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본능(마르코폴로 양을 생각하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침 첫차라 승객이 별로 없다. 달리는 차창밖을 바라보니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지나간 그 세월들...
나는 이때쯤이면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병신 자식이 효도한다)'는 말이 자주 떠올랐다. 벌초 시즌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적엔 벌초를 하였던 기억이 없다. 당시의 시골이란 농사때문에 집집마다 소를 키웠고, 아버지께서 아침이면 소꼴을 베어 나르셨다. 그 풀중에는 뒷산이나 밭귀퉁이 있는 조상들의 묘지에서 벌초를 겸해 베어오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형제나 친인척들이 추석을 앞두고 따로 벌초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그 벌초는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우리들 세대는 고향을 지키는 형제를 제외하곤 대부분 객지로 나가 살았다. 더 좋은 별천지를 찾아서가 아니라, 생업을 위해서였다.
직장을 다니며 동료들의 형제들이 가까이 산다는 것과 우애를 과시하는 대목에선 부러움을 느낀때가 많았다.
나는 마지막 보루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거리가 있더라도 가능하면 벌초행사에 참여하려 노력했다.
벌초는 이미 집안의 묘지 관리자가 올해들어 몇번씩이나 하였다고 전해들었다.
진주에 도착하니 집안 동생이 마중을 나왔다. 그도 70대에 접어 들었으니 건강 안부가 먼저다. 대뜸 인생 허무하니 여럿 생각말고 마음 가는대로 살다 가잔다.
마음속으로 '그런말도 할줄알아?' 하고 의아해했다.
동생은 학창시절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져 대학생때부터 택시를 운전했고, 교장으로 퇴직후에도 관광회사에 재취업 최근까지 차를 운전했던 강한 멘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말이 이랬다.
"15년 동안 가족처럼 키워온 애완견이 아파 잘아는 동물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가슴에 안고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고개를 떨구는데, 허무하더라. 동물이나 인생이나 마지막은 예고없이 갑자기 오는 것 같데."
산소에 도착하니 벌초는 관리인에 의하여 이미 깔끔하게 되어 있었고, 주변 조경작업에 한참동안 땀을 흘렸다.
얼마 후 장소를 옮겨 가까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동생을 만났고, 셋은 이야기를 나누다 한적한 시골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식당은 벌초온 사람들인지 많은 손님들이 북적댔다. 동생의 말은 평소에도 그렇다며 주인이 부지런하고 친절해서 분위기가 다른 것 같단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커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연스레 농촌한경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이제 우리네 농촌은 외노자(외국 근로자)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단다. 그런데 한달이면 300만원, 최저임금의 인상으로 그 품삯 주는 것도 만만치 않다니...
그리고 그들은 잔업이 많거나 소위 돈내기를 좋아한다니, 그분야에선 우리의 경쟁을 넘어선 것 같다.
나는 그것도 얼마가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들이 기술을 익히고 그들 나라에 돌아가면 더 좋은 기후한경으로 역수출이 되기 때문이다.
엇그제 어느 정치인이 최저임금의 산출근원에는 가족들의 생겨비가 포함되었으니, 그 생활비란걸 우리와 동남아 후진국과 다르게 적용하는 것은 차별화가 아니지 않느냐?고 하는 말을 들었다. 속보이지만 일가견이 있겠고, 농촌엔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근래들어 농산물 가격 인상으로 그런대로 농가수익은 괜찮은 것 같았다. 교직에 있었던 동생과 나는 '기후변화로 어차피 과일을 비롯한 농작물의 품종 변경이 필요하니 대체작물을 시험적으로 재배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미 60중반에 접어든 시골 동생은 가족이 '농사 자체가 너무 힘들어 이젠 농사를 접자'고 말한단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나이는 현재의 농촌에선 많은 축에도 들지 못하는데 농촌일이 힘들긴 힘드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생더러 고맙다고 했다. '이제는 자식 온다고 마중나오실 부모님도 안계시고, 이뿐이 곱분이 생각 떠오르는 추억거리도 사라져 잃어버린 고향이지만, 시골을 지켜주어서 마음이 푸근하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들에게 남은 건 명분과 실리 둘다이다. 명분은 어떻게 살았더라는 얄팍한 눈속임이고, 실리는 그 명분의 허물을 딛고 자기자신에게 정직하게 살다가는 진실된 결과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명분은 필요하다. 사자나 호랑이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대와 혈투를 벌여야 하고, 사람도 아버지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자신이 있게된 근원을 자식들에게 보이고, 가족들의 삶의 울타리가 되어 주야 한다. 그래서 아직은 다수의 사람들이 이 무더위에도 조상들의 묘를 살핀다.
그래야만 죽음 앞둔 연어가 산란장소로 회귀하고, 여우가 죽을때 머리를 고향 방향으로 둔다는 말이 탄력을 받는다.
그래도 요즘은 어째든 현실적인 압박에 사람들은 실리를 많이 찾는 것 같다.
돌아오는 길, 동생들이 나를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해 주었다. 다시 만나자는 손흔듬, 그래 다시금 만나야지...
아직은 강한 햇살을 무시하고 나는 커턴을 걷어 제쳤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마자 차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역시 벌초시즌의 위력, 마산까지는 차가 밀릴거란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오랫만에 차창밖 푸르름을 실컷 볼수 있는 즐거움도 있었다. 가는둥 마는둥 나는 문득 언젠가 TV 프로를 통하여 보았던 마르코폴로 양의 마지막 모습이 머리에 다시 떠올랐다.
파미르고원의 척박하고 험준한 지형에서 이동하는 자신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어미양과 새끼양, 어미는 새끼양을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더니 갑자기 거친 땅위에 풀썩 쓰려졌다.
도대체 뭐지? 갑자기 잘걷던 어미양이...나는 영문을 잃고 티비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무슨 묵계가 있었듯, 아니면 그들의 숙명을 받아 들이는양 새끼는 그러한 자신의 어미를 한동안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새끼양은 쓰러진 어미를 뒤돌아 보지도 않고 무리를 찾아 홀연히 떠나갔다.
가족, 그것도 사랑하는 어미와 영원한 이별을 하는 어린양의 모습, 뜨거운 눈물과 눈앞이 깜깜한 암울함은 없었을까? 그 가운데서는 우리 인간의 모습도 조명되었다.
필연, 숙명 그리고 삶의 여정... 나는 마지막 그 장면에서 처럼 결코 새끼양은 데리고 가지 않고, 늙은 여우처럼 외진 곳 떠돌다 사라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뜻깊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