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카피올라니 공원에서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추진 중이며 국궁 속에 있는 한국인의 올바른 정신을 널리 알려고 합니다. 올림픽에서도 아시다시피 여러 민족 앞에 당당히 내놓고 자랑하는 활 쏘기를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해외에 나와 사는 한국인은 우리의 활은 쏠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입니다. 회원 가입이나 회비도 내지 않아도 되는 한인 여러분과 함께 심신수양을 시작 합시다. 이곳 하와이는 물론 전세계에 나아가 살고 있는 한국인은 활 쏘기처럼 삶에도 금메달 우수한 민족입니다. 쉽지 않은 해외이민 생활에서 난관에 부딪칠 때 대한민국 사람이란 자긍심을 가지고 극복해 나아갑시다. 다음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함에 한국의 예를 들어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대한궁도협회에 등록된 국궁장은 전국에 400여 곳이 개별적으로 운영되므로 회원 가입 조건 및 회비와 가입비등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궁시 구입처'에서 직접 구입하시거나 또 다른 방법은 활을 배우고자 하는 亭(국궁장 이름 또는 단체명 : 무슨 무슨정)에 가서 일괄 구입을 의뢰해도 됩니다. 특히 궁시일체는 자신의 체격조건에 적합하게 활의 세기 및 화살의 무게와 길이에 맞추어야 합니다. 활을 배우고자 하려면 독학으로는 어렵구요. 전국에 있는 국궁장을 이용해야 하며,일반적으로 국궁인은 대한궁도협회 등록 및 국궁장의 회원으로 가입해야 합니다. 전국에 있는 국궁장은 국궁 단체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궁장의 운영비는 회원의 가입비(약 10만원에서 30만원, 월1만에서 5만원 정도)를 사용합니다. 전통 활인 국궁(각궁)은 50에서 70만원 죽시(대나무 화살)은 개당 2만원 내외이며, 초보자가 처음부터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나이제한은 없고, 국민 모두가 알고 큰 열량을 소모하는 운동이 아니라. 어르신들께서 즐겨 하시는 운동입니다. 인천의 수봉 공원 수원의 동문 국궁 장 전국에 400여 궁터가 지난 30년 사이에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은 자기 활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울특별시 <!--[endif]--><!--[if !vml]--> 황학정 [黃鶴亭]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대한제국 때의 누정.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지 정 일 <!--[endif]--><!--[if !vml]--> <!--[endif]--><!--[if !vml]--> 1898년(광무 2)에 대한제국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진 궁술연습을 하던 사정이다. 오사정이란 도성 안 서쪽에 세워진 다섯 개의 사정(射亭: 활터에 세워진 정자), 이 있었는데, 황학정이 세워진 곳은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다. 1922년 일제강점기 활 쏘기를 금지했던 상황에서도 황학정 만은 그 맥을 이어갔다. 사직공원 뒷산 인왕산 기슭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건물로 건평 59㎡이다. 필운동(弼雲洞)의 등과정(登科亭), 옥동(玉洞)의 등룡정(登龍亭), 삼청동(三淸洞)의 운룡정(雲龍亭), 사직동(社稷洞)의 대송정(大松亭), 누상동(樓上洞)의 풍소정(風嘯亭) 서촌 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 일본의 무예가 한반도에서 자웅을 겨뤘다. 당시 일본의 조총, 중국의 창, 조선의 활을 으뜸으로 쳤다. 우리 민족은 활과 친숙했다. 활터를 찾아 국궁(國弓)을 쏘며 옛 무인의 풍류를 즐겨보자. 국궁은 전신운동으로 건강에도 좋다. 고종이 노란색 곤룡포를 입고 활을 쏘는 모습이 노란 학(황학)이 춤추는 것 같다고 해서 황학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 활 쏘기 무예가 쇠퇴하자 많은 활터가 사라졌고 지금은 오사정이 모두 없어졌으나, 대한제국 때까지 남아 있던 유일한 궁술 연마장으로 지금도 이곳에서는 궁술행사를 열어 옛 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궁도의 종가(宗家)인 황학정을 중심으로 최근 국궁 열기가 살아나고 있다. 황학정을 찾는 사람도 매일 20~30여명에서 50여명으로 늘었다. 황학정 회원인 사원(射員) 110명. 회원은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태어난 곳 인천 광역시 시립수봉 궁도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시립수봉궁도장(무덕정) 인천시궁도협회 인천시 남구 숭의동 수봉공원 내에 위치한 궁도장 고종 2년인 1865년에 세워진 무덕정은 국궁의 역사와 함께 근대생활 체육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인천 무덕정은 전국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많은 국궁인들을 배출해 낸 장소이다 국궁이 인천의 효자종목으로 불릴 만큼 훌륭한 선수들이 줄이어 나온 곳 제23회 전국궁도대회 개막 인천 남구 숭의동 수봉공원 무덕정. 대한궁도협회가 9.15 인천상륙작전을 기념 궁도 대회 남녀 일반부, 노년부(만 65세 이상) 단체 토너먼트 남자일반 937명. 노년부: 173명. 여자: 124명. 총인원: 1,234명이 참가
성장한 곳 포항 제1회 대회 1968년 예천 무학정에서 개최한지 40년 제100회 경상북도남녀친선대회 <!--[endif]--><!--[if !vml]--> <!--[endif]--><!--[if !vml]--> ◇참가사정:포항( 대회 결과 :◇ 개인전 노년부 ◇ 개인전 일반부 ◇ 개인전 여자부◇ 단체전1위:포항권무정- 2위:포항송학정- 3위:칠곡호국정- 3위:포항일출정 남원시 관덕정 국궁 체험장 <!--[endif]--><!--[if !vml]--> <!--[endif]--><!--[if !vml]--> 남원은 기원초 백제의 교룡군 이었는데 통일신라(685년)때 남원소경이 설치된 이후 남원이라 부르기 시작한지 1300여 년이 된 유서 깊은 고장이다. 고려 우왕6년(1380년) 삼남을 휩쓸고 남원까지 침범한 왜구를 운봉황산 협곡에서 섬멸하는 “황산대첩”을 이룩하였으며 정유재란(1597년)때는 남원성 전투에서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군, 관, 민 일만 여명이 “만인의총” 모셔져 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남원에는 무술연마와 향사례의 도장으로 사장이 여러 곳에 설립되었는데 부(府)의 남쪽에 분위정, 읍승정은 300여년 전에 남원노계소(기로회) 개설하였는데 이후 읍승정은 관설사정인 관덕정(觀德亭)으로 개정되어 운영되었다. 1860년까지 부내무사 강습소로 무술과 궁술을 연마해오다 1887년 사정이 중수 되어 오늘날까지 사정건물로 보존되고 있다. 크게 부흥하던 남원사정은 일제강점기를 맞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관덕정 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여러 사정이 폐정되어 결국은 하나의 사정으로 현재의 “관덕정”이라는 이름의 사정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1931년 춘향제가 열리면서 본정에서 전국궁도대회를 처음 개최하였으며 1973년 금동에 있던 사정을 그리고 역대 사장과 사원, 고문, 국회의원님들의 지원으로 활터를 호남 제일의 궁도장으로 발전시켜와 현재까지 전국궁도대회를 63회와 약420여 차례의 향사례를 개최하였다. 현재까지 사원의 수는 약 90여명이고 임원진은 사두1인, 부사두2인, 감사2인, 총무1인, 부총무1인, 재무 1인, 부재무1인, 이사 7명으로 구성되어 사정을 운영하고 있다 전주 천양정 제10회 전주시장기 및 천양정 제47회 전국남녀궁도대회 <!--[endif]--><!--[if !vml]--> 최고의 강호사정으로 '연기 금덕정' 피난지 충남 보령정 피난지 부산 수영정 충남 논산의 강경 덕유정(사백 <!--[endif]--><!--[if !vml]--> 전남 관덕정 함평읍 기각리 구기산 앞 영수천변에 있다. 이 정자는 영파정(潁波亭) 이안(李岸)이 세웠다고 전하며 처음에는 그의 아호(雅號)인 영파정을 정자 이름으로 썼다. 원래 이 정자가 건립된 단초는 1454년(단종2년)으로 올라간다 당시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보위에 오르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자 당시 정계에 몸을 담고 있던 함평출신 이안(1414년 - ?)이 이에 반대하고 함평으로 낙향하여 살게 되었다. 이안의 생애와 사적을 연결 지어볼 때 이 정자의 창건연대는 1450 - 1460년 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자는 처음 창건 당시에는 이안의 호인 영파정을 정자 이름으로 하였으나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이 정자는 방화에 전멸 손실 되었다. 그 후 현재의 건물 규모로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된 것은 이로부터 200년이 경과한 뒤의 일이었다.
1807년(순조7년) 7월 그 후 이 정자는 1843년 궁도무예를 위한 건물로 중수(重修)활용 되었다
현재 이 정자의 상량에 1843년의 기명(記名)이 보이는 것으로도 이러한 사정은 확실하며 이후 40년이 지나는 동안 정자가 퇴락하자 함평군수를 비롯한 관내 향품(鄕品) 이교(吏校)들에 의해 1881- 1883년 사이에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 졌다.
이후 영파정은 영수정. 관덕정으로 자칭되면서 함평군의 사정으로 성격을 확립하여 갔고 이동선(李東瑄).
2003년 12월 정기총회에서 정명을 다시 관덕정으로 바꾸고 궁도장이 천변에 위치하고 있어 사대와 분리되어 취약성이 많아 군비 5억을 지원 받아 약마등(躍馬嶝) 아래 길승지(吉勝地)인 함평공설운동장 내 2500평 군 부지에 팔작 한옥 70평을 관덕정 역사와 전통에 맞게 최고의 시설로 2005년 5월에 완공했다. 진해시 "양궁과 국궁이 함께하는 정신 갖기" 경남 진해시에서 양궁인과 국궁인 시민 130여명 진해시 비영리 법인 자원 봉사 활동단체로 등록된 ‘경상남도 양궁 발전 협의회’ <!--[endif]--><!--[if !vml]-->
원자력발전소 봉대정(峰大亭) <!--[endif]--><!--[if !vml]--> ‘봉대정’사두(射頭)는 사정의 대표로서 사정을 통괄하고, 교장(敎長) 또는 사범(師範)은 사원(射員)의 사술(射術)과 사풍(射風), 궁시에 관한 지도를 하며, 행수(行首)는 한량(閑良)을 통활 단속하며 사정의 총무직을 맡는다. ‘봉대정’의 사두는 98년부터 국궁을 시작해 현재 4단이다. 4단은 45발을 쏘는 시험에서 30발을 명중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실력자이다. 또한 5단부터 ‘명궁’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니 ‘명궁’이라 불릴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국궁은 정적인 운동이면서도 자세교정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최 사두는 “사대에서는 무상무념이 되어야 하고 잠깐의 상념이 생겨도 어김없이 활은 과녁을 벗어난다”며 “활쏘기는 자신과의 싸움”임을 강조했다. 또 우연히 궁터에 갔다가 활 쏘는 모습에 매료돼 국궁동호회 활동을 시작 화살이 과녁에 명중할 때의 쾌감이 무척이나 좋다. 국궁의 매력이다.‘봉대정’의 올해 목표는. 매년 60여 차례 열리는 전국대회에서 ‘봉대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단체전 입상을 해본 적이 없다. 현재 ‘봉대정’에서는 1~2개 팀이 단체전 참여가 가능한 수준이다. 아울러 봉대정’에서 1~2년 안에 전국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전국대회는 전국에서 1,000여명의 궁사가 3박 4일간 경기를 하는데, 물론 원자력을 홍보하는 데도 한몫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의 궁사들이 ‘봉대정’에 모여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심신수양 활을 쏘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무념무상의 순간, 화살에 마음을 실어 보낸다. 활시위를 당기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 화살은 사대의 과녁을 조준하여 시위를 떠날 때 마음 속 흔들림을 잡기 못했다면 화살은 어김없이 과녁을 벗어나 허공에 의미 없는 떨림만을 남긴 채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만다. 활 쏘기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 심신수양의 도구로 활 쏘기 국궁을 접할 때는 철저하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수련의 과정에서 옷과 신발 모두 흰색으로 정결함과 단아함이 묻어 있어야 한다. 궁도의 목적은 활 쏘기를 통해 모든 인간사에 대한 도(道)를 함께 닦는데 궁도의 정신이며, 궁도를 연마한 사람은 사심 없이 활을 당겨 심기(心氣)를 집중하고, 활을 쏜다는 의식을 버리고 발사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활을 잘 쏘는 민족이다. 전쟁과 수렵을 위해 활 쏘기는 필수요소로 여겨져 왔고, 고구려 시조 ‘주몽’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고대에는 활을 잘 쏘는 것은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선택 받은 자’의 하나의 상징이기도 했다. 활 쏘기는 전쟁과 수렵의 한 방편에서 점차 심신수양의 도구로 자리 잡게 된다. 이씨들의 조선이라는 역사 속에 활 쏘기는 무인뿐만이 아니라 문인, 미술인 내시와 궁녀들 그리고 무속인들의 오락으로 행해지면서, 한 시대를 망가뜨린다. 근대에 접어들어 다시 무예로 익혀 온 활 쏘기는 사정(射亭)을 중심으로 활 쏘기가 민중스포츠로서 보급되는 계기가 됐다. 대한 궁도협회는 8·15해방 1983년 대한궁도협회에서 담당하던 양궁이 따로 분리되면서 새로운 단체인 대한양궁협회가 생겼고 이때부터 대한궁도협회는 국궁 만을 담당하게 된다. 이처럼 활 쏘기가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자리 잡고, 경기를 위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계량화된 ‘양궁’이 나온다. 활 쏘기 민족은 ‘양궁’ 에서 세계 최고의 성적을 거두면서 전통적인 ‘국궁’은 명맥 만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사실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가까이서 활 쏘는 모습. 어린 시절 강변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궁터 사대에서 과녁까지의 사정거리는 145미터, 과녁의 크기는 가로 6자 6치, 세로 8자 8치(1자는 30.303㎝, 1자는 1치의 10배)이다. 실제 과녁의 크기는 2.5미터의 크기다. 국궁 정식경기에서는 5∼7명이 1조가 되어 차례를 정하고 과녁을 향해 1m 간격으로 나란히 서서 심판의 발시(發矢) 신호에 따라 오른쪽부터 차례로 살 하나씩을 쏘아 5발을 끝낸 다음, 적중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개인 및 단체의 순위를 결정한다. 위와 같은 방법을 3차례 반복하는 것을 3순(巡) 이라고 하며, 주최 측의 결정에 따라 3순(3회 15발)·5순(5회 25발)으로 경기할 수 있다. 국궁은 양궁과는 달리 사수의 경험과 감각만으로 바람이 세기, 방향 등을 고려해 활을 쏘기 때문에 과녁에 적중시키는 것이 맘처럼 쉽지가 않다. 국궁은 양궁처럼 한 과녁에 점수가 달리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과녁 안에만 들어가면 명중으로 1점이 주어지며, 화살의 촉은 뭉툭하게 만들어 고무판으로 된 과녁에 맞으면 ‘탕’소리로 명중 여부를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순(5발)의 화살이 과녁을 조준하는 잠시의 정적을 깨고 핑 하는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나 미처 시선이 따라가기도 전에 과녁에 적중한다. 회령 함경북도 지역의 활 쏘기 이 사진은 근대 궁술사에서 귀한 자료이다. <!--[endif]--><!--[if !vml]--> 1937년 함경북도 회령에 만해정 사우의 만개궁체를 볼 수 있는 사진에 발 가짐의 형태를 보면 보폭이 매우 좁게 서 있다. 화살대의 위치는 대개가 입술 근처이나 중앙에 있는 분은 힘이 겨운지 깍지 손 자체가 가슴에 내려와 있다. 회령은 추운지역에 적합한 각 궁이었을 것이다. 각 궁의 삼삼이가 뻐드러진 상태이며, 고자의 모습도 현재와는 다른 형태이다. 동이족의 국궁과 이민 역사 : 근래에 와서야 동학혁명이라하여 위안을 삼지만, 일본군과 청군을 끌어 들인 이씨왕조가 갑오년 동학 농민들의 봉기에 가담한 자를 참살하였던 시대 살던 곳을 떠나게 된 것이 이민의 시작이었다. 동학란 때 강 물 속에서 운명 하신 증조부를 보고도 시신을 찾지도 못한 체 피신한 증조모께서는 두 아들과 백두대 간을 따라 구전으로 전해오던 조의들의 수련장 백두산 무산으로 갔다고 한다. 조부께서도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에게 밀리자 만주 수분하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8사단이 철수하여 제주도에서 8월15일 광복을 맞이 하셨다고 하셨다. 조국으로 돌아 온 인천, 정부수립 후 6.25전쟁과 인천상륙, 포항해병대, 평택기지촌, 서울, 뉴욕을 거쳐 건국의 발원지 하와이에서 60의 나이가 된 개구리밥 지난 역사 속에 중국 일본 지독한 견제, 훼방, 그리고 미국의 간섭을 참고 견디어 온 이제 세계 최고의 명품국가로 우주의 중심 태양으로 날아 오르는 전설 속에 까마귀. 동족상쟁이란 어둠 속에 달 빛까지 가리며 쳐 넣어도 포항 제철소 용광로에서 뿜는 강한 기의 힘이 흐르는 화살로 적중시킨 영원한 천 년 민족 자랑스런 삼족오. 동이민족의 활 이야기 영일만 찬 냇가에서 ? 까악 ? 하와이 한인 궁도 협회 KOREAN ARCHERY ASSOCIATION OF <!--[endif]--><!--[if !vml]-->
|
출처: MOWCO 원문보기 글쓴이: 개구리밥
첫댓글 저는 고1인데요 정에다니려고 햇는대 대한궁도협회가입해서 매달3만원씩 내라고하내요..한달에 4번갈까 말까 한대..내고 다녀야하는대 다음달부터가보려고요,,
거기에 연습활을 없더라고요