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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찰·이율 형제 정려(인천 기념물 52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이찰·이율 형제의 효자 정려 모습 |
조선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인 이찰(李嶻)·이율(李嵂) 형제는 광해군 6년(1614)에 명문가에서 태어나 행실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했던 형제는 어릴 때 부친이 병들어 눕자 곁을 떠나지 않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
▲ 비각 안의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것) 모습 |
부친이 위독해지자 형제는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흘려 넣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며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
▲ 우측편에서 바라 본 정려각 모습 |
▲ 정려각 앞에서 바라 본 종중 묘역 전경 |
▲ 이찰·이율 형제 묘역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묘역군 우측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
또한, 이후 모친이 위독해지자 이들 형제는 부친때와 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으나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른 후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
▲ 이찰·이율 형제 묘역 전경. 좌측 쌍분이 이찰선생 묘, 우측 단분이 이율선생 합장묘입니다. |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이들 형제의 효행을 칭찬했고 부평구 유지들은 나라에 이를 상소하였고 이에 현종은 서원공 한숙으로 하여금 그들의 효행을 기리도록 하고 1670년(현종11년) 효자 정려를 내렸다. |
▲ 좌우측에서 바라 본 이찰·이율 형제 묘역입니다. 근래에 이장해 온 듯한 모습입니다. 옛 석물은 하나도 없네요... |
당초, 이찰·이율 형제의 효자 정려는 갈산동 종손 집 옆에 있었으나 도시화에 밀려 두 분의 묘소가 있는 현 위치(계양구 갈현동 산73-6)로 이전하였다. |
▲ 이찰선생 묘 |
▲ 이율선생 묘 |
이찰·이율 형제 정려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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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의 비각 안에 이찰·이율 형제 정려가, 지도 맨 우측에는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소재지 : 인천 계양구 갈현동 산73-6 |
지도 좌측 화살표 위치에 이찰·이율 형제 정려가 있습니다. 계양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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