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예가 한종일님 광풍을 만나다
2016년 전북지방우정청 이문수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초청 강좌
그 강좌에서 만난 한종일님의 작품과 전설 같은 일화가 아직 생생하다.
이문수 실장님의 강좌에 의하면 무더운 날, 전주한옥마을 중심에 있는 교동아트미술관에서 바람 부는 대숲을 찍어서 한지에 검정 잉크를 뿌린 듯한 작품이 그 어느 작품보다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사진에 깃든 회화성이 좋았고, 댓잎 스치는 바람 소리가 좋았다.
이실장을 황홀경에 빠지게 한 작품은 몰아치는 겨울 광풍 속에서 흔들리는 대나무 숲을 3분간 조리개를 열어서 촬영한 “광풍”. 캔버스 위에 젯소(Gesso)칠하고, 거친 붓에 물감을 잔뜩 찍어서 갈필(渴筆) 맛이 나게 단숨에 휘갈겨 놓은 듯했다. 작가는 숨막히는고통과 절망, 삶의 격정의 순간들을 흔들리는 대 숲에 옮긴 것이다. <혼돈>이라는 제목으로 불어닥친 고난에 밀려 허겁지겁 달아난 현실이 이 작품에 녹아 있다.
사진작가 한종일은 공무원으로 공공기관에 17년간 재직했었다. 눈가린 경주마처럼 앞 뒤 돌아볼 겨를 없이 일에만 전념했다. 동료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있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몸이 안 움직였다. 청천벽력처럼 전신마비라는 기막힌 상황에 직면했다.
이 사진작가의 병은 현대 의학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다 한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우주에 떠도는 수많은 나쁜 기운 중의 하나가 몸속에 들어와서 척수에 빈 구멍을 낸 것이라고.’ 애둘러 위로하고 설명한다. 그 후로 수년간 병원 신세를 지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만 했다. 졸지에 1급 지체 장애인이 된 것이다.
기막힌 운명을 끌어안고 그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악산 오르막 길섶에 청국장 집을 차린 것. 바람처럼 오고가는 사람들을 친구 삼아 ‘걷고 싶다’는 절박하고 원초적인 꿈을 꾸었다.
그의 열심과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기적처럼 한 달에 일주 정도는 조심스럽게 걸을 수 있다. 의사는 ‘걸으면 위험하다’고 말린다. 사진작가는 간신히 걸을 수 있는 일주일 동안 통증을 감내하며 출사를 감행한다. 그의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욕망과 열정을 토해 낼 수 있는 남은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함이다. 혼신을 다해서 작업을 한 후에는 삼 주 정도 쉬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일주일에 한 달 분량의 삶을 응축해서 살고 있다고 학예실장은 한 인간의 운명과 그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며 자신의 길을 가는 한종일 작가의 삶을 그의 광풍 사진과 함께 기묘한 인연으로 삼고 사진의 가치와 한 사람의 운명을 그의 거실에 걸어두고 목도한다.
이 실장은 그 자리에서 광풍에 끌려 시쳇말로 ‘지름신’이 내렸다 한다. 외상이면 소도 잡는다고 했던가, 조만간에 값을 치르기로 약속하고 그 작품을 샀다. 그는 갖고 싶은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던 그림을
떼고, 그 자리에 걸었다. 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안복을 누린다. 볼 때마다 벅찬 감동이 살아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다.
이문수 실장은 여름 복판에서 겨울 광풍을 보면서 또 다른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올겨울 거친 삭풍이 부는 날에는 대 숲에 가려 한다. 모진 광풍 속에서 댓잎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를 보고자 함이다. 왕발은 그의 등왕각서에서
추수공장천일색 秋水共長天一色 가을강은 하늘을 닮는다고 했다.
이문수는 한종일의 광풍을 보면서 바람처럼 잠시 왔다가는 운명을 본 것은 아닐까?
먼저 갑작스럽게 큰일을 겪은 한 사람의 잔인한 천형같은 운명이 한작가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작품 속에서 자신의 한자락 광풍같은 운명을 보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광풍은 내게도 마찬가지다. 아니, 온 인류에게 오고 가며 불어닥치는 운명인지 모른다.
한종일 작가의 삶이 녹아있는 청국장님 예가에서 맛있는 청국장을 들며 그의 삶이 깃든 사진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호사도 누리고 작가의 허락을 받아 사진으로 담는다.
물이란 제목으로 사진전을 했다 하는데 금년도 사진전에는 미술관에 직접 가서 신 내린 그의 사진을 찾고 싶다.
이것이 생이었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자신의 운명을 끌어안고 길 찾는 그이의 삶의 궤적을 찾아 보고 싶다.
2023.9.17(일) 씨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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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늘을 나는 양탄자처럼 휠체어를 타고 다니시던 님, 마침내 본디 몸을 회복하여 백석의 용모로 나타나시니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2024년 6월 예술회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신다고 하니 그날을 기다립니다.
축하합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