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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직 林炳稷(1893~1976)】 "1918 ~ 1919년 3·1독립운동자금 조달에 진력"
1893년 10월 26일 충남 부여군(扶餘郡) 초촌면(草村面) 응평리(鷹坪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호는 소죽(小竹)이다. 아버지는 임연상(林淵相)이고, 어머니는 달성서씨(達成徐氏)이다. 아홉 살 되는 해에 아버지가 대한제국의 외부(外部) 주사(主事)로 임명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열 여섯 살에 강화(江華)의 황찬익(黃讚益)과 혼인하였다.
1908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아버지의 권고로 자퇴한 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의 영어부에 들어갔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전문부에 다니며 학감(學監) 이승만(李承晩)과 사제(師弟)로서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무렵 기독교로 개종하여 주일이면 정동예배당에 나가는 한편, 종로에 있는 대한성서공회(Korean Bible Society) 서기로 일을 하다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이때 조선과 일본 감리교구 감독인 해리스(M. C. Harris)의 추천으로 조선총독부의 정식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1913년 10월 10일 서울을 출발,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와 요코하마(橫濱), 그리고 하와이를 거쳐 11월 1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어 대륙횡단 철도를 타고 매사추세츠주(The Commonwealth of Massachusetts) 노스필드(Northfield)에 위치한 마운트 허먼 스쿨(Mount Hermon School)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전도사 무디(Dwight I. Moody)가 1881년에 세운 대학 예비학교였는데, 학생들이 농장이나 목장, 목공소 등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학교에서 4년간 학업을 마친 뒤 오하이오주립대학(Ohio State University) 농학부에 입학하였다. “황폐한 조국의 산천과 후진성에서 허덕이는 한국 농업을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서양식 농학을 전공해야 하겠다”는 평소의 포부에 따른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1918년 말 오하이오주(State of Ohio)의 한인 유학생들은 ‘미주한인학생단’(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America)을 발기하고, 파리강화회의 개최에 맞춰 한국사정을 세상에 알릴 영문월보 발간을 결의하였다. 이때 학생단의 서기로서 1919년 3월 『자유와 평화(Freedom and Peace)』라는 제호의 잡지 제1권 제1호를 발간하는 데 앞장섰다. 이 학생 영문월보는 『청년 한국(Young Korea)』으로 제호가 바뀌어 제2호와 3호가 나왔고, 이어 서재필(徐載弼)이 필라델피아에 설치한 대한공화국 통신부에 인계되어『한국 평론(Korea Review)』으로 연속 간행되었다.
한편, 미주지역 3・1운동으로 평가되는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일명 대한인총대표회의)의 개최를 앞두고 한인학생단 서기의 이름으로『신한민보』에 광고를 내고 이 ‘역사적인 국민대회’에 참가함으로써 충심(忠心)을 보여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승만과 서재필 등의 주도로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의 소극장(The Little Theatre)에서 한인회의가 열리자, 김현구(金鉉九, Henry Kim) ・ 장기함(Kiyham Chang)과 더불어 서기직을 맡았다.
제1차 한인회의가 끝난 뒤 이승만의 요청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개인 비서로서 워싱턴의 외교무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3・1운동 후 이승만은 ‘대한공화국’의 국무총리, 세칭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등으로 선출되면서 대미외교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6월 18일 그는 한반도에 적법적인 ‘대한공화국’이 수립되었음으로 일왕(日王)은 이 정부를 인정하여 일본 군대와 관리들을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는 「국서(國書)」를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8월 25일 워싱턴에 구미위원부가 설립된 후에는 서기 또는 임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승만과 함께 미국 내 여러 도시들을 순방하며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결성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1920년 11월 16일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 직무 수행을 위하여 하와이에서 중국으로 밀행(密行)할 때 동행하였다. 12월 5일 상하이에 도착 후 대통령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심각한 재정난과 내부 분열상을 목도하였다. 이듬해 2월 이승만으로부터 “자금도 고갈되고 또한 미국에 있는 여러 동지들에게 긴급히 보내야 할 친서(親書)가 있으니 구라파를 거쳐 미국으로 직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임시정부의 외무부 참사(參事) 황진남(黃鎭南)과 동행하여 유럽 내 외교선전활동의 거점인 파리와 런던을 경유, 미국으로 돌아왔다.
1921년 11월 12일 미국 주도로 동아시아 ・ 태평양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 일명 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구미위원부 부원들과 함께 이 회의에 한국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총력외교’를 펼쳤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이 침체기로 접어들자, 생업에 종사하였다. 1923년 6월 하순 시카고에서 북미지역 제1회 대한인유학생회가 개최되자, 출판분과위원회를 맡고 총회 임원(영업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가 결성되자, 송철(宋喆) ・ 이살음(李薩音)과 함께 ‘나성(羅城,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한동안 송철이 경영하는 김송위탁판매소(K&S Jobbers)에서 회계를 맡아 보았다.
1941년 시카고에서 국민회와 동지회의 합동 3・1절 경축식에서 한 ・ 중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하여 영어로 연설하였다. 독립운동의 전망이 불투명하고 수입이 일정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지회의 담보금(擔保金)과 외교비, 주보(週報) 대금 등을 납부하였다. 같은 해 4월 하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주미외교위원부가 출범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 자리잡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같은 해 12월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확대 ・ 개편되었다. 이때 임시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과(宣傳科)의 일을 맡았다.
1942년 2월 15일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경위대’[일명 맹호군(猛虎軍)]가 창설되자 선전과 참위(參尉)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3・1절 기념식 때 처음으로 열병식을 거행하여 교민과 지역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4월 26일에는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공식 인가를 받아 캘리포니아주국방경위군(加州國防警衛軍)으로 편입되었다. 5월 30일에는 그의 주선으로 샌프란시스코에도 한인경위대가 조직되었다. 이곳 경위대는 미국 전시정보국(The Office of War Information)의 협조를 받아 국내와 원동(遠東), 극동(極東)에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일본의 패망과 한국 독립의 희망을 고취하는 방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인준을 받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직무를 수행하게 되자 1942년 9월 ‘무관보(military attaché, 계급 대령)’로 임명되어 워싱턴으로 갔다. 이때부터 ‘커넬(colonel) 임’이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그에게 부여된 직무 중 하나는 미국 전략첩보국(OSS)과의 협조 하에 미주 한인들을 비밀리에 모집하여 특수훈련을 받도록 하는 일이었다. 1차로 50명의 명단이 작성되어 OSS에 통보되고 그 중 12명이 선발되어 워싱턴으로 차출되었다. 주미외교위원부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자유한인부대’(Free Korean Legion)를 창설하려고 하였으나, 미국 육군부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43년 동지회 북미총회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간하는『북미시보(北美時報, The Korean American Times)』의 영문 주필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5월 워싱턴으로 복귀하였다. 6월 4일 주미외교위원부 사무실에서 임원회를 개최되자, 뉴욕 ・ 뉴저지 ・ 워싱턴 등지에 거주하던 한인 22명이 참석하여 협찬회(協贊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협찬회 정치부 부장(部長)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이 조직은 전후(戰後) 이승만 중심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으면서 특별한 활동없이 해체되었다.
1944년 9월 15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연합국구제부흥기관(UNRRA)이 주관하는 국제회의가 열리자 옵서버(observer)의 자격으로 출석하였다. 이때 라디오방송을 통하여「한국 내지와 원동 각처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후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을 논의하기 위하여 50개국이 참가하는 연합국회의가 개최되었다. 임시정부의 훈령에 따라 주미외교위원부가 한국대표단(단장 이승만)을 구성하자, 한국대표단 일원으로서 회의 참석을 요청하는 문서를 들고 미국측 실무 책임자인 히스(Alger Hiss)를 찾아갔으나 무시당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미국이 그 해 2월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을 소련에게 팔아넘겼다”는 얄타밀약설을 제기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 국무장관 대리 그루(Joseph C. Grew)는 6월 8일 얄타밀약설을 부인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 10월 6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을 맡아 미국 정부와 의회, 그리고 국제연합(UN)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최종 목표는 미군정 관할 하에 놓인 남한에 이승만을 수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가 끝난 1949년 1월 28일, 35년 만에 귀국하여 대한민국 제2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주미외교위원부는 주미한국대사관으로 개편되었다.
외무장관에서 물러난 후 1951년 11월부터 1960년 9월까지 UN대표부 대사를 지내며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58년에는 한일회담 수석대표로서 국교 재개를 위한 교섭에 임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임병직회고록』이 있다. 유해는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고향에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