는 뭔가 석연지 않게 여겨졌던 부분이 해결되는 분들도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 글은 앞으로 해야 할 작업의 서두일 뿐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벽돌 하나부터 확실히 놓아야 한다는 심정에서 이 글을 올린다. 2022. 12. 12.
추신. 카페 이름을 규정상 이제야 '성경도 아카데미'로 바꾸면서 이 글을 다시 올립니다. 이 사명을 위한 장이 열릴 때 선언문으로 작성하여 올리고자 합니다. 읽으신 분들은 깊이 생각해 보시고 소감을 남겨 주시길 바랍니다. |
첫댓글 오늘도 하룻길 성경도 길을 나 혼자 가야 해
멀고도 험한 길 성경도 길을 나 혼자 가야 해 나 혼자 가야 해 아 아 아
갈레 갈레 갈레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 가려오
갈레 갈레 갈레길 길이라도 내게 주신 주의 길 따라 가려오
(권영환&배은숙의 복음송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