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술로 유명한 이한우(李翰雨ㆍ53) 조선일보 문화부 부장이 최근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고전 번역 시리즈를 펴내고 있어 화제다.
이한우 부장은 <조선사 진검승부>(2009), <조선의 숨은 왕>(2011), <왕의 하루>(2012), <왕비의 하루>(2014) 등 조선시대 역사관련 책을 꾸준히 써왔다. 2012년부터는 <논어로 논어를 풀다>를 시작으로 <논어로 중용을 풀다>, <논어로 대학을 풀다>라는 사서삼경(四書三經) 시리즈를 펴냈으며, 최근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의 번역본을 내놓았다.
<대학연의>는 송(宋)나라의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펴낸 제왕학 교과서로 조선왕들의 필독서였는데, 이러한 책을 전공 학자가 아닌 언론인이 최초로 번역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지난 10월 13일, 이한우 부장을 인터뷰했다.
<군주열전>을 쓰게 된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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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부장. |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언젠가는 실록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록 완독(完讀)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5년 <조선일보>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전기를 제가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연재 과정이 저한테는 굉장히 충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대중이 알고 있던 이승만이란 인물과 실제 역사적 사실과의 괴리(갭)가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이 부장은 “당시만 해도 이승만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이었다”며 “하지만 연재 과정에서 이승만이란 거인(巨人)이 살아온 삶의 깊이와 정신력의 세계를 알고 새삼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저는 이승만의 전기를 연재하면서 한 인물의 원자료(1차 사료)를 보면서 그 사람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것과, 단순히 막연하고 피상적인 자료로 그 인물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 지 깊이 체험했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이승만의 본 모습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단지 몇 가지 정치적 사건을 가지고 이 대통령의 전 생애를 매장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런 일이 과연 과연 이승만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일일까?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을까’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스스로한테 좀 더 정직해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더라도 내가 본 것을 바탕으로 정직하게 이야기를 하자, 과거의 불확실한 지식이나, 사람들 사이에 당연한 듯 전해지는 이야기에 얽매이지 말자는 다짐을 한 것이죠.”
이 부장은 “2000년 초반 유행한 ‘역사바로보기’식의 좌파적 역사관을 담은 교과서도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소위 우파적 시각에서 쓰였다는 기존 역사 교과서의 역사 서술 능력에도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서양철학을 전공해서 서양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전기를 비교적 많이 접한 편입니다. 서양의 학자들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을 할 때 양면성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역사적 인물에 관해서는 일방적인 평가를 하거나, 매도하는 식의 서술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밝혀낸 객관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그 인물의 실상에 까이 접근하려고 하죠.
이에 반해 우리나라 학자들은 역사적 인물에 대해 자신이 감히 ‘옳다, 그르다’라는 평가를 내리려고 합니다. 저는 이승만 박사의 전기를 쓰면서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이 내린 소위 ‘평가’라는 것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으며, 자의적인 기준이 개입된 것인지 알았습니다. 나아가 저는 우리 지식인들이 역사를 보는 시각에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장은 “이후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역사책에 대한 나름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런 동기 등으로 지금까지 역사관련 책을 꾸준하게 펴내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역사 교과서는 시민교육의 목적상 역사적 내용을 취사 선택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역사 교과서에 실렸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역사적 사실과 같지는 않거든요. 저는 실록을 통해 역사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에 만연한 역사적 편견을 깨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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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책꽃이에 꽂혀 있는 이한우 부장의 역사 관련 저서. 아래쪽에 위치한 책이 <군주열전> 시리즈다. |
실록과의 인연
-왕조실록을 읽기 시작하면서 <군주열전>시리즈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정확한 그림이나 계획을 가지고 실록을 본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실록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2003, 동방미디어)란 책을 준비하면서입니다.
그 책이 나오기 2년 전인 2001년경에 동방미디어 사장으로부터 이 책에 대한 기획을 제안받았는데, 정말 뭣 모르고 승낙했다가 고통스러운 실록 읽기의 세계로 뛰어들게 된 것이죠. 이후 거의 15년 동안 제가 많은 역사서를 내고, 사서삼경 시리즈와 <대학연의>의 번역까지 오게 된 것은 이날의 사건(동방미디어 사장님의 제안)과 연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어쩌면 단순히 역사 책을 한권 내는 일로 그칠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온 것이네요.
“하루는 동방미디어 사장님을 만났는데, 그분께서 제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이승만 전기를 감명 깊게 읽으셨다며 ‘세종실록’을 읽고 세종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써 줄 수 없겠냐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조선왕조실록 CD’(2장)를 주겠다는 제안을 하는 겁니다. 왕조실록 CD는 평소에 너무나도 갖고 싶었지만, 워낙 고가(高價: 600만원 상당)라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못꾸던 물건인데 사장님의 제안에 순간 눈이 ‘확’ 멀었습니다. 결국 이승만 전기 연재의 인연이 연결되어 지금까지 쭉 이어 온 것이죠.”
-<세종실록>을 보면서 다른 실록도 계속해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사실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란 책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입니다. 역사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실록을 바탕으로 글을 쓰려니 그 어려움과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역사서의 기본이 되는 관직명(官職名)도 제대로 모를 때였으니까요.
그래도 <세종실록>을 읽고 책을 한권 쓰고 나니 실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습니다. 내친김에 아쉬움이 많았던 세종시대를 다시 한번 조망해보고 싶었고,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세종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쓴 원고를 출판사(해냄)에 가져갔습니다.”
이 부장은 “출판사 사장이 원고를 보더니 ‘이런 관점으로 태조나 태종부터 좀 써주면 안 되겠느냐’는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거의 1년 6개월 만에 원고를 완성해서 간 것인데, 사장님이 태조나 태종 때부터 좀 써달라고 해서 한마디로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세종에 관한 책을 쓰면서 <세종실록>을 6번을 숙독했습니다. 나중에는 거의 외울 정도가 되더군요. 실록 읽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에 출판사 사장님의 승낙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대신 조선왕조 전체의 군왕 이야기를 다 쓰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조선을 대표할 수 있는 군왕을 추려서 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숙종, 정조 여섯 분의 임금을 선택했고,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된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읽어보니까 ‘축약 실록 본’을 읽은 것처럼 어느 시대가 빠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누락되는 시대와 인물이 없도록 쓴 것입니다. 태종 부분이라고 해서 <태종실록>만 읽어서는 되는 게 아니거든요. <태조실록>과 <정조실록>을 전부 읽고 전후 역사의 맥락을 전부 이해해야 태종이란 인물과 그 시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태종이란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태조실록>과 <정조실록>의 중요한 부분이 거의 녹아들어 있는 것이죠.”
‘군주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에 따라 한 시대의 모습이 결정
-저는 개인적으로 <군주열전>의 태종 편을 읽고 나서 그동안 태종 이방원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이 얼마나 단편적이며, 사실과도 동떨어진 것인가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태종이란 인물이 본격적으로 조명된 것도 제가 쓴 책이 처음입니다. 그동안 지식인 사회에서 태종은 굉장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었고, 이것이 일반인들의 역사인식에 그대로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태종은 묘하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이미지가 많이 겹치는 인물입니다. 두 사람 다 시기적으로도 건국(建國) 다음에 등장해 국가의 기틀을 만들었고, 정치투쟁이 불가피한 시기에 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도전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태종 편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는데, 정치적인 리더십 부재의 시대에 박정희와 겹치는 태종의 리더십을 발견하고 공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대다수 일반인들에게 태종은 형제를 죽이고,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등 냉혈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한 인물에 대한 편견이자 이미지입니다. 태종은 과거(科擧)에 합격한 엘리트이자 천재입니다. 사람을 이유없이 함부로 죽일 수준의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정적을 제거한 이유가 정치적이다 보니까 논란이 될지언정 그의 행위를 일방적인 선악(善惡)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그는 자기가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가 역사의 현실을 맞이할 때는 교조주의적인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군주열전>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실록이 비록 전산화되어 있다고 해도 일자별로 기록된 기사를 일반인들이 읽고 전후 맥락을 파악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실록을 읽는 특별한 요령이 있는지요.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읽으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읽어도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사건의 큰 그림을 파악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군주열전>에서 ‘리더십’과 ‘군주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특히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임금이 있을 때 그가 재야에서 일반 학자에게 학문을 배웠는가, 아니면 세자의 지위로서 배웠는가, 임금이 되고 나서 배웠는가, 몇살 때부터 배웠는가, 무슨 책을 좋아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함으로써 그의 성격과 정책 결정의 의미를 거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사람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짚어낼 수 있다는 것인지요.
“바로 그겁니다. 그가 받은 교육을 보면 그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군주열전>이란 책이 일정하게 지닌 메시지가 바로 ‘교육’과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주열전>을 읽고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숙종의 재발견과 정조에 대한 허상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부장께서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영ㆍ정조 시대가 조선의 르네상스시대’라는 것도 ‘정체불명의 역사 평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가져온 역사적 고정관념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요.
“그동안 사학자들이 실록을 보지 않고 일종의 ‘무지의 카르텔’을 형성해온 결과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 상대가 이루어 놓은 부분은 설사 틀리더라도 건드리지 않는다거나, 실록을 본다고 해도 단편적인 부분만 보면서 대충 넘겨 온 결과들이 누적된 것이죠. 저는 실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역사적 사실로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가 찼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이(李珥)가 주장했다는 ‘10만 양병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실록을 보면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동안 어느 누구도 이 부분을 검증하지 않고, 당연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여겨 왔던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교과서에서도 실어놓고, 가르쳐 왔으니 ‘무지의 카르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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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0일 제24회 이해랑연극상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맨오른쪽). 왼쪽부터 연극평론가 허순자·유민영씨, 연출가 임영웅씨, 배우 손숙씨./ 조선DB |
왕권이냐 신권이냐
-<조선의 숨은 왕>이라는 책에서 당쟁(黨爭)에 대해서 다루셨는데요. 당쟁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일부에서는 나라를 병들게 한 고질병으로, 일부에서는 일종의 조선식 민주주의인 붕당 정치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쟁은 왕조 국가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쟁이라는 것 자체가 왕권을 제도적으로 무력화시키고, 그것을 공인된 과정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당쟁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왕조 국가에서 누가 소인(小人)이고 누가 군자(君子)인지 판단하는 것은 임금의 고유 권한입니다. 신하들이 당을 만들어서 자기들 무리는 군자들이고, 상대 당 무리는 소인배라고 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당쟁이 어떻게 해서 태동을 하게 되었는지요.
“왕조국가라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당쟁입니다. 문제는 이런 당쟁이 선조 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제가 실록을 보면서 그 원인을 파악했는데, 이는 바로 선조가 당시까지 내려온 역대 임금 가운데 처음으로 적통이 아닌 후궁의 손자인 방계혈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조가 어마어마한 혈통적 결함을 지녔기 때문에 당쟁을 막아낼 권위를 세우지 못한 것이죠. 숙종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원인도 바로 원자로 태어나서 세자로 있다가 임금에 오른 몇 안 되는 임금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부장은 복잡한 계보와 다양한 인물, 오랜 역사를 지닌 조선시대의 당쟁을 한마디로 “왕권 지지 라인과 반대 라인의 싸움”이라고 정리했다.
“왕권 반대 라인이 서인(西人)입니다. 서인 중에서도 숙종 때 와서 임금을 존중하자는 것이 소론이며 그 반대가 노론입니다. 또한 노론 안에서 임금을 존중하자는 것이 시파(時派)들이고, 그 반대가 벽파(僻派)들입니다. 이게 조선시대 당쟁구도의 핵심입니다. 왕권을 누르려는 세력들이 왕비를 이용해 권력을 쥐락펴락하면서 정치를 혼탁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되면서 정도전 열풍이 분 적이 있습니다. 이 부장께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왕권(王權) 우선’과 ‘신권(臣權) 우선’ 문제에서 막연히 신권 우선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셨는데요.
“왕권을 우선시하면 왠지 독재 같고, 신권을 우선시하면 좀 더 민주주의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왕권과 신권에 관한 문제를 좀 더 단순화시키면 ‘좋은 신권과 나쁜 신권’ ‘좋은 왕권’과 ‘나쁜 왕권’ 이렇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왕조국가에서 ‘좋은 신권’이나 ‘나쁜 신권’이 우세한 상황에서는 나라가 절대로 좋아질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좋은 왕권’일 때만 나라가 좋아졌습니다. 신권 우선이 실현되려면 ‘모든 신하가 다 선(善)하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선하지는 않죠. 이는 왕이든 신하든 마친가입니다. 왕조국가에서는 군주가 중심을 잡고, 신하는 군주가 좋은 임금이 되도록 보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좋은 신권입니다.”
-드라마 이야기가 나왔으니 드리는 질문인데, 요즘 퓨전 사극이 유행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사실 정통 사극을 만드는 것은 방송의 사회적 책임과도 관계된 것입니다. 그나마 KBS를 제외하고는 방송이 사회적 책임 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사극이 온통 퓨전 일색이 된 것이죠. 고증에 바탕을 두지 않은 퓨전 사극은 사극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사극에서 현대어를 구사하는 것은 고증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한 편의주의적 발상과 오만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 사극을 만들 바에는 그냥 현대판 러브스토리를 만드는 게 낫죠. 하지만 무턱대고 작가만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사극 제작에 바탕을 되는 어느 정도 수준의 교양을 갖춘 역사책이 너무나 없다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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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31일 서울대 규장각은 일본의 도쿄대가 반환하기로한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과 동일한 조선왕조실록중 중종과 선조실록 각각 5권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조선DB |
실록이란 무엇인가?
-<군주실록>을 쓰는 7년 동안 실록을 읽으셨는데, 실록을 대할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우선 기록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록을 통해 본 조선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결코 어수룩하거나 수준이 낮은 분들이 아닙니다. 실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춘추필법’(春秋筆法) 이라는 공자가 남긴 정신에 입각해 기록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실록 문체(文體)의 수준을 보면 그 시대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가장 완벽한 실록은 <세종실록>입니다. <세종실록>은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역사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는 논리와, 또한 이긴 자가 패자(敗者)를 좋게 기술할 리가 있느냐는 등의 이유를 들어 실록의 일부 기록과 신뢰성을 폄훼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며 대꾸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실록을 단 한줄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궤변을 늘여놓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정조실록>은 승자의 기록인데 어떻게 제가 정조의 허상을 드러내며 공격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 승자가 기록했다 하더라도 보는 사람이 안목을 가지고 제대로 읽어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숙종 대의 송시열(宋時烈)이 자기 당에 속한 사람을 아무리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기록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송시열의 말이라고 무조건 동조할 수가 있습니까? 승자가 기록했든 패자가 했든 그렇게라도 기록을 해놓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정실록’이나 ‘개수실록’ 처럼 실록을 두 번 펴내기도 하는데, 혹시 이런 과정에서 왜곡될 소지는 없는지요.
“조선시대 실록제작 과정이 그처럼 어수룩하지 않았습니다. 실록을 만든 실록청 또한 초보적인 수준의 관청이 아닙니다. 또한 구태여 역사를 왜곡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나 한 사건을 왜곡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공식 기록을 다 찾아서 삭제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고요.
예를 들면, 안평대군의 책사였던 이현로(李賢老)는 한명회(韓明澮)하고 소위 ‘맞짱’을 뜬 인물인데, 세조의 계유정난 이후 한명회가 조명을 받으면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사람은 잊혀졌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의 기록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비록 패자였지만, 그의 모든 행적이 실록에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실록은 아주 엄중하게 기록된 역사입니다. 또한 개수실록이나 수정실록도 본 실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두 개의 실록을 비교해서 무엇이 누락되고 수정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정신입니다.”
-오늘날 우리 정부 시스템은 조선시대와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짜여졌는데요. 혹시 조선시대의 정부 조직 중에서 오늘날 우리가 계승할 만한 것이 있는지요.
“조선시대에는 중추부(中樞府)라는 조직을 두었습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고위관료들이 퇴임 후 중추부의 영사(領事)와 판사(判事), 지사(知事)와 동지사(同知事) 등의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국가를 운영하려면 아무래도 현직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경륜이 많아도 의사를 표현하거나, 어떤 안건을 내는데 제약이 따를 수 있는데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현직에서 물러난 원로들로 구성된 중추부를 둔 것입니다.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경우 국왕은 현직과 전직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후 판단을 내리거나 어떤 안을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중추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와 오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제도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상원(上院)에 해당합니다. 조선은 이처럼 실질적인 상ㆍ하원 제도를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습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이런 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국가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장은 “오늘날 우리도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두고 다툴 것이 아니라, 상ㆍ하원제를 도입해서 조화를 잘 이루어 내면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상당 부분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원이 비교적 보수적인 판단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하원에 진출할 여지가 있습니다. 조선 같은 농업 국가에서도 임금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했는데, 요즘 같이 복잡 다난한 시대에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결정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 후진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동ㆍ서양에서 오랜 경험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만들어낸 정치 시스템의 장점을 거의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본질을 이야기 해야 해결이 됩니다. 우리의 경우 지식인들이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담론이 공허하게 흐르고, 정치도 재미없고, 사람들도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언론인이 고전 번역에 뛰어든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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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로 논어를 풀다>. |
“지금까지 논어(論語),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풀이한 세권의 ‘사서삼경 시리즈’와 <대학연의> 번역서 상ㆍ하권을 펴냈습니다. 저의 전공이 철학이어서 서양철학은 어지간히 보았지만, 역시 서양철학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주열전> 시리즈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장은 “하지만 이런 개인의 철학적인 이유와 함께 왕조실록이 논어를 비롯한 동양고전을 공부하는데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저는 실록을 읽으면서 조상 중에 아주 표상이 되는 경세가(經世家)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선 초기 하륜(河崙)이나 조선 중기 이준경(李浚慶) 이라는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들이 어디에서 경세의 기초를 갈고 닦았을까 궁금함을 가지고 살펴보니, 역시 논어에 그 뿌리가 닿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훌륭한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볼수록 ‘논어’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부장은 “논어는 평소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인데 아무리 공부하고, 반복해서 읽어도 도무지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시중의 번역서와 해설서로는 논어의 본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2년간 혼자서 논어에 파고들었습니다. 2년 정도 논어를 보다 보니까 한문에 대한 감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고, 동시에 기존에 나와있는 논어 해설서에 뭔가 중대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출판된 <논어> 해설서의 어느 부분에 오류가 있다는 것인지요.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기존의 번역서를 아무리 읽어도 온갖 현학적인 표현만 가득했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역 때문에 일반인들이 논어에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 어렵다는 ‘자본론’도 제가 1년 만에 읽었는데 논어는 수년을 읽어도 그 뜻을 이해를 못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년간 논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니까 그 뜻이 파악되었습니까.
“논어는 총 498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논어를 읽으면서 각 장들이 독립된 내용이 아니라, 분명히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논어를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 맥락을 따라야 하며, 중간에 한 편씩 빼서 보는 것은 논어를 제대로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나름의 가설을 세웠죠.
그렇다고 해도 498편이 모두 명료하게 연결될지는 사실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논어를 편집한 편집자의 마음속으로 한번 들어가서 논어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논어의 편집자는 왜 공자(孔子)가 한 수십만 개의 말씀 중에 하필이면 ‘學而時習’(학이시습)이란 말씀을 맨 앞에 두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진 것이죠.”
이 부장은 “당연히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하니까 맨 앞에 두었을 것 아니었겠느냐”며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공자의 말씀에서 ‘學(학)’은 도대체 무엇을 배우라는 말인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學而時習’에서 ‘무엇을 배우라’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저는 당연히 공자가 배우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논어의 텍스트 안에 있는 ‘學’이란 ‘學’은 모두 가져와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논어의 다른 장에서 學은 도대체 무엇을 배운다고 했는지 캐 들어 간 것이죠.
그러자 다른 장에서 學은 ‘文(문)을 배운다’고 나오는 겁니다. 우리나라 논어 해설서에 이 文에 대해 단순히 ‘글’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공자가 글 선생이 아닐진데 단순히 ‘글을 배우라’고 했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文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文이냐’하고 또 의심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文에 대한 모든 사전적 풀이를 찾아 모으는 겁니다. 이처럼 논어의 의미를 논어의 안에서 찾는 시도를 계속해서 해나간 겁니다.”
-보통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에 대해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렇게 해석을 하지 않나요.
“그 해석 문장에 벌써 오류가 두 개나 있습니다. ‘時’에는 ‘때로’ 혹은 ‘때때로’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항상’ 혹은 ‘수시로’라는 뜻입니다. 亦자는 ‘또한’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역시’ 할 때의 亦입니다. 첫 문장에 ‘또한’이라는 비문이 나올 수가 없죠.
이처럼 기존의 논어 번역은 초보적인 의미와 문맥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일반인들이 고전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결국 기존의 오역(誤譯)의 폐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제 손으로 사서삼경을 직접 번역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논어로 논어를 풀다>는 1400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분량입니다. 일반인들이 읽기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텐데요.
“논어는 그 내용도 좋지만, 고전으로 들어가는 사전과 같은 것입니다. 고전의 개념을 정의하는 사전이죠. 사사삼경을 읽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논어를 읽어서 한자와 문구 하나하나에 담긴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나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不惑’(불혹)이란 말을 단순히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면 논어의 본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논어에 보면 惑에 대해 그 의미가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논어의 다른 부분과 연결해 惑의 정확한 의미를 알 때만이 ‘불혹’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논어 속에서 서로 연결된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려니까 책의 부피가 두꺼워졌습니다.”
“고전은 인생의 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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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부장이 번역한 <대학연의>. 조선시대 제왕학 교과서다. |
“진덕수가 펴낸 <대학연의>는 조선을 만든 태종과 세종을 이해하는 데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입니다. 그뿐 아니라 고려말의 신진사대부가 읽은 유학 책이 바로 <대학연의>였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만들 때 밑그림이 된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책이 국내에 번역되지 않아서 제가 직접 했는데,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습니다.
책의 문장도 논어나 여타 사서삼경 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그것을 제가 번역해서 내놓자, 어느 학자가 전화를 걸어와 ‘어디서 한문을 배웠느냐’고 묻더군요. 제가 ‘독학했다’고 하자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마 누구한테 배워서 했으면 오히려 고정 틀에 얽매여 번역을 제대로 못 했을 것입니다.”
-조선은 주희(朱熹)의 성리학(性理學)에 지배를 받은 나라로 알고 있는데요.
“실제 조선의 절반을 만든 것은 진덕수입니다. 주희는 조선 중기 이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진덕수가 펴낸 심경(心經)이란 책은 퇴계를 비롯한 여타 유학자들이 단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은 필독서이자 조선시대의 최고 베스트 셀러였습니다. 진덕수를 모르면 사실 조선사를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전(古典)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한마디 하신다면.
“동양고전에는 서양의 사상과 철학으로 채울 수 없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틀은 비교적 안정이 되어 있지만, 그것을 지탱해줄 내적인 의식토대가 붕괴된 상태입니다. 저는 동양 고전에서 정신적인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고전은 인생을 살아가는 내비게이션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있다고 해서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인생에서 많은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